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158
157 나눔의 기쁨(2)
남궁세가로 풍채 좋은 귀인이 찾았다.
거적때기를 덧대 입은 옷을 봐선 귀인으로 보기 힘드나, 노인의 위치를 고려하면 귀인인 건 분명했다.
노인의 뒤에 선 서생은 홍무개였다. 거지에게 어울리지 않는 외향은 여러모로 불편했다. 근래에는 구걸도 잘 안 먹혔다.
“전대 방주님을 뵙습니다!”
“누구?”
당연한 말이지만, 거지는 대충 십만이라고 했다. 그 모든 거지를 방주가 일일이 다 기억할 거란 생각은 명백한 착각이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도 가물가물해지고.
“삼결 제자 육칠입니다.”
“호오, 성취가 제법이구나.”
“많이 부족합니다.”
육칠은 취선을 보고 급히 예를 취했다. 방에서도 얼굴을 보기 힘든 전대 방주님이 찾아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한편으로는 대체 어쩌자고 전대 방주님을 데려왔는지, 홍무개의 무책임을 조심스럽게 힐난했다.
-당주, 미치셨습니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말해 놨으니 괜찮을 거다.
-그게 최선입니까?
-이놈이 지금 날 훈계하는 거냐!
전대 방주께서 검제를 만나 담소를 나누는 사이, 육칠과 홍무개는 은밀히 전음을 시전했다.
얼마 전에 전대 방주께선 검제를 만났다. 굳이 남궁세가를 찾을 이유가 없음에도 찾아왔다면 목적은 분명했다.
홍무개와 육칠은 오성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남의 집에 와서 목적만 취하고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닌지라, 취선은 검제와 시간을 가졌다.
“별일 없었지?”
“아직은요.”
무진은 걸어 다니는 벽력탄이었다. 어딜 가든 대형 사고를 펑펑 터뜨렸다. 나가기만 하면 상상도 못 할 암류를 끌고 다녔다. 여기서 웃기는 진실은, 나가길 싫어한다는 것이다.
“성과는 있었습니까?”
“있으면 여기 있겠냐.”
원래 없었던 존재처럼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제물로 쓴 오성문을 추적하는 동시에 꼬리가 있는지를 살폈지만,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다.
“그나저나 사부님의 말씀대로 성취가 있었나 보구나. 그만하면 오결이라고 해도 믿겠는걸.”
“이 정도로 자랑하고 싶진 않네요.”
칭찬에도 시무룩한 육칠의 태도에 홍무개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 나이에 자신과 같은 오결이면 대단한 성취였다. 이놈이 무진과 같이 다니더니 자신을 개밥에 도토리로 보는 것 아닌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왜 그래?”
“전 제가 제법 잘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그 녀석하고 비교하면 잘하는 놈이 어딨겠어.”
“그러면 차라리 낫죠.”
육칠은 자괴감의 원흉인 무진의 아들, 태진에 대해서 밝혔다. 또래도 아니고, 열 살이나 어린 녀석의 성취가 자신보다 나았다. 그 말은 당장 개방의 당주를 맡아도 될 실력이란 의미였다.
“그리고 철호라는 녀석도요.”
홍무개는 육칠의 자신감을 살려 주고 싶었지만, 훈련에 몰입하고 있는 태진을 보자 그 마음이 쏙 들어갔다. 과장이 아니라 실로 대단한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저 나이에 검안을 개방하다니, 저럴 수가 있나?’
검의 궤적이 정확하다. 혼자서 수련을 하고 있는데도 상대가 보였다. 어딜 어떻게 가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마치 검에 눈이 달린 듯 완벽하다.
‘저것도 괴물이군.’
자신감 빼면 시체였던 육칠이 자괴감을 느낄 만도 했다. 일전에 봤을 때와는 또 달라졌다.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는 데다, 나이도 어렸다. 마음가짐도 단단할 것이다. 괴물이 물심양면으로 괴롭히고 있으니 태만하지 않을 테고.
그런데 하나도 아니고 그런 놈이 또 있단다.
‘나도 방심하다간 장강의 앞 물결이 되겠구나!’
이 녀석도 생각보다 빨리 강해지고 있었다. 홍무개는 무공으로 최강이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뒷방의 늙은이처럼 뒤처지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문득, 목적으로 다시 돌아왔다. 지금은 그런 사소한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홍무개의 시선이 누각으로 향했다.
까닥, 까닥!
정원의 누각에 경침을 베고 팔자 좋게 누워 있는 무진이 보였다. 놀랍게도 발가락을 까딱거릴 때마다 태진의 훈련이 혹독해지고 있었다. 경력을 발출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손가락 놔두고 왜 발가락으로 지랄이야!’
지공은 맞지만, 저걸로 맞으면 굉장히 기분이 나쁠 것 같았다. 상대를 약 올리는 재주는 타고났다고 봐야 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괴상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저처럼 무지막지한 무공을 가지고 있으면 보통 화려하고 강력한 무공을 사용할 텐데, 괴상할 정도로 실전적이었다.
슝슝!
무진은 무형탄지공을 발가락으로 날리며 다과를 즐겼다. 아들의 훈련에 탄력을 주기 위한 아비로서의 성의였다. 체안도 통제해야 하고. 고민을 덜어 주는 아비가 있기에 아들은 강해질 수 있었다.
“멀뚱히 서 있지 말고…… 가서 씻고 와라. 처맞기 싫으면.”
“사정 좀 봐줘라, 사부님하고 같이 왔다고.”
개밥도 잘 처먹을 것 같이 생겨서는.
생긴 것과 달리 유난을 떠는 무진이 얄미웠지만, 홍무개는 사정을 설명하며 애원했다. 그동안 겪어 본 무진은 한다면 하는 위인이었다.
“내 넓은 아량과 단련된 코에 감사해라.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림도 없었어.”
“생각해 줘서 눈물 나게 고맙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진심으로 말하니 홍무개는 짜증이 치밀었다. 개방의 당주를 이딴 식으로 대하는 사람은 무진뿐이었다. 어딜 가도 대접을 받지만, 여기선 푸대접이 일상이 되었다.
“넌 궁금하지 않냐?”
“궁금해할 필요가 있나. 못 잡았을 텐데.”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잖아.”
“빨리 죽고 싶으면 그리하든가.”
“너, 그렇게까지 저들을 높이 평가하는 거냐?”
“간단히 끝날 일이었으면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수차례의 실패로, 일부에 불과하나 마신교에도 타격이 되었다. 특히 자금과 물자의 운송에 지장을 초래했다. 전체적인 틀을 바꾸진 못했어도, 시간은 많이 늦춰졌을 것이다.
하나, 무림이 선제적으로 방향을 바꾼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떤 식으로 나올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살고 싶으면 방관하라고?”
“방향을 정해야지. 어딜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모르잖아.”
“그러는 너는?”
“저들은 신주이십일강을 노리고 있어. 그게 무슨 뜻일 것 같아?”
“구심점을 없애려는 거구나.”
“이러면 좀 답이 나오냐?”
암중 세력은 남궁세가와 사천당문을 장악하기 위해서 검제와 독왕을 노렸다. 그렇다면 저들이 노릴 대상이 어디인지 범위를 좁힐 수 있었다.
‘누군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녀도 감을 못 잡는데, 이놈은 대체 뭐지? 열 받지만 날카롭잖아.’
홍무개는 너무나 간단히 답을 찾은 무진의 예리함에 어이가 없었다. 전적만 놓고 보면 생각 없이 사는 골 빈 놈인데, 이럴 땐 또 그 누구보다 예리하고 정확했다.
-사기 치는 수준이 나날이 발전하는군.
‘관록이야, 인마.’
미래를 알아야 가능한 조언이었다.
당시 신주이십일강은 아홉 명을 제외하고 전부 뒈졌다. 그 아홉 명도 의심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들로 인해 분열을 초래했으니 일부러 남겨 둔 것 같기도 했다. 여하튼 그들의 죽음이 석연치 않은 이상, 뒤를 캐 보면 의도가 나올 것이다.
“아, 전에 말한 건 어떻게 됐어?”
“옥문관 밖은 우리도 정보를 얻기가 어려워. 시간이 더 필요해.”
사막으로 가고 난 후 소식이 끊어졌다. 별다른 일이 없기를 바랐다. 자세하게 말해 주지 않은 것도 걸리고. 어쨌든 검후의 장래성과 미래를 믿어 보는 수밖에.
“그보다, 거산방이 정리됐다.”
“그까짓 게 뭐라고.”
“청양현에선 네 동생을 신검마협으로 부르더군.”
“멋진데.”
“정리하는 과정도 나름 깔끔했고, 명분도 잘 살렸어. 특히 네 딸이 큰 역할을 했다.”
……뭐?
미주가 큰 역할을 왜 해.
내 딸은 안전한 장소에서 맛있는 것 먹고 즐겁게 놀고 있어야 하거늘. 거산방 따위를 공략하는데, 내 딸을 미끼로 써! 동생 놈이 아직 매운맛을 못 본 모양이다. 돌아가는 즉시, 정신 교육과 육체 훈련의 병행이 이루어져야 할 듯싶다.
“왜 그러나?”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니긴, 방금 굉장히 무서웠다.
홍무개는 순간 말을 잘못했나 되짚어 봐야 했다. 그러다 아차 싶었는지, 신검마협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그런 거지, 뭐. 어차피 돌아가면 밝혀질 일이기도 하고.
검제는 취선을 위해 명주와 진수성찬을 내어주었다. 오랜만에 가문을 찾은 친구에게 주인으로서 모자람 없이 대해 주어야 했다.
먹고 죽은 거지가 때깔도 좋다고 하니까.
우걱, 우걱!
거지 중에서도 왕거지로, 취선은 대식가였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졌던 식탁의 절반이 게 눈 감추듯 비워졌다. 손과 입이 쉬지 않았고, 명주는 병째 나발을 불었다. 이쯤 되면 배에 거지가 또 들어 있을지도.
“얼마든지 있으니 천천히 드시게.”
흠.
검제의 권유에 한껏 입에 담았던 음식을 삼키고 손이 멈췄다. 젊은 시절과 달리 유해졌다고는 해도,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
“수상한데.”
“싫으면 그만 들게.”
검제가 음식을 치우라고 말하려 하자, 취선은 황급히 손을 잡았다. 모처럼 걱정 없이 입맛에 맞는 요리를 먹고 있었다. 거지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진수성찬을 받아 보겠는가.
‘위험했군.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눈치는 빨라서는.’
엉성하게 생긴 취선이지만, 누구보다 예리한 촉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시절 위험한 상황을 같이 겪으면서 취선의 날카로움을 몇 번이나 경험했었다.
그러나 검제도 연륜이 쌓이고 노련해졌다.
“그나저나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어인 행차신가?”
“모른 척하기는, 그 녀석 때문이잖아.”
“이런, 이런! 그럼 더더욱 보여 줄 수가 없지. 그 아이는 가문의 은인일세.”
“내가 뭐 잡아먹나?”
“젊을 때나 지금이나 호기심은 여전하군. 이젠 좀 죽일 때도 됐지 않나.”
“자꾸 숨기려고 하니까 더 보고 싶잖아.”
검제는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다.
시간을 끌고 뜸을 들이며 인과를 명확히 했다. 동시에 이호의 불같았던 시절, 맹호개로 맹위를 떨쳤던 때를 상기시켰다.
“정말 봐야겠나?”
“자네가 싫다면 보지 않겠네.”
“다행이군.”
“아니, 봐야겠어.”
떠볼 요량으로 거절하기가 무섭게 검제가 안도하자 취선은 마음이 바뀌었다. 세상은 그를 운수대통 천운권으로 부르지만, 작금의 사태를 해결한 숨은 영웅호걸이었다.
“말린다고 들을 자네도 아니고, 알겠네.”
“진작 그럴 것이지.”
“살살 하게.”
“나도 이젠 늙어서 예전 같지가 않아.”
취선을 등지고 선 검제의 근엄했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담겼다. 아들이나 손녀에게도 생전 보여 주지 않았던 무극지경의 미소였다.
오성원으로 향했다.
아들과 손녀에겐 얘기해 놓았기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런 좋은 구경거리를 혼자서 볼 수 없다는, 검제의 배려였다.
검제와 취선이 오성원에 들어서자 홍무개가 무진을 깨웠다.
“일어나, 인마.”
누각에서 누워 있던 무진은 그제야 뭉그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제와 나란히 선 포근한 인상의 노인을 힐끗 보았다.
스윽!
개방의 전대 방주라고 하기에 마른 가지처럼 앙상한 노인을 기대했거늘, 토실토실 살이 오른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방도들이 구걸해 오면 혼자 다 처먹나?’
무진이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자 홍무개가 작게 기침했다.
커흠!
최소한 사람이 찾아왔으면 예의라도 차리라는 무언의 호소였다. 그러나 남의 집에서도 자기 집처럼 편안한 무진의 몰상식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제발 아무 일도 없이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송호문의 강무진입니다. 취선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최근 벌어진 사태를 해결한 숨은 공로자가 자네라고 들었네. 나야말로 영광일세.”
홍무개의 불안과 달리 무진의 대응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그래서 더 불안하다. 둘 다 정상적인 부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어떤 식으로든 돌발 사태가 벌어지고도 남을 텐데.
문제는 만전을 기한다 한들, 자신이 어찌하기에는 두 사람이 지나치게 거물이자, 괴물이었다.
흠.
취선은 젊은 시절에도 사람 보는 안목은 빼어났었다. 사람마다 풍기는 특유의 기질만 봐도 그 사람의 성향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모호했다. 권태로운 분위기를 봐선 영락없는 한량인데, 몸을 보면 또 아니다.
‘육체의 단련이 남다르군.’
거구임에도 탄탄하고, 좌우의 균형이 완벽에 가까웠다. 그래서 더 아리송하다. 이처럼 완벽에 가까운 육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하루도 쉬지 않고 혹독한 단련을 해야 한다. 치열하다면 또 모를까, 나른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겉모습만 봐서는 알 수 없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았다. 점점 흥미가 동했다. 알 수 없는 상대라면, 방법은 이제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개방의 전대 방주로서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기에 인과는 중요했다.
하나 불필요한 염려였다. 정작 마주한 당사자는 전대 방주든 홍무개든, 거지로 보았다.
“자네는 어떻게 알았나?”
“우연입니다.”
“우연이 겹친다면 필연이자 숙명이지. 안 그런가?”
“그것이 제 숙명이라면 감수해야 할 일이겠지요.”
무진의 응수는 자연스러웠기에 홍무개의 심려를 덜어 주었다.
반대로 저처럼 정상적으로 대할 수 있음에도 미친 짓을 서슴없이 해 왔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밀었다.
보자마자 죽빵을 날렸던 과거와 대비되었다.
‘하지만 순순히 물러설 분이 아니시지.’
먼 길을 찾아와 인사만 하고 갈 취선이 아니었다. 남궁세가를 찾은 목적에 충실했다.
“검밖에 모르는 녀석이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건 처음이었어. 어떤가?”
“좋습니다.”
“과연 시원시원하군.”
“전대 방주님의 호기심을 채워 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뭘 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