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09
308 운수 좋은 날
대낮임에도 검은 구름에 뒤덮인 산은 어두웠다. 바람에 흩날리는 안개비에 옷이 질척하게 젖었다.
여러 방향의 발자국과 수풀을 훑고 지나간 흔적들.
교란의 목적이 다분해 보였다. 그러나 앞장선 자들은 추적의 고수들이었다. 도주 대상자의 의도를 분쇄하며, 분지에 올라섰다.
“저깁니다.”
고생하여 찾아낸 것이 역력했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더 빨리 찾아내지 못해 편치 않았다. 하나, 내색하지는 않는다. 실패는 이미 겪을 만큼 겪었다. 원치 않게도 분노하기에는 내성이 쌓인 편이다.
‘나를 이렇게나 골탕 먹인 걸 후회하게 될 거다.’
강호인들이 치켜세워 준다 해도 어차피 도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하찮은 놈에게 여태 농락을 당했다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가라앉지 않은 살의와 분노. 그럼에도 다스린다. 하찮은 도적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열어라.”
“예.”
가타부타 부언하지 않았다. 명이 떨어지자 앞선 자들이 나서 얕은 개울이 모이는 구멍을 넓혔다. 곧 수명이 들어가기에 충분한 입구가 되었다.
화르르!
안으로 들어선 십수 명이 화섭자로 횃불을 밝혔다. 먼지가 쌓여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물기가 스며들지 않아 건조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인공적인 통로가 있었다. 내력을 돋우자, 어둠을 관통하여 삼 장을 투영했다.
스윽!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아래로 내려섰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고, 내려간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발자국을 숨기기 위해 먼지를 모아 놓았지만, 바람의 결이 남았다.
스윽!
발 구름을 한 후, 용천혈로 내력을 보내 허공을 타며 속도를 늦추었다.
순조롭게 흘러……?
뜨끔.
“은사?”
은사는 통로 전체가 아닌 내려가는 부분에만 몇 가닥 있었다. 알고 있더라도 발견하기 어려운 얇은 은사였다.
파팟!
앞섰던 동료가 멈칫할 때, 사태를 깨달은 자들이 통로의 벽을 버팀목으로 삼았다. 짧은 순간 알아채고 반응하는 속도만 봐도, 그들은 보통 사람과 달랐다. 능히 고수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자들이었다.
단, 고수도 목숨은 하나다.
드륵!
벽면의 한 축이 들어가자, 다른 부분이 튀어나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숨겨져 있던 단창 수십 발이 쏘아졌다. 기습의 연계가 실로 사악했다. 방향을 선회하게 하고, 안심하는 찰나를 노렸다. 인간의 심리를 정밀하게 파악하지 않고서는 설계하기 힘든 함정이었다.
아니면 괄시받은 늙은이의 한이거나.
슈슈슉!
허공에서 방향을 급히 틀어야 했던 자들은 아래로 추락하다, 숨겨져 있던 은사에 희생양이 되었다.
주르르!
스치고 지나간 예리한 실선에 선혈이 흘러내렸다. 동료의 희생으로 은사를 발견한 자들이 도검으로 잘라냈다.
함정의 수준을 고려하면 희생 자체는 많지 않으나, 그들은 이렇게 간단히 죽을 만큼 약하지 않았다.
쯧!
짧게 혀를 차는 현천군이었다. 저런 비루한 함정에 허우적대는 모양새가 마땅치 않았다.
현천군과 달리 백암은 함정의 구도가 범상치 않다고 봤다. 오래전에 쓰던 수법과 달리 상당히 절묘하다. 이를 증명하듯, 인간의 방심과 능력치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통로의 폭을 조절해서, 함정에 대응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낌새를 알아채는 순간의 방심을 노렸다고 볼 수 있었다.
바닥의 끝에서 한 가닥의 은사를 확인하자, 미간을 찌푸렸다. 기존의 은사에 비해 새것이었다.
‘확실히 여우 같은 놈이야.’
원래 있던 은사에 가지고 있던 은사를 더한 것이다. 양쪽으로 은사를 심고 내력으로 눌러서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의도가 있었다.
이건 좋지 않았다.
서걱!
백암의 예측대로 희생자가 또 나왔다. 기존의 함정은 상처를 입는 선에서 끝이 났지만, 나중에 설치한 암기에 목숨을 잃었다. 직선과 곡선의 암기에 은사가 뒤섞이고, 새로 설치한 비수가 치명타를 선사했다.
“그깟 함정을 피하지 못해서야.”
심각해진 암주들과 달리 현천군은 과정이 탐탁지 않았다.
직접 선별하여 무공을 전수했기에 현마단은 여타의 무력단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고작 수백 년 전의 유물과 비루한 도적놈에게 고전하다니, 자신의 가르침이 쇠한 더러운 기분을 맛보았다.
“비켜라.”
함정을 일일이 격파하자니, 꼬리를 문 사냥개를 완전히 떨구어 내지 못했다. 될수록 흔적을 남기지 않는 선에서 추적을 끝내려고 했거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보아라.”
***
툭!
가느다란 실이 하나 끊어졌다.
지루해서 하품이 나오려던 노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너무도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기다려야 했다. 이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진 않았지만, 좀이 쑤셔 죽는 줄 알았다.
“무간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이 나이를 먹고도 기대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갈고닦은 정수를 모조리 다 쏟아부은 필생의 역작이었다.
그것만은 안 된다며 울고불고했던 자식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가문의 기물까지 털어 왔다.
툭!
실이 또 끊어졌다.
노인은 지렛대로 연결된 단봉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진동이 울린다. 미세한 파문을 확인할수록, 머릿속에선 함정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순차적으로 그렸다.
“새것과 헌것의 조화이니라.”
안 될 거라고?
어림도 없다.
인생 다 산 노인네라도 괄시하면 지옥행을 면치 못하는 법. 그 원한의 대상이 오고 있었다. 녀석에게 보여 주어야 했다.
역사를 되짚어 봐도 유례가 없는 지옥의 광기를.
크크크크크!
백 살에 가까울수록 인간은 요물이 되기 마련. 살날이 많지 않을 거란 기대는 하지도 마라.
“어딜.”
노인의 매서운 손속이었다.
큭!
재밌어 보여서 자신도 한 번 당겨 보려고 했던 거구의 사내는 붉어지는 손등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저게 어떻게 백 살 먹은 노인네야!’
자신도 제법 빠르다고 자부했지만, 언제 손등을 쳤는지 모를 만큼 번개 같은 손속이었다. 능히 전설의 수강으로 불리는 광천수에 비견되었다.
“이게 얼마나 섬세한 기구인데 함부로 만져! 저리 안 꺼져!”
“심보 하고는.”
“뭐라?”
“……아닙니다!”
같은 왕의 반열에 들지만, 연배 차이가 크다. 더욱이 동굴에서 지나치게 오랫동안 단절된 생활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괴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위험한 노인네네!’
장필도조차도 건드리고 싶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오왕의 일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반열은 아닌 듯하다. 단순히 무공의 우열만이 아닌, 백년구력의 무서움이었다.
기실, 진짜로 만지려고 하진 않았다.
노인네의 반응을 의도했기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손등에 선명한 흔적이 남았다. 완성된 광룡투마신체를 고려하면 믿기지 않는 속도와 경력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여기서 독수를 썼다면 단순 통증으로 끝나지 않았겠지.’
독에 이은 암기의 연계, 독왕의 정수가 실리지 않았다. 전력 대결을 벌인다면 간단히 지진 않겠지만,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다.
그렇다고 실망하진 않았다.
‘시간은 내 편이니까.’
응?
꼭 그런 건 아닐지도.
광기를 번뜩이는 독왕의 무시무시한 기력을 보고 있자니, 앞으로도 백 년은 거뜬할 것 같았다. 이는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보기 힘들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형제들도 질린 기색이 완연했다. 객기를 부렸다가는 한 줌의 독수로 화하고도 남았다.
그래서 더 믿지를 못하겠다.
“영감님,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버릇없기는 그놈이나 네놈이나 매한가지구나. 정신 사나우니까, 빨리 물어봐라.”
“무진님 만세를 열 번 하신 겁니까?”
“……닥쳐!”
때마침 비밀 통로로 들어온 검제와 취선은 어색한 기류에 발길을 돌릴 뻔했다.
***
함정의 난이도가 높을수록 기관진식도 복잡할 테고, 들어가는 부품도 많을 수밖에 없다. 또한, 기관진식으로 이루어진 함정은 연계가 중요하다. 개개의 독립적인 형태가 아닌, 다음으로 이어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하나, 설치된 함정은 수백 년이 족히 되어 갔다. 사람이 늙어 가듯, 기관도 녹이 슬고 무뎌지기 마련이다. 섬세한 기관일수록 부품 하나만 망가져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관의 중추가 될 만한 지점에 충격을 가했다. 무식해 보이나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었다. 절대고수가 함정에 잘 걸리지 않는 까닭이기도 했다.
이제 더는 함정이 발동하지 않아야 하거늘.
웬걸.
예상치 못한 시간과 공간에서 독과 암기가 발출되었다. 의도치 않게 수하를 사지로 밀어 넣은 격이 되었다.
물론, 수하의 죽음이 중요하진 않았다.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다.
한 번 실패는 병가지상사이니.
두 번은 농락당할 수 없기에 내력을 집중하여 진각을 밟았다. 지축을 흔들었기에 기관이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을 줄 알았다.
이런!
진각을 쓰기 전 기파를 보내 바닥을 확인했었다. 그런데도 지하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지축이 흔들리는 걸 뛰어넘어 완전히 붕괴해 버렸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가라앉으며 화골산에 버금가는 강력한 산성의 증기가 발출되었다. 바닥으로 떨어지진 않겠지만, 가만히 있으면 위험했다.
솨아아아!
누군가 의도적으로 수작을 부린 느낌을 받았으나, 녹림왕은 제외했다. 아무리 빨리 들어왔어도 이처럼 대단위 함정을 설치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쐐액!
지면이 꺼지긴 했지만, 경신으로 뛰어넘으면 되었다. 부서져 내리는 돌 조각을 딛고 신속히 주파하여 피해를 최소화했다. 도중에 의도치 않게 잃은 네 명의 수하는 의미를 두진 않았다.
지체할 수 없기에 현마단을 닦달했었다. 다음 관문은 독기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내력과 지구력을 확인하기 위한 지극독혈수였다. 산성의 증기는 지극독혈수와 이어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허공답보로 느긋하게 걸었고, 현마단은 벽호공을 펼쳤었다. 어렵지 않은 관문이었다.
그래야 하는데.
제기랄!
육성으로 터져 나오는 욕을 간신히 참았다. 허공답보로 거의 다 건너왔을 때 열 명이나 잃었다. 벽의 중간중간이 무너졌고, 암기가 발출된 것이다. 벽을 탈 때까지는 알아보지 못하도록 했고, 건너간 흔적이 남아 있기에 예측하지 못했다.
그뿐이랴.
잔잔하던 지극독혈수의 바닥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떨어져 내리며 사방을 녹여 내기에 내력으로 육신을 보호해야 했다. 한발 늦은 수하들은 몸에 군데군데 화상을 입거나, 독기를 흡입하여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때쯤에 녹림왕이 아닌, 죽고 사라진 천무자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따위 말 같지도 않은 함정으로 자신을 곤란하게 했으니, 부관참시도 모자랐다.
한데, 끝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통로로 들어서고, 공터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기관이나 진법이 펼쳐져 있지는 않았다. 설령 있었다고 해도, 같은 수에 또 당하진 않는다. 방심을 버리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방에서 독물들이 튀어나왔다. 오는 동안 독물이라고는 보지도 못했고, 흔적도 없었다. 독물이 있었다면 독향이나 독기가 있을 테고, 끈적끈적한 이물질이 묻어 있어야 했다. 마치 중심까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독물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오고, 암기가 폭우처럼 쏟아졌다.
이치에 맞지 않았다.
기관장치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반응했다. 의문이 들기는 하나, 그런 걸 따지기에는 당한 게 너무 많았다. 가로막는 걸 힘으로 전부 부숴 버렸다.
그리고 당도한 공터.
현천군은 뒤를 돌아봤다. 현마단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남아 있는 수가 오십 명, 현마단의 삼분지 일이 부상을 입거나 죽었다. 전투를 벌인 것도 아니고, 함정에 걸려 실력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어이없이 당했다.
부글부글!
차라리 수하들의 실수였다면 현천군은 받아들였을 것이다. 보여 준답시고 앞장섰다가 피해를 키우고 말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움찔!
백암을 비롯한 암주들은 그나마 상태가 나았다. 현마단은 합공에 특화된 녀석들이었다. 개개인의 실력도 나쁘진 않으나, 자신들과 견주기엔 부족하다.
그런데도 현천군의 눈치를 봐야 했다.
‘말도 못 꺼내겠군.’
‘천군에게 수치를 안겨 줬어.’
‘녹림왕! 곱게 죽진 못할 거다.’
‘우리도 조심해야 해.’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다. 괜히 현천군에게 쓸데없는 말을 했다가는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었다. 다른 때와 달리 현천군의 심기가 얼마나 불편한지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현천군뿐만 아니라 암주들에게도 이번 사태는 예상을 계속 빗나갔다. 애초의 계획은 녹림왕을 천무자의 유산에 들어오기 전에 제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쥐새끼 같은 녹림왕은 자신과 똑같은 분신을 곳곳에 만들어 놓았었다. 허탕을 몇 번이나 치자 거리가 멀어졌고, 부랴부랴 속도를 내야 했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럴 수가 있나?’
녹림왕의 처세가 대단하기는 해도, 너무 빠르고 정밀했다. 잡았다 싶으면 놓치고, 함정에 걸리고, 혼란이 가중되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녹림왕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백암과 암주들은 이상함을 발견했음에도 현천군에게 밝히지 못했다.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할 텐데, 그 앞에서 녹림왕의 수작에 이용당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근래에 들어 발작적으로 반응을 했던 현천군이 떠오르자, 암주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설마, 아니겠지.’
백암은 불현듯 떠오른 불안감에 고개를 저었다. 이건 누가 봐도 말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암계라면 현천군의 속을 거울처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했다. 대외적으로 활동하지도 않았던 현천군을 훤히 꿰뚫어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통로를 나오자 넓은 공터가 나왔다. 반대편의 공터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데, 생기가 느껴지지 않으며, 미세한 혈향을 풍겼다.
“혈강시군.”
현천군은 단번에 강시의 정체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동시에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혈강시를 분석하여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마병을 얼마 전에 잃었었다.
-선을 넘은 자, 본 좌의 인정을 받으라.
-본 좌의 인정을 받은 자, 고금천하무적최강무쌍절대고수가 될지어다.
광오하다 못해 유치한 글귀였다.
혈강시는 천무자가 분명할 것이다. 혈강시를 완성하려면 절대경에 오른 육체를 지녀야 했다. 그런 육체를 찾아내기란 간단하지 않았다. 천무자는 본인을 강시로 만들어 후인을 기다린 것이다.
훗!
천무자는 나름의 수단을 썼을지 몰라도, 자신에겐 통하지 않았다. 마병은 혈강시보다 앞선 교의 최종병기로써 통제를 위한 비의를 알고 있었다.
저벅, 저벅!
현천군이 앞장섰다.
천군의 권위 하락은 곤란했다. 이번에는 보여 주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저벅, 저벅!
현천군이 선을 넘자, 혈강시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왔다. 아직 공격할 의사는 없었다.
“천한 마물이여, 내 눈을 보거라.”
천군의 신안.
마병의 이지를 제압하는 권능을 지녔다. 하물며 그보다 떨어지는 혈강시가 현천신안을 버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순간.
끼요요요요요욧!
혈광을 활화산처럼 불태우는 혈강시는 완전히 맛이 가서 지랄발광을 했다.
“……?”
***
공동 안의 기류가 묘하다.
독왕, 녹림왕, 검제, 취선이 원형의 탁자를 두고 앉아 있었다. 정사를 대표하는 거물이 이처럼 한자리에 앉아 마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이들은 전부 신주이십일강에 속해 있었다. 역대로 따져 보아도 흔치 않은 정사 연합의 미친 조합이었다.
“선배는 여전히 건강하시구려.”
“꼭 먼저 뒈지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오해요, 그럴 선배도 아니시지 않소.”
“검제도 나이가 드니 능구렁이가 다 됐어.”
독왕의 투덜거림에 취선이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목석같은 검제가 저리 변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나이가 들어 융통성이 생겼다기보다는, 타협한 흔적이 역력했다.
자자!
어색한 분위기에 장필도가 나섰다. 녹림의 왕이기는 하나, 이 자리에선 연배가 가장 달렸다. 최근 가파르게 무위가 오르긴 했지만, 직접 마주한 구세대의 절대고수는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딱딱하게 이러지 맙시다. 우리가 남도 아니고, 다 같이 형님한테 처맞은 피해자가 아닙니까. 이럴 때일수록 똘똘 뭉쳐서 피해를 복구해야만 합니다.”
“……!”
이 새끼가 지금 우리 다 먹이는 건가?
독왕, 검제, 취선이 발끈하며 장필도를 노려보았지만,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으며 도리어 물었다.
“우리가 말로 해서 들을 성격도 아닌데, 설마 고분고분했겠습니까. 막말로 저도 한 성깔 합니다. 그런데도 얌전한 고양이처럼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다면 말 다 한 게지요. 그러니 아닌 척해 봤자 의미 없습니다.”
“녹림왕에 대한 소문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군.”
“과찬의 말씀입니다.”
“하긴, 숨긴다고 될 일은 아니겠지.”
그들은 일문의 수장이며, 정사를 대표하는 절대고수다. 당연히 말로 해선 설득이 될 리가 없다. 일단 말보다 주먹이 가까웠고,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설득은 그다음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무인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 말을 듣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것도 한참이나 어리거나 무명이면 더더욱. 본인에 걸맞은 무위를 갖추어야 설득력이 있었다.
속물 같다고?
인간은 다 똑같다. 자기는 아닌 척해 봐야, 위선에 지나지 않았다. 까놓고 말해 도둑놈의 말보다 청렴한 관리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지 않나.
“형님이 강하긴 강한가 봅니다.”
“강하지. 나와 이 친구가 합공하고도 안 됐으니까.”
“……아! 혹, 우리가 함께 해도 안 되는 건 아니겠지요?”
“장담할 수 없지.”
검제와 취선에게는 수치스러운 역사임에도, 딱히 현실을 부정하진 않았다. 이 무리의 중심은 다른 누구도 아닌 무진이었다. 녀석의 강함을 폄하해 봤자, 자기 비하밖에 되지 않았다.
허~~!
이번에는 독왕과 녹림왕도 제법 놀라는 눈치였다. 무진의 강함이 일반적인 상리를 아득히 넘어서기는 해도, 검제와 취선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줄이야. 한데, 여기 모인 자신들이 전부 덤벼도 답이 나오지 않는단다.
‘후우, 하마터면 뒈질 뻔했구나.’
장필도는 형님의 강함을 인정하면서도, 후일에는 넘어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마저도 실체의 편린에 불과하다니. 대체 얼마나 강한지 감이 오지 않았다. 천무자의 심득을 적선하듯 던져 줄 때부터 이상하기는 했다.
“괴물 같은 형님께서 신중한 걸 보면, 저들을 가볍게 봐선 안 되겠군요.”
“마지막 관문까지 들어온 것만 봐도 보통은 아니지.”
독왕은 자신의 함정에 자부심이 있었다. 천무자가 설치했던 기관을 연구하여 당문의 역사를 녹였다. 평범한 놈들이었다면 두 번째 관문을 넘지 못하고 황천길로 직행했을 것이다. 무식하게 힘으로 돌파해서 마지막 관문까지 도착한 이상, 방심은 금물이었다.
물론, 마지막 관문이 녹록하진 않았다.
“그래도 실패는 용납할 수 없네.”
“맞는 말씀입니다.”
이번 작전의 모든 구상과 계획은 무진의 머리에서 나왔다.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적을 유인해서 전력을 갉아먹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돌이켜 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는 짓은 무식의 결정판인데, 결과만 놓고 보면 천재적이었다.
그런 부수적인 문제는 둘째 치고, 상을 차려서 떠먹여 준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도 먹지 못하고 뱉어 낸다면 자존심을 구기는 차원으로 끝나지 않았다.
신주이십일강이 허명임을 자기 스스로 밝히는 격이었다. 무엇보다 무진의 빈정거림을 듣고 싶지 않았다.
“실패한다고 형님이 안타까워할 분도 아니고요.”
“능히 그럴 줄 알았다고 할 녀석이지.”
설마 그럴까?
그딴 상식적인 도출은 상정해선 안 되었다. 언제나 상식 밖의 언행을 대수롭지 않게 해 왔었다. 그래서일까? 이 자리의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응당 그리할 놈.
속된 말로 상종 못 할 개새끼다.
그것이 무진에 대한 신랄한 평가였다. 박하다고? 있는 자리도 아니고, 없는 자리에서 이 정도 평가면 황제도 감지덕지해야 할걸.
드드드드!
공동이 흔들렸다.
최종 관문이 뚫렸음을 의미했다. 더는 한가로이 잡담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협소하진 않지만, 공터에서 상대하기에는 여러모로 불편했다.
“가세, 끝장을 봐야지.”
“저도 놈들의 정체가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일세.”
“이번엔 제법 큰 놈이라고 했으니.”
적들의 실체, 그저 암류라고만 알고 있었다. 여태 놈들의 의도대로만 끌려갔다. 만약, 계획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세간에 알려진 풍파는 미풍에 불과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어느 하나 가볍지가 않았다.
그런데도 실체에 접근하기는커녕 꼬리조차 잡아내지 못했다. 잡히는 족족 목숨을 끊거나, 금제가 발동했다는 변명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독한 놈들이란 사실을 떠나, 대체 어떤 세력인지 알아야 했다.
무엇보다 언제까지 무진에게 신세를 질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무공만큼이나 지랄맞은 성격에, 위아래도 없고. 돈만 밝히는 인성파탄자는 분명하나, 어쨌든 은인이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보여 주겠네.’
‘노인네를 괄시하면 천벌을 받느니라.’
‘방도들을 위해서라도.’
‘형님,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는 몰라도 이 동생은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