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16
016 인연(2)
낭중지추(囊中之錐)가 아니라 낭중지왕대검(囊中之王大劍)이라고 해야 하냐?
이 새끼 비유를 해도, 이상하고 지랄이야.
여하튼 그 시절 사고를 몰고 다녔던 것은 사실이었다. 굳이 피하지도 않았고, 싸움이 있는 장소엔 항상 있었다. 전왕이란 별호가 붙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응?
이쪽으로 누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차를 비켜 세우기에는 폭이 좁다. 돌아서기도 어렵고. 다음 마을로 가려면 이 능선을 반드시 넘어야 했다.
-거봐.
‘닥쳐.’
꽤 빠른 속도였다.
무진은 마차를 세우고 미주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예상치 못한 변수를 즐기려는 딸의 응석을 받아주진 않았다.
지금 보니 딸아이가 겁이 없다. 나만 몰랐나?
“아빠?”
“감기 들면 안 되잖아.”
“안 걸려.”
“미주, 아빠 말 안 들을 거야?”
“다음엔 봐도 되지?”
“그래.”
미주도 조금은 추웠는지 더는 앙탈 부리지 않았다. 코가 빨개진 걸 보니 무진은 시큰했다.
‘웃기네.’
산을 넘기 전에 마을에 들러 산적이 출몰하는지 꼼꼼하게 확인했었다. 산적이 나타난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아내와 자식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보여주기 싫을 뿐이지 닥치면 한다. 그땐 화가 많이 나서 참기 힘들지도.
-어떠냐?
‘닥치라고.’
마귀 놈의 말이 맞는 것 같아서 더 짜증이 났다.
어쨌든 다급해 보였다.
‘어쭈.’
다급한 주제에 방향을 선회하여 접근했다. 기척을 발견하고도 방향을 돌리지 않는 것은 노리고 있다는 의미가 되었다. 의도가 가히 괘씸하다.
***
“빌어먹을 년!”
“지독한 년!”
“제기랄, 우리가 뭘 어쨌다고!”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도망치는 자들의 경신공이 범상치는 않았다. 최소 일류는 넘어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꽤 다급했다. 꽁지가 빠져라,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경공을 펼치는 내내 추적자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도망치는 주제에 입은 살았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막내가 죽었다고!”
“반드시 복수해야 해!”
말로만?
실제 복수는커녕 도망치기도 바빴다. 셋이 남았지만, 그들은 원래 다섯이었다. 한날한시에 태어나진 않았어도 갈 땐 함께 하기로 맹세를 했었다.
그러나 두 형제의 목숨으로 겨우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도주는커녕 계집의 검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어디서 그런 미친년이!’
그들은 안휘오흉으로 불린다.
성내에서 그들과 자웅을 겨룰 자는 많지 않았다. 전원 일류급인 데다가 합공에 능하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한 번 원한을 맺으면 반드시 잔혹하게 복수를 해 악명이 자자하다. 해서 될수록 그들과는 원한으로 엮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악명이 자자해지자 남궁세가를 비롯한 정파에 공적으로 이름이 오르면서 활동이 뜸해졌다. 거의 7년간 활동하지 않다가 얼마 전에 나왔는데, 괴물 같은 년을 만난 것이다.
‘좁혀지잖아.’
무섭게 쫓아오는 계집의 기운이 전해졌다. 좁혀 올수록 그들은 다급해졌다. 차라리 처음부터 합공을 했다면 또 몰랐다. 초반에 방심하다 두 형제를 잃는 바람에 기선을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대응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때마침.
방향을 잡은 지척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일흉 마길강은 방향을 틀었다. 다른 방도가 현재로서는 없다고 판단했다. 기회는 한 번뿐이고, 말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쌔애앵!
경신공을 발휘해 목적지에 도달했다. 예상대로 마차가 있었다. 마길강은 그 즉시 말 갈퀴처럼 날이 선 거치도(鋸齒刀)를 뽑아 들고 마부에게 쏘아져 나갔다.
이흉 안호성과 삼흉 배길수는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을 잡기로 했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마부가 아닌 마차 안에 있는 계집과 어린아이였다.
“운이 없다고 생각해라!”
마길강은 마부를 향해 망설임도 없이 거치도를 내려찍었다. 이 한 수로 마부의 몸뚱이는 두 조각으로 분리되며 피를 뿌리리라.
타아앙!
철벽을 치는 쇠의 울림.
엄청난 반진력이었다.
충격을 받은 인형이 반동을 이용하여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딱 걸렸다.
“어딜 가려고.”
꽈악!
거치도를 끌어당겨 멱살을 잡아챘다.
크윽!
숨통이 잡히자, 힘이 쭈욱! 빠져 버렸다. 마길강은 어이없는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부 따위에게 한 수에 제압을 당하다니!
더욱이 전력은 아니더라도 다급한 마음에 거치도에 힘이 실려 있었다. 그걸 주먹으로 튕겨낼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그 많지 않은 무인 중에서도 특별한 경우였고 재수 없게 자신들이 그런 고수를 만난 것이다.
그렇다면?
‘……망할!’
고수다!
하필이면!
상대를 인식했지만, 자신의 상태를 고려했어야 했다.
움찔!
무심한 눈빛, 잡것이란 의미가 담겼다. 하찮은 놈이 주제를 모르면 다음 행보는 정해졌다는.
잘 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었다.
“잠깐…… 헉!”
멱살을 잡은 마부는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으며 일흉의 숨통을 끊어내 버렸다.
쿠아앙!
다시 살아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목과 허리가 방향을 달리해 버렸다.
이제라도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도 된다.
안휘오흉 중에서도 가장 강한 일흉. 절정에 올라섰다고 한 마길강의 최후치고는 어이가 없었다.
“……네놈 감히!”
“형님을!”
거치도가 퉁기면서 난 파공성과 동시에 마길강이 죽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참사에 안호성과 배길수는 믿지 못하는 신색이었다. 마차 안의 계집과 아이들을 인질로 잡아야 한다는 사실마저 망각했다. 사실, 마길강의 첫수가 실패하면서 끝나거나 다름이 없었다.
참살흉도(斬殺凶刀) 마길강이 죽은 이상 그들로서는 어찌하기 힘들다.
섬전흉검(閃電凶劍) 안호성.
아귀흉장(餓鬼凶掌) 배길수.
그들의 악명을 증명하는 별호였다. 눈동자가 교활하게 돌아갔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눈치를 살폈다.
“시간 많나 봐.”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수작질은 너희들이나 하는 거고. 한데, 괜찮겠어?”
“그따위 수작…… 헉!”
섬뜩한 한기.
그들이 미처 느끼기도 전이었다. 후방을 가르는 벼락같은 검기가 등을 베어 버렸다.
크악!
척추가 베였다.
그걸로 그들은 전의를 상실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돌아선 시선 속에서 고아한 백로처럼 흰 무복을 입은 여인이 검을 빼든 채 서 있었다. 살인의 현장인데도 선녀와 같은 한 폭의 그림을 완성했다.
“이 비겁한…… 크악!”
수급이 허공을 날았다.
무인은 등 뒤를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인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기회를 보았을 때 망설임도 없이 베어 버렸다. 일흉의 죽음으로 당황하던 그들로선 저항은커녕 어이없는 최후를 맞고 말았다.
데구르르르!
바닥을 구르는 2개의 수급은 허망함을 담고 있었다. 본인들의 죽음을 담지는 못했다. 그저 일흉의 죽음에 놀람과 당혹감만이 남아 있었다.
사박, 사박.
여인이 걸어와 무진의 앞에 섰다.
무진은 그녀를 보자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다는 걸 느꼈다. 저기서 좀 더 연륜이 쌓이고, 무게감이 생기면? 누군가와 아주 흡사하다. 아니 흡사하단 수준이 아니라, 똑같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는 못하는 편이지만, 그녀는 인상이 깊었다.
‘……검후?’
-그녀군.
천경이 바로 대답을 했다.
그렇다면 맞을 거다.
왜 그렇게 확신하냐고?
천빙검후의 최후를 천경이 선사했으니까. 자기가 죽였음에도 꽤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천빙검후(天氷劍后), 이서정.
돌연히 나타나 검의 제후로 불린 여무인, 그녀가 펼치는 빙천검예(氷天劍例)는 당대의 검제, 검성, 검왕에 필적한다고 알려졌다.
그런 검후도 마왕의 적수로는 부족했다.
그런 마왕도 내 상대는 아니었지만.
-내게서 십 초식을 쓰게 한 여인이니, 특별하지.
‘죽이고서 할 소리냐.’
-무인으로서 대우는 했다.
‘하긴, 아니었으면 잡아가서 노리개로 삼았겠지.’
무진은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날이 서 있는 차가운 예기를 품고 있었던, 그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감히 다가서지 못할 고고한 얼음꽃으로 불릴 만했다. 하나, 그 이상은 잘 모른다. 당시의 무진은 사람에 대한 호감이 없었다. 가족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감정이 죽어버린 것이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무진의 감흥은 거기서 끝이었다. 상대가 검후든, 아니든 문제가 되진 않는다.
다만.
‘안 들렸겠지?’
아내와 자식들에게 마차 밖의 상황을 모르도록 소리를 차단해 놓기는 했다. 그러나 현명한 아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알면서도 자신의 의도를 알고, 묵묵히 기다려 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이서정이에요.”
“강무진입니다.”
이서정이 예를 갖추자 무진도 포권을 취했다. 그녀는 여자라고 해서 폄하할 상대가 아니었다. 검으로서 능히 일절로 불릴 검공을 갖추었다. 마왕과의 결전 당시와 비교하면 차이가 있기는 하나, 젊은 시절의 검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일흉을 죽였군요.”
“그렇습니다.”
“고절한 공력이네요.”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습니다.”
이서정은 일흉의 몸에 남겨진 상처를 보고 어떤 식으로 당했는지를 유추했다. 솔직히 좀 놀랐다. 일흉은 다른 사흉과 달리 절정에 이르렀다. 방심했다곤 해도,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목과 허리가 꺾였다.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깔끔한 솜씨에 그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많아 봐야 서른, 아니면 그 아래인데.’
강호에 나와 차기 검후라는 평가를 받으며 소검후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 자신과 또래에서 경쟁할 자는 많지 않았다. 새로운 강자의 출현이었다. 하물며 자신을 보는 눈빛에 그 어떤 감정의 편린도 없었다.
“바쁘지 않으면 대련을 청하고 싶네요.”
“기회를 나중으로 미루고 싶습니다만. 아내와 함께 처가에 가는 길이라서요.”
“안타깝네요.”
“청양의 송호문입니다.”
아쉬워하는 그녀였지만, 무진은 이런 일로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거절하면 실랑이가 이어질 것이다. 당시에도 검후는 끈덕지게 따라붙어 대련을 신청했었다. 검에 대한 열망과 협의는 그녀의 삶과 같았다.
“알겠어요. 그럼 다음에 봬요.”
“양해해줘서 고맙습니다.”
“저야말로 무례한 청이었어요. 다음엔 꼭 보답을 하겠어요.”
“무인이 호승심 빼고 무엇이 남겠습니까. 이해합니다.”
그녀도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안휘오흉은 사파에 속하는 혈사문의 빈객으로 초대를 받았다. 그녀의 목표는 혈사문이었다. 저런 자들을 모아 문파를 만들었다면 좋은 의도는 아닐 거라 판단했다. 개방과 하오문을 통해 얻은 정보도 있었다.
팟!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녀는 무진을 기억한 후, 신법을 전개했다. 절정에 달한 빙섬보(氷閃步)가 인상적이었다. 순식간에 공간에서 사라져버렸다.
“뒤처리는 하지 않는 성격인가 보군.”
무진은 투덜거리며 주변에 널브러진 신체를 허공섭물로 잡아채 삼매진화를 발동했다.
화르르르!
강렬한 화염이 시체를 뒤덮으며 순식간에 화장했다. 주변에 남은 흔적도 말끔하게 지웠다. 세상은 험하다. 자기 흔적은 될수록 남기지 않는 편이 이득이다.
-그러는 너는?
‘요즘 들어 많이 기어오르네. 나오기 싫어?’
-치사하군.
‘그러니까 마왕답게 굴어.’
마왕의 빈정거림이 틀리진 않았다. 전왕이던 시절 싸움만 신나게 벌였지, 뒤처리해본 기억이 없으니까. 저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자들은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