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61
260 인사유명(人死留名)(2)
날이 밝아 오려면 밤은 여전히 길었다. 게르 안과 밖으로 불을 피워 시야를 밝혔다.
무진은 말고기 죽을 두 그릇 마신 후 누웠다.
밥 먹고 바로 누울 때가 비로써 무릉도원이었다. 괜히 움직여서 포만감을 지우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중생들의 부질없는 짓이지. 다만, 절대경의 고수가 아니면 비만으로 인해 자다가 급사할 수도 있었다.
반 시진이 흘렀다.
누워서 잠을 청했던 무진은 밖의 소란에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막을 걷자 난처한 얼굴을 한 적리단철이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완연해 보였다. 예상대로 잘 되지 않은 사람의 전형이었다.
적리단철은 우물쭈물하며 무진을 기다리게 했다. 보통 이러면 궁금해서라도 묻기 마련이나, 무진은 다시 천막을 닫고 자리에 누웠다.
허!
물어봐 주기를 기다렸던 적리단철로서는 헛바람을 토하고 말았다. 북해의 사신은 상식적인 선으로 판단을 해선 안 되었다. 그렇다고 원망할 수도, 탓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멋대로 판단을 내렸던 자신의 결정을 후회해야 했다.
“북궁 대협!”
민망하고 무안하지만, 아쉬운 쪽은 적리단철이었다.
닫혔던 천막이 열리기까지 느릿느릿했다.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운 사람이라,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왜요?”
“그것이……!”
막상 물어보니 대답이 궁색해진 적리단철이었다. 그러나 망설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달팽이처럼 집 안에서 고개만 살짝 내밀었던 북궁진이 다시 들어가려 했기 때문이다.
“궁주님께서 깨어나지 않습니다.”
“내상이 도진 거면 저로선 손쓸 방도가 없습니다. 전 무인이지 의원이 아닙니다.”
“내상 때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운기요상을 마친 후 내기의 흐름은 정상이셨습니다.”
“정상이라, 하면 놈의 사악한 사법에 당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이런! 제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면 궁주님의 위엄에 손상을 입게 될 텐데. 어찌하나? 신실한 수하로서 지존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거늘. 오호라, 통제라.”
“……제가 책임을 지고 청을 드리겠습니다!”
적리단철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하로서 지존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모든 책임을 안고 가라는 의도가 명백했다.
“자, 그럼! 여기 수인을 하시면 됩니다.”
“이건 또 언제?”
“자다가 썼습니다.”
“……아~!”
마치 그리될 줄 알았다는 듯 바로 꺼내 드는 계약서에 적리단철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차라리 백만 대군을 상대하는 편이 훨씬 편했다.
-치료가 끝나면 삼백만 냥을 지급하겠다.
계약서에 다른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액수는 글자도 또렷또렷하고, 정확했다. 이번에도 은자가 아니라, 금자로 삼백만 냥이었다.
“혹, 아까우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아무렴요. 고귀하신 궁주님의 목숨이 하찮은 삼백만 냥하고 같을 수는 없지요.”
북궁혜로선 식상한 장면의 연속이었다. 이 장면을 오늘만 두 번째로 보았다. 돌아가는 정황이 요상하게 비틀어져 난감함의 연속인데, 결론적으로 무진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북궁혜는 고개를 압도적으로 저었다. 운이 한두 번은 따라 준다고 해도, 매번 따라 준다면 계획적이라고 봐야 했다.
‘뭐, 천만 냥은 아니잖아.’
합쳐서 고작 육백만 냥에 불과했다. 그에 반해 북궁혜가 진 빚은 천만 냥이 넘어갔다. 천문학적인 액수에도 시큰둥할 수밖에.
빚도 계속 져 보면 감이 떨어진다. 갚을 수가 없으니 외면하고 싶은 빚의 부작용이었다. 지금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자가 불어나고 있다는 상상을 하면 잠도 오지 않는 법이다.
‘찍지 말라고도 못 하겠다.’
계약서에 수인하는 즉시 빼도 박도 못하는 무저갱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하지 않으면 뒷감당을 하기 힘들다. 궁주가 죽게 생겼는데, 그 앞에서 돈 때문에 못 고쳤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궁주가 죽는 순간 혈병들도 죽어야 했다.
‘하지만 저건 못 보겠어!’
계약을 한 즉시 무진은 궁주의 주변을 돌며 막춤사위를 발동했다.
“악귀야, 물러가라! 훠이, 훠이!”
이번에는 그래도 정상적이라고 편을 들어야 하나?
북궁혜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아!
적리단철과 혈병들도 한숨을 연이어 쉬어야 했다. 저딴 짓을 하는데 가만히 둬야 하나 망설임이 일었다. 그러나 이미 보여주지 않았는가. 차라리 사이비면 잡아서 족치면 되는데, 너무 잘 통해서 복장이 터졌다.
“얼쑤! 악귀야, 물러가라니까. 잘 가, 멀리 안 간다!”
춤은 그렇다 치고, 막말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모두의 바람이었다. 무엇보다 저 개떡 같은 춤사위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진지하게 추었다.
자기는 쪽팔리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반각 동안 춤판을 벌였던 무진이 동작을 멈췄다.
“됐습니다. 곧 일어나실 겁니다.”
“진짜로 된 겁니까?”
“어허, 그 말은 심히 불쾌하군요. 혹, 절 의심하는 겁니까?”
“……의심이라니요! 저는 북궁 대협을 믿고 있습니다. 너희들도 그렇지?”
적리단철이 대원들에게 물었다.
대원들은 뻘쭘하게 서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해야 했다. 여기서 아니라고 해 봤자, 자기들 얼굴에 침 뱉는 격이었다. 애초에 시키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습니다, 대주!”
“그렇다네요, 북궁 대협.”
그렇다고 해서 의심이 아예 사라지진 않았다. 궁주께서 깨어나지 못하면 허언이 되고 만다. 불경하게도 혈병들은 차라리 궁주께서 조금 늦게 일어났으면 했다.
아!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혈병들은 급히 입을 가리고, 심중을 숨겨야 했다.
끄응!
궁주께서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 앞에서 안도가 아닌, 아쉬움이 잔뜩 묻어 나왔기 때문이다.
‘어째서?’
적리단철은 안도를 하면서도 저딴 수법이 계속 통하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단한 수를 썼다면 또 모를까? 누가 봐도 설득력 떨어지는 개소리와 막춤사위였다.
만약 아무나 해도 통하는 짓이었다면?
오싹, 부르르르!
궁주께서 알아서 치료하는 중에 기다리지 못하고 무진에게 부탁한 꼴이 된다. 그럼 생돈 육백만 냥을 잘못된 판단으로 허공으로 날리게 되는 격이다.
‘……안 돼!’
절대 그래선 안 되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육백만 냥이었다. 혈궁이 대막제일이라고 해도 육백만 냥은 감당하기 힘든 액수였다. 그로서는 북궁진이 필요한 행위를 했다고 믿어야 했다.
우우우우웅, 휘아아아앙!
가부좌를 튼 혈천의 주위로 핏빛 선이 무한의 고리를 그리며 돌고 돌았다. 이 순간 혈천은 작은 깨달음을 얻어 혈천공을 대성하게 되었다.
혈륜무극의 경지였다.
육신에서 사방으로 퍼지는 혈천마혼기는 일대의 패자를 상징했다. 혈병은 무릎을 꿇어 사막의 지배자에게 경배를 올렸다.
우우웅, 우우웅!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혈천마혼기가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다 완전하게 변하여 혈천의 육신으로 되돌아갔다. 그 순간 육신은 혈광을 발하며 변화가 이루어졌다.
투득, 투득!
탈태환골이었다.
기존의 탈태환골에서 재차 변화를 해야 할 만큼 경지의 상승을 이루었음을 보여주었다.
오오오오!
적리단철은 대성한 지존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혈궁의 역사상 누구도 이루지 못한, 초대 혈궁주께서 보여주었던 경지가 분명하다.
후우우!
가파르게 행해졌던 호흡이 일정하게 변하는 순간, 철제양은 눈을 떴다. 핏빛으로 물들었던 머리카락은 완전한 검은색으로 돌아갔다. 이전보다 패도적이었던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하나, 자세히 보면 무궁무변의 거력이 자리했다.
“대성을 경하드립니다!”
“대성을 경하드립니다!”
혈병이 일제히 무릎을 굽혀 절제된 충성을 비쳤다.
철제양은 수하들을 굽어보며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평소에도 받아보았던 광경이라 대수롭진 않았다.
하나, 돌아가는 사태를 확인해야 했다.
‘기억이 끊어졌다.’
어처구니없게도 혈천은 대성을 이루기 전까지의 기억이 송두리째 날아간 상태였다. 혈천공을 완성했음에도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내가 이겼나?’
진에 갇혀 전력을 쏟아 낸 후 갑자기 들이닥친 암흑, 그 이후의 기억이 소실되어 버렸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경지는 상승했고, 기사천은 사라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사천을 제압하고, 운기요상에 들어갔다고 봐야 하나?
간혹, 무의식에 접어들어 기적을 이루기도 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으나, 일단은 적리 대주를 통해 확인해 봐야 했다.
“경과를 보고하라.”
“예, 궁주님.”
철제양은 자신의 예상대로 보고해 주기를 바랐다. 싸우는 도중 의식을 잃다니, 대전사로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하나, 바람은 바람일 뿐.
적리단철의 보고에 철제양은 억지로 표정을 감추어야 했다. 혈천공을 대성하지 않았다면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을 것이다. 그만큼 보고는 충격적이었다.
“북궁 대협이 아니었다면 이 사태를 해결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군.”
암흑진을 걷어 내고, 원흉인 기사천을 제거했으며, 무의식에서 깨지 못한 자신을 일깨웠다. 이뿐이랴, 혈천공을 대성할 기회를 제공했다.
‘미치겠구나.’
하나에서 열까지 죄다 은혜를 입고 말았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더 있었다.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한, 북해의 사신과 맺은 밀약이 떠올랐다.
‘어찌한다.’
은원(恩怨)은 분명히 해야 하거늘. 한데, 원(怨)이 아닌 은(恩)만 가득했다. 그 앞에서 밀약을 엎기도 민망해졌다.
이대로 가?
“궁주님, 대성을 축하드립니다. 가까이서 볼수록 정말 대단하시군요. 다시 봤습니다.”
모른 척 외면하면 편하겠지만, 무진은 놔주지 않았다. 궁주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꿈틀!
철제양은 굴곡이 생기는 미간을 간신히 유지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 못한다는 말도 공허하다. 그리고 이제 와 외면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자네의 공이 컸네.”
“공이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아무렴요. 혈천께선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하시는 분이니 약속을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무진이 품에서 계약서를 꺼내며 흔들자, 철제양은 골이 지끈거렸다. 설마 이토록 단도직입적으로 꺼낼 줄은 몰랐다. 궁으로 돌아가서 차분히 풀어 보려고 했거늘, 골치 아프게 되었다. 말을 돌려 봤자 구차한 변명이 되었다.
“혈궁의 중요 인물이 배신했다는 제 말이 사실임을 인정하십니까?”
“인정한다.”
혈궁의 궁주를 이리로 오도록 하려면 통상의 정보로는 불가능했다. 그를 끌어낼 미끼가 필요했고, 기사천이 걸려들었다. 그는 혈천이 믿는 무인이었다.
‘하는 수 없군.’
철제양도 더는 현실을 부정하지 못했다. 기사천의 배신은 그로서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설마 자신들을 미끼로 던져 혈궁 내부의 배신자를 밝혀낼 줄이야.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겠지.’
기사천의 배신은 생각도 못 한 사안이었다. 만약 오늘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모르게 지나갔을 것이다. 차후, 본궁의 치명적인 독버섯이 될 자를 제거할 수 있었다. 북해의 사신에게 입은 은혜가 크고 깊었다.
“모두 합해서 천이백만 냥입니다.”
“곧 내어 주…… 뭔 냥?”
흔쾌히 주겠다고 하려던 철제양은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한 의문이었다.
분명 육백만 냥을 주겠다고 계약서에 수인했다. 그런데 갑자기 두 배로 늘어 천이백만 냥이 되었다. 눈이 돌아가서 불같이 화를 내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것인가!”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해하시는 듯한데, 이 부분은 적리 대주가 계약한 내용입니다. 문제나 이의가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이겠습니다.”
무진은 계약서 두 장을 꺼냈다.
내용을 확인한 철제양은 아찔한 현기증에 비틀거릴 뻔했다. 자신이 의식을 잃고 있었던 시간 동안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적리 대주의 충성심에 감탄했습니다. 주인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분을 수하로 두다니. 부럽습니다, 궁주님.”
“……!”
차마 아니라고 하지 못한 채 철제양은 말문이 막혔다. 충직한 수하를 두어서 좋겠다고 하는데, 그 앞에서 화를 내면 자신의 편협함을 드러내는 꼴이었다.
“궁주님의 위엄에 손상을 입을까 전전긍긍하며, 본인의 책임으로 두려는 마음가짐은 누구나 본받아야 할 충의의 상징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군.”
철제양은 차마 갚지 못하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하물며 적리 대주에게 받으라고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자신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나선 수하를 타박해선 궁주로서 위신이 서지 않는다. 자연히 적리 대주의 빚은 자신의 빚이 되어 버렸다.
‘와, 정말 말이 안 나오네!’
북궁혜는 일련의 상황을 되짚어 보며 혀를 내둘렀다. 처음에는 왜 저러지? 의문이 쌓였는데 종합하면 천이백만 냥이었다.
북해보다 빚이 많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차곡차곡, 계단을 밟듯 무진은 토대를 만든 것이다. 혈궁으로선 천이백만 냥을 내놓지 않을 수 없는 궁지에 몰렸다. 내색하지 않을 뿐, 혈천은 복장이 터질 것이다.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네!’
체면을 구기지 않으려면 돈을 갚아야 했다. 북궁혜는 무진의 치밀한 수작에 혀를 내둘렀다. 갚지 않는 순간 혈천은 자기가 싼 똥에 얼굴을 뭉개는 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