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56
255 훈수(2)
이런 빌어먹을!
한눈팔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무진의 터무니없는 행태에 자신도 모르게 곁눈질하고 말았다.
생과 사가 오고 가는 전장에서 돗자리를 펴고 술판을 벌이겠다니, 제정신으로 하는 짓인가?
농인 줄 알았거늘, 개 같은 짓을 진짜로 하고 있었다.
카아, 좋다!
이쯤 되면 조롱이 분명했다.
빠득!
평소와 달리 분노가 치밀었다.
함정에 몰아넣은 줄 알았건만 역으로 함정에 빠졌다. 뒤통수를 세게 처맞은 기사천의 성정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냉철함을 유지하려고 할수록, 끓어오르는 분기를 다스리기가 힘들었다.
“앞섶에 요상한 폭탄을 가지고 있습니다. 폭탄이 터지며 발생하는 연기가 시야를 가리는데, 정작 문제는 연기에 섞인 학정홍입니다.”
무진은 환살의 약점을 기탄없이 유출했다.
막말로 무시할 순 없다. 내용이 지나치게 딱딱 맞아떨어졌다. 숨기고 있는 약점까지 정확하게 알아맞혔다. 실속 없이 되는대로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능력치를 정밀하게 살폈다.
빠드득!
환살의 특기는 정면 대결과 거리가 있었다. 혈병과 같은 전투에 특화된 무력대와는 거리가 있었다. 상대를 속이고, 현혹하고, 흔들어놓았을 때 환살의 장점이 극대화되었다.
숨겨야 하거늘, 무진의 혓바닥이 길어질수록 발가벗은 환살이 되어 버렸다. 암수를 쓰기도 전에 발각되어 도리어 허점을 노출하고 말았다.
크억!
환살이 죽어 갈 때마다 기사천은 이를 갈아야 했다. 놈의 주둥이를 닫아야 하나, 혈천이 집요하게 추격하며 놔주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무진이 만만하지도 않았다. 한두 명으론 오히려 범의 아가리에 먹잇감을 던져 주는 꼴이었다.
퍼어어엉!
기사천의 검강과 혈천의 권강이 충돌하며 파장을 일으켰다. 반경 십 장 안이 소요의 영향력에 있었다. 완연한 강의 경지에 들어선 파급력은 지축을 거세게 흔들었다.
‘빌어먹을!’
하나부터 열까지 기사천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었다. 사령마검식 육식, 사혼겁천(死魂劫天)이 붕괴하면서 반격의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여력을 숨겨놓았군.’
처음의 우세와 달리 혈천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혈천공을 구성까지 끌어 올렸다. 그런데도 승부의 향방을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기존에 알고 있었던 사사의 무력을 훨씬 상회했다. 이미 완전한 화경에 올라선 강자였다.
우우우웅!
여력을 남기기에는 위험한 놈임을 직감한 혈천은 혈천공을 극성으로 끌어냈다. 그러자 육신에서 퍼져 나오는 혈천마혼기가 그물망처럼 퍼지며 혈라지망을 이루었다.
그는 이 영역에 있는 자들의 존재를 부정했다.
“죽어라.”
“어림없다!”
혈천마혼기와 합쳐진 혈라지망의 권능이 심혼에 타격을 주어, 영혼을 분쇄했다. 보통은 타격을 받기 마련이나, 기사천의 영혼은 흔들리지 않았다. 저항하며 혈라지망을 날카로운 검강으로 갈라냈다.
스왁, 퍼퍼퍼펑!
혈천도 얌전히 관망하진 않았다.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며, 여우처럼 빠져나가려는 기사천을 향해 권강을 발출했다.
츠츠츠츠!
혈기를 머금은 붉은색의 검강과 회백색을 띠는 기사천의 검강이 허공에서 충돌하며 거친 파문을 일으켰다.
강기성강에 이른 무인의 충돌이 불러온 광경은 재해와 같았다. 같은 범주의 인간과는 구별이 되는 인외자(人外者)였다.
채채챙, 스걱!
절대고수의 격돌을 에워싸며 환살과 혈병이 죽고 죽이는 혈전을 이어 갔다. 사사와 혈천처럼 대단하진 않아도, 죽음을 도외시하는 병기의 격돌은 치열함을 넘어 처절했다.
오물, 오물!
열심히 주둥이를 놀렸던 무진은 육포를 씹으며 전장을 관전했다. 대결의 장에서 교묘하게 간격을 조절해 놓았다. 닿을 듯, 말 듯. 적정 거리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었다.
“현장감 넘친다, 그치?”
“사람이 죽어 가는데, 태평한 소리나 할 때예요?”
“내 사람 아니잖아.”
내 사람 아니면 몰살당해도 딱히 상관없다는 무책임함에 북궁혜는 혀를 내둘렀다. 이 인간의 사고 구조는 자신의 울타리 외에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혈궁주와 협상을 하신 거 아니었어요?”
“맞아.”
“대체 어떤 조건이기에 혈천이 직접 친위대까지 끌고 찾아온 거죠?”
“그건 나중에 말해 줄게.”
알아도 상관은 없는데, 지금 말하면 펄쩍 뛰며 귀찮은 짓을 할지 모른다. 일단은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다음에 혈천과 오붓한 대화를 이어 갈 예정이다.
북궁혜도 따져 묻는 대신,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북해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저기요.”
“왜?”
“아버지는 혈궁주보다 약하진 않아요.”
“효녀 나셨구나.”
“사실이거든요.”
“내가 북해에 가기 전엔 아니었지.”
북천신결을 얻지 못했던 북해천존은 혈천과 비교하면 반수는 뒤처졌다. 우물 안에서 자기가 천하제일인 줄 알고 우쭐했겠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북해성의 은혜가 크네요, 정말!”
“비꼬면 맞는다.”
“……진심이에요!”
“이번에는 역할에 충실해서 봐주는 거야. 다음에는 국물도 없으니 항상 주둥이를 신중히 사용하도록 해. 그리 막 놀리다가 비명횡사한다, 너.”
역할에 충실하단 말이 비수가 되어 꽂혔다.
북궁혜는 울컥하는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는데, 잘했다고 하면 이거야말로 빈정대는 거 아닌가?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두고 보세요!’
마땅치 않아 하는 북궁혜와 달리 무진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북궁혜는 존재 자체로 막중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혈천과의 협상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북궁혜가 아니었다면 애를 먹었을 수도 있었다.
‘얘는 칭찬을 해 줘도 지랄이냐?’
-평소 네가 한 행실을 돌이켜 보고서나 그딴 말을 해라.
‘나야 완벽하지.’
-주둥이만 살아서 마구 날뛰는구나.
‘주둥이도 없는 놈보단 낫겠지.’
-내 몸을 찾는 날,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찾는 즉시 대결 어때? 쫄리면 뒈지시든가?’
-얼마든지.
현재의 무진은 미래의 무진보다 몇 배는 더 강해졌다. 그런 무진을 미래의 마왕도 아니고, 현재의 마왕이 이길 수 있을까? 단순히 영혼이 바뀌었다고 될 일은 아닐 텐데. 그런데도 자신만만하다면 꼼수가 있다는 의미가 되었다.
‘이거 혹시 영혼을 합체하면 두 배 이상으로 강해지는 뭣 같은 경우는 아니지?’
-……당연하다!
‘호오, 그렇구나.’
-절대 아니다!
‘알았어, 아니라고 믿어 줄게.’
무진의 격장지계에 넘어간 마왕은 분했다.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마왕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확신은 금물이다.
미래의 영혼과 과거의 영혼이 합쳐질 때의 파급력은 알 수 없다. 다만, 약해지진 않을 것 같았다. 육체는 영혼을 심는 도구로써, 영혼이 두 배 이상으로 강해지면 육체도 자연히 강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데, 단순한 격장지계에 까발려지고 말았다. 마왕으로선 하나의 중요한 패를 스스로 알려 준 꼴이었다. 그 사실이 못 견디도록 수치스러웠다.
다른 놈도 아니고 돌대가리인 전왕 따위에게.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
-내 육체다.
‘그래, 알아.’
-죽일 필요는 없잖아.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가서 지옥을 경험한 아이가 가엽지도 않느냐!
‘마왕한테 죽은 사람이 얼만데, 가엽다는 말이 나와? 이거 아주 적반하장이구먼.’
-네놈이 더 많이 죽였어, 이 새끼야!
‘그러니까 금제부터 해결해.’
금제도 벗어나지 못하는 주제에 육체를 탐하고 있었다.
육체를 얻는 순간 금제가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다. 마왕에게 금제를 풀라고 하는 연유가 바로 그것이다. 육체를 얻어서 강해졌을 때 금제가 발동하면 사육사에게 강력한 병기를 내어주는 짓이 된다.
“이런, 방심하면 안 되지.”
혈천은 사사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비슷했을지 몰라도, 일대일에서 사사는 혈천의 상대로 부족함이 드러났다.
정면 대결에 일가견이 있는 혈천과 달리 사사는 환술을 사용했을 때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영역을 만들지 못한 사사로선 삼 할 이상의 손해를 보며 싸우고 있었다.
반면 환살은 피해를 보면서도 기어이 환극무영살진의 토대를 완성했다. 동료의 죽음을 이용해 축을 그려 놓고, 혈병을 유인해 냈다. 일전 백살과 마찬가지로 혈병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전장에선 완벽한 학살병기지만, 유인책에 약했다.
물론, 아무나 유인해서는 혈병을 끌어내기 어렵다. 감각이 뛰어난 전투병기를 현혹할 수준은 되어야 했다. 그런 정도의 단체는 현 무림에서도 많지 않았다.
-환극무영살진, 나락(奈落).
환상의 극의가 발동하는 순간이다. 이 안에서라면 환살은 혈병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폭, 폭, 폭!
환극무영살진의 축이 되는 자들의 이마에 흑점이 들어왔다가 쏘옥! 나갔다. 이어서 흘러내리는 핏물과 함께 영혼을 관통당한 육체가 쓰러졌다.
정적이 흐르지만, 살수는 멈추지 않았다. 약점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푸욱, 푸욱!
등을 관통하여 심장이 뚫렸다.
혈병과의 전투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던 환살로선 무진의 암수에 무방비였다. 설령, 안다고 해도 방비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모랫바닥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지.’
-돌다리다.
무진은 암수를 쓰기 전에 미리 신화마정갑을 바닥에 깔아 놓고 있었다. 돗자리를 깔고 술을 마시며 깔깔거렸던 모든 행위가 단순 기만이나 조롱이 아닌 함정을 파기 위한 미끼였던 것이다.
화룡점정으로서 무진은 겸손의 미덕을 발휘했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린 곧 형제가 될 사이가 아닙니까.”
혈천의 공세에 밀려 막대한 손해를 본 기사천은 냉철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환살을 이용하여 회심의 수를 쓰려고 했거늘, 그마저도 허무하게 무산되고 말았다.
시도라도 해 봤다면 억울하지나 않지, 하려는 낌새만 보여도 귀신같이 알아채고 훼방을 놓았다.
꽈아아앙!
환살의 허망한 죽음에도 기사천에겐 뚜렷한 해결책이 없었다. 혈천의 공세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혈천공을 바탕으로 한 절기가 해일처럼 밀려와 기사천을 압박했다.
-혈황군림(血皇君臨), 종말(終末).
기사천의 약점을 틀어잡은 혈천은 사방으로 뿌려 놓은 혈기를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 역시도 기사천과 마찬가지로 승부를 결정짓기 위해 자신만의 공간을 완성했다.
망설이지 않고 결판을 지을 회심의 수를 꺼내 들었다.
푸아아아앙!
공간 자체를 뭉개 버리는 혈천의 가공할 기공이었다. 혈천공의 극의가 살아 있는 혈기와 융화해 혈황군림으로 이어졌다.
혈천은 기사천의 완전한 죽음을 원했다.
후아아아앙!
나선의 용권풍, 사막을 보고 자란 자만이 아는 사막의 폭풍이었다. 자연이 주는 위대함을 담은 전사의 울림이 무공으로 재현되었다. 자연기를 어느 정도는 운용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영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