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3
023 이서정(1)
“일어나셨군요.”
“꼴이 말이 아니야. 가문엔 연락했나?”
“하지 않았습니다.”
“잘했네.”
곽철웅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데 보름이 걸렸다. 의식을 회복하고 온몸에 새겨진 흔적이 고통으로 남았다. 대결을 복기해봤자 남는 게 없었다. 그냥 일방적으로 얻어터졌다. 살아생전 겪어 보지 못한 최악의 경험이었다.
인정해야 했다.
“절정고수였어.”
갈효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진을 떠올릴 때마다 처맞은 곳이 이곳저곳 쑤셔왔다. 다시 하면 그래도 버틸 수는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곽가장의 서열 삼위 안에 드는 곽철웅 장로조차 감당이 되지 않았다. 무진에 대한 재평가는 물론, 송호문에 대한 평가도 달리해야 했다.
“나가 보겠다.”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이제 겨우 의식을 회복했다. 워낙 강건한 육체의 곽철웅이라도 당분간은 조심하는 편이 이로웠다.
“자네도 나를 무시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몸이 쑤시기는 해도 내상을 입지는 않았다. 곽철웅은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남아 있는 흔적들은 뼈마디를 고통스럽게 했다. 뚜득!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막혔던 혈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놈은 어디 있나?”
“돌아갔습니다.”
“망신을 주고 사라졌다 이거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천운을 보시면 아실 겁니다.”
맘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찾아가고 싶으나, 곽철웅은 일단 조카가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훈련 중인 운이를 보았다.
응?
전광검이 분명했다.
한데, 다르다.
보폭, 검로, 검형, 내공 운영이 묘하게 달라졌다. 그렇다고 전광검의 틀을 벗어났느냐? 그렇게 물어본다면 답은 또 아니다. 운이의 성취가 완성되지 않아서 그렇지, 저 흐름대로라면 전광검은 정체된 틀을 깰 수 있었다.
아!
감탄과 동시에 찾아온 깨달음.
곽철웅은 급히 가부좌를 틀었다.
갈효명은 깨달음이 온 걸 확인하고 주변을 차단했다. 운이에게도 검을 멈추고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다.
찰나의 깨달음.
정신을 차린 그는.
“허허.”
절정고수의 초입에 머물렀던 곽철웅은 깨달았다. 그동안 막고 있었던 벽이 허물어졌다. 작은 깨달음이기는 하나, 그 무엇과도 비교하기 힘든 가치를 지녔다.
“운이야, 어떻게 된 일이더냐?”
“그게.”
천운은 사실대로 말했다.
인과를 확인한 곽철웅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검을 보고 잠깐 손을 봐주었는데, 전광검을 완성형으로 만들었다. 이게 과연 절정의 고수라고 해서 가능한 일일까?
“태산을 몰라봤군.”
그는 차원이 다른 강자다. 그런 자를 향해 검을 맞댔으니,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강호는 나이, 배분이 아닌 강함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세상이다.
“원한은 잊는다.”
“예?”
갈효명은 두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지금 제대로 들었나 싶었다. 성격이 호방하긴 해도 은원에 관해서는 절대 잊지 않았다. 그런 곽철웅이 먼저 한 발 뒤로 뺐다.
“송호문과는 우호 관계를 맺는다. 가문에도 연락하도록.”
“예, 장로님.”
절정을 넘은 고수와 척을 져봤자 이로울 게 없었다. 그런 자가 독한 맘을 먹었다면 보문상단과 곽가장을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터. 무엇보다 그는 타협의 손길을 내밀었다. 주는 손길 마다하면 더 열 받을 테고.
‘무시하면 가만두지 않겠지.’
다음은 없다는 걸 손속을 보고 알았다. 그의 손길에서 진한 피 냄새가 전해졌다. 그런 자와는 절대 은원을 맺어선 안 되었다.
‘소룡대회가 기대되는군.’
***
-그래서 좀 밟아줬지.
-그런 일은 원래 초장에 밟아 줘야 다음부터 찍소리도 못해
-괜히 여지를 주면 자기들이 뭐라도 되는 줄 알거든.
-유진이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자기 할 말만 늘어놓는 무진이었다.
이를 일방적으로 듣고만 있어야 하는, 사실 듣는다고 하기도 모호하다.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을 만큼 형편이 여의치 않았다.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면 여지없이 권강이 날아왔다.
“……동생을 죽일 작정이야?”
“이제 너도 어엿한 초절정이잖아. 고작 권강 가지고 그래.”
“……보통 권강이 아니잖아!”
“기분 탓이야.”
무호는 송호오검의 오의를 검에 실어 연환결을 완성했다. 쾌와 변을 넘어 환의 극에 이른 검강을 뿜어냈지만, 주먹 한 방에 맥없이 깨져버렸다.
‘검막이 유리잔도 아니고!’
형이 괴물처럼 강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못 보던 사이에 공력이 훨씬 강해진 것 같았다. 초절정에 이른 자신을 가지고 노는 걸 봐선 공력에서 이미 대종사의 반열에 오른 게 분명하다. 그러면 이젠 정체기가 와야 정상이었다.
‘왜 더 강해지냐고!’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자신보다 더 빨랐다. 불공평한 세상이라고는 해도,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5년 전 역전당하고 난 후, 무호의 복수는 요원한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
“동생아, 언제 절대고수가 될 거냐? 내가 불안해서 나가질 못하겠다.”
“내 나이에 초절정도 대단한 거라고!”
“난 절대고수란다.”
와, 겸손이 없다.
형은 하나도 겸손하지 않다.
차라리 망나니일 때가 낫다.
“절대고수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며!”
“넌 가문의 천재잖아.”
“아무 때나 갖다 붙이지 좀 말라고!”
동생을 피 말려 죽일 심산이 아니고서야 매번 대련할 때마다, 아니 이건 대련도 아니다. 형에게는 훈수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무호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숨통을 끊어낼 살기 실린 공격을 거침없이 해댔다.
“강호는 험난하단다.”
“누가 보면 강호 경험이 많은 줄 알겠어!”
“적진 않지?”
“……대체 언제 가출한 거야?”
“형님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배우면 되지, 뭔 말이 이렇게 많냐?”
“……차라리 죽여!”
무진은 형으로서 동생을 사랑했다. 사랑의 매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맘이 아프지만, 어떡하랴. 송호문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도전해 오는 자들이 많아질 거다. 그때마다 자신이 나서서 해결하기는 어렵다.
집을 비울 수도 있고.
‘무호야, 강해지거라.’
네가 강해져야 밖에 나가더라도 안심이 되지. 그리고 송호문의 평균 무력도 강해질 것이다. 가족 우선주의에 근거해서 동생 다음은 가문이었다. 가문의 위계를 위해서라도 서열은 중요했다.
투꽈꽈꽝!
권과 검이 부딪혔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눈으로 쫓기는 어렵다. 감각이 극대화된 무극무아에서 서로의 강기가 충돌했다. 빠르기만 하다고 보면 오산이다. 강기가 터져 나간 파편이 떨어져 나갈 때마다 산의 지형이 바뀌었다.
허억, 허억!
생사를 가르는 대련이 끝난 후, 무호는 지친 육신을 바로잡기도 힘들었다. 한참을 쉬어주어야 겨우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 없을 때 집 잘 지켜야 한다.”
“내가 집 지키는 개도 아니고, 너무하는 거 아냐?”
“대 송호문의 후계자라는 걸 망각하지 마라.”
“아니, 무슨 후계자가 만병통치약이야. 왜 자꾸 아무 때나 다 갖다 붙이는 거야.”
“후계자란 원래 그런 거 아니냐?”
“……아니거든!”
아니면 아니지 왜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무진의 청력은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조곤조곤 얘기해도 다 알아들었다. 그러니 이건 형에 대한 저항이자, 반항이 분명했다. 자고로 장유유서라는 올바른 규칙이 있었다.
“어른을 무시하면 벌 받는다.”
“……시장 터 할머니를 괴롭힌 게 형이거든!”
“언제?”
“기억 안 나면 다야!”
“사소한 건 잊자.”
철없던 시절이었다. 술 먹고 길 가다 짜증 나서 나물 파는 할머니의 바구니를 걷어찬 적이 있었다. 나중에 동생이 와서 사과하고 물어주었다.
‘미안해요, 할머니.’
동생을 훈육하는 과정이었다.
인정하면 형의 체면이 깎이잖아요. 그래도 무호가 값을 후하게 쳐줘서 다행이었다. 다시는 그런 몰상식한 행동은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이것도 빚이네.’
동생에게 빚이 많았다.
“미안하다.”
“이제 멈추…… 허억!”
“더 강하게 만들어주마.”
“미친 새끼!”
“후계자가 돼서 단어 선택이 그게 뭐야.”
속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데,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무안하잖아.
-패는 데도 핑계가 많군.
‘설득력 있잖아.’
-감정 실렸는데.
‘비교당하고 자라면 그래.’
형제의 훈훈한 대련이 끝나고 무진은 그루터기에 앉고 무호는 대자로 뻗었다. 전력을 쏟아낸 무호는 비 오듯 흐르는 땀에 무복이 젖었다.
창연한 하늘이 보였다.
무호는 감정 실렸던 대련에 대한 원한보다 대련에서 얻은 검공의 무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열 받지만, 생사를 가르는 형과의 대련으로 얻은 게 너무 많았다.
한편으로는 이상했다.
형은 단순히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해도 받아내는 능숙함과 완숙함이 돋보였다. 그야말로 실전에서 구르고 구른 백전노장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동네에서 나가질 않는데, 뭘 어떻게 한 거야?’
무호가 보기에 천재는 자신이 아닌 형이었다. 그러고 보면 예전의 망나니짓도 모두를 속이기 위한 기만술일지도. 한데, 그리 생각하면 또 이상하다.
“잡생각 그만하고 목욕이나 하고 내려가자.”
“알았어.”
산 중턱에서 내려가다 보면 작은 폭포수가 있었다. 아는 사람만 아는 계곡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옷을 다 벗고 들어갔다.
땀에 젖은 육신을 식히기에는 폭포수가 제격이었다. 시원하고 청량한 물의 기운이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맑게 해주었다.
무호는 형의 육체를 몇 번이나 봤지만, 적응이 되지 않았다. 바늘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을 탄탄하면서도 군더더기조차 없는 완벽한 육체였다.
투득 투득!
폭포수가 닿을 때마다 화강암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튕겨 나갔다. 저게 의도한 게 아니라는 점이 더 놀랐다.
“그 몸은 사기 아니야.”
“사내의 매력은 이 몸이 다다. 특히 허벅지가 중요해. 으샤, 으샤!”
헐벗은 몸으로 자세를 취하자, 무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 자신감이 꼴불견이기는 한데, 반박하기가 힘들었다. 자신도 못지않은 탄탄한 육체를 소유했지만, 형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수련하는 꼴을 못 봤는데.”
“수련은 원래 안 보는 곳에서 해야 매력이야.”
보이는 곳에서 수련하면 열심히 해서 그렇게 됐다는 식이 되지만, 안 보는 곳에서 열심히 해서 완성되면 천잰 줄 알거든. 그래야 신비감도 살지.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훈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인생을 날로 먹으려고 하는군.
‘너 그러라고 돌아온 거다.’
전왕공이 완성될수록 육체는 완벽해진다. 이는 전왕공이 가진 특성이다. 무장투를 펼치려면 육체 자체가 신병이기를 넘어서야 했다.
-전왕공은 확실히 대단한 무공이야. 이런 식으로 육체가 초월영역에 도달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하물며 완성된 무공이 아니군.
‘익히고 싶으면 익혀라.’
-염장 지르는군.
‘어차피 너나 나나 무공은 상관없잖아.’
-꼭 그렇지도 않을걸.
전왕과 마왕에겐 무공보다 역량이 중요했다. 대종사의 반열에 든 그들은 무공을 창안하는 영역에 도달한 상태였다. 이전의 무공을 발전시켜 새로운 경지에 진입해야만 했다. 그래야 차후에 나타날 강적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