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07
306 역습(2)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잘하겠지.’
-무책임하군.
‘다 죽을 거, 몇 명은 살릴 기회잖아. 그거면 됐지. 마신대전 때 몰살한 문파가 한두 개도 아니고. 아, 마왕만세는 많이 유치했다.’
-시끄러웟!
마왕이 출도했을 당시 마신교도의 암어(暗語)였다. 잘만 활용하면 마인을 걸러 내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시신을 수습하시지요. 비록 타락해 버리긴 했으나, 한때는 동문이었지 않습니까.”
“강 대협의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무진이 살릴 수 있는데도 다 죽여 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행여나 그런 불경은 저지르지 않겠다는 의지가 충만하다.
안면을 튼 잡것들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무진은 처제들에게로 향했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처제들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처제들한테는 잘 보여야 했다.
알고 봤더니 내 아내가 처제들을 끔찍이 위해서 질투가 날 지경이다.
‘차라리 사고사로…… 안 되겠지?’
-그런 생각을 왜 하는 거냐? 그리고 그딴 거 묻지 마라!
‘지는 막 죽였으면서.’
-본 좌에겐 날조 따윈 통하지 않는다.
우연히 벼락을 맞아 죽는다면 처가에 가는 횟수를 줄일 수도 있으나, 그쯤에서 멈추었다. 아내가 슬퍼할 짓은 되도록 하지 않는다. 원만한 타협을 위해 형부로서 노력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단 환하게 웃으며.
“처제들, 보문상단의 물동량이 배로 늘었다더라. 그게 다 내가 정운상단주에게 특별히 부탁한 결과물이야.”
“형부, 보고 싶었어요!”
“우리가 얼마나 애타게 기다린 줄 아세요!”
와, 처세 봐라.
늘었네.
금품만능주의, 즉 속물의 때를 벗기란 이렇게나 힘들다. 무당파가 고생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무당파가 도문이긴 하나, 사람은 먹고사는 데서 자유롭지 않았다.
속가 문파를 두고, 후원자를 모집하는 연유였다. 자연스럽게 모금이 되면 좋겠지만, 사람 사이가 어디 그런가. 주고받는 거래 속에 싹 트는 인정은 무시하기 어렵다.
고로, 보문상단이 잘나가야 처제들에게도 이로웠다. 가문이 비렁뱅이가 되면 무당파로서도 들어오는 수입이 줄기에 대우가 박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기대대로 많이 늘진 않았구나.”
“무슨 소리예요, 형부!”
“저희들은 무당의 기대주가 되었다고요!”
그걸 자신들 입으로 말할 정도로 뻔뻔해지다니!
나이가 들었구나.
아니면 무당파에서 예의, 절제, 겸손을 배우지 않았나. 원래 인성 교육부터 했어야지.
어이구, 두(頭)야!
“청현 사형이 그 증인이거든요.”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
“아, 그 인간은 죽어서도 도움이 안 되네요.”
“그게 방금까지 피 터지게 싸운 놈에게 할 소리야?”
“지옥 갔으면 좋겠어요.”
청정도문의 앞날이 순탄치는 않겠다. 그래도 꽉 막히지 않아 인간미는 있었다. 사람 사는 곳에서 너무 고고한 척, 때 묻지 않으려는 건 위선에 지나지 않았다.
“형부는 극살을 죽일 때보다 더 강해지신 거예요?”
“쉿! 그거 일급비밀이야.”
“아, 적 소저! 방금 들은 말은 못 들은 거예요. 헤헤헤!”
극살을 죽였다고 하자 적서린과 무애선자는 헛바람을 삼켰다. 일전 청성일검과 사매를 쓰러뜨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와는 다르다.
‘검술을 익히신 건가?’
‘권공인 줄 알았거늘.’
청성일검이 습격한 장소를 살폈었다. 권공을 익혔다고 보았는데, 오늘 보니 검공의 대가였다. 제갈무기와 당사진의 합공을 검예만으로 무력화한 모습에 깨달음을 얻기까지 했다.
그 전에, 씁쓸하지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오늘도 도움만 받고 말았군요, 강 대협. 여전히 저는 무력하기만 하네요.”
“의기소침할 필요 없습니다. 한꺼번에 해결할 사안이었다면 시일을 끌지도 않았을 겁니다.”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없었다.
적서린과 무애가 사문에서 실력을 행사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리라. 오늘의 실패가 그녀들에게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무엇보다 서두르지 않는 편이 이로웠다. 성과를 내기 위해서 섣불리 나섰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땅에 묻혔을 것이다.
“사문에서 이번 일에 적극적이었던 분들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적서린과 무애의 안색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오늘의 참사는 예상한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이는 청성과 무당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의사 표출을 자제했던 장로들이 이번에는 제자들을 선별했다. 그때만 해도 제자를 위하는 스승의 마음인 줄 알았지만, 이젠 모든 것들이 의심스러워졌다.
“또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분들도 있었을 겁니다. 이쯤 되면 그간 지내왔던 시간이 부정당하는 기분일 테지요. 하나, 섣부른 판단은 독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평소와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암류는 그러한 의심마저 이용할 테니까요.”
“몰랐을 땐 이렇지 않았는데. 이젠 너무 많아서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모르겠어요.”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포기하면 당장은 편하겠지요. 하나, 외면한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사문을 지키고, 더 나아가 무림의 정기를 수호하려면 어렵더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 대협의 말씀, 새겨듣겠어요.”
포기하면 변하지 않는다. 거스르지 않는다고 사문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적서린과 무애는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을 재차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대단한 분이야.’
‘난세에 영웅이 난다더니.’
무진을 바라보는 적서린과 무애의 눈빛은 동경과 선망을 담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나아가야 할 지침표 그 자체였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치욕과 수모도 감수할 줄 아는, 이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 아닌가.
크흠.
내색하진 않았지만, 맘에도 없는 개소리를 한참이나 떠들었더니 무진으로선 다른 때와 달리 목이 탔다. 근래에 발전을 이루었다고 한들, 미래에 성장한 능력치에 눈이 가기 마련이다. 이미 증명을 끝낸 후보들과 비교하면 큰 기대를 하면 안 되었다.
다만, 무림맹의 맹주를 선임해야 할 시기에 무당, 아미, 청성이 반대만 하지 않으면 된다. 최소한 마신교와의 전쟁에서 무림맹이 벌인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했다.
‘검제가 맹주에 오르는 편이 낫겠지.’
-죽었어야 할 자가 살아 있으니, 적임자임은 분명하다.
남궁혈사에서 살아남은 이상, 검제야말로 이상적이었다. 친분도 있고.
세상사가 그렇듯이 인맥 무시 못 한다. 나중에 필요한 곳에 사람을 배치할 때 최선이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은 한 무리에 넣고 몰살당하게 둘 수도 있고.
일석이조다.
‘개전 초에 삽질하게 했던 병신은 지금 어디 있는 건지. 빨리 나와야 할 거 아냐.’
-지금 죽이면 계획이 틀어질 거다.
‘그건 그래. 적은 원래 가까이 두라고 했으니까.’
-……?
‘왜?’
-네가 생각을!
이 새끼가, 같이 지낸 지가 얼만데. 날 여태 어떻게 본 거야! 이쯤 되면 힘만 센 멍청…… 이런 개자식을 봤나!
‘죽고 싶어!’
-알긴 아는군. 됐다.
‘되긴 뭐가 돼?’
-외면한다고 무식이 사라지진 않는다.
마신대전이 벌어질 때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현재로선 변수가 너무 많다. 당장 분풀이를 하겠다고 쳐 죽이면, 다음 수를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럴 바엔 놈을 손바닥 안에 두고, 적절히 사용하며 정보를 내어 주는 편이 낫다. 그리되면 마신교를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
‘불가피한 선택이 되지 않으면 좋겠지만.’
마신교를 속이려면 적당히 해선 안 되었다. 일거에 완벽히 속여야 하기에 내어 주어야 할 희생을 각오해야 했다. 만약 희생을 두려워하여 선택을 되돌린다면, 무림 역사상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었다.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고.’
무진은 먼 미래를 걱정하기보단, 눈앞에 처한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당시 무림맹은 완전하지 않았다. 내부적으로도 분란이 있었고, 무진을 시기 질투하는 놈들이 산재했다. 더욱이 첩자를 다 잡아냈다고 단정하기 어려웠다.
마왕이 말하길,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던 때에도 무림맹에서 기밀 사안을 보내왔다고 했다. 아마 마왕조차 모르는 어떤 선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마왕의 사육사가 남긴 숨겨진 힘일 수도 있고.
주변을 정리한 후 모였다.
제 손으로 사형, 사제, 사매를 처리해야 했기에 감정을 온전히 추스르진 못했다.
“슬픔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암류를 알아챘듯, 저들도 살아남은 우릴 의심할 겁니다. 마음 단단히 먹지 않으면 지금보다 더 큰 상실감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무진은 마냥 다독이지만은 않았다. 현실을 바르게 보도록, 냉혹함을 비쳤다. 일례로 서로 간 연락할 방도는 암어를 알려 주는 선에서 그쳤다. 사태를 모두 알고 있어 봐야 좋을 일은 없었다.
당연히 불만이 나올 순 있다.
“우리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믿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서 보셨듯이 놈들은 좌도방문의 사특한 수를 씁니다. 과연 자신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고문을 언급하진 않았으나, 뜻하는 바는 전달이 되었는지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희생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살아남은 이상 암류에겐 부담이 될 테고, 어떤 식으로든 손을 쓸 여지가 있었다.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고 해서 끝날 문제였다면, 고민하지도 않았다.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진 은인자중하며 힘을 기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고르겠습니다.”
“그거면 됩니다.”
첫술에 배부르려고 하다가, 영영 숟가락을 놓을 수도 있었다.
입단속을 했으니 이쯤에서 마무리했다.
무진은 당연우를 따로 불러 대화를 나누었다. 이번 일은 당연우가 아니었으면 어려웠다.
“천뢰구를 활용한 만천화우는 신선했다.”
“편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조만간 진정한 의미의 만천화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거, 나도 분발하지 않으면 위험하겠는걸.”
“과찬의 말씀입니다.”
당연우는 본신을 숨기고 있는 상태였다. 만독공 이전 이혈대법으로 감추어 놓은 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온전히 능력을 발휘했다면, 제갈무기와 당사진은 죽었을 것이다.
-잘했다.
-감사합니다, 주군.
대화 도중 전음을 주고받았다. 의기를 다룰 줄 알기에 바로 앞에서 본다 한들 전음을 확인하지 못했다.
당연우가 이 사태를 마무리한 장본인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무진의 행동반경이 자유롭다. 당사진과 제갈무기를 힘으로 찍어 누르지 않고, 무예로 무너뜨린 연유였다.
홀가분해졌으니, 사담으로 넘어갔다.
유약하기만 했던 녀석이 투심마안에 이렇게나 달라지다니. 문득 예전의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난 찬성이다.
-예?
무진이 처제들을 돌아보자, 예상대로 당연우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당연우로선 당연했다.
자신은 당문의 가주가 될 사람이었다. 한가로이 여인과 정을 통할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생의 전환점을 제공해 준 주군의 뜻이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어? 그래.
허둥지둥을 원했거늘.
담담하다.
넌지시 찔러보았던 무진은 당연우의 적극성에 입맛이 썼다. 확실히 재미가 있지는 않았다. 다른 녀석들에 비해 놀리는 맛이 떨어졌다.
-까아, 돌아봤어.
-너 본 거 아니거든.
-언니, 나야! 확실해.
-당 공자는 나처럼 품위 있는 여인과 어울려.
-품위가 아니라 사기겠지.
이럴 땐 귀가 너무 밝아서 탈이었다.
처제들의 전음을 훔쳐 들은 무진은 다리에 힘이 빠질 뻔했다. 놀란 모습도 잠시, 처제들을 돌아보는 당연우의 차분함에 골이 지끈거렸다.
‘아니겠지?’
-네 부인이 좋아하겠구나.
‘닥쳐.’
-자업자득이다.
둘 중 누구냐고 물어보기엔 처제들의 적극성이 부담되었다. 편들다간 형부와 처제 사이가 갈라질 수 있었다. 신속히 발을 빼고, 당연우의 판단을 존중했다.
처제들도 다 큰 어른인데, 막장 짓을 하진 않겠지.
“뒤를 부탁하마.”
“예, 강 대협.”
무진은 다른 이들에게도 인사를 한 후 돌아섰다. 이곳으로 몰려오는 무리가 있었다.
‘우리 마독을 보러 가자.’
-누가 들으면 친구인 줄 알겠군.
하긴 너무 오래 알았다.
이젠 죽일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