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157
156 나눔의 기쁨(1)
평범한 체격에 밋밋한 인상을 지닌 사내였다.
그는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탁상 위에 놓인 문서를 살핀 후 방 안에 모인 자들을 훑었다.
움찔, 부르르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처럼 평온한 눈빛이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완연했다. 사내의 말 한마디에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흥미롭군.”
고요한 침묵이 깨지며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실패의 경위는 보고를 통해 전달을 받았지만, 직접 들어 봐야 했다.
“본교의 대업이 허술하지는 않을 터, 연이은 실패는 이해가 되지 않는군.”
“대계는 완벽합니다. 그저 묵암의 성급함이 독이 되어 돌아온 듯합니다.”
“듯하다, 확신은 아니군.”
“송구합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묵암의 실패를 되돌려 보겠습니다.”
방 안에 선 다섯 사내는 묵암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조차 사내와는 감히 비교되지 않는다. 평범해 보이는 인상은 거짓된 포장에 불과했다. 자신들과는 감히 격을 달리하는 존재였다.
“기껏 자른 꼬리를 다시 이어붙이겠다고?”
“명을 내려주십시오. 따르겠나이다.”
“실패한 계획은 버린다. 당장은 새외에 집중하도록. 또한, 보안을 한 단계 격상한다.”
“예, 천군.”
묵암이 마지막 수를 써 꼬리를 잘라냈다고는 하나, 중원은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 현재로선 중원의 경계심이 누그러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실패한 계획은 끊어 낼 필요가 있었다. 만회하기 위해서 수를 쓰다가 또다시 꼬리를 밟힐 위험성이 크다.
“팽가에 연락을 넣도록.”
다만, 하북성과 강소성의 연계는 가능했다. 아직은 뿌려 놓은 미끼에 불과하나, 강소성을 장악하는 데는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설령, 계획이 잘못된다 해도 문파 간의 다툼으로 치부될 것이다.
“묵암의 죽음은?”
“현재로서는 불명입니다.”
“중원에 묵암을 상대할 만한 자가 얼마나 되지?”
“흑살대를 전부 동원했으니, 신주이십일강이 아니고선 불가능합니다.”
“검제 외에도 누군가 있다는 거군.”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묵암이 사술을 개방하여 대흑귀와 합공을 펼친다면 신주이십일강도 단독으론 제압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 의문이었다. 묵암의 계획은 마지막에 와서 서두르기는 했어도, 빈틈을 허용할 만큼 어설프진 않았다.
“추적의 꼬리를 완전히 피했다고 보기도 힘들군. 일전에 당한 것도 있고.”
“혹시라도 있을 변수를 배제하진 않고 있습니다.”
재료 수급에 실패한 이후로, 남궁세가와 개방이 정보를 교묘하게 비틀어 묵암의 계획을 역으로 이용했다.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기에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놈은 뭐지?’
보고서에 거슬리는 부스러기가 있었다. 이상한 놈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변수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중소 문파치고는 제법 대단한 실력이긴 하나, 그뿐이었다.
‘악감정을 가졌군.’
번번이 끼어들어 치워 버리려고 할 때마다 공교롭게 되었다. 교내에서도 냉철한 놈으로 평가를 받았거늘, 공과 사를 구별 못 하고 이성을 잃다니 어리석었다.
그러나 우연이 계속된다면 지켜봐야 할 놈이기도 하다.
“이후로 실패는 용서하지 않겠다. 명심해야 할 거야.”
“예, 천군!”
***
쩌어어엉!
뇌성벽력이 울렸다. 내지른 주먹에서 번갯불이 응축되어 폭화를 일으켰다. 뇌신의 강림이 이럴까? 그녀의 주변으로 부처의 휘광처럼 뇌기가 출렁거렸다.
천뢰기가 구성에 도달한 현상이었다. 뇌기를 바탕으로 한 강기공의 일종인 천뢰기가 구성에 이른 무인은 흔치 않았다. 현시점에서는 남궁연화가 유일했다.
슈슈슈슉!
아홉 개의 나락이 정면에 새겨진 잔상을 요격했다. 직격당한 잔영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흡족한 기색은커녕, 구뢰신(九雷神)을 연이어 발출해야 했다.
좌우가 따로 놀지 않았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 여파로 오른쪽과 왼쪽의 손과 발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진 못했다.
무공을 익힐수록 이 균형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완전한 균형을 이룰수록 무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좌우가 동일한 경우도 마찬가지로 흔하지 않았다.
남궁연화의 우권과 좌권은 균형이 잡혀 있었다. 오른손이 막히면 왼손으로 천뢰기를 발출했다.
대단한 성취였다.
저 나이에 여자로서 이만한 결과를 얻어 냈다면 천재라는 수식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럼 뭐하냐고!
천재조차 눈앞에서 희롱하는 괴물에겐 주식(主食)에 불과했다.
“좀 맞아라, 이 새끼야!”
“느려.”
“빠르거든.”
“더 빨라야지.”
무한보와 천뢰섬영을 결합하여 탄생한 천뢰무한은 보법과 신법을 동시에 펼칠 수 있었다. 속도만 놓고 보면 천뢰무한보다 빠른 보신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저 인간에겐 빠르기는커녕 하품이 나올 만큼 느렸다. 속도의 상대성에 자괴감이 들 만도 했다.
“뇌기가 정확한 타점에서 폭발하지 않잖아. 천뢰기를 좀 더 효과적으로 운용하라고.”
“하고 있거든!”
“느려.”
“개자식!”
타점은 정확했다.
그저 속도의 차이로 정확성이 떨어질 뿐이다. 천뢰무한을 펼치며 천뢰신화를 연속해서 뿌리지만, 속 빈 강정에 불과했다. 맞혀야 하는데, 맞지를 않는다. 뒷짐을 쥔 채로 느긋하게 피하니 더더욱 얄미웠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거야!”
“옳지, 이제 팰 차례구나.”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오나니, 무진은 주먹을 들었다. 맞고 싶다는데, 소원을 들어줘야지.
“……그 말이 아니잖아.”
“알았어.”
무진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구뢰신을 피하지 않고 맞아 주었다. 중첩된 구뢰신의 파괴력은 굉음만큼이나 대단했다.
그러나 당문의 독왕이 인정한 몸뚱이였다. 당문의 인증 표식을 표준으로 사용한다면 무진의 몸뚱이는 특급이었다.
찌릿, 찌릿!
사방으로 번갯불이 튈 뿐, 무진은 입맛을 다셨다.
“제법이네.”
“시끄러워!”
“작게 말했어.”
“닥쳐!”
닥치고 맞겠다면, 원하는 대로.
자고로 권공은 많이 맞은 만큼 강해진다고 했다. 검공, 도공, 수공, 장공과 달리 권공은 맷집과 반사 신경이 중요하다. 이런 능력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반복 훈련을 통한 경험이 중요하다.
퍼억, 퍼엉!
무진이 공세를 취하자 남궁연화는 일방적으로 처맞아야 했다. 남서로 피해도 맞고, 북동으로 피해도 맞고, 엎드리면 밟히고, 날아가면 발목이 잡힌다.
“……찍지 마!”
왜 사람을 잡아서 찍고 지랄이야!
내가 망치야!
“아, 미안.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니까.”
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날아가려고 하면 발목을 잡는 습성이 있었다. 눈앞에서 벼룩처럼 튀어 나가는 모양새가 마땅치 않았다. 그런 것들은 발목을 잡힌 채 바닥에 찍혀 봐야 정신을 차렸다. 안 차리면 뒈지는 거고.
“거기서 반응해야지. 각을 틀고, 방어 자세를 취해. 어, 잘못 맞으면 이빨 나간다.”
“……죽엇!”
“입 벌리면 더 아파.”
무진의 주먹질은 계속되었다.
주먹에 굳은살이 박인 권법가 간의 아름다운 교류였다. 예전에는 맞을 때 꽤 엉성했는데, 지금은 제법 각이 잡혔다. 이젠 맞아도 예전처럼 허망하게 쓰러지진 않았다. 맷집이 점점 늘고 있었다.
“거봐, 잘 맞을 수 있으면서.”
“그딴 칭찬 하지 마!”
무진은 마지막까지도 섬세하게 두들기며 남궁연화의 감각과 반사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어 주었다. 의도치 않게 성격까지 날카로워지는 것 같지만.
“다 너를 위해서야. 권후 안 될 거야?”
“한 대만 맞자!”
“능력 되면.”
“이 씨부럴 개자식!”
욕이 늘었다.
입이 걸면 시집가기 힘든데, 동생한테 사정을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남궁세가 정도면 나쁘진 않았다. 무호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이렇게나 동생을 위한다니까.
‘잘 끝냈겠지.’
남궁연화를 패면서 잠시 문파의 사정을 심려했다. 거산방 나부랭이들이야 진작 정리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혹시나 잡것들이 남아 있다면, 가르침의 무능을 의미했다. 동생의 사부로서 심히 불쾌할 것이다.
전적으로 마왕 탓이지만.
-그게 왜 내 탓이야!
‘네 지분이 크다.’
-염치도 없는 놈! 잘되면 네 탓이고, 안 되면 내 탓이냐!
‘세상 사는 이치이자 진리지.’
염치를 왜 나한테서 찾아.
무진은 세상을 편하게 살고 싶었다. 걸리적거리는 놈들만 치우면 집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든, 구워삶든 알 게 뭐야. 어차피 무림은 칼로써 흥하고, 칼로 망하는 세상이다. 흥망성쇠에서 영원할 수 있는 세력은 없다.
풀썩!
기력이 빠진 남궁연화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더는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맞는 데도 체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어디 한 군데라도 안 아픈 곳이 없도록 잘도 다져 주었다.
“수고했어. 그리고 어디 가서도 나보다 뛰어난 스승은 없으니까 맘껏 자랑해도 돼.”
“그게 여자를 패고서 할 소리야!”
“난 적이라면 애들도 패.”
“이 미친 인간이, 자랑스럽게 말하지 마!”
무인이라면 남녀노소를 따질 필요가 없다. 눈먼 칼에도 죽는 세상이다. 애가 찌른다고 칼이 안 들어가나. 물론, 나에겐 칼이 안 들어가겠지만, 죽이려 했다면 응당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사람마다 사정이 있을 수도 있어.”
“자기 식구가 죽어서도 그딴 말을 할 수 있으면 인정할게.”
같잖은 사정을 내가 왜 알아야 해.
어떤 사람이든 사정은 있다. 또한, 생사의 기로에 서면 사정이 마구 생겨날걸. 적의 개인사까지 일일이 따져 가며 싸울 거면 무인이 되지 말았어야지.
“난 바라는 거 없다. 그저 네가 강해지기를 순수하게 바랄 뿐이야.”
“흥, 네 속셈을 모를 줄 알아!”
“속셈이라니, 오해야.”
“오해는 개뿔, 날 강하게 만들어서 부려 먹으려는 거잖아.”
미련한 곰인 줄 알았더니 여우 같은 면도 있네. 정곡을 너무나 정확히 찔러서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이럴 땐.
“내가 좀 부려 먹으면 안 되냐? 나 정도면 부려 먹어도 괜찮잖아.”
“뻔뻔하고 재수 없는 자식!”
무진에겐 당연한 권리였다. 이렇게나 세심한 배려를 받고, 모른 척 발뺌하면 열 받지. 외면하는 순간 나의 정의로운 주먹이 절대 용서치 않으리라.
“배고프네.”
무진은 식당으로 사라지고 남궁연화는 덩그러니 남겨졌다. 대련을 관전하던 검제가 다가와 손녀를 일으켜 세웠다.
“너무하지 않아요?”
“너무하다고 하기에는 성취가 놀랍구나.”
손녀가 처맞는 걸 지켜봐야 했던 검제는 마음은 아프지만, 차마 무진을 말리진 못했다. 손녀는 하루하루 강해지고 있었다. 통상적인 상념을 무시하는 무지막지한 대련을 통해 엄청난 속도로 강해졌다.
“그래도 그렇지, 저 여자잖아요.”
“할아비가 복수라도 해 주길 바라는 게냐?”
손녀는 말괄량이이긴 해도 심성이 고운 효녀다. 하나, 무진과 너무 오랜 시간 어울렸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할아버지 힘내세요. 제가 있잖아요!”
“크흠, 비가 오려나.”
염원을 담은 손녀의 응원이 달갑지 않은 검제였다. 솔직히 응원인지 억하심정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들과는 꾸준히 검을 나누고 있지만, 무진과 붙을 때마다 삭신이 쑤셨다.
따지고 보면 무진은 손녀를 많이 봐주고 있었다. 본심을 드러냈다면 손녀는 무진의 일 초식을 버티기 힘들었다.
‘곧 온다고 했지.’
검제는 친우의 방문 소식에 그나마 위안을 얻었다. 혼자만 아는 게 아니라 공유할 수 있어서 좋은 세상이었다.
무진은 널리 공유할 필요가 있는 공공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