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1
021 애들 싸움(2)
“내 이자를 당장 요절내고 말겠어요!”
길길이 날뛰고 있는 아내의 모습에 유천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들이 다치기는 했지만, 대련에 의한 상처였다.
유화와 유경에게 사실관계를 들었다. 천운의 잘못이 컸다. 상인의 가문에서 태어나기는 했어도 무공을 배운 무인이라면 등 뒤를 공격해선 안 되었다.
‘게다가 갈효명은 일류에 도달한 무인일 텐데.’
유천은 갈효명의 실력을 본 적이 있었다. 아내도 그의 검을 꽤 칭찬했었다. 일류 검사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런데도 손도 못 써보고 당했다고 한다.
‘엉망이었지.’
그래서 의문이 들었다.
갈효명은 저항은커녕 검을 뽑지도 못한 채 다리가 잡혀 이곳저곳에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무인의 대결이 아닌 시정잡배처럼 내동댕이쳐졌다.
그렇다 해도 갈효명이 일류 무인이 아닌 건 아니다. 그는 분명 일류 무인이 맞고. 그런 갈효명을 매제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팼다.
상성이 엇갈리거나 방심했다고 쳐도 일류 무인이 그런 식으로 허접하게 당할 수 있나? 이 부분이 걸렸다. 최소 일류 이상이란 소리가 되는데…… 초일류나 절정의 고수일까?
‘그러면 왜?’
송호문이 대문파였으면 이해라도 하지, 청양의 별 볼 일 없는 중소문파에 지나지 않았다. 저 나이에 절정고수인데 소문주의 자리를 동생에게 내어줬다고 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방심했다고 봐야겠지.’
송호문에서도 망나니로 유명한 매제가 하루아침에 절정고수가 되었다고 한다면 아무도 믿지 못할 기사(奇事)였다.
‘그건 그거고.’
유천은 탁자에 놓여 있는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최상급의 백호은침이었다. 선물로서 이보다 좋은 물건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굉장히 찝찝했다.
아버지는 천년삼.
어머니는 야명주.
동생들은 보검.
자신은 백호은침이다.
누가 봐도 차별적인 대우인데, 이걸 가지고 따져봤자 선물에 연연하는 속물임을 자처하는 꼴이다.
그래서 몹시나 괘씸하다.
그 모든 사태를 알고서 벌였다는 의심이 들었다. 하면 망나니가 꾸몄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영특한 동생이 뒤에서 매제를 조종했을 수도 있었다.
그것이 가장 합당해 보였다.
‘아닌 척하면서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버렸던 동생의 복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소문주의 자리를 포기한 것도 보문상단을 노리고 있기 때문일까? 데릴사위로 들어온다면 얘기가 맞아떨어지기는 했다. 천년삼, 야명주, 보검 등등…… 으로 환심을 사려고 했다면 목적은 달성했다고 본다.
후우우!
상념을 깨우는 숨소리가 들렸다.
이영은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원래의 신색을 찾았다. 그녀는 본래 냉철한 성향이기는 하지만 자식에 관해서는 예외였다.
“어쩌려고? 인정하긴 싫겠지만 천운의 잘못이야.”
“알아요.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요. 하지만 제 가문을 건드린 이상 곱게는 못 보내죠.”
“갈효명이 당했어, 쉽지 않을 거야.”
“소룡대회를 위해 가문에서 숙부가 오기로 했어요.”
유천은 아내의 의도를 읽었다.
단순히 아들이 다쳤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를 꺾으려는 것이다. 다시는 상단을 탐하지 말라는.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것이, 몇 시진 전까지만 해도 동생을 가엽게 여겼는데, 이제는 또 아니다.
대련이 있은 지 삼 일이 흘렀다.
무진은 아내와 애들을 데리고 보문상단 일대를 둘러보았다. 아내는 예전에 와봤던 음식점과 시장에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시장에선 태진과 미주가 원하는 물건을 하나씩 사주었다. 미주는 당과살수(糖菓殺手)답게 족족 입에 처넣어 아내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단 거 많이 먹어서 이빨이 썩으면 고생할 걸 알기 때문이다.
새로 익힌 검보의 훈련을 마친 유경과 유화도 합류했다. 근처로 마차를 끌고 소풍 겸 나들이를 즐겼다.
“형부, 그땐 솔직히 좀 놀랐어요.”
“별게 다 놀랄 거리다. 명색이 무가의 자손인데, 그 정도는 기본이지.”
“갈효명은 일류 무인이에요. 기본치고는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일류 무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일류는 아니지. 진짜배기를 만나면 가짜는 실체가 드러나는 법이야. 지금까지 운이 좋았다고 봐야지.”
유화와 유경은 형부를 다시 봐야 했다. 보검을 주었다고 해서 맘이 달라진 것과는 별개였다. 송호문에서 알아주는 망나니라고 해서 언니가 고생하는 줄 알았다.
웬걸, 언니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우리 남편 어떠냐는, 자랑스러운 표정이 쫌 거슬렸다. 알고 보면 둘이 천생배필이었다. 하는 짓이 왜 이렇게 똑같을까.
“언니가 그러는데 요리도 직접 하신다면서요.”
“내가 요리를 좀 해.”
“집안일도 하신다고.”
“누가 하면 어때. 시간 남는 사람이 하면 되는 거지. 가사를 남녀 따로 구분해 버리면 한도 끝도 없고 나중에 분란의 씨앗만 돼.”
유화와 유경은 혀를 찼다.
보통 가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대다수의 사내는 요리와 집안일을 당연히 아내가 해야 하는 일로 치부한다. 그녀들도 그렇게 배워왔고. 형부는 기존의 틀을 부수고 자유로웠다. 애들과도 스스럼없이 친구처럼 대했다.
‘그럼 그때 모습은 뭐지?’
‘아버지한테도 그렇고.’
갈효명을 냅다 패대기칠 때와 아버지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세에서 압도하는 느낌이랄까? 야성적이면서도 강렬했다. 아버지가 움찔하는 걸 몇 번이나 보고 말았다. 그런 모습은 생전 처음이었다. 마치 알려진 절대고수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상념이 너무 멀리 가기는 했다. 절대고수라니, 터무니없는 비교였다.
‘나무꾼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언니만 행복하면 됐지. 살짝 부럽네.’
유화와 유경도 더는 그것에 관해서는 묻지 않았다. 살아가는 방식은 제각각이고 소소하다고 해서 무시할 순 없었다. 행복하다면 성공한 삶이었다.
“오빠가 걱정이긴 해요.”
“사실대로 말했으니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예전에도 오빠는 언니한테 열등감이 있었어요.”
“어쩔 수 없지. 천재 옆에 있으면 불행하거든.”
잘난 동생을 두면 못난 오빠는 고생하기 마련이다. 인간인데, 시기 질투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피를 나눈 가족이다. 선을 넘는다면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어머,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내 아내는 천재니까 편애가 아니라 사실이지.”
무진은 아내를 자랑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 대상이 설령 아내의 오빠라고 할지라도 사실을 뒤로 숨겨 겸손을 떨 필요는 없다고 봤다.
그래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장인어른과 장모님, 형님이 있는 자리에서 아들의 대련과 갈효명과의 일을 사실대로 밝혔다. 무엇보다 아내가 상단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못 박았다. 그 일로 괜히 아내가 상단에 욕심이 있을 거란 의심은 하지 말라고.
“굳이 확언할 필요는 없었어요.”
“아니 해야 해. 오해는 시간이 지날수록 쌓이거든. 하물며 아내는 천재성을 드러낼 거고,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어. 범인인 형님으로선 자괴감만 들겠지.”
“오빠도 그렇게까지 오해하진 않을 거예요.”
“곽가장은 다르잖아?”
무진의 직설적인 물음에 유화와 유경은 말문이 닫혔다. 설마 이렇게까지 대놓고 직설적으로 물어볼 줄이야.
원래 맘에 있어도 이런 껄끄러운 문제는 거론하지 않는 게 정석인데, 형부는 그런 거리낌이 전혀 없었다.
이걸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그러나 전신에서 자연스럽게 퍼져 나오는 여유에 자신들도 모르게 감화되었다.
“곽가장에 대해서 알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대충은.”
그딴 소소한 문파 따위를 알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인사치레는 해주었다. 실상, 무진에게 있어 곽가장은 바람 한 번 불면 날아가 버릴 먼지에 불과했다. 먼지의 알갱이를 일일이 다 세지는 않잖아.
-사람을 먼지 취급하고선 화내지 말라니, 그게 무슨 개똥 같은 논리냐.
‘처맞기 싫으면 개똥 취급당해도 화내면 안 되지.’
-맞는 말이군.
‘난 틀린 말 안 해.’
-개똥 같은 문파는 밟기도 더럽지.
‘근데 비교를 해도 왜 자꾸 개똥으로 비교하냐. 마왕이면 마왕다운 어투를 쓰라고!’
-그러는 너는?
‘됐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다르다고 주장했던 마왕과 전왕이 모처럼 의기투합이 되었다. 그러나 보편적인 개념에서는 굉장히 동떨어져 있었다. 절대강자의 선입견이 작용했다. 이것이 바로 바라보는 수준 차이였다.
‘마신교는 되어야 해볼 만하지.’
-아직 그 정도는 아냐.
‘얼레, 꼴에 출신 문파라고 옹호하는 거야?’
-말 가려서 해라. 해서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어!
‘이것들 왜 활동하지 않지?’
-말 돌리지 말고. 찾아보지도 않으면서 찾는 척하지 마라. 누가 보면 열심히 찾고 있는 줄 알 거 아냐.
‘어차피 올 놈들인데 뭐하러 찾으러 가.’
무진은 아내가 곤란할 수도 있는 문제를 일부러 거론했다. 한 번 곤란한 게 낫지, 두고두고 쌓이면 돌이키지 못한다. 어떤 일이든 시작이 중요하고 대처를 잘해야 했다. 어설프게 마무리를 해 버리면 화근이 될 요소였다.
-그런데 무탈하게 넘어갈까?
‘상인과 달리 무인은 짓밟혀 봐야 자기 처지를 알아. 그전까지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지.’
-그것도 인정.
‘온다면 알게 해줘야지.’
-감추고 살 생각이 없었구먼.
‘내가 언제 감추고 산다고 했어.’
은인자중이 말이 쉽지, 아무나 그렇게 못 산다. 무진이 예전의 잘못을 돌려놓기 위해 애를 쓰고는 있지만, 무림에 속한 이상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칼밥 먹고살 게 뻔한데, 원수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칼은 원한의 연결고리나 다름이 없다. 그 안에서 나만 얌전히 산다고 될 것 같나. 그럴 거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고 산속에 틀어박혀 조용히 살아야 했다.
무진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소풍에서 돌아오자마자 기별이 왔다. 식솔 간의 일이라 보문상단 내부에 있는 넓은 공터에서 만났다. 앞서 장인어른과 형님, 형수님까지 나와 있었다.
그러나 용건은 눈앞에 선 거구의 사내에게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다부진 육체가 무복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곽철웅이라고 하네.”
“강무진입니다.”
곽철웅은 곽가장주인 진천검(震天劍) 곽철용의 동생으로 뇌력검(雷力劍)이란 별호가 붙었다. 곽가장의 대표하는 검수로 제법 명성을 날렸다.
전광검의 성취도 갈효명과는 비교를 하기 힘든 격차가 있었다. 어른과 아이의 수준차라고 하면 정답이었다.
강무진은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왕의 칭호를 받은 그에게 있어 뇌력검이 눈에 찰 리가 있나. 벌레들이 오히려 명성에 연연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꿈틀!
아니나 다를까,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곽철웅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상대의 반응을 좀 보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강호 무림에 무지하다면 이해는 되었다.
무진은 말 돌리지 않았다. 잡것들과 자신의 시간은 엄연히 괴리감이 있었다.
“대련을 원하는 겁니까?”
“그렇네.”
“바로 시작하시지요.”
“이유는 묻지 않나?”
“이유야 뻔하니까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하지 말죠. 무인이 무공을 놔두고 입을 써서야 하겠습니까.”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좋군. 한데, 운이 없군.”
무진과 곽철웅은 바로 비무에 들어갔다. 사전 설명 따윈 집어치웠다. 누가 봐도 뻔한 내용으로 시시비비를 따져봤자 감정만 상한다. 이럴 때는 시원하게 한판 붙으면 그만이다.
“3초 양보하겠네.”
“감사합니다.”
무진은 양보 따윈 하지 않는 성향이라 자세를 취하고 달려들었다. 앞서가는 선봉대로서 전체를 지배하는 전군보(前軍步)를 꺼내 들었다.
선봉장으로서 기세를 꺾는 수준이 아니라, 상대의 군세를 박살 내는 역할을 한다.
파앙!
공기를 찢으며 관통했다.
“……무슨?”
2장의 거리가 단숨에 무력화되어 버렸다. 상상도 못 한 속도에 놀란 곽철웅이 놀라서 검을 휘둘렀다.
안타깝지만, 무진이 더 빨랐다.
전왕 시절 즐겨 사용하던 초인비권(超人飛拳)을 펼쳤다. 방심하여 겉멋 든 자들을 상대할 때 굉장히 효과적이다. 실상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다. 속도만 빠르지, 육신의 궤적이 꽤 크다. 허점을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 있을 테지만, 지금처럼 넋 놓고 있다면 결과는.
퍼어억!
명치를 허용한 곽철웅의 상체가 앞으로 휘어졌다. 강건한 육신과 내공만으로 버티기에는 권공이 한 수 위였다.
크억!
무진은 딱 치기 좋은 위치에 선 곽철웅의 얼굴을 무릎으로 차올렸다.
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