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85
284 서열 정리(2)
“언제까지 뜸 들일 거야!”
“갑니다!”
결심을 굳힌 육칠, 나릉, 강철은 한곳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오늘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나 침투를 해 봤다. 그때마다 낭패의 연속이었지만, 시간을 늘렸다. 혼자도 아니고, 셋이라면 일각은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가자!
신선단을 위하여.
천무신결을 위하여.
명예 회복을 위하여.
각자의 결의가 하나가 되어 위압감을 발산했다.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가 전해졌다.
스륵!
육칠, 나릉, 강철은 비장한 각오로 담벼락을 넘었다. 오늘은 기필코 성공하고 말겠다는 각오를 불태웠다. 이성과 논리를 아무리 따져도 무인은 결국 무공과 영약 앞에서 한없이 나약했다.
“투지가 대단하네요.”
“그거라도 있어야겠지.”
아수라겁천대진의 완성도를 높이느라 밤낮을 가리지 않았던 용무길과 황보세령이 무진의 옆으로 다가왔다. 진의 축이 되는 지점에서 아수라겁천대진의 보완할 부분을 시험했다.
“쟤들이 성공할 것 같아?”
“성공과 실패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육칠, 나릉, 강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한 용무길의 오만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의 성향을 안다면 자만심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무공은 몰라도 잠입은 제법인 녀석들인데, 너무 만만하게 보는 거 아냐?”
“저는 누구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방심은커녕 바늘구멍조차 용납하지 않는 용무길의 완벽 지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황보세령이 어느 때보다 자신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완고함과 요사함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데도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음, 이거 줄초상 치르는 건 아니겠지?’
드러나지 않는 진의 약점을 찾고, 보완하기 위해서 하기 싫다는 녀석들을 무공과 영약으로 유혹했다. 죽어도 문파에 큰 타격은 없겠지만, 양심의 가책은 희미하게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반각은커녕 들어가자마자 곡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침입 대부분은 밤에 이루어지기에 진 내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봤자 들리지도 않았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 더 구슬프게 들리는 것 같기는 했다.
“이러다 죽겠다. 일단, 정지.”
“아직 죽지는 않을 겁니다.”
“정신은?”
“멈추겠습니다.”
몸만 죽지 않으면 단가? 마음이 죽어 버리면 육체는 사자나 마찬가지였다.
용무길과 황보세령은 목적을 위해선 어느 정도의 희생은 당연시했다. 이래서 군사들이 무인들에게 욕을 처먹는 거다. 효율을 중시하다 보니, 인간의 도리를 간혹 잊을 때가 있었다.
우웅, 팟!
바동, 바동!
진을 해체하자 세 방향에서 허우적대는 불쌍한 중생들이 눈물, 콧물을 흘려 대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공포와 마주한 자를 섬세하게 표현했다.
흐억!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육칠, 나릉, 강철은 현실로 돌아오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죽음의 공포는 여태 겪어 보지 못했던 신세계를 그들에게 선사했다.
“살았으니 됐다.”
무진은 혹시나 죽었을까 염려했었다.
다행히 살아서 굼벵이처럼 꿈틀대니 안도했다. 사람은 다 쓰임새가 있는 법. 무공은 대단치 않아도 잡다한 분야에서 쓸모가 있었다. 이거저거 마구 시켜도 탈나지 않는 다용도 노예…… 동료였다.
부들부들!
심신미약에서 겨우 벗어난 육칠, 나릉, 강철은 몸을 심하게 떨며 마른침을 삼켰다.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살벌한 진법이었다. 이름 그대로 존재감을 확실하게 심어 주었다.
‘안 해, 절대 안 해!’
‘또 하면 내가 개새끼다!’
‘전엔 이렇지 않았다고!’
연습은 단지 연습일 뿐이었다. 일부러 진을 약하게 조절한 것이 분명했다. 육칠, 나릉, 강철은 질겁하며 치를 떨었다. 애초에 성공 가능성 따윈 없었다. 무공이고, 나발이고 떠오르지도 않았다. 다시 할 바엔 열심히 수련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보세령과 용무길은 보완할 점을 수정하는 데 여념이 없다. 육칠, 나릉, 강철이 살아 있는 걸 확인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예상보다 일 장이나 더 나아갔습니다.”
“적들을 유인하려면 반각은 필요해요. 다만, 신주이십일강과 같은 절대고수를 상정하면 좀 더 보완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주군께서 내어 주신 마병을 축과 연계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머, 그거 좋겠네요. 흡성진을 강화해서 진 안에 갇힌 자들의 내력을 마병이 흡수하면 일거양득이겠어요.”
“증폭진을 쓰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외부에서 대포를 쐈을 때는 진이 약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진의 자체적인 내구력을 높일 필요가 있겠네요. 이건 철방에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차분히 분석하여 수정하는 용무길과 황보세령의 모습에 나릉, 육칠, 강철은 모골이 송연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대단치 않을 수도 있으나, 방금 무서운 말이 지나갔다.
도전할 마음이 대폭 꺾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도 없진 않았다. 그런 일말의 사정마저 잔인하게 짓밟아 버렸다. 객기로 도전했다가는 오늘처럼 살아서 숨 쉬지도 못할 것이다.
‘지금도 살벌한데, 흡성진까지 사용하겠다고?’
‘다음엔 목내이가 될지도!’
‘지옥인가? 여긴 사람 사는 곳이 아니야!’
괜한 욕심은 부리지 않는 편이 이로웠다.
특히 나릉과 강철은 진법의 무서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준비만 된다면 어떤 철옹성이라도 제집처럼 드나들 자신이 있었기에 충격은 더더욱 컸다. 대도(大盜)의 근성으로도 정복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이었다.
“주군, 완벽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게 어디 있겠어. 다만, 흡성진을 대놓고 쓰면 대외적인 시선이 좋지 않을 수도 있어.”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부에서 통제하도록 설계했습니다.”
“좋아. 완성되면 얼마나 대단한지 보자고.”
“주군의 마음에 들 때까지 완성은 없습니다.”
“저도 그래요. 아버님.”
용무길과 황보세령은 나이와 성별을 떠나 벗이 되었다. 이렇게나 죽이 잘 맞기도 어려울 텐데. 고정관념에 얽매여 사고의 틀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전략, 전술, 기관, 진법, 용병술에 이르기까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었다.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따르지 못한다고 했던가. 더욱이 황보세령과 용무길은 자질 또한 천하제일이었다.
“령아, 오래 머무른 것 같은데 집에는 가고 싶지 않아?”
“제집은 여기예요.”
“저런, 부모님은 어쩌고?”
“부모님께는 보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어요. 전 지금이 너무 행복해요.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어 제 맘에 쏙 들거든요.”
무진은 황보세령이 대견하였지만, 약간 떨떠름했다. 능력이야 나무랄 데가 없기는 해도 황보세령은 어렸다. 부모님의 품이 그리운 것은 인지상정이거늘.
딸 키워 봤자 아무짝에도 쓸모…… 제기랄!
‘미주는 아니겠지! 아니고말고!’
-시집은 혼자 가냐?
‘내 딸이 어디가 어때서?’
-미주가 아니라 네가 제일 문제야. 너 같은 놈을 장인으로 둘 바엔, 나 같아도 싫겠다. 아휴, 끔찍해.
‘나만큼 좋은 장인이 어디 있다고?’
-그러고서 네 공격을 십초식이나 받으라고 하냐. 그것도 미주와 비슷한 연령대에게.
‘알았어. 오초식으로 하면 되잖아.’
-평생 독수공방하겠군.
미주와 같은 연령대에서 무진의 작심한 공격을 받아 낼 자가 과연 있겠나. 있다면 반로환동을 의심해야 했다.
하물며 무진은 반로환동이고 뭐고, 위아래도 없는 후안무치의 표본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어.’
-호오, 져 주려고?
‘삼초식은 어때? 이만하면 나도 많이 양보했다.’
-미친놈.
초식의 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제의 무진이 다르고, 내일의 무진이 다르다. 초식 수를 한정해 놔 봤자, 나날이 강해지고 있는 무진을 감당할 신진고수가 있을 리 만무했다.
지 딸 아니라고 막말을!
무진으로선 미주의 장래를 고려해서 거국적으로 양보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혹, 일초식으로 정했다가 운이 좋아서 받아 내면 어쩌려고. 운 따위에 맡기고 미주를 내어 주라는 건가. 미주하고 행복하게 살려면 실력이 우선이었다.
-일초식이든 백초식이든 전력을 기울일 거잖아.
‘때마침 호풍환우나 유성이 떨어질 수도 있지.’
어차피 마왕이나 전왕이나 설득은 되지 않는다. 서로 전제 자체가 잘못된 소모전이었다. 평행선을 긋고 싸우는데, 답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그나마 피의 마왕이 정상적이어서 답 없는 전왕은 생떼를 부리는 꼴이 되었다.
“서신은 자주 보내고 있지?”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보내요. 그렇다고 걱정하진 마세요. 가문의 기밀을 누설하진 않았으니까요.”
“……고맙구나.”
“뭘요, 제 가문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어딨겠어요. 아참, 염산호 공자도 함께하기로 했어요.”
구음절맥을 극복한 염산호는 무공을 배우는 속도만큼이나 학문적 성취도 빼어났다. 한 방면에 뛰어나기도 힘든데, 문무를 겸비했다. 다방면에서 빼어난 재주를 보여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용병술의 대가로 불릴 황보세령의 판단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은 확실했다. 특히 숨겨진 자질을 찾아서 최적의 성과를 올리는 데 타고났다.
실제로 전투에 투입된 무력대에 어울리지 않는 자들이 종종 뽑혔었는데, 그들이 전장의 흐름을 바꾸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용병술이었으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진가를 드러냈었다.
얌전하게 생긴 염산호도 성실한 편이라 믿음이 갔다.
“미주도 관심이 있는 것 같고요.”
“……어째서?”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겼잖아요. 잘생기면 원래 호감이 가는 법이에요.”
이 어린놈의 새끼가 발랑 까져서는 그새를 못 참고 내 딸을 꼬드겨! 오랜 기간 병상에 지낸 것이 가여워서 기사회생을 시켰더니 감히 내 딸을 노려.
당장 내 오초식을 받아 낼 준비를 하거라.
-얼굴 중요하다며?
‘닥쳐.’
-나보단 못해도 봐줄 만은 하다.
‘시끄럽다고 했다.’
당장 손을 쓰진 못했다. 대놓고 했다가는 뱉어 놓은 말들이 비수가 되어 돌아올 수 있었다.
응?
한껏 흥분했던 무진은 해맑게 웃는 황보세령을 보자 이맛살을 찌푸렸다.
용병술에 관한 한 자타 공인 탁월한 재주를 타고난 녀석이다. 자신을 통제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요 맹랑한 꼬맹이를 보게.’
시아버지를 가지고 놀아!
무진은 울컥! 했던 감정을 다스렸다.
다소 재밌다는 듯이 관찰하는 황보세령의 표정에서 훗날의 모습이 비쳤다. 저 귀여운 얼굴에 요망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니 확실히 요물이 분명했다.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내 머리 꼭대기에서 놀려 하는구나.”
“아버님의 약점을 말씀드렸을 뿐인데요.”
“약점이라고?”
“어머님하고 미주만 편애하시잖아요. 그게 너무 부러워서요. 진 랑도 아버님의 핏줄인데.”
“……내가 또 언제 편애했다고!”
“아닌가요?”
정색하며 쳐다볼 필욘 없잖아.
“……쪼끔.”
“쪼끔이요?”
쩝!
맞는 말만 해서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무진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기에 그런 줄 알았는데, 황보세령은 꼭 짚고 넘어갔다. 확실히 군사하고 말싸움을 하면 끝이 좋지 않았다.
편의대로 주먹을 쓰면.
응?
내가 언제 그런 거 따졌다고.
‘패도 되나?’
-잘하는 짓이다.
바른말을 했다고 며느리를 패는 시아버지로 낙인이 찍힐 수 있었다.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아~~~! 시아버지만 아니었어도.
그렇다고 황보세령을 내치기에는 능력이 지나치게 뛰어났다. 앙심을 품고 적이 되면 매우 골치 아파질 녀석이었다. 어린 싹을 짓밟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노력하마.”
“감사합니다, 아버님.”
“진이가 그렇게 좋냐?”
“귀여워요.”
혀로 입술을 훔치며 입맛을 다시는 황보세령의 요망함에 무진은 골이 지끈거렸다. 언제든 잡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백 년 묵은 여우가 따로 없었다.
후일 내 아들의 미래가 그리 편치는 않을 듯싶었다. 그러나 아들을 하나 팔아서 황보세령을 얻었다면 남는 장사긴 했다.
‘어쩌겠냐, 네가 장남인 것을.’
-그러는 너는?
‘가문을 위해 거국적으로 양보했잖아.’
-떠넘긴 주제에 양심도 없구나.
당장은 중요하지 않았다. 역사는 대승적인 양보로 기억할 것이다. 원래 역사는 승자의 역사잖아. 억울하면 나보다 강해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