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1
030 다툼(2)
선착장에 정박한 배 중 제법 큰 배에 탔다. 작은 배로 가기에는 소호가 보통 넓은 게 아니었다. 호수를 가로지르려면 선단의 규모가 있어야 위험에 노출되는 빈도수가 적었다.
또한, 이름 있는 상단이 운영하는 배를 타는 편이 수월하다. 강 반대쪽으로 도강하는 일은 나룻배로도 되지만, 소호에는 나름의 무림이 있었다.
무진은 안휘성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정운상단의 배를 골랐다. 뱃삯이 조금 비싸기는 해도 안전을 위해 투자했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거든.
“아버지.”
“왜?”
태진이 불편한 표정으로 눈짓을 주었다. 배에 타기 전 통성명하고 인사를 했는데, 사뭇 도전적이었다. 노려보는 눈빛에서 장풍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다.
왜 저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도전을 받아주겠다니요? 제가 언제 도전한다고 했어요! 아까 데리고 가서 무슨 말을 한 거예요?”
“별말 안 했는데. 소룡대회 나간다기에 우리 아들이 더 잘한다고 했을 뿐이야.”
아비가 돼서 아들이 부족하다고 할 순 없잖아. 딱히 잘나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내 아들은 나만 건드릴 수 있었다. 다른 놈들이 손대면 안 참는다.
태진은 골이 지끈거렸다.
이래서 혼자 간다고 한 건데!
“아니,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요!”
“혹시 자신 없는 거야?”
우리, 부자간에 주먹은 들지 말죠. 대답은 자유지만, 원하는 대답이 아닐 때는 가차 없다.
“……누가 자신 없데요!”
“그럼 됐네.”
가는 김에 좋은 형이 생기나 했더니, 아버지는 경쟁자를 만들어 버렸다. 배에 타고 있는 내내 눈도 깜빡이지 않고 노려보았다. 눈 안 아프나? 보기만 해도 안구가 건조해질 것 같다.
그러나 태진도 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난 지지 않는다!
태진과 마주한 철호는 소리를 죽인 채 입만 벙끗거렸다. 그 와중에 이상한 예의를 지키고 있었다. 좀 전에 시끄럽다는 아버지의 핀잔을 듣고는 조용해졌다. 그러면서 자신한테만 전의를 불태웠다.
이 껄끄러운 관계는 대체 뭐란 말이야!
혼자만 무사태평한 아버지를 보고 있자니 마냥 억울한 태진이었다.
내가 뭘 했기에!
가만히 있는 사람을 노려보냐고!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당사자한테는 아무것도 못 하면서, 객잔에서 봤었던 당당함을 재평가해야 했다.
그래도 좋게 봤는데.
철호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나이가 비슷한 것도 아니고 세 살이나 어렸다. 그런데도 질 거라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갑판에서 싸우면 물에 던져 버린다.”
맘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승부를 보고 싶은데, 무진의 경고가 맘에 걸렸다. 환한 미소를 짓기에 농담으로 치부할 수도 있으나 저 무식한 인간은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살아온 세월이 길진 않지만, 자신보다 무식한 인간은 처음 봤다.
‘여기만 아니면 돼.’
철호는 수영을 못한다. 해본 적이 있어야 하지. 배를 타 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우웩!
망할 놈의 뱃멀미!
민물고기들이 몰렸다.
무진은 아들과 철호의 신경전을 관심 없는 척 지켜보고 있었다. 배를 탈 때만 해도 한쪽의 일방적인 투쟁심이었는데, 아들도 애답게 반응을 했다.
애는 원래 싸우면서 크잖아. 많이 싸우다 보면 정도 들 테고, 곧 정리될 것이다.
-어쩌려는 거야?
‘재밌지 않냐.’
-미래를 어그러뜨리는 짓이다. 너도 알다시피 철왕에겐 시련이 필요해.
‘시련이 꼭 멀리 있진 않지.’
-그러다 철왕이 못 되면?
‘알 게 뭐야.’
-큭, 그렇군.
철왕은 별호처럼 강철과 같은 사내다. 시련을 이겨낼 때마다 단단해졌다. 강해지기 위해선 시련이 필요한 녀석이다. 어쩌면 어제의 색마들이 철왕에게는 첫 시련이자, 최악의 시련일 수도 있었다.
정해진 운명이 비틀어져 새로운 길로 가는 중이다. 그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 삶에서 우연이 반복되거나 행운이 따르는 경우는 흔치 않겠지만. 찾아온 기연이 도망쳐 버린다면 철왕이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내가 못 하면 아무도 못 해. 나 전왕이야, 전왕! 알잖아.’
-툭하면 잘난 체야.
‘사실이니까.’
-그러면 검후는?
‘걘 예쁘잖아.’
천경은 예쁘지 않은 철호의 미래를 격려해 주어야 했다. 과거로 돌아왔지만, 전왕은 전왕이었다. 그 시절의 지랄맞은 성격이 돌아왔다고 달라지겠나.
하물며 전왕은 전장의 마왕으로 불릴 만큼 밥 먹고 싸는 걸 제외하면 전투를 가장 많이 치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평온한 세상을 즐기고 있었다. 실상, 즐긴다기보다는 억제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심술은.
‘심술이라니! 대계를 위한 첫걸음이거늘.’
-대계? 누가?
‘아니면 말고.’
천경도 이때만큼은 어이가 없어서 없는 코웃음을 쳤다. 대책이 있기는커녕 인생 막사는 것 같다. 대다수 인간은 항거 불능의 대적이 있으면 두려워하기 마련인데, 이 인간은 두려움을 모른다. 이 인간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없는 고개마저 절레절레 흔들게 만드는 놈이었다.
촤아아, 출렁!
아침에 출발한 배는 여전히 호수에 있었다.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작열하는 태양이 호수의 물결에 반사되어 눈을 따갑게 했다. 맑고 쾌청하기는 한데 피부 타기 딱 좋은 날씨다. 뱃사람들이 일반 사람들보다 시커먼 이유였다.
무진은 봇짐을 풀어 시장에서 사 온 만두를 꺼냈다. 채소와 고기를 적절히 넣어 만든 만두는 식어도 맛이 일품이었다. 몇 개는 그 자리에서 먹고, 맛이 괜찮아서 넉넉하게 포장했다.
“어떠냐?”
“맛있네요.”
“미주도 만두 좋아하는데.”
“아버지!”
“농담이야. 거기 서서 노려보지 말고 너도 와서 먹어라.”
무진이 만두를 하나 맛있게 씹었다. 식어도 육즙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게 느껴졌다. 주방장의 솜씨가 일품이었다. 속이 보일 정도로 만두피가 얇은데도 터지지 않는 걸 보면 명인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듯했다.
“……됐습니다!”
“사내자식이 뱃멀미 하나 못 이기냐. 아들아, 네 승리다.”
“……저는 지지 않습니다!”
성큼성큼 다가와서 만두 하나를 집어 씹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보지만, 속이 울렁거렸다.
“꼭꼭 씹어 먹어. 체할라.”
“괜찮습니다. 저는…… 우욱!”
괜찮기는, 뱃멀미는 적응하기 전까지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물론 고수의 반열에 이르러 육체의 통제가 완성된다면 또 모를까. 철호의 외부는 제법 여물었는지 몰라도 내부까지 단속이 될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무인은 일반인과는 다르다. 적응이 빠르고, 경험을 한 이후로 뱃멀미는 흔치 않다. 부상으로 몸의 균형이 망가지지 않고서는.
“술 한잔 어떠냐?”
“……됐습니다!”
“우리 아들은 진작 주도를 배웠거늘. 역시 어리구나.”
“주세요!”
철왕 이놈! 처음 봤을 때는 소갈머리 없는 녀석 같더니, 단순한 놈이었네. 가지고 노는 맛이 있었다. 면상은 마흔의 관록이 보여도 이러는 거 보면 어리긴 어렸다.
후르르!
호쾌하게 마셨다.
“너도?”
“전 됐어요.”
태진은 술잔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버지의 노림수에 넘어가고 싶진 않았다. 주량을 과시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고, 주도가 꼭 사내의 덕목은 아니라고 엄마가 그랬다.
아빠는 강하지만, 엄마는 가문의 실세다.
‘엄마 말 들어야지.’
태진은 심신을 다잡았지만, 후회가 밀려왔다. 그 와중에 술도 못 마시냐는 철호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인간, 아버지의 수작에 완전히 놀아나고 있었다.
보이는 것 이상으로 단순했다.
“우승은 내 차지다.”
하아아!
이 인간, 취했나?
남궁세가에서 열리는 소룡대회는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자격 조건은 안휘성의 정도문파를 기준으로 하나, 오대세가 간의 교류를 위해서 인원을 보내곤 했다.
지금에 와서 소룡대회는 오대세가의 무공을 확인하고, 미래의 후학을 과시하기 위한 자리가 되었다. 중소 규모의 문파가 소룡대회에 입상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러니 대부분은 들러리가 되곤 했다.
그럼에도 매번 대회에 나가는 것은 오대세가를 제외하고 순위에 들기 위해서다. 운이 좋으면 오대세가에 눈도장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안휘성에서 남궁세가는 절대적이었다. 그들의 눈 밖에 나면 문파를 건사하기 힘들다. 그러니 감히 초대를 거절하지도 못했다.
“소룡대회에서 우승하겠다고 했냐?”
불쾌한 언사의 낯선 목소리가 갑판을 울렸다.
고개를 돌려 상대를 봤다.
어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큰 키에 기골이 장대한 소년이 태진과 철호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태진과 철호는 ‘얜 뭐지?’ 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이 만두를 먹었다.
꿈틀!
무시를.
건장한 체격을 지닌 소년의 눈매가 사납게 변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수모로 받아들였다. 주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왔던 터라 소년에게는 참을 인(忍)이 원래 없었다.
“너희들, 내가 누군지 몰라!”
자신의 무복을 보고도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무복의 중심엔 비단의 수실로 산을 타는 백호가 멋들어지게 새겨져 있었다.
산호(山虎)는 황보세가를 가리키는 상징이었다.
황보세가는 오대세가의 한 축이며, 황보진운은 황보세가의 직계 혈육이자 권왕의 손자였다.
외양에서 풍겨 나오는 오만함을 볼 때 가정교육이 심히 의심스럽기는 했다. 어릴 때부터 오냐오냐 키우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을 품성으로 기고만장이 하늘을 찌르는 걸 보니 비명횡사하기 쉬운 녀석이었다.
꼭 그런 놈들이 눈먼 칼에 뒈지거든.
“넌 뭔데 시비야!”
“꼭 알아야 하냐?”
태진과 철호는 갑작스러운 시비에도 당황하기는커녕 귀찮은 기색이 완연했다.
시비에는 아름다운 칼부림이 정석이지. 말리는 시누이보다 얄밉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다.
‘우리 아들 잘 컸네.’
-그게 아들한테 할 소리냐.
‘시비를 걸면 받아줘야지.’
-저놈한텐 주변 봐 가면서 싸우라고 했잖아.
‘내 아들 아니니까.’
우리 아들 옆에는 대륙 최강의 아버지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리고 사내자식이 기죽고 살면 되겠어!
시비가 붙기 전까지는 최대한 자제를 하더라도 이왕 마주치게 되면 단호해야 했다. 어정쩡하게 손을 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 어떤 일이든 찜찜하게 끝내면 뒤끝이 개운치 않았다.
‘죽기 전에 죽여야지.’
-명언이군.
오랜만에 무진과 천경이 의기투합했다.
여하튼 보무도 당당하게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건방짐의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견적은 나왔다. 너희들 따위가 소룡대회의 우승을 입 밖에 낸 게 못마땅하다는 거다.
어린 새끼들의 호승지심이야 무림의 기본적인 소양이었다. 특히 가문과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높을수록 주변을 하찮게 여기곤 했다.
그러다가 눈먼 칼에 뒈진 놈들도 부지기수다. 무명이라도 당당하면 일단은 조심해야지.
빠직!
시큰둥한 태진과 철호의 반응에 황보진운의 미간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어릴 때부터 벌모세수를 받고, 영약을 복용해 또래에서는 견줄 자가 없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무명소졸이 황보세가의 직계를 모독하고 있었다. 주제를 모르는 놈들에게 황보세가의 위대함을 알려 주어야 했다.
“주둥이만큼 실력도 대단한지 봐야겠다. 겁나지 않으면 어서 일어나라.”
“일어나라고?”
“갑판에서 대련하자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