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51
250 대막혈궁(1)
“그가 우릴 보려고 할까요?”
“걱정할 필요 없어. 쫓아낼 거였으면 궁으로 들이지도 않았을 거야.”
무진과 북궁혜는 대막혈궁에 들어와 있었다. 일행과 헤어지고 곧바로 대막혈궁을 찾았고, 신분을 확인받은 후 내어 준 방에서 대기했다.
사흘이 되어 가는데도 아무 연락이 없자 답답해하는 북궁혜와 달리 무진은 느긋했다.
“협상이 되지 않으면 어쩔 거예요?”
“답답한 쪽은 우리가 아냐. 실체조차 확인하지 못한 저들보단 우리가 훨씬 낫지.”
대막혈궁으로 서신을 보낼 때, 암류에 대한 설명을 간소하게나마 적어 놓았다. 또한, 만약을 대비해 대공자를 통해 혈천에게 서신이 전달되도록 했다.
서신이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욘 없다. 서신을 도중에 차단했다면 교와 유착 관계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다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삼공자가 사라지면서 다음 대 궁주는 대공자가 유력한 상황이었다. 이럴 때 굳이 빙궁을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빙궁과 협조하여 암류를 치워 버리는 편이 나았다. 그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뒈질 수도 있지만, 그건 혈궁의 사정이었다.
‘이공자를 회유하는 편이 손쉽기도 하고.’
마신교가 실패했을 때 써먹는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수도 없이 겪어 보고,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십에 구 할은 확실했다. 저들이 하루아침에 자신들이 써먹던 전략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급박할수록, 새로 시작하기도 만만치가 않았다.
“지금쯤 빙궁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거야. 그러니 더더욱 혈궁을 장악하려고 애를 쓸 테지.”
“혹, 우릴 공격할 수도 있다는 건가요?”
“이젠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구나.”
“친서를 가지고 온 사신을 죽이면 전쟁이 나는 건 상식이잖아요.”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어.”
“저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할게요.”
무진은 북궁혜의 올바른 방향성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미숙하고 칠칠치 못했던 녀석이 부족하지만 사람 구실을 하고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무조건 혹독하게 굴려야 했다. 굴릴수록 녹이 슬어 버린 두뇌가 활발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지.’
마신교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다짜고짜 공격하진 않을 것이다. 잘못했다가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특히 뒤통수를 심하게 처맞은 혈천은 사태를 한 방향으로만 보진 않을 것이다.
점심 식사를 마칠 무렵 사람이 찾아왔다.
수많은 상처로 얼굴을 뒤덮고 있는 사나운 인상의 사내였다. 혈궁을 지탱하는 삼대무력단인 혈패단의 단주를 맡고 있는 자로, 이름은 백사천이었다.
“궁주께서 찾으신다. 따라와라.”
“오냐.”
하대를 하대로 받아치자, 백사천의 얼굴근육이 꿈틀거렸다. 굳이 인상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흉악한 면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철호에게 면역된 무진과 북궁혜를 놀라게 하기에는 부족했다. 저 상처 많은 면상도 철호에 비하면 미남이었다.
“뭘 믿고 까부는지 모르지만, 입을 함부로 놀리면 혓바닥이 잘리게 될 거다.”
혈궁과 빙궁은 새외를 지배하는 거대한 세력이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우열은 비등한 편이었다. 누가 우위에 있다고 하기 어렵다. 기후와 지형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불과 물처럼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다른 세력보다 큰 편이다. 익히고 있는 무공의 성향이 적대감을 크게 키웠을지도 모르겠다.
“똥개도 제집에서는 삼 푼을 먹고 들어간다 이거냐.”
“이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큭!”
적대감이 있으면 뭐?
한 손이 아쉬운 쪽은 혈궁이었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치고는 형편없었다. 이건 누가 봐도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의도였다.
혈궁의 의도를 무진은 순순히 따라 주지 않았다.
백사천이 손을 쓰기도 전 거리를 좁혔다. 무섭게 돌아섰던 백사천은 목이 잡힌 채 바닥에서 들리고 말았다.
바동바동!
무진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거구의 백사천이지만, 지금은 어린애만도 못한 처지가 되었다. 어리광 부릴 수 없는 면상이니, 오늘만큼은 마음껏 부리도록 배려했다.
크으으윽!
목이 잡히자 기력이 뭉텅이로 빠져 갔다. 이러다간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당하게 생겼다.
파아앗, 차악!
백사천은 두 팔로 버티다가 한쪽 팔을 풀어 주먹을 날렸다. 마지막 몸부림에 가까웠다.
하나, 무진의 왼손에 팔목이 잡히고 말았다.
“이 와중에 목숨보다 자존심을 택하네. 근성은 있구나. 보답을 해야겠지.”
담담히 웃는 무진의 눈빛에 백사천은 기겁했다. 저런 눈을 한 자들이 어떤 성향인지 모르지 않았다.
꽈드드득!
팔목이 부서져 버렸다.
크윽!
두 팔로 버티다 한 팔이 되어 버린 백사천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력을 동원해 보지만, 파고들어 온 경력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사막의 전사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고 들었어. 장렬히 전사하도록 도와줄게.”
다음 생에는 착하게 태어나라는 덕담을 끝으로 무진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만하시게.”
낮게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에 항거 불능의 힘이 실렸다. 상당한 기세가 모여들어 심혼을 강타했다. 내력이 심후한 경지에 들지 않고서는 발하기 힘든, 일종의 사자후였다.
꺼르르!
핏줄이 터지도록 세운 백사천의 충혈된 눈동자가 뒤집히고, 입에서 거품이 나오려고 했다. 서푼의 힘이 더 가해진다면 황천길이 머지않았다.
털썩!
무진이 힘을 풀자, 백사천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맥없이 고꾸라졌다. 가느다란 숨결을 부여잡으며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기력을 잃어서 볼품없이 버둥거렸다.
백사천의 흉명(凶名)을 아는 자들이 봤다면 믿지 못할 광경일 것이다. 그의 일생에 잊지 못할 기억이 되었다.
손을 턴 무진이 언제 그랬냐는 듯 너스레를 떨며 물었다.
“이제 됐지요. 하온데, 뉘신지?”
“말하면 아는가?”
“그것도 그렇군요.”
“그래도 이름은 알아야겠지. 공야우일세. 미려하나마 궁의 장로직을 맡고 있네.”
“공야 장로님이시군요. 어쩐지 처음부터 기품이 넘치시더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보기보다 뻔뻔하군.”
“손님을 시험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요.”
의도를 간파당한 공야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북해의 무공을 떠보려는 의도가 없다곤 할 수 없으나, 안방에서 이토록 과감하게 손을 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겁이 없는 건지, 알고 하는 행동인지.
침착한 행동을 보고 있자니,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공야우는 그쯤에서 손을 털었다. 호승심을 불태우기에는 궁주의 명령이 앞섰다. 현재는 볼품없어 보이는 노인네지만, 투마로 불렸던 백절불굴의 전사였다.
‘이만한 노인네가 알려지지 않았다면, 믿을 만하겠는걸.’
마신대전에서 선봉에 섰던 대막혈궁의 전사 중에 공야우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믿음은 갔다. 혈제가 궁주가 되는 즉시 숙청되었을 테니까.
‘시험은 하되, 보기는 하겠다.’
혈천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성향이 알려진 대로 마냥 호전적이지만은 않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거대 무리의 수장이 힘만 믿고 까부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런 세력이 수백 년을 이어 올 수도 없을 테고.
“그런데 자네는 누군가?”
“제 이름은 북궁진이라고 합니다. 궁주님의 이종에 팔촌으로서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그건 그냥 남 아닌가?
북해의 사정을 자세히 모르기에 공야우는 따져 묻지는 못했다. 또한, 바로 옆에 있는 북해궁주의 딸이 신분을 증명해 주었다. 숙부로 모신다나? 그게 족보상 맞는지 공야우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굳이 이런 걸로 속일 필욘 없겠지.’
속이려고 했으면 궁주의 숨겨진 아들이라 하는 편이 나았다. 말도 안 되는 족보를 들먹이며 애써 의심을 살 필요는 없으니까.
무엇보다 백사천은 약하지 않았다. 삼대무력단의 단주면 궁의 서열 안에 드는 실력이었다. 하물며 백사천의 악귀 같은 투지를 고려하면 가볍지 않은 상대였다. 그를 일수에 제압한 이상 간과하기 어려운 무력이었다.
“빙공을 쓰지 않더군.”
“예.”
“그런데도 빙궁의 후예라고 할 수 있나?”
“빙공이면 어떻고, 염공이면 어떻습니까. 무공은 원래 강하면 장땡입니다. 북해는 굳이 빙공만 우대하지 않습니다. 혹, 사막은 무공에 차별을 두는 겁니까?”
“……그럴 리가!”
매우 직설적이었다. 공야우는 근래에 이토록 당황해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무공뿐만 아니라 화술도 만만치가 않았다. 또한, 정석이었다. 무공이란, 적을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두루뭉술한 대답 같아도, 가장 근원적인 정답이었다.
‘북해가 더는 폐쇄적이지 않다고 봐야 할까?’
북해의 근간이 빙공이다. 그런데 북궁이라는 성을 쓰는 자가 빙공을 익히지 않고, 다른 무공에 손을 댔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무공을 가리지 않는다니, 달리 보면 어떤 무인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공야 장로님은 얼마나 강합니까? 궁 서열 십위 안에는 들겠지요?”
“남의 무공은 함부로 물어보는 게 아니네.”
“그러니까요.”
“……내가 실언을 했군.”
대화를 하면 할수록 말리는 공야우였다. 말을 할 때마다 본전도 뽑지 못하고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그 이후로 공야우는 입을 닫고 궁주의 대전으로 걸었다.
‘와, 말로도 못 이기겠어!’
북궁혜는 듣는 내내 감탄을 연발했다. 말로 할 필요도 없는 상식 밖의 무력이 있는데도, 굳이 말로 짓밟아 버렸다. 공야 장로도 노련하게 받아쳐 보았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해 벙어리가 되었다.
‘하긴 아버지를 비롯한 원로와 장로님들을 패고 다닌 위인인데.’
혈궁이 설령 겁천지옥이라도, 무진이 겁을 먹고 입을 닫을 것 같진 않았다. 물에 빠져도 주둥이만 둥둥 뜰 거란 허황된 잡설이 정설일지도.
대전으로 가는 내내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다. 북해의 사절단이 왔다는 소식이 알려진 것이다.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는 자들도 간혹 있었다.
대전 앞에 도착하자 공야우가 돌아섰다.
“궁주님에겐 무례를 범해선 안 되네. 언행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게. 이건 충고이자, 경고일세.”
“아무렴요. 북해에서도 저는 예의의 화신으로 불렸습니다.”
“…….”
공야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놈하고 대화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 사람 짜증 나게 하는 데는 도가 텄다고 봐야 했다.
드르르르르!
대전에 서자, 문이 열렸다.
사막이란 척박한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궁은 크고 넓으며 화려했다. 대막을 지배하는 주인에 걸맞은 위압감이 대전에서 풍겼다.
저벅!
위축되어 망설일 법도 한데, 무진은 대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북궁혜도 얌전히 따랐다.
‘허, 이런.’
그러자 공야우는 헛바람을 삼켰다.
호랑이 간을 삶아 먹은 건지, 도무지 겁이 없었다. 설마 사절단이라고 해서 안전할 거라고 보는 건가?
‘대담한 건 인정해 줘야겠군.’
공야우는 대전 밖에서 대기했다. 이 공간은 궁주님의 명이 떨어지지 않은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었다.
대전의 중심까지 가는데도 거리가 꽤 있었다.
정면의 상좌에 앉아 있는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이 무진을 내려다보았다.
의외로 기품이 전해졌다. 사막의 전사 중 가장 사나운 인간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백이면 백 혈천을 지목할 텐데도. 막상 마주한 중년인에게 왕의 기품이 서려 있었다.
“북궁진입니다. 궁주님의 이종에 팔촌으로서 가장 가까운 사이입니다.”
“흠, 헛소리를 잘도 하는군.”
“공야 장로에겐 통했는데, 아쉽군요.”
“그가 언행에 신경을 쓰라고 했을 텐데.”
“형제가 된다면 거리낌이 없어야 편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아는 사이처럼 친근하게 말을 하자, 혈천의 좌우에 서 있던 두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무진을 노려보았다.
대공자 철원패와 이공자 철옥랑이었다.
그들은 이놈이 대체 뭘 믿고 이리 천방지축으로 행동하나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본궁을 업신여기고 있다면 참혹한 대가를 주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