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03
202 사막으로(2)
소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속물.
삶이 순탄치만은 않을 듯싶다. 숨을 내쉰 무호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아니면 형을 이기거나.
‘이길 수 있을까?’
형을 이겨서 내 맘대로 하게 될 날을 고대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마누라한테 맞고 살고 싶지 않으면 강해져야 할 거다. 빙정을 흡입한 검후가 어찌 변했을지 너도 짐작은 할 수 있잖아.”
“나야말로 쉽지 않을걸.”
“아무렴, 그래야 내 동생이지. 혹여 검후한테 맞는 날이 오면 친히 널 패 주마.”
“형도 형수님한테…… 아니, 알았어!”
무진은 장로님들을 돌아봤다.
훈련 시간이 짧아서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이제 막 기반을 다잡았다. 좀 더 몰아붙여 부족한 부분을 채웠어야 했다. 검후만 아니었어도, 가문을 위해 고생하신 장로님들에게 기연을 줄 수 있었거늘.
“문파는 걱정 말고, 갔다 오너라.”
“인연은 소중한 법이지. 암암.”
“협을 수호하는 정파의 일원으로, 여인을 외면한다면 협객이 아니다.”
장로님들의 덕담이었다. 평소 들어 본 적도 없는 덕담을 이런 식으로 받게 되어 무진은 감개가 무량했다.
그 마음이 진실되기를 바랐다.
‘어서 빨리 나가거라! 훠이, 훠이!’
‘밤마다 삭신이 쑤신다, 이놈아!’
‘네놈만 아니면 살겠구나.’
손자뻘인 무진에게 매일 처맞았더니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나왔다. 나이 먹고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마누라가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조카한테 맞아서 울었다고 어떻게 말하냔 말이다.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애를 건드려서.’
‘이게 다 강 장로님 때문입니다!’
‘아니, 내가 이리될 줄 알았나?’
말썽부리지 않고 한가롭게 얌전히 놀고먹는 녀석을 건드려서 이 지경으로 만든 최고 장로에 대한 장로들의 원망이 컸다. 손자 재롱이나 보면서 말년을 보내려고 했던 계획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평생 게으름을 피우고 살아도 부족한 무진이 본색을 드러내자, 지옥이 기다렸다. 사람이 변하면 주변이 피곤해진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그간의 변화가 다 이 녀석 때문이었구나.’
‘우린 눈뜬장님이었어.’
‘무진이가 우리 문파의 구성이었다니, 썩을!’
차라리 모르고 있을 때는 문파의 밝은 미래에 나름 흡족했었다. 그러나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자 절망이 기다렸다. 문파의 망나니가 알고 보니 문파를 일으킨 일등 공신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여태 무진을 구박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래도 그만 맞고 싶다.
기연이긴 한데, 나이 들어서 조카한테 맞으니 서러움이 백배가 되었다.
“저는 맡은 일을 도중에 관두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관 노사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조금 고되게 다루어도 된다고 했으니, 여기에 수인을 부탁드립니다.”
-수련 도중 탈이 나거나, 죽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마지막에 죽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건 잘못 적은 거 아니더냐?”
“그런 경우는 별로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찍으세요. 설마 죽기야 하겠습니까?”
“그러다 죽으면?”
“어르신들의 평균 수명이 지천명 전후라고 들었습니다. 다들 호상이시네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으니 빨리 찍으라고 무진은 눈짓을 보냈다. 원래 무공이란 그렇다. 치열하지 않으면 성장하지 않는다. 하물며 너무 늦은 나이에 무공에 눈을 뜨셨다. 지금이라도 죽기 살기로 해야, 젊은 녀석들에게 뒤처지지 않는다.
“아니면 제가 남아서 훈련시켜 드릴까요? 아무래도 저보다는 곽 노사가 연배도 맞고 좋지 않을까 싶은데.”
“누가 안 찍는다고 했냐! 어서 찍자고.”
“음, 제 훈련이 마음에 안 드나 보네요.”
“그럴 리가 있느냐. 우릴 위하는 네 마음, 항상 깊이 간직하고 있구나.”
강천명의 발언에 장로들은 헛바람을 삼켰다. 무진이 없는 장소만 가면 밤을 새워 가면서 쌍욕을 하셨던 분이 저리 나올 줄 누가 알았으랴.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변하게 된다더니, 나이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돌아왔을 때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많이 서글플 겁니다. 그럼 제 주먹이 어디로 나갈지 모릅니다.”
“반드시 네가 원하는 경지에 오르마.”
본색을 드러낸 무진은 거칠 것이 없었다.
아는 사람만 환장하게 만드는 인간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답답하게 만들고. 여러모로 피곤하게 만드는 유형이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까웠다.
무진은 동생과 함께 아버지의 방을 찾았다.
“네 성에 차진 않겠지만, 문파의 어른들이다. 너무한 거 아니냐!”
“아버지도 제 성에 차지 않는데, 오랜만에 운동 좀 하실까요?”
“나이 들어서 근력이 빠지면 몸에 좋지 않다고 하더구나. 노년엔 꾸준한 훈련이 필수지.”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이 망할 놈이!
내 아들이지만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이런 녀석이 수년 동안이나 잠자코 지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당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변고가 생기면 부총관과 협의를 하세요. 그러면 알아서 정답을 알려 줄 겁니다.”
“그러마. 한데, 부총관의 전직이 정말 학사가 맞는 거냐?”
“맞는데, 그건 왜요?”
“진정 뛰어나긴 해. 그런데 마치 수라장을 겪은 군사 같았어. 대체 왜 그런 식의 전략 전술을 세우는 건지 도통 모르겠구나.”
“취미 생활입니다.”
뜨끔한 무진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를 무진이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용무길은 적을 죽이기 위하여 최적화된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새로운 전략전술을 가져와서 어떠냐고 물어봤다.
-모든 전략이 상대의 멸살이더군. 타고난 군사다.
‘시대를 잘 타고난 거잖아.’
기발한 전략들이 난무했다. 어떻게 이런 기상천외한 전략을 쓸 수 있을까 되짚어 봤더니 무진은 씁쓸했다. 자신이 그 모든 전략의 핵심이 되어 망나니 춤을 추고 다녔던 것이다.
기실 그런 자들은 평화로운 시대엔 할 게 별로 없다. 살인에 미친 광인이 아니고서야 그런 전략을 평시에 쓰진 않을 테니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유학에 기반을 둔 학자로서 수양이 깊다는 것이다.
삶의 모진 희로애락을 겪으며, 겉으로 드러낼 만큼 얕지 않음을 천운으로 여겨야 했다. 중도를 지키지 않으면 파탄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아수라멸살대계는 꽤 놀라웠다.
‘그거 쓰려면 최소한 동귀어진을 기반으로 해야 해.’
-대신 상대를 완전히 박멸할 수 있지.
‘나는 몰라도, 내 주변은 다 죽을걸.’
-마신교를 멸해 세상을 구하라는 뜻 아니겠나.
‘미친, 그럴 거면 마신교가 득세하는 게 나아.’
-아니면 혼자 감당하거나.
용무길의 새로운 취미 생활이지만 지나치게 극단적이었다. 취미 한번 아주 살벌했다. 생긴 건 고고한 학잔데, 여태 속에 괴물을 숨겨 놓고 살았던 것이다. 그 괴물을 풀어놓은 무진으로선 책임을 져야 했다.
잘못했으면 신기수사가 아니라 광기수사나 멸절수사로 불렸을지도.
그쯤하고.
“흑룡성에서 좀 하는 놈들이 올 거예요.”
“무호와 같은 말을 하는구나.”
“아마 비무를 빙자해서 무호를 죽이려고 하겠죠. 이유는 알 겁니다. 무호 외에는 다들 쭉정이로 볼 테니까. 그다음에 자신들의 세력을 심으면 그만이고.”
“그걸 알면서도 나가겠다고?”
“흑룡성 따위에 애를 먹는다면 제 가르침이 부족한 거겠죠.”
흑룡성주가 직접 오진 않을 테고, 서열 이십 위 내로 멀게 잡았다. 그들이 직접 나선다는 보장도 하기 힘들고.
문제는 마신굔데, 일전의 사건으로 인해 아직은 활보하기 힘들어졌다. 아마 연관성이 없는 자들이 올 것이다.
‘호랑이 간이라도 삶아 먹은 것이냐?’
흑룡성주인 흑천무제 단천경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떤 표정일지.
그런데 신기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지랄맞은 아들이지만,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을 이루어졌다. 그런 아들이라면 흑룡성도 두렵지 않으리라.
“아! 그리고 제갈세가와 산동악가가 협력해서 무림맹을 통해 압박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고를 그리 쳐 대니까 적이 많아지지.”
“그럼 가서 싹 다 죽여 버릴까요?”
“……아니다.”
방금 아들의 표정을 본 강우경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자신이 그러라고 하면, 바로 가서 싹 다 죽일 것 같았다. 그것이 어쩌면 아들의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 한쪽이 아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들의 변화가 이상하리만치 파격적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데 거리끼지 않는 무심함은, 수도 없는 아수라장을 겪어야만 나올 수 있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들은 집에서 나간 세월이 길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아수라장을 겪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저는 아버지를 믿겠습니다.”
“그래, 잘 다녀오거라.”
무진은 육칠과 철호를 데리고 가문을 나왔다. 시간을 지체하진 않았다. 이왕 가는 거, 옥문관을 향해 직선으로 내달렸다.
하아.
육칠은 한숨을 쉬었다.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지?’
***
쫘악!
거침없이 휘두른 손짓에 입술이 찢어지며 선혈이 벽면에 튀었다. 피가 흘러내리고 있음에도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명을 기다렸다.
“분명 잘 감시하라고 했을 텐데.”
“비밀 통로를 확인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손을 썼던 사내는 전체적으로 선이 날카롭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다. 창백한 인상과 위로 솟구친 눈매는 지극히 오만했다. 성향이 고스란히 풍겨 나왔다.
‘이런 곳에 비밀 통로가 있었을 줄이야.’
만약을 대비해서 방 안을 꼼꼼하게 확인했었다. 그런데도 몰랐다면 직계혈족만 알고 있는 비밀 통로일 것이다.
빌어먹을 순혈주의였다.
그것이 사내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귀찮게 하는군.’
대세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손을 쓴 이상,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만의 하나는 언제나 존재했다. 의도치 않은 상황은 원치 않았다.
‘뭘 노리는 거지?’
손을 쓰기에는 늦었다. 방도가 있었다면 진작 손을 썼을 것이다. 내부적으로 끈을 모두 끊어 놨기에 다시 돌아온다면 독방에 갇히는 신세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리다고 가벼이 여기지는 않았다. 영글진 않았으나, 순혈을 타고나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거늘,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순순히 양보하지 않겠다 이거지.’
최대한 순리대로 풀어야 하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싹을 잘라 버려야 했다.
‘차라리 잘됐군.’
밖에서라면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부에선 감시만 할 뿐, 손을 쓰면 의심을 받을 수 있었다. 주요 인사 대부분을 손에 넣었더라도, 원로들의 눈을 의식해야 했다.
“추적대를 보내. 다음은 알겠지?”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이곳은 나의 것이다. 누구도 나의 것을 탐하지 못한다. 그것이 설령 이곳의 주인일지라도.
***
직선이 곡선보다 빠르다는 것은 상식이다. 범인을 초월하여 경지에 이른다고 해도 곡선은 직선보다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가는 길은 정해져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길을 만들기 위해선 평지가 필요하다. 평평하지 않은 길은 길로서 제 역할을 하기 힘들다. 사람들이 바보라서 길을 우회하고 돌아가겠는가. 그 길로 갈 수 없기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보편타당한 진리는 우리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런 상식이 통할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이번엔 좀 심했다.
관통.
말 그대로 직선으로 대륙을 횡단하여 사막에 당도했다. 도중에 거치는 모든 길을 무시하고, 지도에 점과 점을 찍어 그대로 행했다.
하아아아아아!
길게 내쉰 숨에서 검은 먼지가 토해졌다.
헝겊으로 얼굴을 꽁꽁 싸매고 가렸음에도, 입과 코를 통해 들어와 오장육부를 텁텁하게 했던 먼지가 깊게 쌓였다. 한참 동안 기침을 하고 나서야 겨우 숨이 트였다.
후우, 후우!
얼굴은 땀과 먼지에 절어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평범한 세안으로는 본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두꺼운 갑옷이었다. 얼굴의 근육이 먼지로 인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토할 때마다 마른 논바닥처럼 때가 갈라진다.
쩌적, 쩌적!
사람의 형상을 잃어버린 대신, 그 결과는 놀라웠다.
“보름 만에 대륙을 횡단할 수 있다니!”
“우린 기적을 맛보았군요!”
기적은 무슨, 고문이지.
철호와 육칠은 몸소 겪은 이 엄청난 결과물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애초부터 터무니없는 일이었거늘. 이젠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면 된다.
이보다 더 무서운 말이 어디 있겠는가. 인간의 무궁한 잠재력에 감사해야 하나, 심신의 피로도가 극한에 이르렀다. 솔직히 한번은 해도 두 번은 사양하고 싶다.
이번 횡단으로 인내심의 한계를 초월했다.
언제까지 내달려야 할지 모른다는 공포와 매 순간 싸웠다. 포기하면 편하지 않냐고? 그런 말은 누가 쫓아오는지를 모르니까 하는 속 편한 소리였다. 염라대왕도 늦게 달리면 목을 잡고 바닥에 찍을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