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132
131 자승자박(1)
정해진 날짜가 얼추 되었다. 이쯤 되면 와도 벌써 왔어야 하는데 오지 않는다. 다른 문제가 있지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아미파와 청성파까지, 가는 곳마다 대형 사고를 터뜨려 주었다.
사태의 심각성이 예상을 훨씬 상회했다. 암중 세력이 정파의 뼛속까지 침투해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런데도 정보의 구심점인 개방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 망할 놈이 우연히라도 건드려 주지 않았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무림이 암중 세력에 장악당했을지도.
그렇기에 더더욱 이놈의 말을 흘려듣지 못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손해 보는 쪽은 정해져 있었다. 맘 같아서는 이놈을 정면에 내세우고 싶지만, 그리했다가는 어찌 나올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정파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속물적인 쪼잔함과 당하고는 못 사는 더러운 성격을 고려하면 무서운 재앙이 될 수도 있었다.
하늘은 어째서 이딴 놈에게 그처럼 규격을 초월하는 무공을 내렸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멀쩡한 하늘이 요즘 들어 원망스러웠다.
어쨌든 이 근본 없이 날뛰는 놈이 연락을 넣어 놓고 제날짜에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가로이 강호 유람이나 다니는 놈하고, 시간의 쓰임이 같을 순 없잖아.
누구는 하는 일 없이 마냥 놀고, 누구는 발바닥에 피가 나도록 일하고.
세상 참 불공평했다.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세상 돌아가는 진리인걸. 불공평이야말로 어쩌면 천하를 돌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일지도. 현실에 만족하는 인간들투성이면 누구도 삶이 발전하기를 바라진 않을 테니까.
어쨌든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홍무개는 발에 땀이 나도록 내달렸다. 산을 올라 다음 목적지로 넘어가는 고개가 보였다.
‘혈향?’
바람에 실린 비릿한 피 맛이 홍무개를 다급하게 했다. 저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파문이 번지고, 인기척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펼쳐진 공간.
인간들이 고깃덩어리처럼 조각조각으로 찢어져 사방팔방을 적시고, 바닥은 선혈로 흥건했다.
씨익!
피바다 속에서 환하게 웃는 놈을 봤을 때, 홍무개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러고서 한다는 말이.
왔냐니!
“이 미친놈이!”
혹시나 사고를 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하긴 저 괴물이 당했으면 대륙이 발칵 뒤집혔겠지. 여태 아무 일 없이 돌아가면, 무소식이 희소식이었다.
“욕하지 마라, 여린 마음이 아프다.”
“닥쳐!”
“날도 좋은데, 술이나 한잔할까?”
“그러니까 네가 미친놈이라는 거야!”
천지 사방에 피 칠갑을 해 놓고 술을 마시자니!
그리고 날이 좋기는 개뿔, 우중충하잖아. 저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이 보이지도 않는 거냐?
홍무개의 인생에서 이런 상종 못 할 놈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된 게 가는 곳마다 사고를 달고 다니고 있었다.
내 인생의 먹구름 같은 놈이다.
이번엔 대체 또 뭔지…… 알고 싶지 않다.
말하지 마라!
제발, 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차도살인지계야. 나는 피해자고.”
“그게 무슨 거지 개뼈다귀 쪽쪽 빠는 소리야!”
“쟤들 싹 다 죽이고 녹림에 뒤집어씌우려고 한 거지.”
“쟤들?”
홍무개가 돌아보자 망부석처럼 정신 나간 산적 놈들이 포착되었다. 다들 머리 한쪽이 짓눌렸는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흉신과 조우한 사람들의 기본적인 상태이기도 했다.
“어이, 나 털려는 분들! 정신 안 차리지! 내가 차리게 해 줄까?”
화들짝!
그제야 충격과 공포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장금탁이 호구였던 분을 되돌아보고 말았다. 광인과 마주하자 다리가 바닥에 아귀처럼 착 달라붙었다.
‘내가 저런 미친놈한테 돈을 뜯으려고 한 거였어?’
저세상 구경하지 않은 작금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언제 움직였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자신과는 격이 다른 고수이며, 피에 찌든 살인귀였다.
그러면서도 순간 해맑았다.
소름, 제대로 돋았다.
장금탁은 느꼈다. 오늘이 인생에서 겪어야 할 중요한 고비임을. 대답 잘못하면 염라대왕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맛있는 거나 먹고 올걸.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간사한 목소리로.
“헤헤헤. 확실하게 차렸습니다! 하온데 왜 그러시는지?”
“방금 너희들 살려 준 거다. 이놈들은 제갈세가 놈들이거든.”
“제갈세가가 어째서 우리를?”
“내가 하는 말 잘 새겨들었어야지.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봐. 눈치도 별로고.”
“저한테 한 말이 아닌…… 헙! 맞습니다!”
무진이 인상을 쓰자 장금탁과 산적들은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지도 못했다. 부단히 노력하여 정신력으로 겨우 버티고 있을 뿐이다. 녹림의 말석, 흑우채로서는 견디기 힘든 공포였다. 흑우들 전부 파랗게 질린 기색이었다.
“제갈세가? 하면 이놈들이 널 노린 거냐?”
“천수문이 혈라문에 당한 모양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날 노릴 이유가 없지.”
무한에서 황우철을 데리고 올 때 시비가 붙었던 무한의 천수문이 혈라문에게 타격을 입거나, 망해 버렸으리라 짐작했다. 제갈세가에서 진상 조사를 했을 테고, 무진이 엮여 있음을 파악했을 것이다.
제갈세가로선 설상가상으로 당문에서의 일도 무진으로 인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공교롭지만, 당문에서도 무진이 개입되었다.
“당문의 일도 그렇고, 제갈세가가 네게 맺힌 게 많기는 하겠지.”
“그게 왜 내 탓이야! 자기들이 자식 잘못 키워서 그런 거지. 나처럼 잘 키우면 후계자 경쟁 따윈 벌어지지도 않았어.”
철호, 나릉, 육칠은 저 인간이 저딴 말을 함부로 지껄여도 되나 싶었다. 하늘이 정녕 두렵지도 않나. 이쯤 되면 벼락 백 방쯤은 떨어져야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아야 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죽지도 않을 인간이긴 하지만.
그나마 아버지의 헛소리를 듣지 않아서, 태진에겐 불감청 고소원이었다. 저딴 말을 현장에서 들었다면 부모가 보는 앞에서 혀를 깨물고 자결할지도.
“사람이 정의롭게만 살면 나처럼 피해를 본다니까.”
“너는 양심도 없는 거냐?”
“난 잘못이 없어요. 너도 알잖아. 모든 잘못은 제갈세가가 자초한 거고, 그 책임을 녹림에 떠넘기려고 한 거잖아. 저 자식들 싹 다 죽였을 텐데, 살려 주기까지 했다고, 나는.”
뭐?
그제야 말귀가 트인 장금탁과 흑묘는 돌아가는 사태를 이해했다. 죽어 버린 자들. 너무나 간단히 죽어 버렸지만, 그들도 보는 눈이 있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자신들쯤은 언제든 죽여 버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우릴 죽여서 저자와 녹림을 이간질하려고 한 거잖아!’
‘이 쥐새끼 같은 제갈세가 놈들!’
장금탁과 흑묘는 서늘해진 목을 쓰다듬었다. 자칫 잘못되었다면 오늘이 명년 제삿날이 될 뻔했다. 저 앞에 있는 미친 혈귀가 그들의 구세주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놈들은 제갈세가의 은밀한 무력대인 비살대일 확률이 높아.”
“알고 있었어?”
“이 정도는 원래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안 밝혀?”
“제갈세가만의 문제가 아니니까 그렇지. 그리고 바보가 아닌 이상 증거를 남기겠어?”
음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만든 비살대는 개방에서도 최근에야 꼬리를 잡았다. 하지만 제갈세가는 비살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가능성이 컸다.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몰아붙였다가는, 정파 내부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었다.
“구질구질하긴. 중소 문파였으면 개방이 가만 놔뒀겠어? 아마 조금이라도 잘못 보였으면 공중분해 되었을걸.”
“단체의 규모를 무시할 순 없는 게 현실이다. 그걸 깨부수기 위해서라도 확실한 증거는 중요해.”
무진의 날카로운 지적을 홍무개도 인정했다. 중소 문파는 감히 개방의 추궁에 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제갈세가쯤 되면 개방이라도 무조건 밀어붙이긴 힘들다. 아마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정의도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
“그러게, 한 명이라도 살려 놨어야지! 왜 싹 다 죽인 거야?”
“지금쯤 먼저 내려간 놈들이 다시 올라올 거다. 그놈들이 바람잡이거든.”
상인으로 위장해서 무진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시간이 되면 다시 돌아와서 비살대와 합류할 예정일 것이다. 보통은 이 정도만 해도 증거로 차고 넘치지만, 제갈세가와는 연관을 짓기가 만만치 않았다.
무진은 산적을 불렀다.
“야.”
“예, 말씀하십시오.”
“할 수 있지?”
“무엇을?”
“몇 놈이 다시 올 거야. 다 같이 덤비면 절반 정도만 죽겠지. 혹, 다 죽으려나? 너희들,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잖아. 난 녹림의 저력을 믿는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을 왜 믿어?
장금탁과 흑묘의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 상식적인 인사가 아닌 줄은 알았지만, 그 이상으로 미친 놈이었다. 직접 해결하면 그만일 텐데, 자신들에게 시키고 있었다.
그러고선 고작 절반만 죽는단다. 우리 목숨은 파리보다 못한 건가? 삶에 심각한 회의감이 들었다. 이러려고 산중호걸을 자청하진 않았다.
개 같은 이승이라도, 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자존심 따윈 없는 장금탁은 바짝 엎드린 채 사정했다.
“대협께서 나서시면 깔끔하지 않을까요?”
“아까는 칠정산의 주인이라며! 산에서 사건이 터지면 주인이 해결해야지. 안 그래?”
맞는 말인데, 그걸 왜 당신이 말하냐고!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잖아.
따지고 보면 무진이 칠정산을 넘지 않았으면 흑우채는 멀쩡히 정상적인 운영을 하며 잘 살았을 것이다.
인과는 분명하나, 장금탁과 흑묘는 입도 뻥끗 못 했다. 주먹이 곧 법이었다. 괴물의 심기를 어지럽혔다간, 나중은커녕 지금 당장 몰살당한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겁도 많은 놈들이 산적질은 잘도 했었네. 쩝, 알았어. 너희들은 애들 좀 도와줘. 그리고 너!”
무진의 지적을 받은 흑묘는 심장이 덜컥 가라앉을 뻔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겨우 물었다.
“저는 왜?”
“은인을 모시지 않을 셈이야!”
아!
다들 장탄식을 터뜨렸다. 뻔뻔함이 상상을 초월했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자 재앙이 은인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런데 딱히 부정하기도 어렵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무진이 아니었으면 몰살당했을 테니까.
“저를 따라오십시오.”
“상차림은 제가 더 잘합니다!”
눈치 빠른 흑묘가 잽싸게 앞으로 나서자, 장금탁은 자신이 안내를 더 잘할 수 있다고 읍소했다. 여기 남아서 제갈세가의 비살대를 상대하기보다는 산채로 가는 편이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다.
“주력은 싹 다 죽였으니까, 지금 올라오는 놈들은 많아야 세 명을 넘지 않을 테고 쭉정이겠지. 녹림왕에게 보고해야 할 텐데, 내뺀다라. 원하면 맘대로 해.”
“상차림은 흑묘가 더 잘합니다. 제가 책임지고 쥐새끼들을 잡아 올리겠습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제가 칠정산 흑우채의 주인인 만악도 장금탁입니다!”
확실히 녹림다운 처세술이었다. 조금이라도 약세를 보이면, 달려드는 살쾡이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무진은 장금탁의 허세를 나무라지 않았다. 흑우채는 돌아가는 정황을 녹림왕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사태를 조용히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런 짓을 잘도 꾸몄군.”
“제갈세가가 보기엔 녹림이 우습나 보지. 크크크크.”
어울리고 싶지 않지만, 홍무개는 적당히 무진의 대화에 양념을 쳐 주었다. 그것은 곧 제갈세가보다 무진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되었다. 아니었다면 제갈세가를 두둔하진 않더라도, 비살대를 알리진 않았겠지.
-도와준 거다.
-알았어. 나중에 몇 대 빼 줄게.
-……뭔 소리야?
-언젠가 나한테 또 맞을 거 아냐.
-……?
생색을 내려고 전음을 보냈던 홍무개는 아연실색했다. 이 인간의 계산법은 상식을 간단히 초월하고 있었다. 후일 꼭 맞을 테니, 그때를 대비해서 조금 깎아 주겠다니! 전음을 보내고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왜 날 때리겠다는 거냐?
-이유야 그때 가면 생기겠지.
-그냥이구나!
-나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 아니다.
-그런 게 있긴 한 놈이었냐!
-여하튼 내가 패겠다는데 네가 어쩔 건데?
-패악이다!
-농담이야.
무진은 해맑은 웃음으로 때웠지만 홍무개는 등골이 서늘했다. 흘려듣기에는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묵은 원한처럼 찜찜한 여운이 남았다.
-뿌리 깊은 쪼잔함은 과거로 돌아와도 변하지를 않는군.
‘넌 닥쳐.’
사실로 무장한 마왕이 거들고 나섰지만, 무진은 평소처럼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는 쪼잔함이 아닌, 받은 건 돌려주겠다는, 대승적 차원의 공평무사함이었다.
미래에서 죄를 지었으면, 과거에서라도 받아 내야지.
-하지도 않은 짓으로 괴롭히는군.
‘할 거야.’
운명은 잔인하다. 홍무개는 언젠가 반드시 맞을 짓을 하리라, 관상가 양반으로 변한 무진은 홍무개의 앞날을 예측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다. 잔혹한 운명에 휩쓸리면, 그땐 답이 안 나온다.
무진은 잔뜩 움츠러든 채 안내하는 흑묘를 배려해 주었다.
“운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조사해 보면 다 나오겠지만, 저놈들은 내가 올 때까지 산에서 죽치고 있었어.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재수가 없어서 엮인 게 아니야.”
“아무렴요. 대협의 은덕입니다.”
“제법 똘똘하네.”
산길에서 벗어나 외진 장소에 흑우채가 있었다.
흑묘가 무진과 홍무개와 함께 산채의 입구에 도착하자, 앞에서 대충 지키고 있던 산적이 의문을 표했다.
슈아앙!
자초지종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수는 없을 거다. 무진의 손날이 허공을 가르자, 산적은 눈만 붕어처럼 껌뻑거렸다. 그로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실제로 알아도 대비하긴 불가능했다.
쩌저저적, 쿠우우우웅!
뭐야?
소리쳤던 산적이 뒤를 돌아보곤 입을 헤벌쭉 벌렸다. 산채의 왼쪽에 자리한 거대한 수목이 기울더니 미끄러지듯이 잘려 나가 굉음을 토했다.
무진이 물었다.
“질문 있냐?”
“……!”
있겠냐?
제자리에서 십 장이나 떨어져 있는 거목을 수기로 반 토막 내 버렸다. 그 앞에서 질의를 요청해 봤자 대답이 나올 리 없잖아. 이는 마치 편하게 먹으라며, ‘나는 소채’라고 말하는 황제의 식성과 비슷했다. 그 와중에 사천식 마파두부를 원할 무진이겠지만.
보면 볼수록 기가 찬 홍무개였다. 자신도 녹림을 좋아하진 않지만, 무진처럼 대하진 않았다. 누가 산적이고 누가 협객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저걸 보고 무슨 말을 하라는 거냐?”
“그러니까.”
무진도 모르지 않았다. 그저 구질구질하게 설명을 나열하기 귀찮았을 뿐이다. 그리고 남의 물건이나 훔치는 산적에겐 나대면 이렇게 된다는 간단한 설명이면 충분했다.
어딜, 선량한 백성처럼 대우받기를 원해!
무진은 다른 건 몰라도 기본적인 도리나 규칙을 무시하는 놈들을 대접하진 않았다.
그런 거 있잖아, 천박한 짓을 하면 가는 말도 더럽다고. 초면에 죽이지 않은 걸 하늘의 계시로 알고 착하게 살아야 했다. 도적들은 원래 초면에 보이는 족족 죽여도 괜찮았다.
“웬 놈들…… 흐억!”
놀란 산적들이 우르르 몰려나오자 무진은 거목을 또 베어 냈다. 기겁한 산적들은 어리둥절했지만, 감히 따져 묻지 못했다.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내려가서 너희들 두목이나 도와.”
“옙! 대협의 명이시다! 어서 두목을 돕자!”
“도망치면 알아서 해. 이쪽이 개방의 알아주는 마당발, 홍무개거든. 도망칠 수 있으면 해 봐. 참고로 녹림에도 알릴 거다. 의리 없이 도망쳤다고.”
“도망치지 않습니다! 어서 가자!”
산채의 산적들은 서둘러 무기를 챙겨서 정상 영업 중인 두목을 찾았다. 한시라도 빨리 찾지 않으면 목숨이 여벌이라도 살지 못할 것이다. 행동이 무척이나 빠릿빠릿해, 평소의 흑우채답지는 않았다.
아!
흑묘는 협박의 정석을 보았다.
대다수의 고수는 자기 명예가 있어 저딴 식으로 협박하지 않겠지만, 무력과 상황을 절묘하게 호환시켜 궁극의 협박을 했다. 이런 식이면 황제도 상납을 해야 할지 모른다. 녹림에 꼭 필요한 인재의 표상이었다.
‘여태 뭐 하고 이제 나타났데.’
왕이 될 상이었다.
녹림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