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4
024 이서정(2)
동생을 내려보내고 무진은 나무를 마저 했다. 지게에 산더미처럼 쌓은 후, 천천히 내려갔다.
송호문으로 가는 길에 사람들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이 인사를 하며 아는 체를 하고, 무진도 반갑게 일상을 즐겼다.
돌아오기 전이었으면 상상도 못 할 장면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무진을 두려워하고 꺼렸었다.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트집을 잡지 못해서 안달이었던 과거가 부끄러웠다.
‘철이 없었지.’
-지금도 없어 보이는데, 이게 철든 거면 전엔 어떻게 산 거냐?
‘몇 번을 말해. 너보다는 나아. 자기 자아도 없이 꼭두각시로 살았던 주제에 누구한테 철없데!’
-난 내 의사가 아니었지만, 넌 자의잖아. 누가 누굴 욕해.
‘시비 걸지 말고 넌 내공이나 돌려.’
-망할 놈. 내가 내공 돌리는 노예냐!
‘심심하면 사술도 발전시키고. 걔들한테 복수 안 할 겨!’
-넌 분명 나중에 후회할 거다.
천경과의 다툼도 이젠 익숙해졌다. 이놈이 고분고분할 때는 자기를 띄워줄 때뿐이고, 평소에는 시비를 걸지 못해 안달이다. 돌아온 후 평화주의자가 되지 않았으면 매일 싸웠을 것이다.
어?
문파에 도착할 즘,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곧 실체가 보였다.
그녀가 먼저 알은체를 했다.
“오랜만이에요.”
“절 기다린 겁니까?”
“그래요.”
“안에서 기다리시지.”
“앉아서 기다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성격이 참 독특한 여인이다. 아마 물어본 후 시간이 되기까지 문파 주변을 돌아본 듯하다. 맺고 끊음이 확실한 성격으로 신세 지는 걸 극도로 경계했다. 검후 시절에도 선이 지나치게 분명해서 주변에 적이 많은 편이었다.
그녀가 온 이유는 명확했다.
무진도 서론을 길게 설명하진 않았다. 그러나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보았다. 그녀는 현재 정체기에 들어서 있었다. 차후 올라설 경지지만, 시간을 앞당길 방법을 찾을지도 모르지.
문제는 나한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 격차가 좀 많이 난다. 그보다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가야 할 듯싶다.
“오늘은 여독을 풀고 내일 아침에 비무를 하시지요.”
“당장은 안되나요?”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최적의 상태에서 비무를 하고 싶습니다. 물론, 압니다. 항상 최고의 상태에서 실전을 경험할 수도 없겠지요. 하나, 지금은 비무가 아닙니까.”
“……알았어요.”
이서정으로서는 특이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강호에 나온 이후,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사내는 처음 보았다. 뒤로 빼거나 비굴해 보이진 않아도, 겸손하다고 하기도 어렵다.
‘모르겠어.’
그녀는 선천적으로 감각이 뛰어났다. 한 번 보면 상대의 특성을 파악하는 탁월한 직관을 지녔다. 그러나 이 사내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철두철미한 성향은 여전하군.
‘또 자기 칭찬이냐?’
-흑백마검을 그녀에게 잃었다. 그래서 내가 나선 거지.
‘호오, 그거 대단한데.’
흑백마검(黑白魔劍)은 마신교를 대표하는 고수다. 그의 성명절기인 흑천마라혈검(黑天摩羅血劍)에 죽은 상급 무인의 수가 수백에 달한다. 마왕이 본격적인 행보를 나서기 전까지 악명이 자자했다. 그를 죽이다니, 대단한 업적이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아, 빙정을 얻었구나.’
-맞다.
검후의 행보에서 파격을 이룬 시점이 바로 빙정을 얻고 난 이후다. 그전에도 이름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지만, 빙정을 흡수한 이후로는 격이 달라졌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시죠. 방은 남아도니 침소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식사도 같이하고요.”
“그래도 될까요?”
“아무렴요.”
“그럼 실례할게요.”
무진은 이서정을 문파로 데리고 들어갔다. 사소한 분란은 있었다. 이서정이 워낙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다소 차가워 보이기는 해도 대륙에서 손에 꼽힐 것이다.
반대로 무진이 예전의 망나니가 된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시선도 꽤 있었다. 무진은 자신이 쌓아 놓은 업을 받아들이고, 가족에게는 연유를 설명했다.
‘어라. 이 녀석.’
시선을 떼지 못하는 사내놈이 있었다. 무진의 입술이 얄팍해지면서 호선을 그렸다.
탁주를 들고 동생을 밤중에 따로 찾았다.
다음 날 아침 무진은 이서정과 함께 산으로 향했다.
아침에 나무를 해오는 일은 무진의 일상이라 딱히 신경을 쓰진 않았다. 더욱이 이서정의 이름값이 있었다.
소검후이기 전에 냉혈검(冷血劍)으로 불렸으니, 어지간한 간담이 아니고선 말도 못 붙였다. 그런 여인과 알고 지내는 무진을 오히려 이상하게 보았다.
산 중턱에서 숲길로 이어진 곳을 뜻밖의 사내놈이 먼저 선점하고 있었다. 무진은 어색한 연기를 하며 물었다.
“네가 웬일이냐?”
“형, 그쯤 하지.”
“하긴 뭘 해.”
“최선을 다할 거라면서.”
“비무란 원래 최선을 다하는 거고, 그게 예의지. 안 그래?”
“맞는데…… 좀, 아니… 그게 아니라.”
무호는 답답했다.
아니라고 답하기가 어려웠다. 이서정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했다.
어제 술 마시며 한 얘기가 떠올랐다.
-어떤 일로 온 거래?
-비무를 하고 싶다잖아.
-형하고?
-그래, 내 실력을 보고 싶다는데 보여줘야지.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어?
-자라나는 새싹은 꼼꼼하게 밟아줘야 강하게 크지. 너처럼.
그 말을 듣고 도저히 가문에 있을 수가 없었다. 비무 장소야 알고 있으니 문제가 되진 않았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장소에 도착한 후 형과 이서정을 기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비무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도움이 될진 몰라도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다. 그건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다. 하물며 사내도 아니고 여인이었다.
-여인이잖아.
-무인이 남녀노소를 가릴 거면 산에 들어가서 살아야지. 그리고 그녀는 봐주는 거 싫어해. 소문 들었잖아. 나중에 봐줬다고 앙심 품으면 어떡하냐.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노인, 여자, 아이가 어쩌면 더 무섭기도 하다. 방심하지 않으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방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호에서는 약해 보일수록 조심하란 격언이 있다.
“오늘따라 왜 이래? 꼭 서리맞은 개처럼 볼품없이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다.”
“비무란 건 서로의 실력을 확인해 보는 거잖아. 실전과 같다고 해도 실전처럼 할 수는 없는 거고.”
“무정검께서 서론이 왜 이렇게 길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혹시.”
무정검에 냉혈검이 합치면?
이름 하난 그럴듯하다.
“……그런 거 절대 아냐.”
“내가 뭘 물어볼 줄 알고?”
“어떤 걸 물어보려고 했는데?”
“어이쿠, 다른 생각 하다 까먹었네. 생각나면 알려주마. 그러니 일단 물러서라.”
“잠깐만!”
무호는 만류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겠지만, 상대는 형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흔들림이 없을 것 같은 선녀처럼 고고한 여인이지만, 형한테 당하면 회복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모습을 상기하니, 더더욱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녀석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동생의 허둥지둥하는 행태에 무진은 혀를 찼다. 무정검이란 별호가 무색해졌다. 표정 관리는커녕 다급함이 얼굴에 고대로 적혀 있었다.
‘이거 멈출 수가 없네.’
무진은 곤란해하는 동생이 귀여워서 계속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중간에 이서정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동생과 훈훈함이 오래갈 뻔했다.
“다른 용건이 있는 건가요?”
“아, 그게…….”
“없다면 이만 물러서 주시겠어요.”
“없는 건 아니고요.”
“있는 것도 아니죠.”
“그렇기는 한데…….”
단도직입적인 발언에 무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서면 호감이 있는 여인이 꼴사납게 망가질 것이다. 문제는 말리고는 싶은데, 명분이 없다. 검을 든 이상 여인이라고 하여 사정을 봐주어선 안 되었다. 그럴 거면 애초에 검을 들지 말아야 했다.
에라 모르겠다.
이판사판이다.
“이 소저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당황스럽네요. 그리고 제 도전이 먼저예요.”
“부탁입니다! 검을 꼭 나누고 싶습니다!”
“순서를 지키세요!”
이서정의 표정은 거의 변화가 없지만, 눈매가 살짝 차가워졌다. 다짜고짜 비무를 청하는 무책임한 태도에 실망한 것이다. 이는 자신의 형을 무시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무호는 말을 하고도 후회가 밀려왔다.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인데, 다급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게다가 그녀의 말이 옳았다.
그때였다.
“이 소저. 제 동생의 청을 들어주신다면 차후 소정의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상식적이지 않은데도요?”
“무례한 부탁임은 압니다. 하지만 하나뿐인 동생의 부탁인데 형으로서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좋아요. 이 무례에 대한 답은 반드시 받겠어요.”
이서정은 형제의 의기를 고려해서 받아주기로 했다. 어차피 둘 중 누구와 먼저 대련을 한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다만, 좋게 봤는데 불쾌하긴 했다.
-잘해라.
‘제기랄!’
무진의 전음에 무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 인간이 다 알고 있으면서 여태 자신을 가지고 논 것이다. 어제 갑자기 술 한잔하자고 할 때부터 계획적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내뺄 수도 없게 생겼다. 좋지 않은 인상을 새겨준 이상,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나쁘지 않아.’
무진은 평소 즐겨 애용하는 그루터기에 앉았다.
이서정과 무호가 마주 섰다.
약간은 날이 서 있는 이서정이었다. 그녀로서는 순서를 방해받았다는 점이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검을 뽑아 든 무호를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강해.’
검을 타고 전달된 반응이 예상을 넘어선다. 이서정조차도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감각이었다. 이런 수준에 이른 검사는 동 나이에선 만나보지 못했었다.
스릉!
사부에게서 하사받은 빙룡검(氷龍劍)을 꺼내 들었다. 경시할 수 없다는 걸 안 이상, 불쾌한 감정을 지웠다. 이런 적수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무인의 자세가 아니다.
‘크음, 명성보다 더하네.’
소검후 이서정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악인에게는 자비를 보이지 않는 단호한 손속을 지녔다고.
“선수는 양보하지 않을게요.”
“원하지도 않습니다.”
처음으로 이서정과 무호의 생각이 일치했다. 말이 아닌 검으로서 서로를 인정한 것이다.
기세가 충돌한 후, 검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