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77
276 새옹지마(3)
무신총과 신화마정갑으로 무림이 시끄럽게 변하며 의혹이 쌓여갔다. 각 시대의 절대자로 불렸던 자들의 무공과 신병이기에, 무인이라면 탐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기가 매우 공교로웠다. 무신총과 신화마정갑의 비도가 비슷한 날짜에 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계략을 꾸민다는 분위기가 조금씩 형성되었다.
무림이 시끄러운 때에 녹림은 변화를 추구하고, 구조를 쇄신하는 작업을 했다. 겉으로는 개혁의 바람이나, 실제는 내부에 숨어있는 독버섯을 골라내기 위한 쇄신이었다.
“녹림에 심은 우리 쪽 인물들이 대거 물갈이되었습니다.”
“당했구나!”
“우리가 움직이기 무섭게 역으로 추적당한 듯합니다. 아무래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 녹림왕은 직접 고른 정예를 따로 빼놓았습니다.”
“성급하게 움직였어, 빌어먹을!”
신화마정갑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 것이 분명했다. 녹림왕은 본인이 직접 신화마정갑을 찾기 위해서 내부를 정리하고, 정예를 빼놓은 것이다. 자신의 동선을 믿을 수 있는 자에게만 알린 것도 신화마정갑을 찾기 위한 일환이었다.
차라리 녹림왕이 먼저 움직이는 때를 노렸어야 했다. 서두르는 바람에 공들여 심은 세작의 일부가 날아가 버렸다. 이로 인해 개방에서도 냄새를 맡고 녹림을 주시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사태가 귀찮아졌다.
실제로 개방은 남궁세가와 연관이 있으며, 황보세가도 가담한 상태였다. 신화마정갑이 녹림왕에게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는 정황을 보면 녹림왕이 어설픈 짓을 하진 않았을 텐데, 개방이 어떻게 알고?”
“소호채를 조사할 때 개방이 냄새를 맡은 것 같습니다.”
소호채를 꾸준히 조사했던 개방은 녹림이 이후에 나섰다는 걸 알고 이상하게 여겼을 수도 있다.
이쪽이 가장 정답에 가까운 추론이었다. 아니라면 누군가 알고서 알려 줬다는 소리가 되는데, 말이 되지 않았다.
흠.
녹림, 개방, 남궁세가, 황보세가가 엮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무신총에 대한 소문도 이쯤 되면 균형을 잃게 된다. 준비해 놓은 함정을 사용하기도 전에 김이 빠질 수 있었다.
‘어쩌면 기횔 수도 있겠군.’
검제, 취선, 권왕은 눈엣가시였다. 이들의 개입으로 입은 피해가 적지 않았다. 단번에 처리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다.
현천군에겐 실패를 만회할 절호의 기회였다. 이전의 그라면 모험은 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정보력을 녹림에 집중해.”
“예, 천군.”
***
평온한 하늘.
차분한 문파.
여유로운 나 자신을 돌아보며 관조를 마친 무호는 가부좌를 풀었다. 근래 깨달음을 얻어 화경에 대해서 알아 가는 단계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막연히 화경에 올랐다고 본다면, 지금은 화경의 실체를 규명할 수 있게 되었다.
‘화경이라고 해서 다 같은 화경은 아니구나.’
비교하면 지금 펼치는 검강과 어제 펼쳤던 검강은 아예 달랐다. 막고 있던 벽을 넘었다곤 할 수 없지만, 무공을 수치로 계산하여, 보다 정확하게 파악했다.
이는 매우 큰 효과를 가져왔다.
어디를 보완하고, 어느 부분을 개선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하여 수련을 하는 데 효율적이었다. 하나, 자신을 명확히 안다는 것은 단점도 뚜렷했다.
‘한계를 규정하면 역효과가 날 거야.’
이쯤에서 더는 가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항시 나태해지려는 인간적인 본능을 억제하며,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했다.
무호의 옆에서 명상에 들었던 태진도 정신을 차렸다. 희미한 미소를 보자.
“녀석, 너도 감을 잡은 모양이구나.”
“숙부처럼 완벽하진 않아요.”
“세상에 완벽이란 게 있겠느냐.”
“망할 놈의 상대평가네요.”
무호와 태진 정도면 어딜 가도 융숭한 대접을 받을 만했다.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를 고려해도 서로 모셔 가려고 안달이 날 것이다.
그러나 송호문은 기준의 잣대가 심각하게 상향 조정되어 있었다. 워낙 말도 안 되는 괴물이 기준점을 높여 놓는 바람에 작금의 성취로도 만족은 위험했다.
쿠다다다당!
산 공터의 구석, 누군가가 심각하게 구르고 있었다. 구르고 굴러 엉망진창, 만신창이가 된 사내는 치를 떨었다.
‘왜 못 피하는 거야?’
움직임이 괜찮은 편이었다. 순간순간의 기민함과 반격은 예리했다. 문제는 상대와 워낙 상성이 좋지 않았다. 반 박자를 잡아내지 못해 일방적으로 얻어터졌다.
“거북이처럼 느려 터져서 이 몸에 생채기라도 낼 수 있겠느냐.”
“거만 떨지 마라, 씨부랄 새…… 쿨럭!”
욕하는데 때리고 지랄이야!
욕은 마쳐야 할 거 아니오!
턱주가리를 발에 처맞은 강철은 핏물을 뿜으며 바닥을 또 한 번 굴러야 했다. 악에 받쳐서 다시 일어나지만, 주먹의 궤적이 보이지 않았다. 막았다 싶으면 처맞고, 못 막으면 더 처맞았다. 그나마 몸부림이라도 쳐야 세 대 맞을 거 한 대로 끝낼 수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강철의 생애에 경험하지 못한 치욕이었다. 호굴에 겁도 없이 제 발로 들어와 사로잡힌 것은 그렇다 쳐도, 이 새끼한테 손도 못 써보고 계속 털리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비슷한 수준이었고, 승패를 결정짓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젠 승패는커녕 한 대 때려 보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처맞았다.
“에헴, 이젠 넌 내 상대가 아냐.”
“누가 상대하고 싶데!”
“응? 더 맞고 싶다고? 잘 안 들린다!”
“벼락 맞아 죽어도 시원치 않을…… 쿠웩!”
나릉의 현란한 발차기가 이어질 때마다 강철의 신형은 뜨겁게 타오르는 대지의 아지랑이처럼 맥락 없이 흔들렸다.
‘크크크, 이 맛이지.’
나릉은 오랜만에 맛본 손맛에 중독이 되었다. 송호문에선 항상 약자였다. 반면, 강철은 자신과 같은 오대야객이었고, 경쟁하던 놈이었다. 경쟁자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이 맛, 정말 경쾌하고 시원했다.
“이렇게나 약해서야, 이러면 여기서 못 버텨. 다 널 위해서 이러는 거다.”
“……개소리를, 누가 버티겠데!”
“어허, 형님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누가 형님이야. 카아악!”
아우 주제에 버릇없이 굴면 안 되지.
나릉은 먼저 갱생한 형님으로서 강철의 못된 버릇을 고쳐 주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반론이나 이의 제기는 허용하지 않았다. 남의 집을 허락도 없이 터는 놈은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처맞아야 한다고 법에 적혀 있었다.
강철은 처맞으면서도 억울했다.
‘내가 한 살 많거든!’
한 맺힌 절규는 닿을 수 없는 아우성에 불과했다. 무림에선 무공이 제일이고, 형님이고, 아버지고, 할아버지고, 하늘이었다. 그런 와중에 한 살 더 많다고 해 봤자, 추한 발악에 불과했다.
‘그래, 너 한 살 더 많다, 어쩔래?’
호구조사를 마친 나릉은 강철의 나이를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패는 기분, 아주 좋았다. 따지고 보면 나릉은 무진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런데도 주군으로 모시는데, 한 살 차이야 궁합도 안 보고 패도 되지.
‘대체 못 본 사이에 뭘 얻은 거야?’
강철의 의문이었다.
나릉의 무력 수위와 무공이 예전과는 판이하였다. 기연을 얻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하물며 이 문파도 제정신이 아니다.
저 두 사람을 봐라.
숙부와 조카가 검강을 쏟아 내고 있었다. 화경에 초절정이라니. 상식을 불허하는 진법에 혹독하게 당했음에도 도망치지 못하는 연유였다. 대련도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잠깐의 한눈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데 평온하며, 간혹 미소마저 보였다. 마치 이 평온을 깨고 싶지 않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게 말이 되냐고!’
저 둘만 해도 나릉과는 비교가 안 되는데, 송호문의 문주와 장로들도 만만치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 문파라곤 믿어지지 않는 무력 수위였다. 이쯤 되면 소림이나 무당에서 나서야 한다고 본다.
“오늘만 같으면 원이 없겠네요.”
“그러게 말이다.”
숙부에게 검강을 다발로 날리고서 저게 할 소린가? 대화의 영역이 강철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났다.
‘내가 왜 이딴 문파를 털려고 해서는!’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게다가 자신을 전담하는 나릉은 정말로 개새끼였다. 한시도 빈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빠져나갈 궁리만 해도 귀신처럼 나타나 두들겨 팼다.
“넌 너무 약해.”
“징그러운…….”
강철의 정신은 이쯤에서 끊어졌다. 꼭 마지막엔 의식이 날아가서, 일어나면 송호문이었다.
“목 잡고 가는 건 좀 그런데요.”
“잡을 데가 없지 않습니까.”
“하긴 목이 편하긴 해요.”
“손맛도 있습니다.”
태진과 나릉의 대화에 무호는 혀를 찼다.
멱살잡이가 아무래도 가문의 상징이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자신도 툭하면 멱살을 잡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었다. 이건 멱살 잡힌 채 맞아 보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본능이었다.
“숙부, 무림맹에서 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잠잠하네요.”
“남궁세가와 개방에서 이의를 제기했다고 하더구나.”
“그렇다면 산동악가와 제갈세가가 개별적으로 나설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겠지. 아니면 서로 힘을 합하거나.”
“그걸 역으로 이용하면 재밌는 그림이 나오겠어요.”
“녀석, 그런 건 닮지 마라.”
부전자전은 위험했다.
형이 하나여도 종일 맘 졸이며 사는데, 둘이라고 상상해 봐라. 그러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형과 형수님의 금실이 워낙 좋았다. 자식을 얼마나 낳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대를 이을 자손은 많으면 많을수록 경사긴 하나, 형을 닮으면 답이 없다.
“선제공격과 각개격파도 괜찮지 않을까요? 설마 우리가 먼저 공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요.”
“밤중에 기습하여 전력을 깎아놓는 것도 괜찮긴 하지만, 무공이 노출되면 나중에 곤란할 수도 있어.”
무호와 태진이 작정하고 기습하면 산동악가와 제갈세가는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무너뜨리지 못하면 역으로 빌미를 내어 줄 수도 있었다.
“이대로 우린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건가요?”
“우리가 근래에 성장하긴 했어도, 제갈세가와 산동악가를 얕보면 곤란해. 저들이 가진 역사는 우리보다 길어. 문파의 숨겨진 저력을 고려하면 우리만으론 힘들다.”
“도움을 좀 받으면 될 텐데.”
“네 할아버지가 퍽이나 들어주겠다.”
안전 제일주의를 지향하는 아버지였다. 산동악가와 제갈세가의 하는 짓이 얄밉기는 하나, 선제공격에 동의하시진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공격적인 성향으로 변한 태진이 걱정되었다. 무력이 약할 때는 주변의 눈치를 봤지만, 강해질수록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했다.
“저도 짜증이 나서 해본 소리예요. 하지만 마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는 걸 보여주어야 한다고 봐요.”
“옳은 말이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당하고도 허허실실 넘어가면 좋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얕잡아 보고, 언제든 물어뜯으려고 하는 세상이었다.
“그저 지금의 평온을 만끽하고 싶을 뿐이에요. 방해하겠다면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그때는 이 숙부도 너와 함께하마.”
평온.
얼마 만에 맛보는 평화인가. 형이 각성하고 나서 한시도 맘이 편하지 않았다. 이 평화를 깨는 자가 있다면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숙부.”
“진아.”
우린 하나!
나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른팔을 교차하여 의지를 불태울 때마다 낯간지러워서 소름이 돋았다. 나이를 떠나 화경과 초절정의 고수가 저래도 되나 싶다. 다행이라면 주변의 시선을 많이 의식해서 보이는 데선 또 안 그런다.
‘기절해서 다행이지, 안 그러냐?’
눈을 뜨고 있었으면 부끄러워서 살인멸구를 당할 뻔했던 강철이었다. 살포시 몸을 떠는 걸 봐선 생존 본능 하나는 일품이 아닐 수 없었다.
무호와 일행은 산 공터 훈련을 마치고 내려왔다. 문파에 도착한 무호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정문을 통과하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차후 장인어른이신 정운상단의 상단주 능백환이 찾아왔다. 급히 예의를 차리며 인사를 올렸다.
“장인어른, 어인 일이십니까?”
“어인 일이긴, 사위 보려고 왔지. 껄껄껄!”
능백환은 혼인을 올리지 않았음에도 장인으로 깍듯이 대하는 사위의 태도를 보며 기꺼워했다.
‘소려가 잘해주고 있구나.’
안휘성에서 송호문의 기세와 명성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다. 패천문의 패룡을 패퇴시킨 후, 비무를 요청한 무인들이 많았다. 그때마다 사위는 대수롭지 않게 꺾어 냈다. 이젠 신검마협이란 별호가 아깝지 않았다.
안휘제일상단으로 발돋움했지만, 능백환은 야심을 감추지 않았다. 대륙제일상단이 될 기회였기에 송호문과의 혈연관계는 매우 중요했다.
“부족하지만 소려를 잘 부탁하네.”
“부족하기는요, 제겐 과분합니다. 항상, 소중하게 대해도 미안할 따름입니다.”
“그런 마음이면 족하네.”
“아버님을 보셨습니까? 보셨다면 제 방으로 가시지요.”
“그럼세. 오는 길에 좋은 소식도 있으니.”
“좋은 소식이요?”
“자네 형이 곧 돌아온다네.”
“……?”
화기애애했던 공간에 정적이 흘렀다. 옆에서 웃고 있던 태진이도 정중동의 묘리를 깨닫고 돌덩이가 되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저 앞에 있는 아버지와 장로들도 표정이 굳어 있었다.
‘좋은 시절 다 갔네.’
어색한 기류에 능백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먼 곳으로 떠나 고생한 가문의 장남이 돌아온다는 경사스러운 소식을 전했거늘.
다들 왜 그러냐고.
……내가 못 할 말을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