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292
291 사부(1)
천주신창이 참살대도를 꺾자, 송호문의 위상이 바뀌었다. 오래전부터 천주신창이 송호문의 뒤를 봐 주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검마협과 같은 고수의 배출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더욱이 천주신창의 무공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고강했다. 극살을 죽였을 때만 해도 의문을 품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천주신창이 참살대도를 가볍게 꺾어 내자, 신주이십일강과 견줄 무인으로 인정했다.
한편 천운권이 뭘 믿고 천둥벌거숭이처럼 깝죽거리고 다녔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절대고수가 뒤를 봐 주고 있으니 눈에 뵈는 게 있었을까.
호가호위를 누린 것으로 받아들였다.
“곽 대협의 무위가 그렇게나 대단했던 거야?”
“처음에는 비슷한 줄 알았는데, 결과만 놓고 보면 참살대도는 아예 상대가 안 됐다고 하더라.”
“설마, 같은 육성인데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려고.”
“곽 대협은 애초에 창형이 아닌 검형을 썼어. 이게 뭘 의미하는 것 같아?”
“검형은 또 왜?”
“송호문이 검공을 쓰잖아. 창법을 가르칠 수 없으니 검공을 썼을 테고. 어쩌면 깨달음을 얻었을 수도 있지.”
신검마협과 함께 천주신창이 호법으로 있는 이상, 더는 송호문을 소문파라고 하여 업신여기지 못했다.
그간 수없이 많은 위협에도 숨겨 놓은 패를 이제야 꺼내 들은 것만 봐도 송호문의 저력을 얕볼 수 없었다.
삽시간에 달아오르며 분분했던 송호문을 향한 관심은 신화마정갑과 무신총을 가리키는 장보도가 풀리면서 금세 시들해졌다.
“제갈세가와 산동악가는 무신총의 비도를 얻었다면서 이상하게 잠잠하네. 당장 찾으러 나서야 하지 않나?”
“소문일 뿐이고,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찾아다니면 진짜라고 동네방네 떠드는 꼴이잖아.”
“아닌 척해도 무인들과 무문이 동분서주하는 거로 봐선 마냥 뜬소문은 아닌 것 같아.”
“내가 듣기론 절강성 안탕산에 무신총이 있다고 하던데.”
“뜬금없이 뭔 소리야?”
“하오문에서 일부러 흘렸는지는 모르겠고. 허탕을 쳤는지 녹림왕이 하오문도를 가만두지 않는다고 통보한 모양이야.”
“그래서 연합맹을 추진하던 수로채도 나선 건가?”
“절강성에서 수라도가 나타난 걸 보면 무신총의 보도를 찾는지도 모르지.”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원래의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도중에 몇 번이나 소문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교란을 펼쳤는데, 그럴 때마다 뜻하지 않은 소문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녹림왕이 뭔가를 알고 있는 건가?”
안탕산이 언급됐을 땐, 현천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공교로웠다. 무신총의 비밀을 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산동악가와 제갈세가는 또 왜?”
제갈세가와 산동악가의 가주가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불현듯 심득을 얻어 폐관수련을 하는 일이야 통상적이었다.
그러나 느낌이 좋지 않다.
무신총을 얻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폐관에 들었다. 이번에도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천운이 따른다지만, 이런 식으로 우연이 겹친다고?”
무신총에 송호문을 끼워 넣어 압박의 수단으로 쓰려고 했었다. 그래야 하는데 기가 막히게도 소문이 번졌고, 산동악가와 제갈세가가 호되게 당했다. 재차 소문을 이용하기에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정보를 통제하기도 바쁘다.
그래서 꺼림칙하다.
마치 이 모든 사태가 하나로 귀결이 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비약이었다. 그 조그만 문파가 작금의 사태를 주도했다는 소릴 어떻게 하냔 말이다.
흠.
백암이 돌아왔다.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던 백암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
“송구합니다…… 커억!”
현천군이 기경을 발산했다.
충격을 받은 백암의 입술에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보고하기 전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근래에 들어서 성공했다는 보고를 올리지 못했다. 실패의 연속, 자신이라도 화가 났을 것이다.
“얼마나 잃었지?”
“절반을 잃었습니다.”
중원의 정보를 흔들고 왜곡할 때마다 변수로 작용했던 녹림왕이었다. 놈을 사로잡아 변수를 제어하고, 신화마정갑을 찾아 검제와 취선을 제거하려고 했었다.
두 마리 쥐를 쫓다, 둘 다 놓친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녹림왕이 파 놓은 함정에 걸려 되레 당하고 말았다. 일반적인 함정이었다면 절반이나 손해를 보진 않았겠지만, 벽력탄이 무려 열 발이나 숨겨져 있었다.
‘이놈이 우리를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구하기도 힘든 벽력탄을 열 발이나 사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정체까지는 몰랐어도,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태가 점점 원치 않는 방향으로 어렵게 흘러갔다. 비도쟁탈전이 시작부터 삐끗거렸다.
“낭악은?”
“절강성에서 사라진 후 뒤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이 빌어먹을 도적놈이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있었다. 문제는 당장 낭악을 처리하기엔 아까웠다. 후일 녹림과 수로채를 통제하려면 낭악이 필요했다. 놈만큼 집요하게 강함을 탐하며 욕망에 충실한 자는 흔치 않았다.
결론은 제자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녹림왕부터 찾아내.”
“예.”
소문이 무르익지 않았다. 무리하게 밀어붙이다가는 세간의 의심을 살 수 있었다. 지금은 녹림왕을 찾는 것이 먼저였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녹림왕에게 이렇게나 고전하고 낭패를 당하게 될 줄은. 그것이 현천군의 심기를 무척이나 불편하게 했다.
‘사로잡아야 한다.’
교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또 누가 알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도 교의 대계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짜증이 나는군.’
분명 녹림왕이 최후의 변수가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천운권에 대한 살심이 치솟았다.
왜지?
***
노인의 걸음걸이가 꽤 빨랐다.
어딜 그리 바쁘게 가는 걸까?
일견 다급해 보이기까지 했다.
며칠 전만 해도 노인은 작은 마을의 외곽 산 아래에 터를 잡고 홀로 살았다. 산에서 잡은 동물과 채집한 약초를 팔아 근근이 생활했기에 따지고 보면 모처럼의 외출이었다.
이십 년이 넘도록 마을을 벗어나지 않았던 터라 긴장은 되었지만, 길을 잃지는 않았다. 산기슭에 들어와 살기 전엔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십일 전 한 장의 서신을 받은 후 한가로웠던 노인의 일상이 다급해졌다. 평소 알고 지냈던 사람들에게 말도 못 나누고 부랴부랴 짐을 싸서 무작정 출발했었다.
수중에 돈이 많지는 않았고, 나이가 들어 기력이 예전만 못하긴 하나 불편하진 않았다. 다행히 부단히 노력하여 소성(小成)이 있었다. 자랑할 만큼은 아니나, 팔자려니 하고 만족하며 살았었다.
서신엔 한 줄의 문장과 장소가 적혀 있었었다.
평생 사문의 무공을 완성하는 데 힘을 쏟느라 혼인은커녕 여자를 만나 보지도 않았었다. 그런 노인에게 있어 제자는 처음으로 정을 준 하나뿐인 소중한 자식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여린 녀석을 강호에 내보내야 했을 때가 떠올랐다. 자신과 달리 워낙 천부적인 재능을 지녀, 금세 성취를 뛰어넘었다. 더는 가르칠 것이 없어 내보내야만 했었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험난한 강호에 내보내 성취를 얻는다 한들, 목숨은 하나였다.
‘그깟 무공이 무엇이라고!’
사문의 무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나뿐인 제자가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더는 무공에 얽매이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사문의 무공을 완성하는 일보다 제자가 훨씬 소중했다.
‘무사하기만 하거라.’
서신에 적힌 장소에 도착했다.
웅장한 규모에 당황했던 노인은 제자를 위해 결연한 의지를 불태웠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모한 일이기는 하나,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설령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이놈들, 내 제자를 내놓거라! 만약 무사하지 않으면 내 모든 걸 걸고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저.”
처절하게 소리를 지른 후 정문을 매섭게 주시하던 노인은 갑작스러운 부름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세월이 야속하고 인생이 무상하다고 해야 할까. 비록 오랫동안 실전을 벌이지 않았다곤 해도, 지척까지 다가왔음에도 못 느낄 줄은 몰랐다.
그런데 화를 내기도 어정쩡했다. 다시 보니 곱상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왜 그러느냐?”
“그건 제가 물어볼 말인데요. 여기가 우리 집이거든요.”
“이놈, 이 악적들과 한패구나!”
“한패라고 하시면 맞는 말이긴 한데, 자초지종부터 말씀해 주시겠어요? 다짜고짜 화를 내시면 저도 해결해 드리기가 힘드네요.”
무척이나 정중한 태도에 불같이 화를 냈던 노인은 자신이 잘못 찾아왔나 의구심을 느꼈다. 이렇게나 예의 바른 태도를 보이는데 무작정 화만 낼 수도 없었다.
“여기가 청양의 송호문이 아니더냐?”
“맞아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제 아버지가 조금 이상한 분이긴 해도 누굴 잡아다가…… 음, 그것도 좀 의심이 되기는 해도 무작정 누굴 패지…… 그것도 좀 의심이 가기는 하는데요. 일단 제자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남철호라고 한다.”
아!
산에서 오전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다 웬 노인이 비장한 각오로 소리를 치기에 자초지종이 궁금해서 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분의 방문이기는 한데, 철호 형의 사부님이라면 찾아올 수도 있었다.
“저는 송호문의 강태진입니다. 철호 형과는 형, 동생 하는 사이예요.”
“……그 말을 내가 믿을 거라 보느냐. 나는 제자처럼 어수룩하지 않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굉장히 허술했다. 근래 본문의 유명세를 안다면 혼자서 찾아온 것부터가 겁도 없는 무모한 행위였다. 얼마 전 참살대도가 패했다는 소식만 들었어도 다짜고짜 무턱대고 찾아오지 않았을 텐데. 사건을 키우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철호 형의 사부님이 맞는 것 같기는 하네.’
앞뒤 꽉 막힌 철호 형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는 노인의 완고함에서 엿볼 수 있었다. 해명한다고 믿어 줄 것 같지는 않지만, 함부로 대하진 않았다.
“전후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리 말씀하시면 받아들이기가 어렵잖아요. 우선은 우리가 왜 철호 형을 구금, 협박했다고 생각하는지부터 알려 주세요. 본문이 그렇게까지 무도…… 흠. 어쨌든 부탁드려요.”
구금, 협박했다고 보긴 어려워도. 철호 형을 대하는 아버지의 평소 행태를 딱히 좋게 보기는 힘들었다. 양심에 찔리기에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이걸 보고서도 그리 말할 수 있겠느냐?”
태진의 정중한 태도에 노인도 계속 화를 낼 수는 없었는지, 서신을 꺼내서 보여 주었다.
-당신의 제자를 제가 잘 보살피고 있습니다.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찾아오셔야 만나 볼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