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00
299 일각여삼추(1)
하아, 하아!
서정, 육칠, 태진, 철호의 호흡이 거칠었다. 적지 않은 내력과 체력을 소모하고 말았다. 살수가 까다로운 연유를 깊이 체감했다. 정면 대결을 선호하는 무인의 전투와는 다르게 심력의 소모가 컸다. 부지불식간의 기습, 암습, 독, 자폭까지, 어느 하나 간과해선 안 되었다.
“저 앞 바위로 가서 쉬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한시라도 빨리 내려가 쉬고 싶을 텐데, 무진은 근처에 큰 암반이 자리한 곳으로 걸었다. 베이고, 찢어지고, 터진 주검이 널려 있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단약을 삼켰으니, 일각이면 회복될 거야.”
“괴의 어르신이야말로 천하제일신의가 분명합니다.”
서정, 육칠, 태진, 철호는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운기요상으로 내력과 체력을 원래대로 되돌리려다 삼매경에 들어섰다.
“부주의한 것들! 무아지경에 들면 어떡하냐고. 이럴 때 누가 습격이라도 하면 저항도 못 하고 죽겠네.”
사람들은 입방정을 굉장히 싫어한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입방아가 만악의 화근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무진은 입방아를 멈추지 않았다.
“운기도 돌아가면서 해야지, 쯧쯧!”
듣지도 못하는데 강호 경험이 일천한 후배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살수의 맹공에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기에 설득력은 없어 보였다. 전말을 안다면 헛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핀잔을 먹었을 것이다.
“전부 운기에 들어가면 나는 누가 지키나?”
보표나 표사도 경력직만 선호하는 연유를 증명했다. 신입은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야 하기에 아주 피곤했다.
푸슥, 푸슥!
삭아 버린 나뭇잎이 으스러졌다. 화들짝 놀라야 했던 무진이 돌아섰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자들이 있었다.
다 잡아 놓은 먹잇감처럼 느릿느릿한 여유가 느껴졌다.
왼쪽 눈썹에서 시작하여 길게 베인 상처가 인상적인 중년인이 감탄을 터뜨렸다.
“전대의 검후도 괴물이더니, 그 후인은 그 이상이군. 더욱이 애송이들도 초절정의 문을 열었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잠룡들일 텐데, 아쉽게 됐구나.”
“참살대도의 위명이 아깝네. 졌으면 곱게 물러날 것이지. 너무 추잡해 보이지 않냐?”
흉터가 자글자글한 거구의 사내는 곽운백에게 패한 참살대도 익경이었다. 그는 돌아가지 않고 원한을 곱씹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진의 힐난에도 익경은 히죽였다. 곧 죽을 놈의 헛소리 따윈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었다.
“문파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겁도 없이 돌아다니니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거다.”
“혼자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떼거리로 몰려온 주제에. 그래 봤자 넌 패배한 쥐새끼에 지나지 않아.”
무진은 깔아 준 멍석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상대의 아픈 부위를 칼로 후비고 소금을 왕창 뿌렸다. 어디 얼마나 여유를 부리는지 보겠다는 뒤틀린 기대감을 더해서.
효과가 여실히 증명되었다.
빠직!
흉터로 얼룩진 익경의 안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란다고 자신 앞에서 이처럼 대놓고 힐난하는 놈은 처음 봤다.
죽기 전 실성을 하지 않고서야.
익경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곱게 죽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혼자선 안 된다니까. 아? 다 같이 해도 안 되겠구나. 버러지들이 모여 봤자 버러지지.”
“계집의 치마폭에나 휘둘리는 놈이 감히!”
“무림에선 강하면 장땡이야. 남녀를 왜 따져? 그리고 치마폭이 얼마나 따뜻한데. 이런 시대착오적인 놈을 육성에 집어넣다니, 강호인명록이 잘못돼도 한참은 잘못된 게야. 쯧쯧쯧!”
혀를 차는 모습이 진심 때리고 싶을 지경이다. 강렬한 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니 더더욱 익경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크크크크!
숲에서 누군가 폭소하듯 웃으며 걸어 나왔다.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 무인의 눈을 가진 사내였다. 선이 고운 갸름한 인상에 평범한 체격을 지녔다.
그는 무엇이 그리 웃긴지 배를 부여잡기까지 했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천하의 참살대도를 이렇게나 신랄하게 까는 인간이 있었다니, 소문은 반도 담지 않았구나. 크크크크크!”
“넌 눈이나 뜨고 다녀라. 앞은 보이기나 하냐.”
“……!”
천운권의 힐난에 갸름한 사내의 주변이 고요해졌다. 실눈 사내의 정체를 알기에 기가 찼다.
‘이 미친놈은 대체 뭐지?’
‘천운권이 맞기는 한 건가?’
‘평생의 운을 다 써도 오늘은 죽는다!’
함께 대동한 천기십영은 천운권의 운도 다 됐다고 확신했다. 강호에서 겉모습으로 상대를 판단하지 말라는 격언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필수 요소였다.
“크크크, 살면서 들어 본 말 중 이처럼 웃긴 말은 처음인데. 아주 제법이야. 시간을 끌려고 했다면 나름 괜찮았어.”
광분하여 날뛸 줄 알았던 사내는 생각 외로 차분하며 날카로웠다. 단숨에 천운권의 꾀를 분쇄하여 참살대도의 분노를 활화산으로 키웠다.
“우리가 기다려 줄 줄 알았나?”
“살수를 보내 간이나 보던 놈들이 어련하시겠냐. 애초에 기대도 안 했어.”
“일각이 무간지옥보다 길게 느껴질 거다.”
육성의 일인이라면 운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마땅하나, 익경은 무진의 조바심과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걸 보겠다는 의도가 명백했다.
“치마폭 운운하면서 숨어 있지 말라더니, 사실은 두려운 거지. 이제 막 검에 눈을 뜬 계집의 검에 패할 것 같으니까.”
“격장지계는 네놈의 팔을 자른 후에 들어 주마.”
운기가 끝나려면 일각도 남지 않았다. 하나, 시간은 상대적이다. 일각은 여삼추라고, 다급하게 기다리는 자에게는 억겁보다 길어질 수도 있었다.
익경은 거구임에도 경신이 가벼웠다.
일수유(一須臾)에 무진의 정면을 막아서며 기세를 발출했다. 산중제왕이 토끼를 사냥하듯, 살기로 뭉쳐진 무형지기가 무진을 덮쳤다.
익경의 대도가 수직으로 선을 그었다. 다른 어떤 초식보다 완벽한 일도양단이었다. 산악을 참하여 절애를 이루듯 공간이 반으로 갈린다.
스왁!
스륵!
경각에 이르는 일촉즉발.
익경의 대도가 무신의 오른팔을 가르며 바닥을 내리찍었다.
꽈아아앙!
지면에 닿은 대도에 땅거죽이 폭발하며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가 떨어져 내렸다.
후드드드!
어둠을 짙게 물들이는 흙먼지가 바람에 흩어지며 모습을 보였을 때, 실눈(絲眼)에게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쐐액!
실눈의 정면에 무진이 있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바로 전 익경의 대도에 팔이 잘려 나가야 했거늘.
“눈 떴네.”
“……이놈!”
몸이 의지를 따라 주지 않는다.
무진의 일보(一步)가 공간을 장악하고 있었다. 전장을 지배하는 전왕의 발걸음, 전군보가 펼쳐진 것이다. 단번에 실눈의 제공권을 무력화하고, 반응 속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렸다.
일사천리로 주먹을 뻗었다.
슈우우우!
사내는 주먹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실눈이 점점 더 뜨여지며 동공을 점점 채우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주마등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이 내가?’
사내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비현실이었다. 운신을 제압당한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속도를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가?
태소산.
이름만 들어서는 잘 모를 수도 있다. 하나, 광기를 번뜩이며 살육전을 펼쳤던 전장을 봤다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광살(狂殺).
광기에 젖은 살인마.
칠살의 일인.
무수히 쌓인 악명과 수식어.
그런 수식어들이 태소산을 증명했다.
지금은 살육전의 악마가 아닌, 한낱 희생양이 되어 가고 있었다. 산중제왕은 아니더라도 늑대는 되어야 하거늘, 이리 허무하게.
‘이건…… 아니야!’
광기를 번뜩이는 최후의 발버둥에 태소산은 제압되었던 운신이 풀리는 걸 느꼈다.
조금만……!
퍼어어어억, 뿌거거거걱!
주먹은 나아갔다.
태소산의 머리통이 폭죽처럼 터지며 파편과 함께 선혈을 토해 냈다. 몸뚱이는 머리를 잃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다는 듯 꿈틀거렸다.
털썩!
곧, 힘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광살의 마지막 몸부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제법이었어.”
전군보의 예측에서 살짝 빗나갔다. 결과는 바뀌지 않았지만, 칠살의 일인다웠다.
죽음은 한순간이었으나, 무진의 살의는 가볍지 않았다. 대비하고 있었어도 막기 어려운 일수를, 방심하고 있었다면 자명했다.
부들부들!
대도를 바닥에 내리꽂은 채 망부석이 된 익경이었다.
“……어떻게?”
내려다본 자리에 있어야 할 목표는 사라졌다. 일촌음에 벌어졌던 광경은 현실적이지 않았다. 대도는 잔상을 베었고, 미처 반격을 예상하기도 전에 왼쪽 가슴을 내어 주었다.
쿨럭, 주르르르르!
바람 빠진 기침에 폐부 깊숙이에서 솟구쳐 오르는 선혈이 입을 타고 흘렀다.
익경은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가슴을 관통하여 내부를 부순 내가중수권에 심장이 파열되었다. 살아 있는 것은 융통무애(融通無碍)한 내기의 마지막 저항에 불과했다.
털썩!
항거 불능이 되어 죽음을 기다리게 된 익경을 뒤로하고, 사방엔 적막감이 흘렀다.
“……헉?”
천기십영의 일영, 제갈성천.
눈앞에서 벌어진 참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상식적이지 않은 결과물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익경과 함께 온 산동악가의 철혈당 당주, 악중필도 마찬가지였다. 형님의 명령을 받고 천운권을 죽이기 위해 절치부심했었다.
참살대도가 천주신창에게 패해 계획대로 되진 않았지만, 긴 기다림 끝에 천운권이 제 발로 문파를 나섰다. 이제야 비로소 과거의 원한을 씻어 낼 절호의 기회를 얻은 줄 알았다.
……이게 무슨?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꿈처럼 다가왔다. 악몽이라면 깨어나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쳐다봐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참살대도는 죽어 가고, 광살은 죽었다.
그들보다 강한 고수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수에 육성과 칠살에 속한 고수를 무력화할 무인이 있을 수 있을까?
덜덜덜!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한 악중필은 떨려 오는 육신을 주체하지 못했다. 권왕과 짜고 수작을 부릴 줄만 알았던 놈이, 사실은 상식을 불허하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황보세가가 산동악가의 청혼을 거절한 연유를 자각했다. 이런 괴물과 원수가 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싸워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참살대도와 광살을 일수로 처리한 괴물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싸워 봤자 전멸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악 당주, 이럴 때가 아니라고. 정신을 차리시오!”
“……어떻게 하지?”
“천하제일고수라도 광살과 참살대도를 저리 죽이진 못하오. 사술을 쓴 것이 분명해.”
“……맞아, 너 따위가 천하제일고수라니! 그럴 리가 없지!”
제갈성천은 넋이 나가 있던 악중필을 일깨웠다.
그러나 내심은 달랐다. 사술을 썼다고 단정하기도 어렵고, 설령 사용했다고 해도 참살대도와 광살과 같은 고수가 사술에 쉽게 당하겠는가.
“우리가 놈을 유인할 테니, 저놈들을 사로잡으시오!”
“아, 그렇게 하지!”
제갈성천은 시간을 벌고, 간격을 벌리는 사이 운기하는 놈들을 인질로 잡기로 했다. 정면 대결을 벌여도 이긴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한편으로 이런 자가 천운권으로 소문이 났었다니, 세상이 전부 속고 있었다.
제갈세가와 산동악가마저 놈의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제갈성천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무공은 뒤떨어진다 해도, 두뇌 싸움에서는 앞선다고 자부했기에 더더욱 그렇다.
“간악한 놈! 모두를 속였구나!”
“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다는 거지? 분명 천권이라고 누차 말했을 텐데.”
……빠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