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14
313 천권이라니까(2)
녹림왕, 검제, 취선의 기세가 워낙 흉악했다. 현천군은 정면 대결을 벌이려다 버티기로 방향을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강한 것도 강한 거지만, 이제까지와는 전투의 양상이 다르다.
‘……이런 놈들이었나?’
절대고수라는 것들이 하찮은 수를 쓰고 있었다. 집요할 정도로 치사하고, 더러운 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썼다. 녹림왕이야 원체 근본이 없는 놈이라 치더라도, 검제와 취선이 이리 나올 줄은 현천군도 예상하지 못했다.
‘뭐지, 이 쫓기는 듯한 흐름은!’
쫓기고 조급한 쪽은 되레 현천군이었다. 신력이 바닥이 나기 전에 역천군이 돌아와야 했다. 신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역천군의 신력을 받아 원래대로 돌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예 바닥이 나면 그땐 탈수증상의 몇 배에 달하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장난은 이쯤 하지!]개방된 신력으로도 현천군은 벅찼다. 그간 알고 있었던 녹림왕, 취선, 검제와는 격이 다르다. 더욱이 무인으로서의 품위를 내팽개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육신에 새겨진 상처를 타고 들어오는 경력에 신력이 방해를 받았다.
이대로는 진다.
현천군은 패배의 위기감에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늦을 놈은 아니다. 보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나서야 했다.
녹림왕, 독왕, 취선, 검제를 온전히 제압하려면 힘을 합해도 부족하다.
그런데 천군이란 놈이 유희를 위해서 방치한다?
‘설마?’
최악을 상정했지만, 곧 머릿속에서 지웠다. 검제, 취선, 녹림왕은 조바심을 보였다. 합류하기 전에 자신을 제압하려는 각오를 엿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역천군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는 의미가 되었다.
‘그런데 왜?’
신력이 고갈되어 가자 상처가 벌어지고 있었다. 새로 생겨난 상흔에선 선혈이 흘렀다. 이러다간 힘이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이젠 확신이 섰다.
‘없어.’
천군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아도, 죽음까지 외면하진 않는다. 교에서 천군의 위치는 그 자체로 중요 전력이었다. 나누어진 신력을 합일했을 때 오는 전력의 증가는 군단에 비견되었다.
자신의 죽음은 천군 한 명의 소실이 아니라, 교의 주요 전력의 손실을 뜻했다. 그런데도 나서지 않는다면 문책을 피하지 못한다.
“……나를 지켜라!”
자존심은 버린다.
살아서 이 자리를 벗어나는 일이 중요하다. 다른 모든 걸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동시에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린 현실에 울화가 치밀었다.
[동귀어진에 대비해라!] [도망치면 나중에 죽을 줄 알아!] [내일은 없다고 생각해!]천리전성을 펼쳤다.
검제, 녹림왕, 취선도 목숨을 걸기는 매한가지였다. 조금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았다. 도망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럴 놈이 아니다, 그런 상정 따윈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암주들과 현마단이 현천군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 자체를 차단했다. 독왕, 녹림십걸, 백 명에 달하는 무력대가 전력으로 막아섰다.
전황이 급박하게 변했다.
현천군의 패착이었다.
빠득!
암주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가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 진암의 다리가 독왕의 암기에 매끄럽게 잘려나갔다. 다시 회복하려고 해도, 고갈된 신력이 발목을 잡았다. 무턱대고 신력을 뿌려 대다간 먼저 쓰러질 수 있었다.
“어디 다시 한번 등을 보여 봐라!”
자신을 두고 다른 생각을 품자 분개한 독왕이 상처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익장을 과시했다. 백 년 묵은 노인네를 화나게 하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연유였다.
“죽어랏, 노괴!”
“고손자를 보기 전엔 날 죽일 수 없다, 이 썩을 마물들아!”
증손자도 아니고, 고손자를 볼 때까지 살아 있을 생각을 하다니. 순간 다들 잘못 들은 줄 알았지만, 괴팍한 노괴의 현신에 혀들 내둘렀다.
크윽!
현천군은 검제의 검에 다리를 베이고, 취선의 장법에 어깨를 내어 주고, 녹림왕의 권공에 심장을 비켜 맞았다. 신력으로 부상을 회복하고는 있지만, 전처럼 빠르지 않았다.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전세가 급격하게 기울고 있었다. 암주들과 현마단을 불러들인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수하를 희생양으로 삼아 도망치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용이치 않으니 치욕스러웠다.
‘빌어먹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현천군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냉혈안으로 불렸던 철면이 부서지고, 길 잃은 방랑자처럼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럴수록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었다. 최악을 상정하고 가져온 진천뇌력탄을 사용했다.
데구르르!
이런!
검제, 녹림왕, 취선은 급히 거리를 벌려야 했다. 실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피부를 스며드는 불길함이 있었다.
꽈아아아앙, 쩌저저적!
벽력탄을 상회하는 진천뇌력탄에 일대의 축이 반이나 부서져 내렸다.
쐐액!
그 틈을 타 현천군은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이 자리에 역천군이 없다지만, 약속된 장소가 있었다. 거기까지만 가면 된다. 그럼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딜.”
“……?”
뿌연 연기를 뚫고 전속력으로 내달리던 현천군은 낯선 목소리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언제 이토록 가까이에 접근했는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죽어라…… 크억!”
“느리네.”
현천군은 숨통이 막혔다. 상대의 손이 팔을 잘라 내고, 목을 잡아챘다. 저항하려고 했지만, 무의미했다. 온몸이 기력이 빠진 것처럼 통제 불능이 되었다.
바동, 바동!
재밌는 장난감을 마주한 아이처럼 천진함이 비쳤다. 현천군에겐 그것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아이의 천진함은 때론 잔인함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제기랄!
무진의 절묘한 등장에 검제, 취선, 녹림왕의 얼굴이 썩어 갔다. 예상을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 독보적인 거만함.
나 아니면 어쩔 뻔했냐는, 의도가 표정에서 온전히 드러났다. 겸손의 미덕 따위는 한 줌도 실리지 않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망할 놈이다.
떠그럴!
모두는 이맛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완전 죽 쒀서 개 준 꼴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선천진기를 끌어 올리는 한이 있더라도 놈을 죽였어야 했다.
하아아~~~!
이런 꼴을 보려고 무공을 익혔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하필이면 잡힌 모양새도 우스웠다. 저토록 대단한 놈이 갓 태어난 아기처럼 발버둥을 치면 자신들은 뭐가 되냔 말이다.
최소한 우리의 체면을 고려해서 당당하게 질식사를.
안 되려나?
무진의 손에 잡힌 현천군은 극한의 고통을 받고 있었다. 신력이 고갈된 후라, 육체의 통제는커녕 내력마저 말썽을 일으켰다.
‘……도대체가?’
한계에 달하기는 했어도 이토록 무력하게 제압되다니, 현천군은 믿어지지 않았다.
무진은 사로잡은 현천군을 뒤로하고, 검제, 취선, 녹림왕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이래서야 제가 믿고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이놈이 도망치지 않았으면 끝낼 수 있었어.”
“화룡반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성도의 식당이고, 화룡점정이다.”
“그러니까요.”
이 무식한 놈이 이 와중에 문자까지 써 가면서 설교하려고 하자, 다들 골이 지끈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학문적 소양은 무진이 많이 달렸다. 그 앞에서 공자 왈, 맹자 왈 성인을 읊어 대고 있었다.
그래, 좋다 이거야.
좀 맞는 말을 하라 이거야. 이치에 맞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비슷하기라도 했는데, 문전박대가 여기서 왜 나오냐고!
“등하불면이군요.”
“아무 말이나 끌어다 쓰지 말게. 그리고 등하불명일세.”
무진의 표정이 굳었다.
고사성어가 궁금하면 물어보라더니, 마왕이 꼭 한 글자씩 틀리게 말하고 있었다. 괜히 문자 좀 썼다가 무식이 뽀록나는 중이다.
그러나 당황하면 무진이 아니었다.
“맞을걸요.”
“……아니, 틀렸다니까!”
“맞을 겁니다. 계속 주장하시면.”
“아, 맞다.”
무진의 인상이 험악하게 굳자 다들 고개를 돌려 현실을 외면해 버렸다. 곧은 기상과 옳은 정신으로 무장한 협객의 표본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진은 이치에 맞지 않아도, 한다면 하는 미친놈이니까.
지금도 봐라, 저게 어디 틀린 놈의 표정인가? 너무 당당해서 맞는 말인 줄 착각할 뻔했다. 아마 고사성어를 완성한 공자와 맹자도 우기면서 팰 인간이었다.
“그보다, 왜 인제야 온 게야?”
“오다가 이놈하고 똑같은 새끼가 있기에 죽이고 왔습니다.”
“……아!”
“별것도 아닌데, 시간을 끌었네요.”
늦게 와서 죄송하다는 무진의 송구함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무진을 욕해 봤자, 자신들의 무능을 고백하는 격이었다. 셋이서 하나도 해치우지 못했는데, 혼자서 둘을 처리했다.
“독왕 어르신이 숨넘어가는 것 같은데, 보고만 있을 겁니까? 나중에 어떤 소릴 들을지 모르는데.”
아차!
백 년 묵은 노인네가 고군분투하며 피투성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물며 당문이 자랑하는 최강의 꼰대였다.
저 노인네의 원한을 산다고 상상해 봐라. 먹는 건 다 조심해야 했다. 나이가 들수록 먹는 것 빼고는 삶의 낙이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젊은 녹림왕을 재물로.
다다다닥!
서둘러 암주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나아갔다.
무진은 현천군의 목을 잡은 후 강제로 마주했다. 눈이 흔들리는 걸 봐선 꽤 놀라는 눈치였다.
“……네놈은 누구냐?”
“몰라도 돼.”
알다시피 무진은 남의 속을 시원하게 해 주는 성향이 아니었다. 사로잡은 현천군의 정신을 제압해서 필요한 것만 알아내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살아 있어 봤자 도움도 되지 않는 육체, 땅의 거름이면 족했다.
‘있을 수 없어!’
현천군은 심신의 균형이 어긋나 버렸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과 마주했기에. 단단히 무장했던 정신이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버리고 말았다.
‘조금 더 흔들어 보자.’
무진은 현천군의 불완전한 상태에 기름을 부어 주기로 했다. 본인을 세상의 조율자라고 여기는 놈일수록 누군가의 꼭두각시란 걸 인정 못 하는 경향이 있다.
“사막도, 북해도, 이번에는 신화마정갑까지 꼴이 말이 아닌데. 천하의 현천군이 이래서야.”
“……?”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러면서 여태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한 거였어? 나 같으면 쪽팔려서 혀 깨물고 죽었겠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감도 못 잡네. 여태 날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었으면서. 실패가 쌓이니 본질을 외면하는 건가?”
불현듯 스치는 일련의 상황들, 그 안에서 계속 겹치는 무언가가 현천군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본질에 가까워질수록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실이라면 아예 가지고 놀며 농락했다고 봐야 했다.
“……천운권!”
“천권이라니까.”
너만 알고 있으라는 무진의 속삭임에 현천군은 지옥에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모든 사태에 천운권이 있었다.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인과가 만들어졌다.
부정했던 현실을 인정하자, 분노가 치밀었다.
“네놈이 나를 가지고 놀아!”
“나름 재밌었어.”
“죽여 버리겠다!”
“네놈들이 뭐라도 되는 줄 알기에 좀 보여 준 거야. 어때, 나름 괜찮았지? 음모는 이렇게 하는 거야. 알간?”
무진은 마신교를 드러내진 않았다.
그저 내가 너희들을 간파하고, 훨씬 고단수라는 우쭐함을 아낌없이 베풀 뿐이다.
현천군에겐 더할 나위 없는 굴욕이었다. 차라리 마신교를 막기 위해서 애를 썼다면 이해라도 하지, 과시욕에 지나지 않았다.
부르르르!
폭풍처럼 몰아치는 수치와 모욕에 현천군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나마 겨우 버티고 있던 한계마저 붕괴하여 이성을 잃어 갔다.
‘됐지?’
-징그러운 놈.
과시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무진은 그마저도 이용할 줄 알았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음에도, 조금 더 무력화해 금제의 범위를 넓히는 용도로 사용했다.
헉!
분노에 이성을 잃어 가며 파격을 드러냈던 현천군은 내부로 파고들어 오는 마안에 기겁했다. 사전에 방비했다고 해도 무력화하기 어려운 절대권능이었다.
-꿇어라.
‘이럴 순…….’
마왕의 투심마안에 현천군은 저항은커녕 완전히 제압되어 숨기고 있던 진실을 드러냈다.
부르르르!
그래도 방심은 금물.
숨통은 확실하게 끊어야 하고, 영혼도 승천 못 하도록 소멸시키는 편이 이로웠다. 다음 생엔 착하게 살라는 덕담은 배제했다.
하아암.
마왕이 알아서 하기에 무진은 지루하게 기다렸다.
물론, 다른 한쪽에선 여전히 바빴다. 나이가 들어도 소일거리가 필요하고, 실력을 발휘할 기회는 있어야 했다.
의견을 존중해서 모른 체해 주었다.
꽈아앙, 푸아앙!
암주들의 저항이 거셌다. 신력이 사라지자 현천군이 제압된 걸 알게 된 암주들은 동귀어진의 수를 썼다. 현마단까지 가세하여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 쉽지 않은 혈전이 되었다.
“전투는 피가 튀어야 제맛이지.”
방관자로서 여유를 부리진 않았다. 주변에 숨어 있는 놈들이 있나,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놈이 네 아들한테 흉악을 보냈다는데.
“설마, 당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