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15
015 인연(1)
“소야, 이리 와.”
태진과 미주의 옆엔 항상 새하얀 털에 둔탁한 걸음걸이로 어슬렁거리는 고양이가 있었다. 어딜 가나 졸졸 따라다니곤 하는데 얼굴에는 노곤함이 역력하다. 따라다니기만 하고 정작 움직이지는 않는다.
스윽!
이름은 소(素).
소리를 내지 않아 소아자로 불리기도 한다. 게을러 보이는데, 털에서 윤기가 나서 신기하긴 했다. 부드럽고 몽실몽실한 털 때문에 촉감이 굉장히 좋았다. 태진과 미주의 사랑뿐만 아니라 문파 내의 관심을 받았다.
날름, 날름!
소는 미주의 품에 안겨서 혀를 날름거리며 거드름을 피웠다. 하는 일 없이 밥만 축내고는 있지만, 누구도 탓하진 않는다. 귀여운 외모만으로 충분한 밥값을 했다고 보았다.
미주의 품에서 잠들어 있는 소를 보며 무진은 혀를 찼다. 소의 겉모양은 고양이처럼 보이나 실제는 산의 왕 중의 왕인 백호다.
‘저게 어딜 봐서 백호냐.’
-투심마안의 위대함을 이제야 알았느냐?.
‘툭 하면 잘난 체네. 그거 병이야.’
-그러면 풀까?
‘정도껏 해라.’
핀잔을 주긴 했어도 마왕의 투심마안은 대단했다. 강력한 심령술을 지니고 있어 제압을 통한 각인이 되었다. 물론 백호의 의지를 꺾어 놓은 것은 무진이었다. 제아무리 투심마안이 강력하다고 해도 백호는 산의 제왕으로 신성시하는 존재다. 영력이 워낙 높아 일단 기를 죽여 놓아야 했다.
‘미친 듯이 날뛸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완전 고양이가 다 됐네.’
-그래도 백호는 백호다.
신체 규격을 축소시켜 놓아서 그렇지, 실제 크기는 집채만 하다. 규격을 제 의지대로 줄일 수가 있어서 데리고 다니기에는 용이했다.
‘미래엔 더 했지, 아마.’
-흉신으로 불렸다고 했으니, 그렇겠지.
작금의 백호는 흉신으로 불리기 전이다. 차후 삼왕의 전설을 찾겠다고 백호의 터전을 공략하던 무인들, 그때 백호는 새끼를 잃었다. 분노한 백호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공격했고 무인들을 찢어발겼다. 사람을 죽이면서 살육에 맛을 들인 백호는 점점 더 포악해졌고 흉신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땐 죽이더니 이젠 데리고 사는군.
‘잘못은 사람이 하고, 벌은 백호가 받았으니까.’
백호는 일류 무인도 어찌하지 못했다. 절정에 달한 고수도 산악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별다른 수련을 하지 않았음에도 발길질 한 번이면 바위가 베어졌다.
그런 백호를 무진이 죽였다.
삼왕의 전설 중 전왕의 무공을 익히고 나왔을 때 백호와 맞닥뜨렸다. 당시엔 사투를 벌여야 했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겨우 백호의 숨통을 끊었다.
무진은 나중에서야 백호의 흉명을 알았다. 비록 백호의 새끼를 직접 죽이진 않았어도 일말의 책임은 느꼈다.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백호는 새끼를 잃지도, 흉신이 되지도 않았다.
-그럼 자유롭게 놓아줬어야지,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내 자식들을 새끼처럼 보호하면 되는 거지.’
-결국, 지 자식만 소중하다는 거네.
‘부모 마음이 다 그렇지. 남의 자식이 소중하겠어?’
마왕답지 않은 말이긴 한데, 그 말이 옳았다. 하지만 무진은 백호의 삶보다 자식이 소중했다. 마신교와의 일전이 다가올수록 최악의 사태를 피할 안전장치를 마련할 필요성이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어도 의심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경호를 할 수 있어 유용하다.
무진의 앞엔 쌍두마차가 있었다.
모양은 단조로웠지만, 말은 꽤 강건해 보였다. 순혈(純血)은 아니더라도 몽고마의 혈통을 받아 힘과 지구력이 뛰어났다. 밤색의 윤기 나는 털만 봐도 관리가 잘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자, 어서 타렴.”
“아빠가 구한 거야?”
“당연하지.”
“아빠 부자야?”
“부자인진 몰라도 우리 미주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사줄 정도는 되지.”
“와, 나무꾼 부자네!”
“미주는 나무꾼 딸이고.”
말은 종류에 따라서 가격이 천차만별이기는 하지만 가격이 결코, 싸지 않았다. 마시장에서 마차를 끌 수준의 말은 은자로 최소 일백 냥은 주어야 한다. 그러니 보통 사람은 말을 타고 다니지 않는다. 어느 정도는 먹고살 만하고 여유가 있어야만 가질 수 있는 게 말이다.
“태진이도 어서 타.”
“엄마는요?”
“금방 나오실 거다. 그러니 먼저 타.”
“알았어요.”
오 년이 흐른 태진은 어릴 때와는 또 달라졌다. 체격도 다부져지고 커졌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다. 그리고 아빠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아빠 같은 나무꾼이 어디 있어요!’
문파 내에서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지만, 태진이 아는 아빠는 강했다. 문파는 물론, 청양 일대에서 비슷한 또래와 대련을 해봤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소룡대회를 나가기 위해 청양에서 벌어진 예선에서 압도적으로 이기고 올라왔다. 그런데도 아빠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삼촌도 안 되던데.’
문파의 후계자로 선택이 된 삼촌은 기대대로 강했다. 그런 삼촌도 아빠한텐 삼초지적도 되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강한지 모르겠다. 어쩌면 안휘성을 대표하는 십대고수에 꼽히지 않을까?
‘너무 나갔나?’
태진이 아는 범위 내에서 최고의 고수는 아빠지만, 세상은 넓고 고수는 모래알처럼 많다고 들었다. 그래도 아빠가 문파 내에서 최고라는 사실에 뿌듯하기는 했다. 의도치 않게 은둔 고수가 되어 버렸지만.
‘엄마도 좋아하고!’
태진은 아빠가 고수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밝힌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테고.
‘누가 믿겠어?’
하지만 태진은 믿고 있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를! 굳이 감추는 건 아니지만, 때가 되면 아빠는 세상에 널리 알려질 것이다.
‘한 성질 하시니까.’
삼촌 팰 땐 진짜 장난 아니었다.
감정 없다면서, 누가 봐도 감정 있어 보이는 주먹질이었다. 성질낸다고 또 패는 아빠를 보고 있자니, 반항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실랑이를 벌였다.
“아버지, 그만 좀 하세요! 제가 애도 아니고.”
“다 큰 녀석이 사고 칠까 봐 걱정하는 아비가 안쓰럽다고 하진 못할망정! 뭐가 어쩌고저쩌고해!”
“저 그때 이후로 사고 한 번도 안 쳤잖아요.”
“그래서 더 불안하다, 이놈아! 너 대형 사고 칠 것 같아!”
“아들을 좀 믿으시죠!”
“허튼 소리하지 말고 무조건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 숙여!”
“그래도 무조건은 좀!”
“해!”
“옙!”
실랑이는 예상대로 할아버지의 승리로 끝났다. 5년간 사고를 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이 많은 할아버지였다.
‘허 참, 언제쯤 자식을 믿으시려나.’
-그러게 평소에 잘했어야지.
‘누가 보면 효잔 줄 알겠네, 마왕 주제에!’
-난 고아다.
‘……툭하면 고아래! 말도 못 하게.’
마왕이 되기 위해 수집된 아이들, 그중에 선발되어 마왕이 된 천경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당연히 부모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수밖에.
괜히 미안해지려니까, 무진은 성질이 났다.
-그러니까 잘해!
‘효자 마왕 나셨네, 망할 놈의 고아들!’
-그건 전 대륙의 고아를 모독하는 발언이다. 어서 사과해라!
‘얼씨구, 언제부터 대륙을 위했다고. 적당히 해라.’
부모의 얼굴도 모르는 녀석이라 불쌍하기는 한데, 마왕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하게 미소 지으며 무인들을 찢어발겼던 녀석이 할 소린 아니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찾을 거야?’
-당연하지.
‘찾아서 어쩌려고?’
-날 버렸다면 응당 대가를 받아야지. 자식 버리고 잘살면 아름답지 않잖아.
‘미친 새끼!’
-응,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역시 마왕이었다. 얘가 한순간 정상일 거라고 생각했던 무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동정심 따위는 사치였다. 평소대로 대했어야 했다. 마왕 주제에 인간적인 면이 있다면, 위선과 위장에 지나지 않았다.
‘네가 어려서 세상을 모르는 거다. 쯧쯧쯧!’
-사돈 남 말 하고 자빠졌네. 그러는 넌 개차반처럼 살아서 가출했냐.
‘여기서 그 말이 왜 나와? 지금 잘하고 있잖아.’
-그게 다 내 덕인 걸 잊지 마라.
쩝!
이건 또 맞는 말이네.
하긴, 무진도 천경에게 부모한테 잘하라고 할 처지는 아니었다. 과거로 돌아오지 못했다면, 감히 꿈도 꿔보지 못할 혜택인 건 사실이니까. 천지 분간 못 하고 살아온 나날을 되돌아보면, 훈계는커녕 X잡고 반성해야 했다.
“언제까지 멍하니 있을 셈이더냐!”
“아, 다녀오겠습니다.”
“쯧, 정신머리하고는. 태진이를 봐라. 얼마나 의젓하냐.”
“아버지, 쫌!”
“시끄럽다. 잘하고 오지 않으면 다시 들어올 생각일랑 하지도 말거라.”
“제 아내도요?”
“너만.”
아들을 이렇게나 믿지 못하시다니, 지나온 행실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드시 훌륭한 아들이 되어서 집 밖으로 나돌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가봤자 개고생이지.’
-그럼 세상은?
‘몰라.’
-훌륭한 아들이군.
‘빈정거리지 마라. 맞는다.’
-쳐봐!
여정은 순탄했다.
문파에서 며칠씩 걸릴 만큼 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손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그런데도 찾아가지 않은 세월이 벌써 십 년이나 되었다.
‘유진이도 부모님이 그리웠겠지.’
나이가 어려도, 들어도 부모님에겐 자식이었다. 혼인하고, 자식을 낳으니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더 커졌을 것이다. 그 시절 모진 말이 상처가 되긴 했어도,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달라졌을 것이다.
“춥지 않아?”
“하나도 안 추워.”
“우리 딸 씩씩하네.”
“당연하지. 누구 딸인데!”
“하긴 내 딸이지.”
마차를 모는 무진의 옆에 미주가 앉아 있었다. 가을이 지나가는 겨울의 초입이다. 애들에겐 쌀쌀할 수도 있었다. 감기라도 걸리면 고생할 수 있어 마차 안에 있었으면 했지만, 딸의 바람을 꺾진 못했다. 모처럼 나온 새로운 세상을 눈에 담고 싶은 것이다.
“쌀쌀해지는데, 들어갈까?”
“아빠. 난 봐야 해.”
“보다니 뭘?”
“아빠도 참. 외진 산길을 지나가면 위기에 처한 사람이나 산적이 나타나잖아.”
엥?
새로운 세상을 보려던 거 아니었니?
뜻밖의 사고에 얘가 내 딸인가?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저런 깜찍한 상상을 하다니. 소설을 많이 본 모양이다. 세상이 험하기는 해도, 시도 때도 없이 위기에 처하고 산적이 불쑥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그런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아가나.
‘분란이 생길 곳으론 가지도 않지.’
무진은 마차를 모는 동안 감각을 개방해서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의도치 않은 사건 사고가 있다면 방해하지 않는 게 기본이었다.
설령 싸움이 있다고 해도, 둘 중 누가 선이고 악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어떤 일이든 은원은 반드시 생기고 후일 귀찮은 악연이 될 수 있었다.
‘은혜는 개뿔.’
은혜를 받고 갚으려고 하는 자들도 있겠지만, 나중에 뒤통수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래서 될수록 연은 만드는 게 아니었다.
어쭙잖은 정의감으로 나섰다가 자기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한 명의 절대강자가 세상의 흐름은 바꿀지는 몰라도 내 주변까지 완벽히 보호하긴 어렵다.
‘피해 가는 게 상책이긴 하지.’
-전왕답지 않군. 가는 길마다 사고를 쳤으면서. 부정은 하지 마라. 네 과거를 다 알고 있다. 읊어 주랴?
‘넌 빠져.’
-네가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넌 대형사고상이다.
‘운명 같은 소리 하면 가만 안 둬.’
-넌 주머니 속의 왕대검(王大劍)이다, 송곳 같은 게 아니라.
‘악담은 그만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