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124
123 신화마정갑(1)
“실패했습니다.”
“뭐라고?”
수하의 예상치 못한 보고였다. 묵암의 뇌리에 한기가 깃들었다. 실패는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 망할 놈이 제법이기는 하지만, 청성일검에게 굉폭뢰까지 쥐여 주었다.
“그놈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놈이었나?”
“그것이 아니오라, 아미신녀와 무애의 무공이 예상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둘 다 최소한 초절정에는 이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정이라고 하지 않았어?”
“실력을 숨긴 듯합니다.”
아미파로 돌아간 적서린과 무애는 사매의 배신과 의문의 습격을 보고했다. 그리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실력을 드러냈다.
그 나이에 절정의 무력만 해도 대단하거늘, 검강을 펼쳐 보였다. 임연홍의 낌새를 이상하게 여겨 대비하고 있던 중, 간신히 습격을 막아 냈다고 했다.
“이런 개 같은 일이!”
서두르기는 했어도, 계획에 영향을 줄 변수는 최소한으로 줄였다. 예상대로만 흘러갔다면 이목을 사천으로 돌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변수를 놓친 대가는 컸다. 설마, 적서린과 무애가 임연홍의 변심을 알아차렸을 줄이야.
그래도 좀 이상했다.
“놈이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없진 않겠지만, 당장 확인하긴 어렵습니다. 아미파에서 개방에 의뢰해 주변을 차단한 상태입니다.”
하긴 문파의 기대주를 습격한 사건이었다. 아마파에서 가만있을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 계집들이 머리가 비상하다. 탁광운이 전력을 숨겼다면 모를까, 일이 틀어진 이상 청성파의 무공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계집들은 청성을 거론하지 않았다.
“당분간 자중하라고 전해.”
“예, 암주.”
씨앗을 꺼내 쓰기에는 일렀다. 이번 일로 아미파는 경계심이 생겼을 테고, 개방에서도 허투루 여기지 않을 것이다. 섣불리 다른 수를 썼다가는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된다.
“그놈은?”
“사천을 여행하며 맛집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천운권의 한가로운 여정에 묵암의 대쪽 같은 심기가 갈대처럼 휘청였다. 이 모든 사달의 원흉인 주제에 여행이나 계속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놈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당장은 힘들었다. 놈에게 심력을 쏟다가, 정작 중요한 계획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더 열이 받았다.
‘네놈은 꼭 내 손으로 죽여 주마.’
빠드득!
***
후비적, 후비적!
누가 내 욕을 심하게 지껄이나? 오늘따라 귓구멍이 매우 가려웠다. 한두 명이 욕해서는 이렇게까지 가렵지는 않은데. 살면서 누구한테 원한을 사 본 적이 없어서 의아하기만 했다.
‘나 같은 평화주의자가 없거늘.’
-욕먹고 싶어서 작정했군.
‘평화롭게 해결했잖아.’
-전쟁 전야가 평화로운 거냐?
‘전야가 오래갈 수도 있는 거지.’
-내기할까?
무진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이길 수 없는 내기는 애초에 하지 않는 편이 이로웠다. 마왕을 이겨 봤자 별로 즐겁지도 않고.
무진은 사천과 운남의 경계인 목리에 도착했다. 마차로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왔기에 예정보다 오래 걸렸다. 개방과 공조해 사천의 이곳저곳을 들쑤시기는 했어도, 놈들의 이목을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목리현의 대지주에게 적절한 가격에 말을 팔았다. 고가의 말이기는 한데, 산을 오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차는 꼭 필요했다. 말 대신 철호, 나릉, 육칠이 마차를 끌었다. 협소한 지형이 많아서 마차를 끄는 데 시간이 소요되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 휴식을 취했다. 마을에서 사 온 만두를 고깃국에 넣고 끓였다.
“아미파는 됐고, 청성은 어떠냐?”
“청성으로선 청성일검과 문도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뒤숭숭한 분위기입니다. 그럼에도 조사에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은 의문입니다.”
아미파로 돌아간 적서린과 무애가 적절히 잘 둘러대서 무진은 사건의 중심에서 배제되었다. 개방이 아미파와 함께하면서 의심과는 별개로 신중해야 했다.
“아미파보다 청성파가 좀 더 심각하다고 봐야겠네.”
“청성파를 주요 대상으로 분류했습니다.”
“당장은 찌르지 마.”
“총분타주께서도 그리 판단하고 있습니다.”
청성파 내부에서도 윗선이 관여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정체를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순순히 드러내지도 않을 테고, 성급하게 움직였다가는 도리어 발목이 잡힐 수 있었다. 당분간은 간을 보는 선에서 끝내는 편이 낫다.
“이젠 날 찾지 않겠지?”
“그럴 겁니다.”
아미파와 개방이 들쑤시고 있고, 남궁세가와 당문도 관련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성급한 행동을 할 만큼 멍청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죽이고 싶지 않을까요?”
“그럼 더 좋지.”
“예?”
“감정이 앞서면 실수가 잦지.”
고의라고 하긴 힘들지만, 무진은 의도적으로 마신교를 흔들고 있었다. 나중에 어떤 식으로 나올지 단정할 순 없지만, 실패가 쌓이면 실수는 반드시 나오기 마련이다.
‘허, 알면 알수록 무서운 사람이네!’
보고를 올려야 하는 육칠은 무진과 적이 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적이라고 상정할수록 무서웠다. 몰상식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지만, 신기하게도 정황을 자신의 주도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이건 배운다고 해서 익힐 수 있는 기질이 아니었다.
‘잔재주 같은데 왜?’
그래서 이해하기 힘든 종자였다. 상식적인 선에서도 도저히 해석이 안 된다. 종잡을 수 없는 행동임에도 결과를 만들어 내니 더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목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겠다고요!’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윗선에서 아무리 닦달을 해 봤자 육칠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안다고 보내면, 그 후에 항상 답이 달라졌다.
무공의 내력만 봐도 답 안 나오잖아.
“나릉, 저기가 맞냐?”
“예, 주군.”
목리에서 운남으로 향하는 외진 길을 따라가면 종일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는 음산한 산이 있다.
묵운산(墨雲山).
띠를 두르듯 먹구름이 뒤덮여 있어 대낮임에도 산은 밤처럼 어두웠다. 일 년 내내 우중충하며 습하고, 비가 수시로 내렸다.
목리에 사는 현지인들조차도 묵운산은 꺼리는 산이다. 지리를 잘 알아도 수풀이 워낙 우거져서 길을 헤매기 일쑤였고 밤이 찾아오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 되었다.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퍼져 이 근방의 사람들도 근처에 접근하지 않는 산이었다.
“있어 보인다.”
구름이 꼭 악마의 형상처럼 보여 무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었다. 보물이 있으려면 저 정도로 음산해 줘야 한다는 상식적인 신념이 있었다.
‘하여간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왜 좋아해?’
보통은 들어가기 꺼리는 것이 정상인데, 무진의 환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다들 맥이 빠졌다. 하긴 저 인간이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설득력이 떨어졌다. 지금까지 보여 준 이력만 놓고 봐도, 정상적인 부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보물을 찾으러 가자.”
“주군, 함정을 조심해야 합니다.”
나릉의 호소는 무진의 귓구멍에 닿지도 않고 튕겨 나갔다. 그는 벌써 저 앞으로 생각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쪽이 아닙니다.”
“어, 그래.”
보물에 정신이 팔린 무진의 거침없는 행보에 철호와 육칠은 골이 지끈거렸다. 천무자의 함정이라면 조심해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
무모함이 아닌 자신감의 발로이기를 바랐다.
산의 중심으로 들어서자 깜깜한 암흑이 되었다. 하늘로 솟구쳐 오른 수목이 햇빛을 완전히 가렸다.
나릉은 이 중에서 공력에 제일 달리지만, 목표 지점을 잃지 않았다. 확실히 양상군자답게 밤눈이 밝았다. 대도로서 밤의 주인으로 불린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한번 와 봤던 장소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곳이 설령 빛이 없는 순수한 암흑이라고 해도, 지형을 밟는 감각만으로도 찾아낼 수 있었다.
“저 앞의 고개만 넘으면 됩니다.”
“제법인데.”
“별거 아닙니다.”
“사람, 사물만이 아니라 지형도 기억하는 거면 대단한 거다. 자부심 가져도 돼.”
“감사합니다.”
길치에 가까운 무진의 입장에서는 필요한 기능을 갖춘 나릉이었다. 앞으로 어딜 가게 되면 반드시 나릉을 가지고 가기로 했다.
집에 돌아가는 즉시 안 가 본 지역 중심으로 나릉을 보내 눈에 익히도록 할 예정이다. 후일 모르는 곳을 가더라도 평소 가던 길처럼 익숙하게! 아내와 딸을 데리고 다닐 때 나릉을 유용한 길잡이로 삼을 수 있도록!
능선을 넘어 아래로 내려가다, 벼랑과 벼랑 사이로 들어섰다. 수풀에 가려 있어서 벼랑의 틈이 보이지 않았다. 지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찾지 못했을 것이다.
벼랑은 동굴처럼 되어 있었다.
위로 칡과 같은 넝쿨이 빼곡하게 들어앉아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나릉은 자신만 들어갈 수 있도록 칼로 조그맣게 뚫어 놓았었다.
푸슥, 푸슥!
무진은 막아서는 넝쿨을 마차 크기의 강환으로 천천히 뚫어냈다. 가는 길을 환하게 밝히는 횃불 대용으로도 강환은 적격이었다. 더욱이 강환은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서 굴착도 가능했다. 넝쿨은 강환에 닿기가 무섭게 뚫려 나갔다.
저벅, 저벅!
무진은 뒷짐을 쥐며 네모반듯하게 뚫린 길을 천천히 걸었다. 강환이라고 해서 반드시 공처럼 생긴 건 아니다. 얼마든지 형태를 변환할 수 있기에 도굴을 위한 필수용품과 같았다.
‘세월의 흔적 따윈 의미가 없구나.’
마차를 끌어야 하는 나릉, 육칠, 철호도 불편함 없이 다음 장소로 넘어갔다.
솨아아아!
넝쿨 동굴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서자, 묵운산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장관이 펼쳐졌다. 빛의 기둥이 쏘아져 내려 선녀가 수욕했을 웅덩이와 시냇가가 시야를 가렸다.
눈이 부신 광경에 넋을 놓을 만도 하건만.
“이런 장소엔 대부분 영초, 영물, 영과가 다발로 있지 않나? 어떻게 된 게 죄다 풀이야?”
아름다운 광경은 세속에 찌든 무진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않았다. 무릉도원은 어느 산을 가도 하나쯤은 있었다. 최소한 그에 걸맞은 품격, 즉 공청석유와 같은 영물이 있어야 했다.
아무것도 없는 이상 무릉도원이 아닌, 경치 좋은 냇가일 뿐이다. 아니면 지키고 있는 만 년 묵은 뱀, 원숭이, 호랑이 정도는 있어야지.
쩝!
입가심으로 몸보신하나 했더니, 천 년 묵은 뱀도 보이지 않는다. 천무자의 안목에 살짝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
철호와 육칠이 하수오를 발견했다.
“이거 백 년은 되어 보이는데요.”
“백 년짜릴 어따 써.”
기본이 천 년이고, 만 년은 되어야 가치가 있었다. 백 년은 잡풀이었다. 하물며 천무자가 죽은 지 수백 년이 지났다. 당시에 심었어도 수백 년은 되었겠다.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심히 의심스럽다. 그러고도 하늘의 무를 이어받았다는 놈이 맞나 싶다.
“무공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무진은 기원했다.
천무자가 그 시절 최강자라면 그에 걸맞은 품격 즉, 황금을 산처럼 쌓아 놓았어야 했다. 예외로 보물이나 패물도 품격의 종류에 넣었다. 쓸데없이 무공만 팠다면 부관참시는 기본이고, 지옥 가라고 제사 지내야겠지.
“이쪽입니다.”
“보물은 있겠지?”
“……그럼요.”
“아니면 너도 천무자 따라가는 거야.”
“……옙, 딸꾹!”
여기까지 오느라 개고생하진 않았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못 본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간 후 의도치 않게 대륙을 횡단했다. 그 대가로 미려하나마 산처럼 쌓인 보물 정도는 괜찮잖아.
‘너무 솔직해서 할 말이 없다!’
‘위선자들은 보고 배워야겠다!’
‘사부, 속물이세요!’
절대고수의 품격 따윈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지나치게 솔직해서 보는 사람들의 속만 뒤집어 놓았다. 자기감정에만 충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