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58
257 충성심(1)
현암은 스스로 진의 축이 되었으며, 환살을 제물로 삼아 지옥사사겁천진(地獄死死劫天陣)을 펼쳤다. 어차피 이 혈투는 혈천을 죽여야 끝이 난다.
환살의 폭사로 혈병도 삼분지 일만 남았다. 승패의 향방은 애초부터 혈천과 관련이 있었다. 그를 지옥사사겁천진으로 묶어놓은 후에 죽은 자들의 공간으로 잡아챘다.
“대체 무슨 짓을?”
“어디 발버둥을 쳐 보아라, 혈천이여!”
일순간 반경 십 장이 지옥사사겁천진으로 묶이며 외부와 단절이 되어 버렸다. 먹물을 머금은 듯한 그물의 망이 촘촘히 모이더니 현암과 혈천을 삼켰다.
“이런다고 나를 이길 성싶으냐!”
“자신이 처한 상태도 모르고 허세를 부리는구나!”
어둠으로 물들어 버린 공간,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혈천은 공력을 끌어 올려 시야를 확보했다. 그러자 검은 기운이 물처럼 일렁이며 일어서고 있었다.
곧 사람의 형체로 화해 혈천을 향해 쇄도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광경이었다.
“환상 따위로 나를 어찌할 순 없다!”
화르르르르!
혈천염화를 발동한 혈천은 주변을 화기로 태워버렸다.
츠으으으으!
쇄도해 오던 망자가 가공할 염기에 증발하지만, 이미 죽은 자들이었다. 가둬 놓은 진 속에선 무한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태워버릴수록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크하하하하하하!
현암은 혈천의 허둥지둥대는 꼴을 비웃으며 여태 당했던 것을 보상받았다.
내색하지 않았으나, 혈천도 내심 인정했다. 상황이 아주 좋지 않았다.
‘놈의 말대로다.’
이대로는 끝이 없다.
꽈아아앙!
혈천은 죽여도 죽여도 끝나지 않는 망혼과 상대하기보다 현암을 직접 노렸다. 하나, 일 촌 간에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정면에 있었던 현암이 아예 다른 방향에서 나타났다.
‘진 안에선 내 감각마저 피한단 말인가?’
절대경에 오르면 감각 자체가 일반적인 영역을 초월한 상태가 된다. 환술이나 환영이 통하지 않는 궁극의 단계거늘. 아예 느끼지도 못한 사이에 거리가 멀어졌다.
‘이런!’
이 안이 절대 넓진 않을 텐데.
거리감이 사라졌다.
찌릿!
파앗!
운신의 폭이 좁아진 고립무원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에 반격을 가했다.
‘없어?’
귀신을 공격한 듯 닿지 않았다.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며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주르르!
검흔이 생겼다.
혈천의 옆구리가 붉게 물들었다. 금강불괴에 이른 육신에 흠집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위협적인 것은 지척까지 접근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한 감각의 교란에 있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놈의 호언대로 이 안은 위험하다.
혈천은 자신이 위험에 빠졌다는 걸 절감했다. 어설픈 수로는 벗어나기 요원하다. 거리감을 잃어버린 탓에 시야의 확보가 불가능했다. 함부로 움직이기도 어렵다. 운신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는 망자를 처리하기도 쉽지 않았다.
우워어어어어~~~!
원한에 사무친 망자의 비명이 반향(反響)을 일으켜 소리마저 교란했다. 마치 죽음의 진언처럼 생자를 끌어들였다. 육체는 물론, 정신마저 혼란을 가중시켰다.
“방문좌도의 사특한 술수로 나를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혈천의 공력이 일순 배로 증폭했다.
여력을 남기지 않고 폭화를 일으키며 화기가 방위를 정하지 않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단숨에 진을 태워버리겠다는 혈천의 의지였다.
화르르르르르!
어둠을 태우는 축융(祝融)의 화인(火印)처럼 팔열지옥을 방불케 했다.
검게 변해 버린 진의 영역.
그 앞에 선 혈병들은 우왕좌왕했다. 환살을 처리했지만, 주인께선 진에 갇히고 말았다. 놈들은 죽음마저도 이 순간을 위해서 교묘하게 이용했다. 섬뜩하면서도 과감한 수가 절묘하게 들어맞았다.
퍼퍼퍼펑!
시간을 끌어선 위험했다. 진을 부수기 위해서 공력을 전이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하나, 진은 마치 깊은 수심의 바다처럼 잠시간 파도를 일으킬 뿐, 원래대로 돌아와 버렸다.
흐억!
전력을 쏟아 낸 혈병은 기겁하고 말았다. 진은 내력을 흡수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생기까지 빨아들였다. 암흑진에 손을 댔던 혈병은 생기가 빨려 들어가자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순식간에 목내이가 되는 광경은 생경함을 넘어 공포였다.
그뿐이랴, 주변의 생기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암흑진을 중심으로 검게 물들어 가는 공간은 사기로 가득했다.
“……이럴 수가!”
혈병으로선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내력을 발출할수록 암흑진이 더욱 강해지는 걸 느꼈다. 외부의 충격이 내부에 갇힌 혈천을 위협하는 행위가 되었다.
이도 저도 못 하는 가운데, 암흑진에서 거리마저 두어야 했다. 혈병으로선 방도를 찾으려고 애를 쓰지만, 뾰족한 수는커녕 발만 동동 구르는 무력감을 느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혈병의 구심인 혈병 일호, 적리단철이 체감하는 막막함은 대원들 이상이었다. 백 명의 혈병 중 절반 이상을 잃었고, 이젠 궁주님의 안위마저 위태로웠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암흑진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전사로서 희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암흑진은 일반적인 상리를 완전히 거슬렀다. 섣불리 공략했다가는 대원들을 희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없기에 더더욱 막막했다. 차라리 수만의 적을 상대로 결사 항전을 벌이는 편이 나았다.
‘시간을 끌수록 궁주님은 위험하다!’
적리단철에게 선택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궁주의 명령을 따랐을 뿐, 선택의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순간이 인생 최대의 고비가 되었다. 차라리 목숨을 걸라면 쉬운 방도였다. 단호히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현실이 답답했다.
‘누군가 올바른 선택을 해준다면…… 응?’
잘못 봤나?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잘 봤네.
궁주의 목숨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처한 급박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자들. 돗자리를 예쁘게 깔고, 좋은 술을 마시고, 맛있는 안주를 씹으며 사태를 방관했다.
개……술판을 받쳐 주고 있는 북해빙궁의 여식은 그래도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지만, 사내는 남의 일처럼 평온하다. 자신들이 제대로 보고 있는지 주변을 돌아봐야 했다.
혈병들도 어안이 벙벙해서 병신같이 서서 봤다.
하는 말도 가관이었다.
남의 집 불구경 다음으로 재밌는 생사혈투의 관전자로서, 다음에 펼쳐진 광경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술맛 끝내준다, 안 그러냐?”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잖아요. 제발 조용히, 노려본다고요.”
“어허, 너 지금 빙궁이 고향이라고 혈궁 무시하는 거야?”
“제가 언제 또 무시했다고 그래요?”
“저들은 혈궁의 친위대야. 이런 문제쯤은 얼마든지 간단하게 해결할 능력이 차고 넘친다고.”
“망했다면서요?”
“그냥 해본 소리야. 사소한 단어에 목숨 걸지 마라.”
다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무진은 옛사람의 지식을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혈천을 믿고 있었다. 사막의 주인이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암흑진의 일용할 양식이 되겠지만.
허!
적리단철은 저들의 개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는 고수의 반열에 든 무인이다. 이 거리에서 못 들을 리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저들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북해의 사신은 혈궁의 위상을 높여 주고 있었다. 이 사태를 해결하리란 믿음을 보여주었다. 그 앞에서 왜 우릴 띄워주냐고 나무랄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요상하게도 칭찬이 욕처럼 들렸다. 조롱하고 있는 것 같은 더러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 작자가!’
후자라면 본때를 보여주어야겠지만, 적리단철은 포기해야 했다. 환살과 대치 중일 때 사내의 조언과 도움이 없었다면 피해를 양산했을 것이다. 시기적절하게 대응할 방법을 알려 주었다. 따지고 보면 이미 큰 은혜를 입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은혜를 입은 주제에 더 도와주지 않고 방관했다고 욕을 한다면 세간의 비웃음거리가 되고도 남았다.
‘그래도 그렇지!’
시작부터 지금까지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눈치가 없다면 모를까. 돌아가는 사태를 모르지도 않았다. 그가 한 조언은 국면을 알지 못하고선 할 수가 없는 절묘한 선택이었다.
‘선택? 어쩌면.’
적리단철은 자신을 비롯한 대원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에겐 선택지가 따로 없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을 뿐이었다. 그런 삶을 살아온 자신들이 어떤 선택을 한단 말인가? 사고, 분별, 조언, 선택은 자신들과 관계가 없는 사안이었다.
병기는 병기로서의 역할이 있었다.
우우우웅!
망설일 시간이 없다. 암흑진이 용틀임을 하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안에서 어떤 일이든 벌어지는 중이다. 그것이 궁주님에게 결단코 이롭지는 않을 터.
쌔애앵!
적리단철은 즉시 북해의 사신을 향해 달려갔다. 한시라도 빨리 어떤 선택이든 해야 했다. 망설이고 있다 궁주님이 해를 입는다면 뒷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후로는 자신들의 목숨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위험해진다.
적리단철은 사신의 앞에 서서 간청했다.
“북궁 대협, 이 사태를 해결할 고언을 청합니다!”
“하오나 궁주께선 사막제일인이십니다. 손수 끝장을 내시고 싶으실 텐데, 외인인 제가 개입한다면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점에 관해서는 대원들과 합의를 끝내고 제게 물어보는 것이겠지요?”
“……그건!”
지금까지 시기적절한 조언을 했기에 적리단철은 기대를 했었다. 그라면 현명한 판단을 내려 줄 거란 믿음이 있었다.
한데, 시작부터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하지?’
궁주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거론하자, 적리단철은 어찌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상황을 놓고 보면 북궁진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러나 자칫 궁주님의 위엄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궁주님의 자존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망설임이 길어졌다. 사태를 해결하더라도, 애초에 도움이 필요 없었다면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
고민에 빠진 적리단철을 무진은 가만두지 않았다.
더더욱 고민의 수렁에 빠지도록 차근차근 바닥을 다졌다. 대화든, 무공이든,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 법이다.
“성함이 어찌 되시오?”
“적리단철입니다.”
“저나, 적리 대주나 궁주님이 이 상황을 헤쳐나갈 힘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하나, 단체의 수장은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일말의 위험이 있다면 수하로서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손 놓고 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무진과의 대화에 적리단철은 마구 휘둘렸다. 말을 나눌 때마다 희비가 엇갈렸다. 정작 도와줄지 말지, 선택은커녕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우우웅!
암흑진이 더 커진 것 같다.
적리단철은 급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시간이 없다니요, 그 말씀은 고작 반각조차 궁주님께서 견디지 못한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궁주님은 분명 잘 견뎌 내시고 있을 겁니다!”
“아무렴요, 저도 궁주님을 믿고 있었답니다. 그럼에도 대비는 해야겠지요.”
사막의 용권풍에 휩쓸린 듯 들었다 놨다, 고수의 반열에 든 적리단철은 현기증을 느꼈다.
왜 자신이 여기까지 와서 이런 난감한 상황에 놓여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스스로 해결을 해 볼까? 그러는 편이 마음은 편할 것 같았다.
“저 암흑진은 환술진과 흡혈진을 교묘하게 섞어 놓았습니다. 진법에 대한 지식 없이 무작정 달려들면 아마 진의 자양분이 되기 쉬울 겁니다.”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돌아서려던 적리단철은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한 채 망부석이 되었다. 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궁박한 처지가 되었다. 차라리 틀린 말을 하면 모르겠는데, 다 맞는 말만 하고 지랄이었다. 그의 말대로 함부로 공격했다간 궁주를 위험하게 하는 행위였다.
“적리 대주께선 내부인이라 궁주께서 아량을 베풀 수도 있지만, 저는 외인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사막과는 관계가 소원한 북해인이기도 하고요. 그런 제가 나서면 궁주님의 체면에 손상을 입는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간 경쟁 관계였던 북해인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으실 테고요.”
……(빠지지직)!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야,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