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15
214 이빙제빙
“막호는 무사히 돌아갔으려나?”
“사막에서 태어난 녀석입니다. 염려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매정한 놈, 그래도 같이한 정이 있지.”
“강 대협께선 정이 깊어서 탈입니다. 헤헤헤.”
단답형으로 무뚝뚝하게 대답해 왔던 철호도 육칠과 보조를 맞췄다. 사부는 정 빼면 시체라고 아부를 마다하지 않았다. 사회생활 못 할까 걱정되었던 철호가 이렇게나 많이 바뀌었다.
인생의 융통성을 배운 순간이 바로 삶의 전환점이었다. 자고로 모난 돌이 정을 맞듯,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면 단명하기 마련이었다.
‘이 인간들이, 말이면 단 줄 알아!’
정이 깊어서 천에 달하는 도적들을 모조리 다 도륙하냐고!
사람답게 죽이기라도 하면 이해라도 하지. 흔적은커녕, 전부 잿더미가 되었다. 죽어서 염라대왕에게 갈 영혼조차 남지 않았을 것이다. 불타 죽은 것도 억울할 텐데, 다들 팔열지옥행이었다.
‘자기들도 명색이 고수면서, 추하잖아!’
함께 싸워 봤기에 북궁혜는 육칠과 철호를 경시하지 못했다. 그들의 실력이면 북해에서도 명성이 자자할 것이다.
나이를 고려하면 철호는 신성 중에선 최강자의 반열이거늘. 그런 자들이 입에 발린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고수로서의 위신과 체면 따윈 내동댕이친 채.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어?
거북한 시선이 느껴졌다.
무진이 보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러냐? 혹, 나를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보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강 대협처럼 다정한 사람도 없어요!”
“그래, 사람이 솔직해야지.”
“아무렴요. 헤헤헤!”
다짐을 지키려면 일단 살고 봐야잖아.
빌어먹을 현실에 치가 떨린다.
북궁혜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맞지 않으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무인으로서 회의감이 들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무인은 스스로에게도 당당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 말을 북궁혜는 항상 마음에 새겼거늘.
가공할 폭력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술도 안 처마셨는데, 자기도 모르게 입에 발린 말이 술술 나왔다.
‘난 이런 사람이 아니라고요!’
북해제일미 이전에 냉화라고 불릴 정도로, 북해의 얼음꽃으로 대쪽 같았던 북궁혜였다. 하지만 세간의 평가 따윈 이 사람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대체 뭐 하시는 분이세요?’
여태 같이 붙어 다녔지만,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렇게나 자기과시욕이 강한 사람이 소문조차 나지 않았다니, 상식적이지 않았다. 어딘가에 있더라도, 흉험한 소문이 나돌아야 마땅했다.
‘강해도 너무 강하잖아.’
육칠과 철호의 과도한 반응이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젠 너무나 잘 이해가 되었다. 저러지 않으면 처맞기 일쑤였다. 무위가 저렇게나 강하면 체면을 따지거늘, 저 사람은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꼭 짚고 넘어갔다.
속이 좁은 데다가 천하무쌍의 성격파탄자였다.
그런데 또 이상한 면이 있다.
처음 만난 사람인 막호를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그가 다치지 않도록, 오는 동안 배려했다. 돌아가는 길에 금 한 냥을 수고비로 더 주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거야?’
까놓고 말해서 막호 같은 우락부락한 사내보다 자신처럼 아리따운 여인을 대우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처음 보는 길잡이보다 취급이 박하냐고요.
그녀로선 많이 억울했다.
아버지가 입마에 든 이후로 대접이 소원해지긴 했어도, 무진처럼 대놓고 막 대하진 않았다.
‘무서워서 말을 못 하겠어!’
북궁혜는 속상한 감정과는 별개로 솔직하게 밝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말끝마다 죽고 싶냐고 떠벌렸던 기억이 생생했다. 말로만 하는 인간이라고 하기엔 도적들을 도륙했던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프다고 했지?”
“아, 예. 그래요.”
왜 이래? 뜬금없이.
아버지의 상태를 물어본 무진의 의도가 수상했다. 그런 어마어마한 무력을 가지고도 알려지지 않았다면 흑막의 수장이나 암중 세력의 주인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런 자가 의미 없이 묻지는 않을 터.
혹, 궁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북궁혜는 신중하게 답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자칫 북해빙궁이 암류에 휩쓸릴 수도 있었다. 이 인간이라면 그리하고도 남을 힘을 가졌다.
“이제 어쩔 거야?”
“예?”
“아버지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으려고 사막을 횡단한 거잖아. 혹,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턱대고 온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서 어쩌려고?”
“그녀를 설득해서 궁으로 데려갈 거예요.”
“그래, 해 봐.”
“예?”
“설득해 보라고. 할 수 있으면 데려가.”
무진의 수락에도 북궁혜는 갈피를 못 잡았다.
진의가 무엇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크크크크!
흑막은 무슨, 의문은 곧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정신을 차린 미친년이 강한 적의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그제야 무진이 순순히 허락한 연유를 깨달았다.
북궁혜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에도 불만을 토로하지 못했다. 의도가 불순하긴 해도 기회였다.
“병든 아비를 위해 미친년을 설득하겠다, 그 효심은 본받아야 마땅해. 그렇지 않냐?”
“그렇습니다, 강 대협!”
“지당하신 말씀이세요, 사부님!”
효를 중시하는 무진은 북궁혜의 효심에 살짝 감동했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부모를 위해 몸을 바치는 자식은 흔치 않았다. 그 효심을 본받아 천금 같은 기회를 주었다.
“돗자리 펴라.”
“예.”
거리를 벌리고 육칠과 철호는 신속히 돗자리를 폈다.
두둥!
북궁혜는 의도치 않게 이서정과 마주했다. 초면이라 굉장히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크크크크크!
이서정의 티 없이 맑은 순백의 미소에 북궁혜는 골이 지끈거렸다.
대체 어떻게 설득하라는 거야?
대화가 가능해?
대치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무진의 뻔뻔함에 북궁혜는 치를 떨었다. 저 인간이 허락할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입마를 치료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되든 안 되든 일단 시도는 해 봤다.
“저.”
크크크크크!
그럼 그렇지.
아니나 다를까, 말을 걸어 보기도 전에 이서정이 광분하여 날뛰었다. 자신을 기절시킨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적의가 다분했다.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북궁혜를 호의적으로 보지 않는 건 순리였다.
스왁, 채채채챙!
이서정의 새하얀 검기가 부챗살처럼 펴지며 북궁혜의 신체를 노렸다. 위험을 감지한 북궁혜는 북천신검을 꺼내 들어 요소요소 찔러 들어오는 검기를 간신히 막아 냈다.
후아앙!
순식간에 십여 합이 지나갔다.
같은 계열의 빙공이 부딪치자 공간에 서리를 수놓았다. 한광이 번뜩일 때마다 사막에 눈바람이 날렸다. 처연하고 아름다운 백광의 향연이 이어졌다.
타앙, 처어엉!
검첨, 검신의 부딪침이 이어지는 광경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안에 서린 한기는 아름답다고 볼 순 없었다. 매서운 기운이 점차 위력을 과시했다.
후아앙, 우우웅!
승부가 길어지자, 이서정의 검기가 검강으로 변했다. 위기를 감지한 북궁혜는 북천신검의 이능을 꺼내 들었다.
전력이 충돌했다.
크윽!
그러나 경지의 차이가 현격하다.
적풍사와 흑풍사를 홀로 밀어붙였던 이서정이었다. 정신 나갔다고 해도, 북궁혜가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잠시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북궁혜로선 설득은커녕 살아남기에도 바빴다.
일단은 물러서서…… 헙!
“설득 못 하나? 그럼 하는 수 없지.”
무정하리만치 얄미운 무진의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북궁혜로서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입마에 걸린 아버지를 구하려면 빙정의 기운이 필요했다.
그게 아니라면, 북해전설인 북해성의 북천신결이라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 넓은 대륙에서 북천신결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빌어먹을 인간!’
인성의 끝판왕을 보고 있었다.
무진을 만나고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어째서 그때 외면하지 않고, 홀로 가지 않았을까?
후회해도 늦었다.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북궁혜는 빙백수라신공을 극한으로 끄집어내어 북천신검에 불어 넣었다. 완성되지 않은 빙백수라신공은 그 자체로도 위험하지만, 북천신검의 요력과 결합하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아버지를 구하고 말겠어!’
이서정과 북궁혜의 대결은 극단으로 치달아 갔다.
한천백룡공이 자리를 잡아 가는 이서정이기에 실력만 놓고 보면 북궁혜보다 훨씬 앞섰다.
그럼에도 대결은 치열했다. 한계를 초월한 북궁혜의 간절함과 북천신검이 대등한 대결을 이끌었다.
꽈아앙, 솨아아아아!
빙검강과 빙검기의 격돌이 눈 폭풍의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사방으로 한기가 퍼져 나가며 사막을 빙판으로 변화시켰다.
“시원하다.”
영향이 무진에게까지 오진 않았다. 육칠과 철호가 견고하게 막아서며 빙공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너무 막았잖아.”
“조절하겠습니다.”
꽉 막으면 덥고, 방심하면 차가웠다.
무진은 적당한 상태를 원했기에 철호와 육칠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 미묘한 간극을 조절하기가 완전한 차단보다 힘들었다.
‘요구 조건 한번 까다롭네.’
‘사부는 한서불침이잖아요.’
한서불침은 맞지만, 그렇다고 더위나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무인에게 있어 감각은 중요하다. 더위도 추위도 감각의 일종으로, 아예 느끼지 못하는 것과 조절하는 것은 다른 영역이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면 오히려 무인으로서 위험했다. 감각은 그만큼 섬세하고 중요한 요소였다.
꽈아앙, 쿠다다당!
무리한 공력의 운용과 요검에 의지한 북궁혜의 한계가 엿보였다. 더더욱 강력하게 미친 이서정이 빙천검예의 빙폭강을 꺼내 들었다. 간신히 막아 냈지만, 북궁혜는 모랫바닥을 사정없이 굴러야 했다.
데구르르르!
빙공을 중첩하여 폭화하는 빙폭강을 막아 내긴 역부족이었다. 재차 빙폭강을 펼치자, 북궁혜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안 돼!’
이대로 당할 수 없는 오기와 간절함이 있었다. 여기에 내몰린 억울함까지 더해졌다.
번쩍!
그 순간 북천신검이 요사한 백광을 발하며 북궁혜와 혼연일체를 이루었다. 눈빛이 한기를 가득 머금은 한광을 번뜩였다. 동공에 초점이 사라지면서 완전한 백안(白眼)을 이루었다.
크크크크크!
크크크크크!
이런, 둘 다 미쳤네.
돗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무진은 광년들을 향해 쇄도했다. 싸우고 토해 내다 보면 깨닫고 정신을 차릴 줄 알았다.
같은 계열이니까, 깨닫는 바가 있을 거란 기대를 했거늘.
이독제독을 모방한 이빙제빙의 수였다.
그런데 그냥 빙년이 되었다.
-네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말 이상하게 한다? 너도 동의했잖아.’
-난 아무 말 안 했다.
‘침묵은 긍정이지.’
통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제법 그럴싸한 방법 아니었나? 나름의 합리적인 요건을 제시했는데 일이 요상하게 돌아갔다.
가급적이면 이 방법은 나처럼 고상한 사람으로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쓰려고 했거늘.
‘이게 다 너희들이 설득하지 못해서 그런 거다.’
-어디서 되지도 않는 소리를! 넌 처음부터 이럴 목적이었잖아.
‘어허, 같은 왕끼리 이러지 말자. 이러면 같이 죽는 거야. 아니구나. 넌 이미 뒈졌지.’
-난 혼자 안 죽는다!
마왕의 강인한 의지에 무진도 조금은 움찔했다.
늘 입버릇처럼 ‘나 갈 때, 반드시 너도 데려가겠다.’고 했었기에. 마왕도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추잡하게 그러지 말자.’
-널 만난 이후로 그딴 거 신경 안 쓴다.
‘마왕답게 굴어.’
-너나 전왕답게 굴어라.
언쟁은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마왕이 같이 죽자고 달려들어도 골치 아프다. 그건 예상한 답안지가 아니었기에 무진도 당혹스러웠다.
우우우웅!
마왕만 따로 소멸시킬 방안이 있나 고민하는데, 눈치챈 마왕이 지랄하기 시작했다.
크크크크!
크크크크!
남은 심각한데, 이 미친년들은 왜 웃고 지랄이야.
얼레.
공동의 적을 만난 것처럼 적의가 다분했다.
이년들이 돌았나.
미치고 나니 공동의 적이 생긴 모양이다. 무진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자기들을 위해서 빙정의 위치를 알려 주었고, 아버지의 병을 치료한다고 해서 데려다주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냐?”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안 그래?
대승적인 차원으로 무진은 공평하게 주먹을 뻗었다. 은혜를 모르는 년들에겐 매가 약이었다.
뻐억, 꽈당!
뻐억, 쿠덩!
아까는 오른쪽을 날렸으니, 이번엔 왼쪽을 날렸다. 그래야 좌우의 균형이 맞았다.
비대칭은 건강에도 좋지 않았다.
바르르르!
네 개의 다리가 모래에 처박혀 경련을 일으켰다. 숨구멍이 막힐 뻔하자, 육칠과 철호가 그녀들의 다리를 잡고 뽑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러게, 왜 미쳐서는.’
미쳐서 날뛸 대상이 잘못되었다.
헙!
육칠과 철호는 기겁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본격적으로 손목을 푸는 무진을 보고 육칠과 철호는 신속히 두 여인에게서 떨어졌다.
“깨워야지.”
“아.”
그녀들을 깨우고 육칠과 철호는 재차 멀찍이 벗어났다. 같이 있으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좋지 않았다. 보고 있으면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무지하게 힘들었다.
크크크크크!
크크크크크!
역시 한 방으론 안 되네.
정신 못 차렸으면 차릴 때까지 도와주어야겠지.
하늘에 천명하는 바이다. 이는 전적으로 너희들을 위한 사랑의 주먹, 즉 애권(愛拳)이다.
빠악, 꽈당!
빠악, 쿠덩!
무진은 좌우를 아끼지 않고 주먹을 베풀었다. 그녀들의 정신병을 낫게 해 주려는 순수한 의도였다.
바르르르!
바르르르!
멀찍이 떨어졌던 육칠과 철호는 신속히 다가가 그녀들의 다리를 잡고 모래에서 뽑았다.
“이 방법이 맞겠지?”
“예?”
“맞겠지, 뭐.”
“아니면요?”
“맞을 거야.”
무진의 확신에 육칠과 철호는 절대 미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서정과 북궁혜는 의도치 않게 미쳤지만, 무진은 정상적인 척하는 미친놈이 분명했다.
후자가 훨씬 무서웠다. 의식을 잃었다고 안심해선 곤란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처맞고 있을 테니.
‘빨리 정신 차리라고!’
맞아 죽고 싶지 않으면.
이래서 병이 나면 의원을 찾는 거다.
의원 자격도 없는 인간이 신념을 가지면 이렇게나 무섭다. 모호하든 말든, 자기가 원하면 밀어붙이는 인간 앞에선 가련한 처지일 뿐이다.
“깨워.”
“예.”
그렇다고 해서 육칠과 철호는 불만을 토로하진 않았다. 부리나케 그녀들을 깨우고, 멀찍이 거리를 두었다. 자신들에게만 불똥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안전제일.’
‘보신최고.’
***
소나기처럼 퍼붓는 권강의 세례, 뇌기를 머금어 천둥이 치는 듯 굉음이 울렸다. 중구난방으로 궤적을 예측하기 힘들지만, 빠르면서도 정확했다.
슈슈슈슈, 쩌어어어어엉!
빛의 번쩍임은 직선으로 나아갔지만, 실제 타격은 왜곡되었다. 궤적이 순간적으로 비틀려 전혀 다른 지점을 노린 것이다.
천뢰신권의 천뢰이격이었다.
비틀어진 틈을 노리는 수법인데, 이를 구뢰신과 결합하여 아홉 개의 나락을 선사했다. 전부 비틀지 않고, 순간순간 정석과 왜곡을 섞었다.
파스스스!
나락이 폭사하면서 뇌기가 공간을 태웠다. 뿌연 연기가 발생하며, 타는 듯한 열기가 발생했다.
엉망진창이 된 공간에서 노인이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허허허, 할아비를 죽일 셈이더냐!”
“그런다고 할아버지가 죽겠어요?”
“나도 이젠 늙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아닌 거 알거든요.”
남궁연화는 할아버지의 강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십성의 천뢰기를 사용했음에도 할아버지의 공간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것도 검이 아닌 권으로서. 신주이십일강의 이름값을 되새겼다.
‘그 자식은 어떻게 한 거야?’
할아버지의 제공권을 손쉽게 뚫고 들어가 일격을 가했다. 그 당시의 충격은 여전히 잊히지 않아 밤마다 그녀를 괴롭혔다.
“녀석을 생각하는 거냐?”
“아니거든요.”
“맘이 가면 거리는 중요하지 않지.”
“아니라고욧!”
도끼눈을 뜬 손녀의 광기에 검제도 그쯤 했다. 놀리는 재미가 있기는 한데, 요즘 들어 굉장히 흉험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예민하다고 해야 할까?
남궁연화는 속내를 밝혔다.
“그 자식은 너무 강해요.”
“그렇지.”
“제가 따라갈 수 있을까요?”
“못 하지.”
“저, 할아버지 손녀예요.”
“녀석, 맘을 너무 쓸 필요는 없다. 지금 강하다고 해서 앞으로도…… 크흠. 너는 이미 그 나이를 뛰어넘었다. 조바심은 성장에 독이 되니, 너만의 길을 묵묵히 정진하면 반드시 길이 열릴 것이다.”
검제도 어지간하면 손녀의 의지를 북돋아 주고 싶지만, 무진은 논외의 대상이었다. 신주이십일강의 누구도 그 녀석을 이긴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하물며 무진은 젊었다.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옆에서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범인은 따르지 못할 영역이지.’
무진과 같은 경지에 이르면 심상만으로도 무공은 진일보할 수 있었다. 범인의 상식으로 무진을 이해해선 안 되었다. 그 나이에 초월적인 경지에 이르렀다면 자신만의 철칙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연화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진 않다만.’
무진을 따라나선 후 돌아온 손녀는 완전한 강의 경지에 발을 들였다. 어떤 훈련을 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한데, 물어볼 때마다 손녀가 신경질을 부렸다.
“그 자식이 그러더라고요, 자기 동생 어떠냐고.”
“그 정도면 아주 좋다만.”
“여자가 많아요.”
“저런. 하지만 고민할 필요 없느니라. 네게 정략적인 결혼을 원할 만큼 가문은 약하지 않단다.”
검제는 손녀가 가문을 위해 정략적인 선택을 하길 바라지 않았다. 사랑 없이 하는 결혼이 반드시 불행하다고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상처받을 가능성이 컸다. 죽고 못 살아 혼인을 해도, 부부는 또 다른 삶이었다. 평생을 아껴 주며 백년해로하려면 천운이 닿아야 했다.
“그렇다면 제 맘대로 할게요.”
“그 녀석은 포기하거…… 크흠. 그만하마.”
쌍도끼눈에 검제는 고개를 돌렸다. 무진하고 지낸 시간이 많아지더니, 온순했던 손녀가 독이 잔뜩 올랐다. 이리되니 누가 됐든 손녀와 혼인할 녀석이 걱정되었다.
내 손녀지만, 사내 잡아먹을 상인데, 쩝!
“취선 할아버지랑은 연락되는 거죠?”
“연락은 된다만, 왜 그러느냐?”
“그 녀석이 그러던데요. 제가 아주 좋은 먹잇감이라고.”
“이놈이 감히!”
그때만큼은 검제도 순수하게 분노를 드러냈다. 사이가 좋다고 해도, 해선 안 될 말이 있었다. 남의 집 귀한 손녀에게 할 말인가? 무진의 인성을 되새기게 했다.
“인성은 최악이라도, 틀린 말은 아니에요. 제가 할아버지의 역린은 맞으니까요.”
“안 된다.”
“저도 그러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최대한 조심할게요.”
“마음을 정했구나.”
“제가 정하고 말고가 있나요.”
단순히 무진의 말 때문은 아니었다. 남궁연화도 자신의 위치를 체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가문 밖으로 나가지 않으며 몸을 사렸다.
하나,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상대는 아직 꼬리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는 현실이었다.
이런 때일수록 몸을 사리고만 있다가는 적의 의도에 끌려다닐 수 있다. 끌려다니게 되면 무수히 많은 변수를 방어해야 한다. 공격보다 방어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을 가진 채 살 순 없다. 긴장이 무너졌을 땐 한없이 나약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더는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무진에게 화를 내듯 언성을 높였지만, 실상은 무기력했던 자신에 대한 화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나 무진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의 말대로 온실 속의 화초는 강해지지 못한다. 도전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철저히 준비하고 나서는 편이 나았다.
“물러서지 않을 셈이구나.”
“저도 무인이에요.”
검제도 더는 손녀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무인으로서 자신의 길을 간다고 하는데, 그 앞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하나, 손녀의 각오는 각오고, 자신은 손녀를 지켜야 했다. 이미 아들 하나를 잃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자존심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