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17
316 숨 고르기(1)
녹림왕이 천무자의 진경을 얻었다고 알려졌다. 그러자 진위를 확인하려는 자들이 속속 등장했다.
녹림왕은 오왕의 말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부정하듯 일권으로 절벽을 부수어 위용을 과시한 것이다.
녹림왕의 배후를 추적한 취선의 낭패한 모습이 목격되었다.
그렇다고 취선이 약해졌다고 하기도 무리였다. 녹림왕과의 결전에서 보여 준 강룡십팔장은 능히 천하제일장이라 부를 만했다. 두 사람의 격전으로 절벽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광경은 역사에 회자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나, 승패는 나지 않았다.
검제가 합류하자, 녹림왕이 알아채고 자리를 벗어나 버린 것이다. 대결의 방점을 찍지 못한 모양새가 아쉽긴 해도 당연한 일이었다. 제아무리 녹림왕의 성취가 놀랍다곤 하나, 검제와 취선을 동시에 상대할 순 없었다.
인과를 살필수록 녹림왕의 성장은 실로 놀라웠다. 천무자의 진경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취선을 압도하는 무위를 선보였다. 만약, 무리를 완전히 갈무리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의문이 들었다.
천무자의 비도를 쫓았던 검제와 취선이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상식적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번 일에 독왕까지 나섰다는 소문이 있었다. 정파를 대표하는 무인과 세력이 동시에 움직였는데도, 녹림왕에게 농락을 당한 것이다.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았다. 정파의 장기 집권으로 안일하고 무능해졌다는 시론(時論)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제, 취선, 독왕, 권왕이 나섰었다. 그런데도 녹림왕 하나를 견제하지 못하고 천무자의 진경을 빼앗겼으니 무능하다는 설도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갈수록 소문이 가관으로 흐르자 참다못한 검제가 사태의 내막을 알렸다.
녹림왕을 추적하던 중 공교롭게 암중 세력과 충돌해 온전하지 않았다고. 그로 인해 무당파, 아미파, 청성파의 후기지수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사천당문, 남궁세가, 개방, 황보세가도 적지 않은 피해를 본 것이 드러났다.
천무자의 비도와 함께 이목을 집중시켰던 무신총도 암중 세력이 무림의 혼란을 부추기기 위한 암계였음을 밝혔다.
세간의 흐름은 반반이었다.
무능을 감추려고 암중 세력을 거론했다는 부류와 무림을 전복하기 위한 숨은 세력을 경계하자는 부류로 나뉘었다. 무림맹에서도 이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치며 조사를 진행 중이었다.
이중의 담장으로 내부와 외부가 분리된 비처. 가문 내에서도 직계혈족이 아니고선 출입을 금했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정원이 조화를 이루고, 푸르름을 잃지 않았다. 정원엔 이름을 알기 어려운 형형색색의 화려한 꽃들이 있고, 물가에는 황금으로 도배된 잉어가 물장구를 쳤다.
무진은 정원의 누각에 누워 소고기볶음에 사천의 명주인 오량주를 따라 마셨다.
풍류남아의 현신일지니.
폴짝!
한가로이 손가락으로 툭툭! 허공을 칠 때마다 화들짝 놀란 황금 잉어가 물 밖으로 튀어나왔다.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방향을 조종당한 황금 잉어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물에 들어가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헤엄을 쳤다. 황금이든 은이든, 잉어 대가리였다.
후르르!
막 잡은 소를 요리해서 그런가, 술이 유난히 달다.
다만, 이 좋은 술과 안주를 아내와 함께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일이 끝나면 돌아가려고 했지만, 남겨진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나 아니면 되는 일이 없구나.
‘생각보다 너무 조용해.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구대성천의 영향력은 교에서도 적지 않아. 천군의 죽음을 확인할 때까지는 신중하게 행동하겠지.
‘골치 아픈 놈들일세. 지금만 해도 마신교는 약하지 않잖아. 남은 천군을 전부 동원해서 일거에 쓸어버릴 수도 있을 텐데.’
-교는 유독 대륙의 잠재력을 경계해 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일말의 빈틈도 내어 주지 않으려는 경향이 없지 않아.
‘결국, 너구나.’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을 테지. 그땐 파릇파릇한 맛이 있었다.
마신교의 본격적인 행보는 마왕의 등장 이후로, 시간적인 여유는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마신을 숭상하는 사교도, 그 중심은 사람이었다.
사람은 완벽할 때도 있지만 불완전할 때가 더 많았다. 궁지에 몰리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순 없다.
내가 죽게 생겼는데, 이것저것 따지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잖아. 마신도 그때쯤 되면 아량을 베풀겠지, 뭐.
‘구대성천의 누가 올 것 같냐?’
-서열대로 온다고 해도, 셋 이상이라고 봐야겠지. 아니면 상위 서열을 보낼 수도 있다.
천군의 죽음은 일단 숨길 수가 없다. 신력이란 특이한 이능은 서로의 생사를 판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죽음으로 신력이 사라지면 다른 천군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계나 사법으로 가려도,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사성천만 아니면 좋겠는데.’
-그 새끼다.
‘그 새끼는 너무하잖아.’
-보는 즉시 죽이길 바란다.
구대성천의 사성천, 서열 사위이면서 죽음을 관장하는 천군이다. 사성천이 온다면 꽤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상대하기도 까다로운 데다가 핵심을 간파하는 능력이 남다르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윗서열의 천군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아미파와 청성파를 정리하려면 수련에 박차를 가하긴 해야겠어.’
-끌어들이는 방법도 나쁘진 않지만. 자칫, 유혈 사태로 번질 수도 있을 텐데.
‘그렇다고 놔둘 수도 없잖아.’
-혼란을 유도할 셈이군.
‘저쪽에서 신중하게 나가겠다잖아. 나로선 나쁠 게 없지.’
-이런 쪽으로 잔머리는 기가 막히는군.
역천군과 현천군에게서 뽑아낸 정보가 있었다. 단편적이라 독버섯을 전부 골라내진 못했어도, 피아를 구분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정보가 없다면 시간을 들여야 할 테지만, 지금은 단서가 사라지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더욱이 장필도를 최대한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천무자의 심득을 얻어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고 해도, 마신교가 본격적으로 나서면 위험했다. 이목을 구파일방으로 돌린다면 장필도가 수로채를 병합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방향의 정리는 이쯤 하고, 풍류를 다시 즐겼다.
더 고민한다고 현답이 나오진 않는다. 지금을 즐기지 못하면, 나중에도 즐기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다.
앙, 사르르!
소고기 세 점에 술 한 잔으로 입안을 헹구었다. 아내와 같이 맛있는 고기를 먹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랬다.
아~~!
허공을 향해 자기 한 점, 나 세 점.
다행히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서 송호문은 논란의 중심에서 소외되었다. 천무자, 무신총, 암중 세력, 녹림왕에 이르기까지. 송호문이 신흥 세력으로 급부상하기는 했어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아주 팔자가 늘어졌구나.”
“내 집이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일 누워서 술잔이나 비우면서, 이젠 집문서도 내 달라는 게냐?”
“저도 놀고만 있는 거 아닙니다.”
당사독은 형식적으로 내뱉은 말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주인으로서 객이 불편하지 않도록 내 집처럼 편히 있으란다고, 실제로도 저러지는 않잖아. 자기 집처럼, 상전 중의 상전이 나셨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가산을 탕진하고 있었다.
진짜로 당문의 가산이 탕진되진 않겠지만, 정말 꼴 보기가 싫다.
“등이 물리진 않느냐.”
“물리긴요, 누워 있으면서도 더 눕고 싶은 게 인지상정입니다.”
“개방의 개파조사도 너보단 부지런하겠다.”
“비교를 해도. 제가 얼마나 부잔 줄 아시면서.”
“그런 놈이 빈대를 붙냐?”
“그래서 부자가 된 겁니다.”
부자라고 돈을 낭비할 거란 고정관념은 버려라. 부자는 괜히 부자가 되지 않는다. 남보다 다른 무언가가 있기에 부자가 되는 것이다.
무진은 쓸 때는 과감하게 쓰지만, 안 쓸 때는 하늘이 무너져도 쓰지 않는다. 항상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생활하기에 삶이 풍족한 것이다.
그렇다고 궁색하지는 않았다. 당문을 위해 그간 해 온 일들을 고려하면 돈을 받아 내도 부족했다.
당사독도 말로만 타박할 뿐, 강제로 내쫓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 보여야 했다. 나가란다고 나갈 녀석도 아니고, 후일 손자가 가주가 되었을 시 재산을 다 내놓으라고 하면 당문은 알거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뒤처리가 안일하시네요. 제가 아는 독왕 어르신이 아닙니다.”
“더는 피를 흘리고 싶지 않구나.”
“그런 안일함이 불씨가 되어 당문이 화마에 휩싸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있는 한 절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아.”
“살아 보니 절대란 없더군요.”
무진의 가혹한 언사에도 당사독은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동생과 며느리의 반란은 일어나고 말았다. 그토록 신신당부했음에도 기어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가족조차 건사하지 못한 주제에 누굴 탓할 수 있을까.
“더는 가문의 일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할 테니,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도 제갈세가는 압박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마.”
“쩝, 삭초제근이 아쉽네요.”
제갈수란, 당연천, 당연수의 몸에 금제를 가하고, 금지에 가두었다. 가혹한 처사로 보일 수도 있으나, 무진은 단전을 부수지 않아서 아쉬웠다. 독과 혈맥술로 내공을 폐하는 처분으로 온건하게 끝이 났다.
‘다시 생각해 봐도 독왕답지가 않아.’
-네 손자와 손녀라고 생각해 봐라.
‘생각은 하지. 근데 아니잖아.’
-잔인한 새끼!
‘내 가족을 예로 들지 마라, 짜증 나니까.’
마왕이 요즘 들어 개소리를 자주 하고 있었다. 혹시, 사육되기 전, 천성이 착했던 건 아니겠지? 마왕이 착하다니,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나중에 미련을 가지도록 밑밥을 까는 거 아냐? 마왕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좀 믿어라.
‘세상에 믿을 놈 없더라.’
죽이지 않을 거면 희망을 주지 말아야 했다. 살아날 희망이 있으면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화근이 될 불안의 씨앗은 전부 소거하는 편이 이로웠다.
아쉬워하는 무진의 표정에 당사독은 질린 기색이었다. 어떨 때 보면 이놈은 진짜 과할 정도로 잔혹했다.
“금제로도 부족하다 이거냐?”
“저도 완벽하진 않으니까요.”
당문의 독과 무진의 금제술의 결합. 어지간해서는 풀리지 않을 조합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항상 대비는 하고 있어야 했다.
“사람을 붙여 놓으세요. 서로 친해지면 더 좋고요.”
“징그러운 놈.”
그걸 또 이용하겠다고.
이 녀석하고 적이 되면 차라리 자살을 권유하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유비무환이라고 했습니다.”
“알았다, 이놈아.”
살려 놓은 이상, 그에 맞는 계획을 세워 놓기는 했다. 후일 마신교와의 전투에서 당문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면,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컸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사람은 쉽게 안 변합니다. 그리고 준비했으니까 망정이지, 가문에 큰 누가 될 뻔했습니다.”
“편히 놀고먹고, 막 해라. 됐냐!”
“그러시다면 저도 부담 없이 있겠습니다.”
“언제는 부담 가졌고?”
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했으면, 듣지 않을 권리도 있었다. 하물며 노인네의 투정을 일일이 받아 주면 버릇 나빠진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백 세가 넘었으니 다시 배울 때가 되었다. 원하신다면 무료로 진지하게 가르쳐 줄 의향이 있었다.
‘이런 놈이 무림의 구원자라니!’
당사독은 무진의 속내를 간파하자 골이 지끈거렸다. 그러나 마신교의 힘을 엿본 이상,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신주이십일강의 자부심이 무너져 버렸다. 그처럼 대단한 세력이 암중으로 활약하고 있었음에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부끄러웠다.
‘어쩌자고 그런 짓을.’
며느리야 제 아들을 소가주로 만들려고 그랬다 쳐도, 동생이 한 짓은 가문의 근간을 어지럽히는 중죄였다. 한데, 그조차도 우연이 아닌 함정이 숨어 있었다.
남궁세가, 아미파, 청성파, 무당파가 엮여 있었고, 새외의 북해빙궁과 대막혈궁에도 놈들의 마수가 뻗쳤다.
그중 어느 하나라도 마신교의 뜻대로 이루어졌다면 무림은 큰 혼란을 초래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맞물리며 이어졌다. 짧은 시간 완성된 계획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것이더냐?’
검제, 녹림왕, 취선이 합공을 펼치고도 현천군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런 현천군을 무진은 닭 모가지 비틀듯이 비틀어 버렸다. 너무 쉽게 처리해서 원래 약한 놈이었나 의구심이 들게 했다.
그러나 현실을 부정해 봤자,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네요.”
“자기 먹은 거라도 치우면서 그딴 소리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생각도 하기 싫다고요. 비워야 보이는 세상도 있는 법입니다.”
“사람처럼 살 생각이 없구나.”
대협에 관한 기준점과 사고관이 달라지는 당사독이었다. 이런 놈을 믿고 끝까지 가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일전에 검제 어르신과의 합격은 괜찮았습니다. 잘만 하면 한 놈 정도는 맡겨도 되겠던데요.”
“달갑지 않구나.”
그날의 충격으로 검제, 녹림왕, 독왕, 취선은 무진과 훈련을 하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었다. 처음에는 일대일로 시작했다가 무진에게 일방적으로 처맞고 합공을 택했었다.
‘괴물 같은 자식!’
넷이서 전심전력을 다해 달려들었는데도 처맞았다. 이놈의 강함은 끝이 없었다. 대체 얼마나 강한지, 감이 오지도 않는다. 이런 놈이 암중 세력을 경계하고 있었다. 발을 빼는 즉시, 가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절실히 느껴야 했다.
“훈련할 시간인데, 같이 하실래요?”
“됐다, 이놈아.”
당사독은 무진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전각 안으로 냉큼 들어가 버렸다. 말이 좋아 훈련이지, 일방적인 구타였다. 명색이 가문의 어른으로서 체면이 있지, 손자와 나란히 처맞고 싶진 않았다.
처맞더라도, 혼자 몰래 처맞고 싶은…… 제기랄!
만연한 패배감에 당사독은 자괴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