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7
026 이서정(4)
강호 무림을 위해 잘 싸워보자고 하고선 정작 문파의 재정 관리나 하게 된다면 과연 용무길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눈에 선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라. 식솔들은 좋아할 테니까. 낙방학사의 아내와 자식들의 삶은 고될 수밖에 없었다.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닐지라도 삶을 풍족하게 해준다.
벌컥!
문이 열리고 안채로 급히 뛰어 들어온 동생이었다. 무진은 대청에 앉아 동생을 보았다.
“왜?”
“왜라니, 그걸 말이라고 해?”
“며칠 더 묶게 됐잖아.”
“그래도 적당히 했어야지.”
“난 적당히 했는데.”
“그게 적당히라고?”
“너처럼 다루진 않았잖아. 혹시 그러길 바랐어?”
한 방으로 끝을 냈으니 고통은 잠시였다. 기억이 난다 해도 고통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이보다 좋은 대접을 하기도 힘들다.
“그건 아니지만, 충격이 클 텐데.”
“너 그녀를 너무 만만히 보는구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간 조만간 역전당한다. 솔직히 재능만 놓고 보면 너보다 그녀가 훨씬 뛰어나. 알지?”
“말을 해도 꼭.”
“그래서 하는 말이야. 고수는 재능만으로 탄생하지 않아.”
동생의 재능도 남부럽지 않은 편이긴 하나, 냉정하게 따지면 이서정이 더 높다. 그러나 무인에게 재능은 고수로 가는 하나의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재능이 높을수록 쉽게 올라가겠지만, 최후는 또 모른다.
물론 확률을 따지면 재능이 중요하긴 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벽을 또 허물 거야.”
“그게 말이 돼?”
“말이 되지. 그게 재능이거든.”
“실감 안 나네.”
“그러니까 넌 노력충이 되어야지.”
“앞으로도 패겠다는 거구나.”
“안주하면 더 맞겠지.”
무호는 인상을 구겼다.
따지러 왔건만, 오히려 훈계만 잔뜩 들었다. 그런데 반박은커녕 맞는 말만 하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호감과는 별개로 간격을 내어주고 싶진 않았다. 이는 남녀를 떠나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었다.
“넌 송호문의 문주로서 강호의 지존이 되면 돼.”
“언제는 절대고수라며?”
“절대고수도 하고, 지존도 해라.”
“제기랄. 대체 난 얼마나 많은 걸 해야 되는 거야!”
“그게 바로 후계자의 의무다.”
“이러려고 나 후계자 시킨 거야!”
“얼레, 요즘 들어 투정이 심해졌다. 너 원래 이런 성격 아니잖아. 진중하자. 품위가 있어야지.”
품위고 나발이고, 의무에 깔려 죽게 생겼다.
무호는 형이란 자가 이렇게 무책임하다는 것에 분통이 터졌다. 오 년 전 가족을 걸고 한 약속이 뼈에 사무쳤다. 하지 않을걸. 괜한 약속을 하는 바람에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형을 잘 둬서 말이라도 붙여 보는 거 아니냐.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었어.”
“젠장!”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제멋대로인 형이지만, 맞는 말이다. 가르침이 없었다면 이 소저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테니까.
‘사내는 주먹이란다.’
센 놈이 다 차지하거든.
부정하고 싶다면 역사를 되짚어 봐라.
콕, 콕!
볼살을 건드리는 느낌에 정신이 돌아왔다. 회복된 의식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로 인해 뭉개져 보였지만, 귀여운 외형의 동그란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삼촌, 언니 깼어!”
다다다!
이서정이 미처 알은체를 하기도 전에 소녀는 삼촌을 부르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이에 비해서 굉장히 안정적이고 날랬다. 그래도 그렇지 부르기도 전에 가버리면.
난감했다.
이서정은 일단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옆에 주전자와 잔이 있었다. 주전자를 기울여 물을 따라 마셨다. 시원한 물이 들어가자 정신이 맑아졌다.
가부좌를 틀려고 하자 몸이 비명을 조금 질렀다. 충격의 여파가 남아 있는 듯하다.
급한 대로 소주천을 하여 육신을 점검했다. 내상을 입기는 했지만, 잠깐의 운기요상을 하자 거의 회복이 되었다.
내상보다는 육신의 고통이 컸던 모양인데, 경직된 근육, 혈맥, 골격이 의식이 살아남과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육체가 간직했던 기억이 돌아와서 과거를 떠올리게 한 것이다.
허!
이서정은 대련을 복기할 필요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뭔가를 하지도 않았다.
단 일격.
그걸로 대련은 끝이 났다.
상식적인 범위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비록 무호 공자와의 비무로 체력과 공력의 손실이 있기는 했어도 깨달음을 얻은 상태였다. 완벽히 체화할 시간은 부족했지만, 그 전과는 확연히 달랐을 텐데 반응은커녕 답을 찾지도 못한 채 의식이 끊어져 버렸다.
대체?
솔직히 믿기 힘들다.
강호는 넓고 기인이사는 모래알처럼 많다고 스승께서 항상 말씀하셨다. 그러니 자만하지 말고 매사에 신중히 행동해야 한다고. 협을 행함에 망설임은 옳지 않으나, 만용은 경계하라는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강호에서 자신의 성취를 따를 자는 많지 않았다. 안휘오흉으로 불리는 자들도 알려진 바와는 달리 허술했다.
한데, 이 사내는 대체?
상식적인 선에서 예측이 되지 않는다.
드륵!
상념이 길어지자 때마침 무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폐를 끼쳤어요.”
“폐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하온데?”
이서정은 물어보고는 싶었지만, 망설였다. 이런 적이 없었기에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걸 느꼈을까?
무호는 미소를 지으며 사실을 알려주었다. 형한테 통지를 받은 상태라 알려줘도 무방했다.
“형은 절대고수입니다.”
“아! 그렇군요.”
“단, 비밀입니다.”
“비밀치고는 허술하네요.”
“그래서 주변이 피해를 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약자는 서러운 법이지요.”
형을 상기할수록 답답한 무호의 푸념이었다.
듣고 나니.
풋!
이서정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초절정 고수가 약자라고 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래서 평소와는 달리 냉정함을 유지하지 못했다.
“아,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형한테는 동네북이 맞으니까요.”
“그럼 저도 마찬가지네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저도 그래요.”
동류라는 느낌이 강하게 작용하자 말문이 저절로 트였다. 사실 한 사람을 대상으로 흉을 보면 동료 의식이 생기는 법이다. 이건 남녀의 성별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그 나이에 절대고수라니, 믿어지지 않네요.”
“옆에서 보는 저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말이 되지 않거든요.”
“혹, 기연을 얻은 걸까요?”
“저도 그런 의심을 해봤는데, 밖엘 잘 나가지 않습니다. 뭐랄까? 집돌이라고 해야 하나요.”
“어째서요?”
“형수님과 딸바보거든요. 내 못난 조카만 불쌍하죠. 사내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차별을 당하는군요.”
“한데, 미주 고 녀석이 워낙 영악해서 못 당합니다.”
이서정에게는 생경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절대고수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진 않는다. 송호문은 그의 존재 자체로 대문파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절대고수는 일인군단으로 칭해진다.
문파 하나쯤 부숴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대륙에 알려진 절대고수를 보면 답이 나온다. 그들 대다수는 명문거파나 대문파를 다스렸다. 물론 그 중 몇은 개인이기도 하나, 절대 개인으로 치부되지 않는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아졌어요.”
“다시 도전하실 겁니까? 형님은 언제든 오라고 했습니다.”
“솔직히 엄두가 안 나네요. 저는 강 공자와 다르잖아요.”
최선을 다해 상대를 해주었다. 그래서 답이 안 나왔다. 다시 도전한들, 작금의 결과는 뒤집히지 않을 거다. 뭔가 배울만한 단서조차 잡지 못했다.
‘차별이 심해.’
동생이라 괴롭힘이 심하다고 했지만, 실상 배움을 위해선 필요한 일이었다. 반면에 자신은 아무런 배움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좀 얄밉기는 했다.
“가기 전에 형이 들르라고 했습니다.”
“대련은 아직 힘들어요.”
“대련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사과할 사람은 아니니 기대는 마세요.”
“저도 기대 안 해요.”
이서정은 사과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해봤자 무인으로서의 가치가 떨어뜨리는 일이다.
그런데도 궁금하기는 했다.
이서정은 회복하고 얼마간 문파를 돌아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작은 문파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문파를 구성하는 무인의 수준이 낮지는 않았지만, 비대칭을 이루었다. 절대고수인 무진을 축으로 문주와 소문주를 비롯한 몇몇은 높은데, 장로들의 수준은 또 평범하다.
이서정은 무호와 함께 문파를 구경하면서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젊은 무인일수록 새로운 무리를 빠르게 습득했다. 그에 반해 장로들은 새로운 걸 받아들이고도 망설였던 것이다.
차차 극복해나갈 문제였다.
송호문을 떠나기 전 이서정은 무진을 만났다.
무진은 동생과 비무했던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실 말씀이 있다고 들었어요.”
“빙정을 원하시죠?”
“……!”
예상치도 못한 물음에 이서정은 말문이 막혔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해서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딱히 이상하진 않았다. 빙공을 익힌 무인에게 빙정은 소림의 대환단과 같은 천고의 영약에 비견되었다.
“맞아요. 한데, 빙정을 언급한 이유가 있나요?”
“빙정이 있는 곳을 압니다.”
“예?”
“나중에 제 부탁을 들어준다면 장소를 알려드리죠.”
허를 제대로 찔린 이서정은 평소와 달리 음성이 떨렸다. 마치 귀신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당신 뭐예요?”
“싫다면 그냥 가셔도 됩니다.”
무진은 붙잡지 않았다. 믿고 안 믿고는 그녀의 선택이었다. 사실 믿지 않아도 어쩔 도리는 없다. 의심도 없이 덥석 잡는다면 그것 역시도 허술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도 믿겠다면 받아들인다.
어차피 그녀는 미래의 절대고수이고, 마신교와 대척점에 있었다. 빙정을 얻게 될 시기를 조금 앞당긴다면 마신교는 좀 더 애를 먹을 것이다. 또 하나의 방수를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내어준…… 아, 내 것도 아니니. 원주인한테 일찍 인계한다고 보면 되었다.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는 이서정이었다.
하나, 며칠씩 누워…… 문파에 있도록 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철두철미한 성향이라면 문파에 대해서 나름대로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동생과 짝짜꿍이 되어 내 험담을 한 것은 의외이기는 하지만.
평정심을 회복한 이서정이 되물었다.
“장소에 없으면요?”
“그땐 비무를 해드리지요.”
“뻔뻔하시네요.”
“가르침을 드릴 수도 있지요.”
“좋아요. 하지만 잊지 마세요.”
“이 소저도 약속은 지켜야 할 겁니다. 전 손해 보고 사는 성격이 아닙니다.”
무진의 무심한 미소에 이서정은 등골이 서늘했다. 단순한 엄포가 아니었다. 이런 느낌은 사부님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자일 지도 몰랐다. 사부의 진신을 알기에 더더욱 의문이다.
“어디에요?”
“옥문관을 넘어야 합니다.”
“대막이군요.”
“그렇습니다.”
믿기 어려웠다.
빙정이라면 당연히 북해의 어느 곳에 있을 줄 알았다. 상식적이지 않았다. 그 뜨거운 사막에서 빙정이 생성될 수 있을까? 함정이면 어떡하지, 의심은 인지상정이었다.
“완성된 빙정은 시간이 흐른다고 변하지 않습니다.”
“이번 한 번 속아드리죠.”
무진은 정확한 위치를 알려준 후, 그녀를 떠나보냈다. 빙정을 얻어 절대고수가 되어 돌아온다면 아주 볼만할 것이다.
‘후후후.’
동생의 미래가 아름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