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13
013 세월유수(3)
무호는 딱히 지금 당장 여인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5년 전 이후로 검공을 새로이 정립하고 경지를 개척했다. 그럼에도 형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형에게 뒤처진 채 살 수는 없다.
‘늙어서도 처맞을 순 없잖아!’
최소한 비등한, 아니, 막기라도 해야 했다. 지금 많이 절박하다. 맞을 때마다 새롭고, 더 아프다. 매번 뼈가 되고, 살이 된다고 하는데 골병이 먼저 들겠다 싶다.
“이런 방해가 되었구나, 마저 하도록.”
“살펴 가십시오.”
강 장로는 훈련장을 나와 내원으로 들어섰다. 나날이 성장하는 문파의 후예들을 뿌듯하게 바라보지만, 투기를 잃진 않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검으로 증명해야 했다.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을 순 없지.’
소문주와의 대결 이후로 깨달음을 얻어, 검의 정수를 한 단계 이상 끌어올렸다. 그날 이후로 침식을 마다하고 검을 벼리었다. 후일 노병은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리라.
“작은할아버지, 어디 가십니까?”
“너도 여전하구나.”
“여전해야 문파가 무탈하지요.”
“그래도 검가의 후예로서 검을 잊으면 곤란하다.”
가는 길에 나무를 한가득 해온 무진이었다.
강 장로는 담담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심은 못마땅한 기색이 남아있었다.
응?
오 년 전부터 나무를 해온다고 들었다.
문파의 후계를 내려놓고 낮은 자세에 임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때는 얼마나 갈까? 작심삼일을 기대했었다. 한데, 벌써 5년이나 흘렀고 문파엔 장작이 넘쳐난다.
‘뭐가 이렇게 많아?’
지게에 한가득 싣고 왔다고 한다면 맞는 표현인데, 고개를 젖혀야 할 정도다. 장작 하나의 무게는 가볍겠지만, 저만큼 쌓이면 상당할 거다. 족히 800근은 되지 않을까? 장정 10명이 들어도 묵직하게 느껴질 무게였다.
‘힘을 들이지 않아?’
그제야 무심코 지나쳤던 시간과 달리 무진을 자세히 돌아보게 되었다. 뒷산에서 해온 나무가 아니었다. 나무 종류가 다르다. 꽤 거리가 있는 산에서 해왔을 거다. 거리가 있다면 당연히 힘도 더 든다. 저 무게를 지고 문파까지 왔다면 땀 한 방울이라도 흘려야 할 텐데, 매끈하다.
“무겁지 않으냐?”
“다들, 이 정도는 들지 않나요? 작은할아버지도 들 수 있잖아요.”
“……그렇지.”
들라고 하면 못 들 것도 없겠다만.
넌 아니잖아.
태생이 게으르고 나태한 데다가 훈련도 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하니, 꽤 얄밉게 받아들여졌다.
지가 천재도 아니고.
그러나 문파의 미래를 위해서 과감히 자리를 내어놓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것이 결코 쉬운 결단은 아님을 알기에 여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 문파에는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넌 문주의 장남이다. 모범을 보여도 부족한 판국에 허드렛일이나 해서야 쓰겠느냐?.”
“그 허드렛일을 하지 않으면 문파의 다른 식솔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말로 인력 낭비지요. 전 제 일에 아주 만족합니다. 부수적인 수입도 짭짤하고요.”
직업 만족도가 높았다. 무진에게서 풍겨 나오는 여유에 강 장로는 입맛이 썼다.
이런 식으로 요상한 대화를 하려고 한 게 아닌데, 자꾸 허튼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사실, 이대로만 있으면 되는 일이다. 문주도 더는 바라지 않았다. 자기 딴에는 많은 고민 끝에 동생에게 내려놓았다고 했다.
무진이 검을 잡고 문파의 대소사에 적극적으로 나서봤자 무호에게 득이 되지 않았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무진은 장남이고, 후계자였었다. 언제든 무호의 의사에 반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혼자 편하게 사는 것 같아 찝찝하군.’
왜 그런지는 답이 나왔다.
모두가 바쁘게 살고 있었다. 소문주를 필두로 문파의 발전을 위해 앞장섰다. 그런데 모두와 달리 무진은 한가롭다. 세월아 네월아. 가는 세월 붙잡지 않고, 현실을 즐기고 있었다.
젊은 녀석이 인생을 달관한 듯해 강 장로의 심술을 자극한 것이다. 나이 지긋한 자신도 새롭게 검술에 눈을 떠서 훈련을 마다하지 않거늘.
어디 젊은 녀석이 벌써부터 농땡이를!
그런데 인정한다.
“시간도 널널하고요.”
“네 동생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절치부심하거늘, 형이 돼서 할 말이더냐.”
“하시면 지금부터라도 검을 잡으란 말씀이신가요? 문파의 주요 행사에도 참여하고요? 원하시면 하고요. 못할 게 뭐가 있을까요.”
심통이 나서 찔러봤더니,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강 장로는 예상과 다른 반응에 말문이 어눌해졌다.
“어…… 굳이 그렇게까지 열성적일 필요는 없다만.”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솔직히 하라고 했으면 많이 귀찮았을 거예요.”
“귀찮다니, 문파의 중대사를!”
“그럼 할까요?”
“그러라는 게 아니라……!”
문파의 행사에 나선다고 했을 때, 괜한 말을 했나 자책했던 강 장로는 입맛이 썼다. 이런 식으로 대화가 흘러가선 안 되는데, 자꾸 무진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나서지 않은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무진은 무능력해도 안 사람은 유능했다. 문파의 모든 행사와 대외비용을 충당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재정이 건실해지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유를 모르겠군.’
총관의 자리를 꿰찬 무진의 아내, 백유진은 여자로 태어난 것이 아까운 인재였다. 문파를 위해서도 필요했다. 달리 보면 왜 그런 인재가 무진을 선택했는지, 여전히 불가사의로 남았다. 문파에 그토록 큰 피해를 줬으면서도 내버려 두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편하잖아.’
젊음이란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시간을 충실히 지내지 않으면 나이가 들수록 후회하게 된다. 예전보다 사람이 됐다고는 해도 검가의 후예였다. 다른 이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거늘, 나무꾼은 좀 아니잖아.
“곧 소룡대회가 열리는 걸 아느냐.”
“아, 그래요?”
“이번 대회에 태진이도 나가는데 어찌 이리 무관심하단 말이더냐.”
“애들 대회잖아요.”
“어허, 남궁세가에서 개최하는 대회니라.”
“그렇군요.”
무진에겐 남궁세가든, 소림이든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소룡대회도 강 장로가 말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다. 하물며 코흘리개들 간에 치고받는 대회에 지나지 않았다.
열 살에서 열여섯 살로 연령 제한을 두어 간격을 조절하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애들이었다. 애들은 언제 어떻게 성장할지 모른다. 지금 당장 앞서간다고 해서 미래에도 앞서간다는 보장을 하기 어렵다.
‘겉멋만 들지.’
어릴 때 잘 나간다고 허파에 바람이 들면 훈련을 게을리하게 될 수도 있었다. 차라리 차후, 완성되었을 때 실전 위주로 전장을 경험해 보는 게 낫다.
‘그렇다고 말릴 처지는 못 되지만.’
예전이었다면 나가겠다고 아우성을 쳤을 거다.
물론 나갔었다. 그때 당시에 예선 일차를 넘기지 못하고 떨어졌다. 자신도 나갔었는데, 아들보고 나가진 말라는 건 위선이었다.
‘누구였더라?’
패배의 기억은 흐릿했다. 지고 나서 술을 퍼마셨던 기억만 남았다. 끊어졌던 기억을 애써 불러오려고 노력하진 않았다. 어차피 상기될 기억이면 언젠가는 떠오르기 마련이다.
“태진이는 장차 문파의 기둥이 될 아이야. 네가 잘 관리를 해줘야지.”
“그 나이 때는 잘 먹고, 잘 뛰어놀기만 해도 쭉쭉! 성장합니다. 저 보세요.”
널 닮으면 안 되지.
큰일 날 소리를.
자세는 취하지 말거라.
무진은 알통이 불끈!
장로는 머리가 지끈!
무진의 태평함에 강 장로는 짜증이 탑처럼 쌓였다. 한편으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는 자신만 보면 피해 다녔던 녀석이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회피하기에 바빴다. 그랬던 녀석이 이제는 피하기는커녕 실실 쪼개고 있었다.
‘이놈이 날 놀리나!’
그러나 기색을 살피니 그렇지는 않았다. 놀리기는커녕 관심을 보이지도 않는다. 이게 또 그러면 무신데, 무시라고 하기도 모호하다. 그냥 잘 가고 있는 나무꾼을 잡아 세우고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을 하게 만든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무진의 아들, 태진이는 자라나는 문파의 꿈나무이자 희망이었다. 내심 소룡대회에서의 선전을 기대한다. 그만큼 또래에 비하면 출중한 실력을 갖추었다.
‘역시 백 총관이야.’
무진이 간섭하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었다. 지금처럼 백 총관이 알아서 잘 건사하면 되었다. 하마터면 순간의 말실수로, 문파의 동냥을… 아치로 만들 뻔했다. 참고로 아버지는 절대 닮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지금도, 현재도.
과거는 개차반인데, 현재는 한량이었다.
어떻게 무진한테서 태진이 같은 보물이 나왔는지 납득은 되지 않는다. 부전자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도 다 맞는 말은 아니었다.
“해도 중천에 떴는데 식사 같이하실래요?”
“일없다.”
“예, 그럼 전 이만.”
“크흠.”
갈 생각은 없었는데, 한 번 권유하고 쌩! 하고 가버리니 멍하니 서 있게 된 강 장로다. 거절을 한 건 자신인데, 기분이 나쁜 것도 자신이다. 어디서부터 말린 건지 몰라도 계속 말리더니 더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가 되었다.
‘이젠 뻔뻔함으로 밀고 나가려는 거냐?’
그렇다고 밥만 축내는 식충이라고 하기에는 또 모호해진다. 무진이 해온 장작이 가지런히, 산처럼 쌓여 있었다. 장작만으로 자기 밥벌이는 충분히 했다. 그러니 놀고먹는다는 말은 나무꾼에 대한 모독이 된다.
‘……흔들림이 없잖아!’
멀어져 가는 무진을 멀뚱히 바라보던 강 장로는 고개를 갸웃했다. 걸어가면서 조금이라도 균형이 무너질 줄 알았는데, 반듯하다. 지게에 쌓인 장작마저 반듯해서 속을 뒤집어 놓았다.
돌아서지 않았지만, 무진의 입가에 미소가 진하게 배였다.
‘작은할아버지가 저렇게 재미난 분이셨나?’
그땐 몰랐다.
무섭고, 짜증 나고, 간섭쟁인 줄만 알았다.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지만, 워낙 강경해서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실상, 문파에서 가장 무서웠던 분이시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꼬장꼬장하긴 한데 귀여운 노인네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음에는 곡차나 한잔하시죠.’
술로 보내드릴게요.
천국이 될지, 지옥이 될지는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