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50
249 교란술(5)
스윽!
검강의 끝이 향하자 단천상은 눈만 껌뻑껌뻑할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기세에 완전히 잠식되어 분노를 상실하고 말았다.
“무인을 모독한 대가를 받아 가겠다.”
“……잠깐! 우리가 실례했소이다!”
“했소이다?”
“……했습니다!”
자신의 나이 반 토막도 안 되는 놈이 하대했음에도 단천상은 반박은커녕 꼬랑지를 내렸다. 정도와 달리 사도는 불가항력에 도전하진 않았다. 강자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자고로 고개 빳빳이 드는 놈치고 오래 사는 놈을 보지 못했다.
“패배를 인정하나?”
“인정합니다!”
“가 봐, 그럼.”
“강 대협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단천상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쓰러진 패룡을 수습한 채 걸음을 재촉했다.
‘죽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사파라고 자존심이 없겠나, 패천문의 문주는 망신당한 걸 분풀이할 게 분명하다. 대상은 아마도 단천상과 그가 데리고 온 무인들로, 그들은 치도곤을 당할 것이다. 그래서 저들의 목숨을 붙여 줄 최소한의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그렇다고 여지를 줄 순 없지.’
무호는 무림의 생리를 알고 싶진 않지만, 허점을 내주면 돌아온 형이 가만두지 않을 거다. 송호문의 완전무결한 방패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일정부분 경지를 드러내 어중이떠중이가 오지 못하도록 연막을 친 것이다.
휙!
결판을 내자 무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파로 돌아가 버렸다.
휑!
며칠 동안 이 대결을 보려고 일대에서 기다렸던 군중들은 할 말을 잃은 채 망연자실했다. 정작 대결을 벌인 두 사람이 사라진 이후에도 한참 동안 넋을 놓았다.
“허, 어이가 없네!”
“패룡을 저리 간단히 쓰러뜨릴 줄이야!”
“이거 예상한 사람?”
“젠장, 신검마협에 걸었어야 했는데!”
“짜고 친 거 아냐!”
눈앞에서 벌어진 결과를 믿기가 힘들었다. 패룡의 무력을 알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감히 신검마협을 의심하지도 못했다. 그가 보여 준 여섯 자의 검강과 뿜어져 나온 기세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신검마협은 진짜였어!”
“시대의 새로운 강자가 탄생한 날이야!”
“차후 신주이십일강에 변화의 바람이 불겠어!”
“나이를 봐, 천하제일도 꿈은 아닐 것으로!”
“이젠 송호문의 시대야!”
한 차례의 대결에 불과하나, 이후에 불러올 파급력은 무궁무진했다. 어정쩡한 수단으론 송호문을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
패배의 당사자인 패천문도 복수를 천명하긴 어려웠다. 이 대결은 정정당당한 무인 간의 대결이었다. 무림맹에서 대결을 공증했기에 세력 싸움은 불가능했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패천문이 나서게 되면 무림맹이 개입할 여지를 주게 된다. 무림맹도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대외적으로 공언한 이상, 책임을 져야 했다. 무시하고 모른 척 외면한다면, 무림맹의 위상에 흠집이 생긴다. 한 번 무너진 명예를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 간단한 이치를 무림맹이 모를 리 없었다.
여하튼 신검마협이 패룡을 꺾으면서 무림맹과 흑룡성에 거대한 엿을 날린 격이 되었다.
화창했던 날씨가 밤이 되니 먹구름이 잔뜩 끼어 언제라도 비가 올 듯했다. 어둠이 주변을 완전히 장악하고, 피곤함이 무르익어 수마가 찾아오는 시각이었다.
사삭!
한 줄기의 희미한 바람이 일었다. 잠시 후 나타난 그림자는 주변과 동화하여 육신을 완벽히 감추었다.
‘패룡을 이길 줄은, 나도 몰랐네.’
그는 군중들 사이에 숨어서 대결을 지켜보았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패룡이 쉽게 이길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을 벗어나 신검마협이 이겨 버렸다. 그것도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이며. 다시는 까불지 말라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이쪽이 나에겐 더 좋지.’
패룡에게 졌으면 송호문에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문파를 대표하는 고수가 꺾이고, 회생 불능이 되었다면 당연한 처사였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송호문은 보란 듯이 힘을 과시했다. 이후로 송호문은 누구도 경시하지 못할 대문파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이 기회였다.
‘들떠 있을 때 빈틈이 생기지.’
사람들이 흔히 하는 패착이었다. 승리에 도취하여 방비를 허술하게 하곤 했다. 설마 대결이 끝난 직후를 노리지는 않을 거란, 방심이 부른 화근이었다.
스르르륵!
어둠과 동조하여 담벼락을 넘었다. 예상대로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지키는 자도 없다. 불도 꺼져 있었다. 모두가 수마에 들어 경비가 허술했다.
‘쯧쯧쯧, 털어 달라고 대놓고 부탁을 하는군.’
이렇게 간절히 원한다면, 털어 주는 것도 인지상정.
어둠의 협객으로서 신속히 나아갔다. 오늘 이후로 경각심을 가지라는 배려심을 발휘했다. 작은 것을 잃고 큰 것을 얻는다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이렇게 깊숙이 들어왔는데도 지키지를 않다니…… 어?’
그제야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작은 문파라도 밤에는 번을 세운다. 좀도둑이 없는 세상도 아니고. 송호문 정도 된다면 최소한의 인원이라도 경비를 섰어야 했다.
‘귀신의 집이 아니고서야.’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아까와 같은 공간에 서 있었다.
착각일까?
그럴 리가 있나.
‘진법!’
같은 공간을 빙글빙글 돌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위적으로 주변을 변화시킨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 되었다.
‘이런 제길!’
방심은 송호문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태였다. 그렇다고 당황하진 않았다. 송호문에서 기관진법에 달통한 자를 고용하진 않았을 터. 최소한의 방비를 위한 결계에 불과할 것이다.
‘오행, 사상, 팔진, 구궁 중에 하나겠지.’
허둥지둥댈 거라고 봤다면 오산이다. 대륙 제일의 대도로서 이따위 결계 따윈 단숨에 벗어날 수 있었다.
“북으로 오보, 좌로 삼보, 남서로 육보, 여기다…… 헉!”
반보 차이거늘, 나아가기가 무섭게 천장단애의 낭떠러지로 변했다. 실제가 아니라 결계의 환상이었다. 발을 내디뎌도 죽지 않을 거란 확신과는 별개로 지나치게 생생하다. 아래서 위로 불어오는 용권풍에 피부가 밀려 나갔다.
‘단순 미로진이 아니잖아!’
미로진을 억지로 열려다가 진을 다음 단계로 변환시키고 말았다. 불가항력의 환영, 환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속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암기가 나오진…… 헉!”
스치고 나간 날카로운 암기가 있었다. 눈앞으로 날아올 때까지 보이지도 않았다. 뺨이 수평으로 벌어지면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식은땀이 폭포수가 되어 등을 적셨다.
슈유융!
허억!
연이어 헛바람을 삼켜야 했다. 어디서 오는지 도무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 죽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발버둥을 쳤을 뿐이다.
익히고 있는 초공감각이 아니었다면 진작 머리가 뚫렸을 것이다. 초공감각은 육체의 감각뿐만 아니라, 일정 공간을 자신의 감각 안에 둘 수가 있었다.
“……빌어먹을, 이게 대체 뭐야…… 흐엑!”
밤손님을 진법 밖에서 지켜보고 있는 두 인영이 있었다. 생김새는 무진과 무호였다. 안과 달리 밖에서는 진법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진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안에서 웬 뻘짓을 하냐고 생각할 것이다.
“저 새끼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찾아왔데.”
“아는 사람입니까?”
“저보다는 못하지만 오대야객에 속하는 놈입니다. 별호는 묵객이고, 이름은 강철입니다.”
“오대야객이면 방심 못 할 사람이군요.”
“그래 봤자, 저한테는 안 됩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나릉은 진법에 갇혀 곤욕을 치르고 있는 묵객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보단 못해도 진법에 걸릴 놈이 아닌데.’
오대야객을 투전판에서 따지는 않았다. 어지간한 문파는 다녀간 줄도 모르게 털 자신이 있었다. 송호문에 펼쳐진 진법이 보이는 것 이상으로 대단하다는 방증이었다.
웃기긴 했다.
폴짝폴짝, 아등바등! 살려고 발버둥 치는 묵객의 절절함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만날 때마다 잘난 체를 하던 놈이라 기분이 상쾌했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저 진 안에 갇혔을 때를 상정하자, 입맛이 썼다.
‘나도 쉽지 않겠어.’
진법의 이름은 방호진(防護陣)으로 평범해 보이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방호진은 부총관과 신산묘녀의 합작품으로, 자신이 직접 실험에 참여해 진을 보강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통과가 되었는데, 시일이 지날수록 막막해졌다. 이뿐이랴, 문파에 기거하는 철방의 야장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만든 병기, 암기, 기관은 걸리면 백 중 백,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방호진은 연막에 불과하다. 차후 등장하는 아수라겁천대진을 위한.
‘저거 위험한데.’
진을 열려고 발악할수록 진은 변환했다. 처음에는 단순 미로진 같아 보이지만, 점차 환상진에서 살상진으로 변해 갔다. 살상진에 들어가는 순간 뒈졌다고 봐야 했다.
‘……저런 무식한!’
대체 어디로 피하라는 거야?
묵객이 처연하게 발버둥을 칠수록 희열이 점차 싸늘하게 식어 갔다. 자신도 저놈과 다르지 않을 거란 걸 너무도 잘 알았다.
‘위험한 인간들이야!’
신산묘녀는 그렇다 치자고. 부총관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자 나부랭이였다며. 그런 인간이 어떻게 이런 무식하고 살벌한 진법을 만드느냐고.
“살상진까지 갈 줄은 몰랐는데, 이거 참.”
“그래도 처음치고는 잘했잖아요.”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걸 보면 많이 미숙합니다.”
“우리 같이 개량해 보죠.”
“신산이 있어 큰 힘이 됩니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용 부총관과 황보세령이었다.
그들은 진 안에서 발버둥 치는 묵객의 생존이 마음에 안 드는지 고심하고 있었다. 이 정도만 해도 어지간한 대문파의 결계보다 대단한데, 이 인간들이 대체 어떤 진법을 만들려고 하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천살진이라도 만들려나?’
갇히면 무조건 뒈지는, 무저갱과 같은 진법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죽어 가는데 그 앞에서 흥미롭게 감상하고 있다니, 용 부총관과 황보세령도 보통 인간들은 아니었다.
‘어째 이 문파에 제정신인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나릉은 자신 빼고, 다들 정신적으로 비정상 같아 보였다. 따지고 보면 패룡을 일검에 베어 버린 소문주도 보통은 아니지. 하나같이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그 정점에 선 존재가 강 대협이었다.
‘이러다 죽겠는데.’
안 되지.
나릉은 묵객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 못지않게 변장술과 기타 잡다한 것들을 아주 잘하는 녀석이었다. 이번 기회에 누가 형님인지 제대로 겨루어 볼 때가 되었다.
“소문주님, 제가 한 번 갱생을 시켜 보겠습니다.”
“하긴, 이대로 죽기에는 아까운 실력이군요. 마음껏 해 보세요.”
무호가 눈짓을 주자 용 부총관이 진법을 잠시 개방했다. 진의 축은 안에서만 개방할 수 있고, 술식을 아는 사람은 용 부총관과 황보세령이 유일했다. 실제로 안다고 해도, 워낙 복잡해서 해체가 쉽지 않았다.
우웅, 팟!
결계가 사라지고 안에 담고 있던 기운이 퍼지며 파문을 일으켰다.
헉!
절벽에서 떨어졌던 묵객은 자신이 바닥에서 뻘짓 하고 있었다는 걸 인식했다. 일어나서 사태를 확인하려고 할 때 누군가 앞에 섰다.
“……넌 뭐야?”
“뭐긴, 네 형님이다, 이 새끼야!”
일어나려던 묵객의 죽탱이에 주먹을 날리는 나릉이었다.
뻐억, 꽈당!
바닥에 엎어지면서 이차 충격을 받은 묵객이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짓밟았다.
퍼퍼퍼퍼퍼퍽!
나릉은 보람을 느꼈다.
“사람 돼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