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89
288 연기?(1)
산동악가.
가주와 장로가 한자리에 모였다. 제갈세가에서 보내온 서신에 답을 해야 했다. 현재 산동악가는 제갈세가와 작당하여 송호문을 압박했다고 알려졌다.
돌아가는 정황이 묘했다. 힘으로 눌러 성과가 있다면 모를까. 결과적으로 송호문의 명성만 높여 주었다. 제갈세가와 산동악가의 무도한 폭압에도 굴하지 않은 소신 있는 문파로 각인되었다.
산동악가주 악중평은 서신의 내용을 곱씹을수록 미간을 찌푸렸다. 일전의 망신도 그렇고, 송호문 따위에 끌려가는 형국이 맘에 들지 않았다.
“총관이 보기엔 어떻지?”
“천기신검의 제안은 현명합니다. 현재로선 송호문을 무너트리기가 어렵습니다.”
“굴욕을 당하고도 참으라 이건가?”
“남궁세가와 황보세가가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송호문이 두 세가와 혼사를 추진하여 혈연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검제와 권왕이 송호문을 봐 주고 있는 이상, 가문의 힘을 드러내며 송호문을 치는 건 위험했다. 사실상 명분에서도 밀렸다. 두 늙은 괴물이 송호문을 옹호함으로써 중소 문파의 지지를 받아 냈다. 이로써 맹 내의 정치적인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장은 제안을 받아들이는 편이 나았다. 하나, 이번 제안은 가문의 뒤를 캐지 않고서는 알기 어려운 내용이 담겼다. 일종의 제안과 동시에 협박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에겐 네가 가라. 단, 선은 분명히 지켜야 할 거야. 무리하지 말도록.”
“예, 가주.”
가주의 명을 받은 악중필의 눈빛이 비장했다.
이번 일은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 일전에 놈에게 당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그날 이후로 가문에서 받은 소외와 멸시를 떠올리면 아직도 이가 갈렸다.
“당분간 폐관에 들겠다.”
악중평은 비도의 심득을 갈무리해야 했다. 내공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속혈공의 약점을 보완할 심산이었다. 그로선 거슬리는 송호문의 처리보다 무공의 완성이 중요했다.
‘무신결이 모든 무공의 무리를 담는다고 하더니 명불허전이군.’
무신결은 무신총의 장보도를 통해 얻은 심득이었다. 공교롭기는 하나, 속혈공을 보완할 단초를 제공했다.
***
“도련님하고 진이에 비해 많이 부족하죠?”
“처음엔 다 그래.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고 따라와. 우리 자기 소질 있어.”
“정말요?”
“아무렴, 나 아무나 가르치는 사람 아냐.”
무진은 무의 근간이 되는 보법부터 차근차근 가르쳤다. 다른 건 몰라도 경신은 매우 중요했다. 위기 상황이 오기를 바라진 않지만, 최소한 몸을 피할 능력은 필요하다.
“내력을 많이 쓴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건 아냐. 공든 탑을 쌓듯 하나하나 밟아 나가면서 공력을 구결에 따라 정확하게 보내야 해.”
“개념이 잘 안 잡히네요. 정확하게 수량으로 지적해 줬으면 더 좋을 텐데.”
“공력은 돈이나 물건처럼 셈을 정확하게 나누기 힘들어. 통상적으로 공력을 갑자로 표현하지만, 그것 역시도 편의를 위한 통합에 지나지 않아. 더욱이 같은 내공을 익혀도 사람마다 성질뿐만 아니라 받아들이는 수치가 달라.”
“첫술에 배부르기를 바랐나 봐요.”
무공에 지름길이 없다곤 할 수 없으나, 꾸준히 쌓아 올린 노력은 중요했다.
주르르!
유진은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매사에 꼼꼼한 성격이라, 무공을 배우는 데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아름답다!’
무진은 아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땀을 흘리는 역동적인 건강함에 눈이 호강하고 있었다.
“옳지, 그렇게만 하면 돼.”
“마지막에 균형을 잃었는데요.”
“하체가 완성되지 않아서 그런 거야. 차차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니까 일단은 완벽하게 밟는 걸 우선으로 해.”
“알았어요.”
반 시진 훈련하고, 일각을 쉬었다.
무진은 아내의 몸을 풀어 주기 위해서 추궁과혈을 펼쳤다. 구석구석 꼼꼼하게 주무르며 피로를 풀어 주고, 근육의 이완을 도왔다. 나른함에 수마가 찾아오던 유진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듣기로 추궁과혈은 타혈법의 일종이라 굉장히 아프다고 하던데, 오히려 졸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건 어설프게 익힌 사이비라서 그래. 나처럼 숙련된 전문가가 하면 하나도 안 아파. 졸리면 자도 돼. 내 어깨는 언제나 당신한테 열려 있다고.”
이걸 숙련된 수준으로 표현해도 되나 싶다. 타혈법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안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대체로 추궁과혈은 기예에 가까워 누구나 익힐 순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추궁과혈은 삼갑자에 이르는 공력과 출회수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입신의 경지에 이르러야 했다.
하물며 무진처럼 고통마저 통제하려면 삼갑자의 내력 가지고도 어림도 없었다. 최소한이 절대경은 되어야 하며. 어설프게 시도했다가는 반각 안에 탈진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훈련의 성과는 뚜렷했다.
근력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그렇지, 유진의 내력은 오갑자나 되었다. 밤마다 음과 양으로 꾸준히 아내의 육체를 공들여 만져 준 효과였다. 내력뿐만 아니라 체질도 개선이 되어 무공을 익히기에 나무랄 데가 없었다.
“어때, 괜찮지?”
“이건 괜찮은 정도가 아니잖아요.”
“말했잖아, 금방 따라잡게 해 준다고.”
“무리는 하지 말아요.”
“남편을 믿으라고. 나 공력 빼면 시체야.”
무진은 보법을 펼칠 때마다 기맥과 혈맥의 흐름을 각인하는 작업을 했다. 사람마다 혈맥, 기맥, 혈 자리, 골격은 형태와 위치가 다 다르다. 같은 무공을 익혀도 그 사람의 특성에 따라서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의 능력이 중요하다. 배움을 청한 제자를 정확히 알고, 그에 맞추어서 가르쳐야 성취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승 대다수는 무진처럼 해 주기 어렵다.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실행하기 어려운 섬세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아무나 됐으면 개나 소나 절대고수지.
휙, 휙!
유진은 달라진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매끄럽지 않은 부분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도록 공력을 배분할 수 있게 되었다. 머릿속으론 개념이 정리되지 않았는데, 육체가 알아서 개념 정리를 끝내 버렸다.
이럴 수도 있나 싶었다.
“말의 고삐를 잡듯 당기고, 놔주고.”
“이렇게요?”
“옳지, 잘한다. 우리 자기는 천재야.”
“사부님이 훌륭한 거죠.”
훈련은 화기애애하게 진행이 되었다. 웃음꽃이 만발하고, 부부 사이의 애정이 더욱 돈독해졌다.
우웩!
안채에서 벌어지는 만행을 지켜보는 시선들. 내색하지 못했을 뿐, 불만이 담겨 있었다.
‘훈련이 말랑말랑하다 못해 봄날의 눈꽃처럼 녹겠어요!’
‘저렇게 잘 가르쳐 줄 수 있으면서 우린 왜 만날 굴려요?’
‘사부,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요!’
이서정, 북궁혜, 철호는 오전 훈련을 끝내고 안채를 지나는 중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신들이 여태 알고 있었던 무식한 훈련과는 궤를 달리했다.
자고로 훈련이라는 것은 고통과 인내를 바탕으로 한다. 저렇게 풀어 주면 진척이 느려야 하는데.
‘그새 보법을 다 익혔어?’
‘뭐가 저렇게 빨라! 게다가 정교하기까지 하잖아!’
‘공력의 배분은 또 어떻고?’
오늘 하루에 십 년 치가 담겼다.
유진의 자질이 빼어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보법은 무공의 근간이 되는 기초임과 동시에 익히기가 가장 까다로운 분야다. 하루아침에 저처럼 완성도 높은 보법을 펼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불가능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기연이 쏟아지고 있는 현장이다. 하나하나 맞춤형으로 보법의 극의에 다가가고 있었다.
‘저럴 수가 있나? 저게 가능해?’
세 사람에게 동시에 든 의문이었다.
본인이 아닌 타인을 완벽히 통제하지 않고서는 행하기 어려운 훈련이다. 이는 마치 훈련 중에 촌음 단위로 허공섭물과 진기도인을 펼치는 일과 같았다.
‘이런 미친!’
겉으로만 화기애애할 뿐.
훈련에 쏟아부은 무진의 심력과 내력이 얼마나 대단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자신들은 반각은커녕 시도조차 하기 힘든 황제 훈련이었다.
실제로 황제도 저런 호화 사치스러운 훈련은 받지 못한다. 그랬다간 황궁에 내가고수가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작정하고 황궁 고수를 갈아 넣는다면 또 모르지만.
‘가르침도 가르침이지만, 공력만 놓고 보면 나보다 높아.’
‘사모님의 공력이 이렇게나 정순했었다니.’
‘공력을 어떻게 쌓아야 이토록 순도가 높을 수 있는 거야?’
공력의 순도가 높을수록 탁기가 섞여 있지 않아 같은 힘을 발휘해도 차이가 벌어진다. 이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문파가 소림과 무당이다.
정순한 공력을 쌓는 소림과 무당의 심공을 대성하게 되면 같은 공력을 써도 우위에 서게 되었다. 항마나 법력이 작용한 상성 싸움이 된다면 또 다르겠지만.
‘선천진기와 같은 후천지기로 천년 공력을 쌓겠다고?’
워낙 상식을 불허하는 천인합일의 공령지체를 이룬 무진이기에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봤었다.
그렇다고 해도, 유진이 뿜어내는 공력의 순도는 단순하지 않았다. 저 상태로 천년 공력이 된다면 어지간한 무인은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다.
공력만 높다고 고수라고 할 순 없으나, 물량 앞에 장사 없다는 말도 틀리진 않다. 국가 간 전쟁에서 숫자가 중요하듯. 깨달음이 삼류라고 해도, 천년 공력이 실리면 절정고수도 식겁할 수밖에.
허!
누군 아등바등 훈련해도 겨우 공력을 쌓는데, 누군 숨만 쉬어도 일갑자가 생기고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괴리감에 이서정, 북궁혜, 철호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때.
무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들 한가하구나.”
“……어?”
“한 철이 지날 동안 옆에 있었는데 눈치를 못 채고, 내가 그렇게 가르쳤나? 하긴, 근래에 훈련이 부족하긴 했지.”
“……어디가요?”
들키지 않으리라 자신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 그보다 우리가 숨어서 본 것도 아니잖아.
“무슨 일이에요, 여보?”
“아냐, 아무것도.”
아내의 염려에 무진은 괘념치 말고 하던 거 마저 하라고 했다. 유진은 아무 걱정 하지 말고 훈련에만 열중하면 된다.
“너희들은 편하면 안 되지.”
언제는 편했냐고!
***
침투, 함정, 암살에 특화된, 돈을 받고 청부를 받아들이는 자들을 살수라 부른다. 강호에서 살수는 돈에 자신들을 팔기에 천시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척을 지고 싶은 무인은 없을 것이다.
살수는 무인들과 달리 의뢰를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독을 타고, 암기를 쓰고, 함정을 파기에 밥을 먹기도 잠을 자기도 힘들다.
살수의 목표가 된 자들치고 살아남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청부나 받아들인다면 공적에 오른다. 살수를 펼쳐도 되는 자들을 골라야 했다. 그것이 살수 단체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사사삭!
밤이 깊어지고 새벽 동이 트기 전. 어둠 속 그림자가 담벼락을 넘었다.
‘곧 죽여 주지.’
복면을 쓴 사내는 사살곡(死殺谷)에 속한 살수다.
사살곡은 강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살수 집단으로, 소속 인원과 신상은 알려지지 않았다. 곡주를 제외하고 번호로 불리며 이십호 내에 든다면 일급 살수의 실력을 갖추었다.
강호의 분류상 일급 살수는 절정고수를 죽일 수 있었다. 눈먼 검에도 당하는 비정 강호에서 살수의 암수를 버텨 내기란 쉽지 않았다.
사살 십호.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불패의 살수로, 끊임없이 서열을 끌어올렸다. 자신이 마음을 먹은 이상 상대는 죽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는 오늘도 자신하며 목표물을 향해 다가갔다.
‘뭐야, 이건?’
외원에서 내원으로 들어선 줄 알았는데, 제자리다.
사살 십호는 위기감을 느끼고 재빨리 돌아서려고 했다. 그러나 들어올 때와 달리 나갈 때는 자유롭지 않았다.
크아아아악!
빠져나가기는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다. 첫 비명이 사살 십호의 최후가 되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흐아악!’
살려 달라는 처절한 비명에도, 담벼락 안 누구도 관심을 두진 않았다. 밤의 고요함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비명조차 새어 나가지 않은 것이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야.”
무진은 진 안에 너저분하게 널린 시체를 꼼꼼하게 태웠다. 요즘 들어 소일거리로 화장(火葬)하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청소는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