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16
315 해후(2)
검제와 취선이 무진과 독왕의 말다툼을 말리며 나섰다. 정정해 보이지만, 독왕은 내외상이 적지 않았다.
“이놈들의 정체를 알아낸 거냐?”
“어느 정도는 예상하셨겠지만, 마신을 숭상하는 사교입니다. 안타깝게도 근거지나 목적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무진은 처음으로 마신교를 언급했다.
현천군과 역천군을 처리한 이상, 더는 마신교와의 전쟁을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지금까지 미래와의 접점을 통해서 마신교를 상대했다면, 앞으로는 불특정 변수를 고려하여 대비해야 했다.
그러려면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세력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속인다고 속아 줄 사람들도 아니고. 자기들끼리 알아보겠다고 설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래서 이대로 두고 보자고? 마신교를 찾거나 간자를 색출하지 않으면 다음에도 끌려다닐 텐데.”
“무리해서 색출하다가는 근간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신분이 탄로 나면 같이 죽으려고 할 겁니다.”
죽음을 도외시하고 최후의 최후까지 달려들어 동귀어진을 택했었다. 신주이십일강이 넷이나 있지 않았다면 모두 주검이 되었을 것이다. 그 집요하고 망설임 없는 결단을 경험했기에 이 자리의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그만한 자들을 도구처럼 쓰는 놈들을 여태 모르고 있었다니, 인생을 헛살았구나.”
“자네만 그런 거 아니니까 자책은 그만하게.”
검제의 한탄에 취선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기 안마당까지 내어 주고서도 여태 모르고 있었다. 대륙의 정보를 손안에 쥐고 있다고 자부했던 지난날이 부끄러웠다. 마당발은커녕 심산유곡의 은둔 고수만도 못했다.
“인상들 펴세요. 누가 보면 오늘내일하는 줄 알겠습니다.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그러는 거지요.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방금까지 산 사람 앞에다 놓고 제사 지낸 놈이 누굴 위로하는 게야!”
무진은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한테 제사를 지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독왕의 잔소리를 환자의 횡설수설로 치부했다. 환자는 절대안정이 중요하니, 일어나려는 걸 강제로 눕혔다. 부상당한 노인네가 완력이 제법 강했다.
“어디다 손을…… 커억, 거긴!”
“아차, 수혈을 짚는다는 게. 아무렴 어때요. 쓸데도 없을 텐데.”
네 거 아니라고 막말을!
쓸데가 없다니~~!
독왕쯤 되면 수혈을 짚어도 얼마든지 풀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무진은 저항할수록 강하게 눌렀다. 괜한 소리는 그만하라는, 협박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강제로 자는 척이라도 해야 찌르는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무진은 분위기를 전환했다. 심각하게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이럴 때일수록 여유를 가지고 심사숙고해야 했다.
“어차피 지금 당장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 하면, 최대한 진실을 숨기고, 사실을 왜곡하는 편이 낫겠구나.”
확실히 개방의 전대 방주답게 무진의 의도를 한눈에 파악했다. 숨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너무 꽁꽁 싸매면 그 자체로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그럴 바엔 일부의 진실을 밝히면서 혼선을 주는 편이 나았다.
그 시작을 위해 무진은 팔을 걷어붙였다.
일전에 심은 씨앗이 적당히 영글었다.
“필도야, 성취가 제법이구나.”
“형님이 주신 천무진경이 도움이 됐습니다.”
“역시 신외지물은 하늘이 내린다더니, 주인이 따로 있었어. 그치?”
눈치 빠른 장필도였다. 얼굴은 생으로 소도 잡아먹을 듯하게 생겼지만, 속내는 능구렁이 수백 마리를 품고 있었다. 그런 녀석이라 여태 살아남은 거지. 알려 주기는 했어도, 마신교의 추적은 예사롭지 않았다.
“……형님!”
“아니면 도로 뱉든가.”
“……아닙니다.”
이미 익힌 무공을 어떻게 도로 뱉어.
장필도는 제대로 엮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여기서 발 빼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어쩐지, 천무권이 독약이었군요.”
“여차하면 도망쳐.”
“전혀 위로가 안 됩니다.”
“그러게, 아무거나 막 먹으니까 탈이 나잖아.”
“안 먹으면 강제로 먹였을 거면서. 이왕지사 신화마정갑은?”
“과식하면 탈난다.”
“아, 예, 그렇지요. 저는, 이 아우는 고생만 하겠습니다.”
“죽는 것보단, 고생이 백번 낫지.”
신화마정갑이 욕심나긴 했지만, 장필도는 미련을 두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형님을 끝까지 믿고 가야 했다. 발을 빼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그때 제갈세가의 의뢰를 받지 않는 건데.”
“행여나 네가 잘도 그랬겠다.”
제갈세가에게 돈을 뜯고, 내 앞에서도 돈을 뜯으려다 역으로 당한 녀석이었다. 그런 놈이 수십만 냥을 외면할 리 만무했다. 결국, 나와 필도의 만남은 필연이었다. 그래서 여태 숨 쉬고 있는 거고. 비명횡사할 녀석을 구해 줬으니, 은인이기도 했다.
은인으로서 필도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리는 있잖아.
“낭악을 맡겨도 되겠지?”
“그놈은 원래부터 제 상대가 아닙니다. 이번 기회에 물장구나 치는 애송이에게 누가 형님인지 알려 주겠습니다.”
“놈은 교와 연관이 있으니, 순순히 나오면 수작 부린다고 봐야 할 거야. 뒤통수 조심하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형님. 저만 믿으십쇼.”
이번 일은 녹림왕이 주도한 것으로, 뒤늦게 당도한 검제, 독왕, 취선이 함정에 빠져 마신교와 우연히 충돌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천군을 잃은 마신교가 사건을 조사할 게 뻔하지만, 무림맹에 보고가 올라온 다음이었다. 결국, 무림맹 내부에 숨겨 놓은 세작을 동원하게 될 테니, 배후를 추적할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이를 위해서 검제와 취선을,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전면에 내세웠었다. 취약했던 지지 기반을 넓히고, 무림맹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명분이 생겼다.
“무림맹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놈들이 있을 겁니다. 그때마다 사사건건 변죽을 울리시면 됩니다. 굳이 적극적으로 방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의도대로 되지 않도록 장애물을 놓으면서 들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너무 약 올리다가 비명횡사하는 건 아니겠지?”
“살 만큼 사셨으면서. 대의를 위해섭니다.”
“독왕 선배는 백 세시네.”
검제와 취선의 고자질에 자려고 했던 독왕은 수혈마저 해제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삼일 상 치르고 나서 묻으려는데 갑자기 관 뚜껑 열고 일어난 경우와 일맥상통했다.
“또 왜요?”
“이놈들이 나를 보내려고!”
“살 만큼 사셨잖아요.”
“그게 요즘 유행이냐!”
나이 먹은 것도 서러운데, 자꾸 어딜 가래? 갈 때 가더라도, 반드시 같이 간다.
휘익!
독왕의 희번덕거리는 눈빛에 검제와 취선은 먼 산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균 수명 마흔다섯인 시대에 백 세나 사셨다. 이만하면 흙으로 돌아가도 괜찮잖아.
“대체 얼마나 더 사시려고요?”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다!”
“미련 많네요.”
“갈 때 가더라도 넌 꼭 데려가마.”
살 만큼 살았으니 삶에 미련이 없다고 해 주길 바랐던 무진으로서는 입맛이 썼다. 그래야 나중에 실수로 뒈지더라도, 양심의 가책이 덜할 텐데. 나이가 들어도, 백 세가 되어도, 살고 싶은 건 다 똑같았다.
“괜찮아요, 저도 혼자는 안 갑니다.”
“……?”
무진의 담담한 독백에 모두는 전율했다.
빈말이 아님을 느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당하고도 반격을 하지 않으면 사람을 호구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기회는 줄 만큼 주었다.
***
아!
낭패다.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사부님의 오해를 풀 수 있을까? 서정은 머리를 굴려 봤지만,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시숙의 장난질에 사부까지 놀아나고 있었다. 단순한 오해였다고 하기에는 사부의 성향이 지나치게 올곧았다. 항상 말을 할 땐 신중하라고 가르친 사부였다. 그 앞에서 장난이라고 어떻게 말하냐고.
한편으로 자신을 위해서 한달음에 달려온 사부님을 제자로서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검후께서 오해하신 겁니다. 강 공자의 혼인 상대는 저예요.”
“……!”
자초지종을 얘기하려고 했던 이서정은 아찔한 충격에 비틀거렸다. 때마침 남궁연화가 끼어들어 완강히 부정해 버린 것이다. 이제는 설명할수록 이상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부아가 치민 이서정의 언성이 높아졌다.
“남궁 소저가 나설 일이 아니에요!”
“곤란해하는 것 같아서 도와준 건데, 뭐가 잘못됐나요? 오해는 풀어야죠. 혹, 제가 괜한 소리를 한 건가요?”
갑자기 존대를!
남궁연화와 이서정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서로 최대한 고상하게 말하지만, 내심은 이년이 분별없이 나선다며 쌍욕을 박고 있었다.
“서신을 보낸 분이 아주버님인 이상, 인정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지요.”
“이 소저의 안위가 걱정돼서 아주버님께서 어쩔 수 없이 서신을 보낸 거겠지요.”
“강 공자와 저는 뜻을 나눈 사이예요.”
“그렇다고 정을 나눈 사이는 아니잖아요.”
남궁연화와 이서정의 살벌한 기세에 태진, 철호, 강철, 나릉, 육칠, 초개는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자신들에게 후폭풍이 미칠 수도 있기에, 일단은 피하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거, 재밌네.
황보관혁은 이 사태를 흥미진진하게 관전했다. 돌아가는 과정을 보니, 과연 그놈다웠다.
‘어떤 수를 썼나 했더니, 대단한 놈일세.’
금이야, 옥이야 키운 제자의 혼인을 서신으로만 달랑 전해 듣게 된다면, 사부로선 당연한 행동이었다.
검후의 조급함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나저나 이걸 너무한다고 해야 하나? 부럽다고 해야 하나?’
무진의 의도가 훤히 보이기는 하는데, 이서정과 남궁연화는 천하절색의 미녀였다. 자고로 도전적인 미녀를 마다할 사내는 흔치 않았다.
한 여자만 바라보는 지고지순한 순정남이라면 또 모를까. 사정을 알수록 순정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형이 돼서 자기 동생의 성향을 모를 것 같지도 않고.
“그만하지 못하겠느냐!”
고상한 품격의 상징과도 같은 검후도 참다못해 언성을 높였다.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발산되는 가공할 내력에 이서정과 남궁연화는 움찔했다. 자신들이 생각해도 유치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혹, 정말로 한 남자를 두고 연적인 게냐?”
“사실은…… 죄송해요!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어요.”
“네가 진정! 어서 아니라고 하거라!”
“사부님, 제발 고정하세요. 이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만 됐으니, 나를 따르거라.”
검후는 부정하지 않는 제자의 안일한 태도에 실망이 컸다. 우유부단함이야말로 무인으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이거늘. 협을 바로 세우고, 의를 실천하라고 가르쳤던 지난 세월이 허망할 따름이었다. 데리고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가르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안 돼요.”
“진정 이 사부의 말을 따르지 않겠다는 말이더냐!”
“사정이 있어요!”
“하면, 이 서신이 거짓이라고 말을 하거라.”
“그것도 안 돼요!”
“네가 어쩌다가……. 안 되겠구나. 수련을 다시 해야겠어!”
이서정도 이 사태가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이대로 산으로 돌아가면 그 인간이 어찌 나올지 감당이 되지 않는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지옥 끝까지 사부와 자신을 쫓아올지도.
시숙이 눈을 부릅뜨고 쫓아온다고 상상해 봐라.
소름 돋았다.
“세파에 찌든 때를 빼기엔 산만큼 좋은 곳도 없지 않나요.”
“그만해요. 저도 더는 가만있지 않아요!”
남궁연화가 끼어들 때마다 이서정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이년이 계속 초를 치고 있었다. 상스러운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아차 싶었다. 하나, 남궁연화에게 끌려다니며 구실을 제공해 줄 마음도 없었다.
이럴 때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사부님, 제자는 그에게 목숨 빚을 졌어요.”
“하면, 서신은 그 보답이더냐. 어째서 그런 무모한 짓을!”
“구명지은만이 아니에요. 그 사람 덕에 빙정도 얻었어요.”
“그래서 네 성취가…….”
검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은혜가 깊어도 너무 깊었다. 구명지은에 이어 천고의 기연을 내어 준 이상, 반드시 빚을 갚아야만 했다. 이는 자신이라도 되돌리기가 어렵다. 외면하는 순간, 천하의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협을 숭상하던 삶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흥분했던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한천백룡공이 내부를 돌고 돌아 원래의 검후로 돌아가는 듯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선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남궁의 아이까지, 둘이더냐?”
“……!”
체념해서 물었을 뿐이거늘.
우물쭈물 대답을 못 하자, 간신히 성질을 가라앉혔던 검후는 머리 뚜껑이 열릴 뻔했다. 제자가 정실인지, 첩실인지 알 수 없는 것도 복장이 터지는데.
“또 있더냐?”
“현재까지 네 명이에요.”
망연자실한 검후는 망부석이 되었다.
허!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었나, 점검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다. 제발, 잘못 들었기를 바랐다.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넷이라니.
그것도 현재진행형이란다.
사태가 파악될수록 검후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곱게 키워서 강호의 재목이 되기를 바랐던 제자가 난봉꾼에게 팔려 가게 생겼는데, 분노하지 않을 사부가 있겠는가.
“네가 어디가 어때서 이런 말도 안 되는 혼인을 올린단 말이냐! 설마, 그놈이 강요한 것이냐?”
“강요는 아니에요!”
이서정은 사부의 화를 누그러뜨려야 했다. 그런데 간단하지가 않았다. 사실을 알아 갈수록 사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러다가 시숙과 다툼이라도 벌이는 날엔?
‘안 돼!’
사부가 검을 들이미는 즉시, 시숙의 주먹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여인이라고 하여 봐주는 성향이 절대 아니다. 비무를 빙자해서 사부를 두들겨 팰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부라면 혹시?
그런 가당치 않은 기대가 통할 상대도 아니었다. 시숙은 인간이 아니라 순수한 재앙 그 자체였다.
이럴 때 도움이라도…… 제기랄!
“하긴 그 인간이 억지는 잘 부리지.”
말려도 부족한 판국에 남궁연화가 또 끼어들었다. 화가 나서 노려보자, 혼잣말이란다.
“그놈이라면 하고도 남긴 하지.”
도와줘도 부족할 판국에 황보관혁은 사실을 적시해 주는 만행을 대수롭지 않게 저질렀다. 딱 봐도 고의가 분명하다. 어깨가 잘게 들썩인다. 돌아서서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사부, 그런 거 아니에요!”
“됐다. 내가 직접 보겠다.”
아!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