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19
218 내 알 바 아니잖아(1)
솨아아아아!
반경 오십 장에 달하는 공간이 순식간에 얼어 버렸다. 북풍한설의 대지로 변했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무공을 익혔다고 해서 다가갈 수 있는 영역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닿기만 해도 얼어 버리는 극빙의 영역이었다. 물러서지 않았다면 눈 폭풍에 함몰되어 냉동인간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 정도로 극한의 지대로 바뀌었다.
자유자재로 자신의 영역을 완성하여 최적화를 이루었다. 한천백룡공의 극존 빙룡무극에 이르렀다. 십성을 달성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위력은 이성을 잃었을 때 발휘되었던 빙룡무극과 차원이 달랐다.
“거봐, 되잖아.”
“쉽게 말하지 마세요!”
기뻐하고 또 기뻐해야 마땅했다. 한 단계도 아닌 무려 세 단계를 단숨에 뛰어넘었다. 자고로 경지에 이르려면 재능을 겸비한 노력을 기반으로 하여 깨달음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무인으로서 강해질수록 앞을 가로막는 단계의 벽은 두껍고 높아진다.
이서정은 자신을 가로막은 단계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랬다면 빙정을 얻기 위해 사막을 찾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 단계를 뛰어넘어 작금의 성취를 이루었으니 사부님도 기뻐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순탄했느냐고 물어본다면?
이서정은 단호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정확히 아흔하고도 여덟 번이었어요!”
“뭘 그런 걸 다 숫자를 세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면 되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갈 생각 마세요! 아흔여덟 번이나 기절했다 일어난 제 심정을 아시냐고요!”
“나야 모르지. 알아야 하냐?”
와, 인성!
말문이 막히는 것은 이서정만이 아니었다.
듣고 있던 북궁혜, 육칠, 철호도 헛바람을 삼켰다. 아흔여덟 번을 빙정에 먹혔다, 돌아왔다를 반복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녹록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을 깨우는 방법은 매타작이었다. 빙혼이 빠져나가지 못하고는 배기지 않도록 두들겼다.
‘모질게도 두들겼지.’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어.’
‘사부는 권공의 화신이 분명해.’
경악, 감탄, 불신이 맴돌았다. 그렇게 맞고도 여태 살아 있는 이서정이 대단했고, 그렇게 때리고도 또 때리는 무진도 지독했다.
인정사정없이 여인의 육체를 두드렸다. 어설픈 각오는 통하지 않았다. 빙정이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양보한 것만 봐도 독종들이었다.
“약간 어설프지만, 이제는 제법 검후의 모습을 갖췄어.”
“칭찬하지 마세요. 저 화났거든요.”
“화나면 풀어야지. 정식으로 상대해 줄까?”
“……됐거든요. 더는 싫어욧!”
감정 표현을 극도로 절제했던 이서정이었다. 지금처럼 언성을 높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무진을 만난 이후로, 희로애락을 폭풍처럼 겪고 있었다. 감정이 풍부해지기는 했는데, 성격이 좋아졌다고 하기엔 모호했다.
“아~~~! 좀만 가다듬으면 완벽한데 말이야.”
“아쉬워하지 마세요, 제발!”
이서정의 성취는 겉으론 완벽해 보이나 실제로는 약간 어설프다. 우격다짐으로 경지를 후다닥 넘어서인지 몰라도, 같은 경지에 이른 자들과 견주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쯤에서 멈추는 것은, 빙공의 특성 때문이다. 같은 성취를 이루어도 빙공이 일반적인 무공에 비해서는 상성상 강했다. 그것마저 뛰어넘은 자들이라면 아무 의미 없겠지만, 그런 자들이 흔치는 않았다.
가닥을 잡았으면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무진은 시간을 끌지 않았다.
“이제부터 한껏 날뛰어 보자고.”
“꼭 해야 해요?”
“왜 이래, 머리에 꽃 달고 다 베어 죽였으면서.”
“그만 놀려요!”
머리에 꽃을 단 채로 돌아다녔다는 사실에 이서정의 얼굴은 민망해서 붉게 상기되었다. 마지막에 상대했던 도적단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가자.”
-그쪽 아니다.
무진은 가던 길에서 역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전히 무진은 길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달, 별, 구름, 지형을 보고 방향을 정하지 않았다. 순전히 마왕의 안내를 철저히 따랐다.
-최소한 배우는 척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척을 할 바엔 하지 않는 게 효율적이잖아.’
어차피 하는 시늉만 해 봤자 익혀지는 것도 아니고. 무진은 시간 낭비를 할 바엔 마왕을 전적으로 믿었다.
-날 믿지도 않는 놈이.
‘길잡이로선 네가 최고야.’
달갑지 않은 칭찬이었다. 마왕은 투덜대면서도 방향을 정확히 잡았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겐 현지인처럼 능숙해 보여 이상할 수도 있었다.
이는 혈제를 죽이고 얻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기억을 기반으로 하기에 사막의 지형이 어렵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혈제의, 지형지물을 파악하는 능력은 탁월한 듯했다. 더욱이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꽤 쏠쏠했다.
길을 잃고 미아가 될 우려는 제법 덜었다. 무진은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이것도 제법 짭짤하겠지.’
-적당히 하시지.
빙정을 넣어 둔 상자가 의외로 요긴한 가치가 있었다. 당장은 내어 놓지 않기로 했다. 마왕에게 해석을 맡겨 놓은 상태였다. 틈틈이 익혀 볼 요량이다.
“저기요.”
“왜?”
북궁혜가 뚱한 얼굴로 물었다. 한시가 급한 와중에 시간을 끌고 있다는 조급함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든 생각은 자신의 흐릿한 존재감이었다.
“저는 뭘 할까요?”
“입 닥치고 얌전히 따라오기나 해.”
“저도 할 수 있어요.”
“넌 가만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무진의 시큰둥한 태도에 북궁혜는 분한 감정을 속이기 힘들었다. 성의를 보였음에도 이렇게나 사람을 무시해도 되나 싶었다. 그는 자신에게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하는 일이라고는 게르에 검을 묶는 일이 전부였다. 하다못해 육칠과 철호는 훈련이라도 봐 주고 있었다. 그런데 북해칠성검을 보는 데서 열심히 펼쳤음에도 자신에겐 시선도 주지 않았다.
북해에선 북해칠성검을 보려고 하는 자들이 수두룩했었다. 이렇게 천대받을 만큼 허접한 무공이 아니었다.
“저는 병풍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그래, 맘대로 살아.”
“제가 맘에 안 드는 것은 알아요. 그렇지만 성의를 봐서 가르침을 줄 순 있잖아요.”
“그것도 나름이지. 난 쓸데없는 일에 시간 투자 안 해. 아, 이런 걸 발기부전이라고 하지, 아마.”
얼굴이 붉어진 북궁혜였다. 이 사람이 지금 날 놀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비인부전이다.
무진은 마왕의 뒤늦은 수정에 미간을 찌푸렸다.
“크흠, 웃자고 해 본 소리다. 자고로 비인부전이라고, 능력이 안 되면 매달리지 말아야지.”
대놓고 무시를 당하자 북궁혜는 오기가 발동했다. 반드시 무진의 눈에 들고야 말겠다는 오기.
북해에서도 오늘처럼 존재감 없는 귀신 취급을 당하진 않았다. 자신은 북해제일미이기 이전에 무인으로서 능력을 검증받았다.
‘안됐지만, 유명세는 중요하다.’
-잠재력은 나쁘지 않다.
‘잠재력은 잠재력일 뿐이야.’
-그건 그렇지.
무진은 북궁혜의 잠재력을 기대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미래의 명성에만 기댔다.
이서정도 그렇고 철호도 그렇고. 둘 다 미래에 마신교와 대적할 명성이 자자한 무인이 된다. 그에 반해 북궁혜는 들어 보지 못했다. 미래의 무명에게 과거를 기대하는 병신 같은 짓은 원래 안 하잖아.
가족이라면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노력하겠지만, 북궁혜에게 심력을 쏟을 만큼 한가하진 않았다. 그녀가 강해지든 말든, 대세엔 지장이 없었다. 혹, 기연을 만나 잠재력을 각성한다면 그땐 돌아봐 줄 용의가 있다.
‘이래야 안목이 좋은 줄 알지.’
-그건 사기다.
‘억울하면 회귀하라고 해.’
-네놈과 회귀하지 말았어야 했다.
‘웃기고 있네.’
마왕은 회귀해도 복수하기 글렀다. 녀석에게 심어진 근본적인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저항은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상태에선 대적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심산유곡에 숨어 사는 편이 이로웠다. 마왕으로선 무진과의 회귀가 반드시 필요했다.
“부지깽이 들고 설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계획 틀어지면 가만 안 둔다.”
“……알았어요(이익)!”
의도치 않았지만 북궁혜와 북천신검이 대동단결했다. 공동의 적에게 인정받기 위한 작전상 타협이었다.
***
방 안에 고기 위주로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그 앞에서 고개를 조아린 자의 태도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요리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나쁘지 않군. 그보다 계집은?”
“곧 대령하겠습니다.”
“상태가 좋아야 할 거야.”
“대인의 고귀한 취향에 맞으실 겁니다!”
“그래야지.”
그는 예를 차린 후 방을 나섰다.
살기 위해 몸을 사리며 굽신거리는 자는 흑풍사 서열 구위 파사랍이었다. 야율제가 주력을 이끌고 출정한 이후로 그는 흑풍사의 본채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괴인이 홀로 찾아왔다. 주력이 빠졌다고 해도 본채에는 족히 삼백의 형제들이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제압하거나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다.
웬걸.
그의 일수에 수십 명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죽어 버렸다. 어떻게 손을 썼는지도 모른 채 형제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가공할 일수에 모두가 얼어 버렸다. 그러나 형제를 잃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어떻게든 복수를 하려고 했지만, 또다시 수십 명이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죽었다.
경천동지할 고수였다.
흑풍사의 주력이 돌아오지 않고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물며 그는 혈궁의 혈패를 가지고 있었다. 혈궁에서도 혈패를 가진 자는 열을 넘지 않았다.
파사랍은 살기 위해 바짝 엎드렸다. 흑풍사는 혈궁의 지배를 받진 않지만, 감히 저항하진 않았다. 사막에서 혈궁은 법이나 다름이 없었다.
별호는 모른다. 그저 희천산이란 이름만 알려 줬을 뿐이다. 그는 본채를 비운 대형의 방을 차지한 후 주지육림을 즐겼다. 혹,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는 살육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와 강제로 동침한 계집 중 절반은 정신이 나가기까지 했다. 변태적인 성향과 살육의 향기를 풍기는, 그야말로 사신과도 같은 자였다.
까아악!
방에서 계집들의 까무러치는 비명이 들렸다. 하나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하루에도 두세 명을 갈아 치우기에 계집을 수급하기도 마땅치가 않았다.
부우우웅, 뎅뎅뎅뎅!
계집을 집어넣고 방에서 나오자, 본채에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파사랍은 어찌 된 연유인지 살피기 위해 건물에서 나왔다.
솨아아아!
밖으로 나오자 파사랍은 한기를 느꼈다. 곧 저녁이 다가오기는 하지만,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의 기운이 남아 있을 시각이었다. 불어닥친 한기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솨아아, 꽈아아앙!
순백의 새하얀 기운이 폭발하여 사방을 북풍한설의 지대로 만들어 버렸다. 눈 폭풍에 갇힌 형제들은 저항은커녕 도망도 못 친 채 얼어붙었다.
쩌저저적!
순식간에 얼어붙은 형제들은 몸에 균열이 가더니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붉은 선혈은 흐르지 않았다. 고스란히 얼어붙은 채 죽음마저 잊었다.
“……이게 무슨?”
예상을 상회하는 현실과 마주하고 있었다. 본채는 돌산이 분지처럼 되어 있어 외부의 침입을 막기에 적합한 천연 요새였다. 그러나 침입자는 순식간에 안으로 치고 들어와 본채 안을 얼음 지대로 만들고 있었다.
대체 누구일까?
의문은 곧 해결이 되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의 중심에 검을 든 여인이 있었다.
얼굴은 낯설지만, 머리 위에 장식처럼 달린 눈꽃은 그녀의 정체를 증명해 주었다.
“……빙백마녀?”
그녀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난단 말인가?
본채의 주력은 물론, 적풍사와 혈궁의 추적을 받고 있었다. 그들의 추적을 물리치고 여길 찾아오다니, 불가능한 현실과 마주한 듯했다.
솨아아악!
하나, 그녀가 보여 주는 신위는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일검을 휘두를 때마다 수십의 형제들이 동상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알려진 것보다 강하다!”
빙백마녀는 절정의 후반에서 초절정의 초입으로 보고 있었다. 그녀가 익히고 있는 빙공의 특성으로 여태 잡히지 않았다고 봤다.
그런데 그녀는 완전한 형태의 검강을 검에 두르고 있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형제들은 물론, 건물까지 두 동강이 났다.
크크크크!
하물며 미치기까지.
하긴, 미치지 않고서야 본채까지 찾아와서 난장을 까진 않겠지. 미친년을 건드리면 어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광경이었다. 자신의 목숨 따윈 개의치 않는 광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