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21
320 필연인가?(2)
두두두두!
반각이 지났을 때 홍설과 도사들은 의문을 지웠다. 마주하는 쪽에서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쪽을 향해 오는 걸 보면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설마 진짜로 고수였어?’
‘우릴 속였나?’
‘속였다고 하기엔, 좀…….’
홍설과 도사들은 이 거리에서 적의 낌새를 알아챈 무진이 범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주고받던 농이 사실이었을지도. 그러니 속였다는 말도 어폐가 있었다. 사정이 있어서 신분을 숨긴다고 미리 말을 하기도 했고.
두둥!
정면에서 악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격하세요.”
다짜고짜 기습을 가하라는 무진의 요구에도 홍설과 도사들은 매화검진을 펼치며 시키는 대로 나아갔다.
파아아앙!
홍설과 도사들은 화산의 절기,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익히고 있었다. 완전한 경지에 오르진 않았지만, 매화의 옅은 향을 보니 성취가 최소 칠성에는 올랐다.
‘방향제로는 제격이네.’
-검향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면 화산의 도장들이 들고일어날걸.
화산의 도장들이 여성들에게 인기가 제법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특유의 매화향이 여성들에게는 매력적인 부분으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더욱이 무당과 달리 진산제자도 혼인을 할 수가 있으니 남편감으로도 제격이었다.
‘호오, 매화노방과 매화낙섬은 연환이 어렵다고 들었는데, 팔초어처럼 팔 관절이 없는 것 같네.’
-재능만 놓고 보면 네가 선별한 검후와 권후에 뒤지지 않는다.
‘그래도 좀 힘들어 보이는데.’
-당황하지만 않으면 그리 어렵진 않을 거다.
무진은 색혼수사 반오를 보았다.
홍설이 절정이라고 말한 것과 달리 초절정의 초입에 도달해 있었다. 여기에 색혼술이라는 좌도방문의 사술을 사용하여 상대의 심지를 흔들었다.
‘요승과 잘 어울려 다녔던 놈이지.’
-대단치는 않았다.
요승에게 의탁해서 수많은 여인을 능욕하고 간살했었다. 다행히 미리 요승을 죽여, 참사는 벌어지지 않겠으나. 보다시피 앞일은 어떤 식으로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채채챙, 타아앙!
대결은 얼추 팽팽해 보였다.
무진은 지면에 약간 솟아 있는 돌을 잡아서 빼 올렸다. 빙산의 일각처럼. 겉으로 보이는 돌은 작았지만, 안에는 어마어마한 크기를 숨기고 있었다.
두드드!
서걱!
바위의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그어서 잘라 내고 평평하게 만든 후 앉았다. 이 자리가 관전하기에 시원시원했다.
퍼퍼퍼펑!
혼마장(混魔掌)을 뿌린 색혼수사는 의도치 않은 흐름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계획대로 되기는 했어도,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대비했다.
‘이년이 어떻게 안 거야?’
홍설의 사매를 유인하여 간살한 후 적당한 흔적을 남겼다. 그 정도면 쫓아오는 데 무리는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검진을 펼친 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인간은 감정이 흔들릴 때와 변수가 겹치면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 틈을 노려 계집을 사로잡아 혼마섭혼술로 사로잡으려고 했었다.
‘빌어먹을, 다 와서 속을 썩이는군.’
색혼수사로서도 화산파를 건드린 것은 위험한 도박이었다. 만약 홍설을 보지 않았다면 이런 극단적인 수단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찾아다닌 천고의 영약이었다.
환음지체.
음기를 강하게 품고 있으며, 색공을 익히면 희대의 요녀가 탄생하게 된다. 지금까지 홍설이 요녀가 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화산파의 태청일원신공이 위력을 발하기 때문이었다. 도문의 신공이 음기를 가라앉히고, 음양의 조화를 이룬 것이다.
색혼수사가 환음지체를 원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환음지체와 살을 섞게 되면 대상의 공력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만드는데 수월하다. 그뿐이랴, 환락마음공을 잇는다면 사내의 내력을 흡수하여 끊임없이 흡입할 수 있었다.
홍설의 외모와 요기를 잘만 활용하면 천고를 넘어 만고의 영약을 얻는 것이다.
그런 색혼수사의 속내를 무진은 간파하고 있었다.
환락마녀, 요설.
홍설은 색혼수사에게 사로잡혀 능욕을 당하고, 이지를 빼앗긴 후에 마녀로 거듭나게 되었다. 하나, 색혼수사가 원하는 결과와는 거리가 멀었다.
‘죽 쒀서 개 줬지.’
-요승에겐 날개를 달아 준 격이었지.
홍설의 스승, 자운진인의 분노가 너무 컸다. 그는 집요하게 색혼수사를 추격했고, 요승이 접근할 계기를 제공하고 말았다. 살기 위해 요승에게 의탁한 색혼수사는 하는 수 없이 홍설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당시 검제의 제자를 겁도 없이 건드렸으니,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지.’
-남궁세가의 검제와는 다른 의미군.
자운진인은 세속에 관여하는 성향이 아니었다. 홍설이 세뇌를 당해 문파를 배신하고, 화산파를 몰락의 길로 인도하지 않았다면 검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궁세가의 몰락으로 사라진 검제의 자리를 자운진인이 이었었다.
자운진인은 홍설의 체질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화산파의 무공 중에서도 태청일원신공을 전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녀에게는 환음지체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타락에 빌미를 제공했다는 자책감도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색혼수사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쟤들도 좀 하네.’
-하지만 성급해, 경험이 부족하군.
무진은 봇짐에서 육포를 꺼내 씹었다. 싸움 구경할 때, 육포야말로 제격이었다.
‘……뭐야, 저 새끼는?’
아까부터 거슬리는 놈이 있었다. 치열한 전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한가로움이 반오의 신경을 건드렸다.
얼레!
이제는 육포를 꺼내 씹고 있었다. 마치 놈이 꾸려 놓은 장기판에서 장기 말이 된 더러운 기분이었다.
‘잠깐, 이게 아니지.’
계집과 말코의 저항이 워낙 거셌다. 조금씩 유리해지기는 하지만, 이쪽의 피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세뇌한 색혼십괴가 쓸모를 다하면 곤란했다. 하나씩 수집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저놈을 사로잡아야겠다.’
매화검진을 뚫고 타격을 주기엔 자신도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럴 바엔 인질을 잡아 매화검진을 흔든 후 공략하는 쪽이 효과적이었다.
휙!
반오의 지시를 받은 색혼사괴가 무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홍설과 도사들이 흔들리기를 바랐다. 한데, 흔들리기는커녕 매화검진을 더욱 단단히 했다.
어?
인질로서 가치가 없나?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반오의 전략은 괜한 짓이 되어 버렸다. 되레 한 명이 빠지면서 틈을 제공해 주었다.
“빌어먹…… 어?”
꽈득!
무진에게 달려들었던 색혼사괴가 허공에 들린 채 바동거리고 있었다. 목이 잡혀 허둥지둥대자 반오는 흐름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드드득!
미처 지시를 내리기도 전 색혼사괴는 혀를 길게 내뺀 채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다.
휘익.
대충 던졌다.
쌔애애앵!
그냥 그렇게 보였을 뿐, 색혼사괴는 포탄처럼 날아가 색혼이괴와 육괴를 노렸다.
꽈아아아앙!
충돌하기 무섭게 폭발하며 사방을 어지럽혔다. 순식간에 색혼십괴의 전력은 절반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아!
멍!
적아를 막론하고 어안이 벙벙하게 만드는 결과물이었다. 자신들은 전력을 기울여 싸우고 있는데, 대충 끝장을 내 버렸으니 당혹스러움을 넘어 허탈하기까지 했다.
“이봐, 관계없는 사람한테 살수는 쓰지 말자.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
저게 어떻게 놀란 놈의 표정이야.
즐거워서 미칠 것 같아 보였다. 하물며 재차 건드리기도 힘들어졌다. 전력의 반이나 깎여 버렸다. 또 나서기에는 부담이 컸다. 설상가상으로 팽팽했던 양상도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부르르르!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격이다.
반오는 이 사태의 원흉이 저놈임을 확신했다. 아마, 자신이 온다는 것도 저 새끼가 알려 준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관계자가 아니라고!
씨알도 안 먹힐 개소리를 작작 하고 있었다.
“표정 봐라, 얼굴로 사람 죽이겠네. 자꾸 무섭게 노려보지는 말지.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손을 쓸지도 몰라.”
“……뭐?”
가만히 있는데, 신경 쓰이게 하면 불안장애를 일으키잖아. 그럴 때는 원인 제공자를 죽여 버리는 편이 최고의 선택지였다.
무진의 협박이었다.
부글부글!
분노한 반오는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손을 쓰기에는 눈앞의 계집과 젊은 말코 놈들이 방해가 되었다.
‘아니지.’
냉정하게 판단해야 했다. 애초의 목적은 홍설이었다. 저놈이 방심하고 있는 이때가 역으로 기회였다.
반오는 환락영천보를 펼치며 틈이 생기기를 기다렸다.
‘강해.’
홍설은 사매의 복수를 할 기회를 다른 이들에게 내어 주지 않기 위해 사제들과 함께했다. 색혼수사의 악명을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 봤자 음적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그것이 오판임을 깨달았다.
‘우물 안 개구리는 바로 나였어!’
사부는 항상 심신을 갈고닦으며 자신을 성찰하라고 했었다. 그러나 사형, 사제, 사매보다 뛰어나다는 자만심에 취해 판단이 흐려졌다.
‘저 사람이 아니었으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역으로 색혼수사에게 당해 사매와 같은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저 사람이 궁금하다. 방금 보여 준 말도 안 되는 괴력은 상식적이지가 않았다.
‘진짜로 절대고수일까?’
제 입으로 절대고수라고 말하기에 농담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사실일 것만 같았다. 그래도 저 나이에 절대경의 고수가 가당키나 한 일일까?
아무튼, 이상한 사람이었다.
어?
찰나 흐름이 비틀어졌다. 벌어진 틈을 뚫고, 위화감이 번졌다. 홍설은 자신이 느낀 감각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예리하게 베어진 곳에 잔상이 갈라졌다.
옆으로 이어지는 그림자가 장력을 발출했다.
꽈아아앙!
가볍지 않은 장력을 구궁보로 방향을 전환하여 매화점점으로 막아섰었다. 검신이 파랑에 흔들리는 배처럼 요동을 치며 검병을 타고 육체에도 타격을 주었다.
흐음.
반진력에 휘청이는 순간 향을 맡았다.
‘이건?’
무언지 모르지만, 급히 호흡을 차단하고 거리를 벌렸다. 그 순간 색혼수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걸렸다, 이년.”
뭐지?
의아함을 채 인식하기도 전에 육체의 근원에서 열기가 치솟아 올랐다. 의식이 저 멀리 사라지려고 했다. 원래의 자신과 괴리감이 생겼다.
“환음향을 취한 이상 네년은 내 손을 벗어날 수 없다.”
홍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도사들도 매화검진을 완전하게 펼치지 못하게 되었다. 기회를 얻은 색혼수사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크으으!
태청일원신공으로 음양의 균형을 이루었던 홍설은 음기가 갑작스럽게 치솟아 오르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대로는 자신은 자신이 아니게 된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정신 차렷!’
태청일원신공을 운용하여 심신의 균형을 되찾아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색혼수사는 용납하지 않았다. 색공을 펼치며 그녀의 이지를 흔들어 놓았다.
“이제 끝이다.”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가만히 있던 무진이 일어나서 성큼성큼 색혼괴에게 접근했다.
퍼억, 뿌거거걱!
몰래 다가가 하나씩 색혼괴의 대가리를 부수어 버렸다. 등 뒤에서 불현듯 나타나 주먹을 날렸기에 색혼괴는 저항은커녕 그 자리에서 비명횡사했다.
퍽, 뿌거거걱!
무진은 연거푸 다섯 번의 주먹질을 한 후 돌아섰다. 홀로 남겨진 색혼수사는 반쯤 넋이 나가고 말았다.
“……이럴 수가! 가만히 있겠다면서!”
“미안. 내가 그래도 정판데, 색마를 방관해선 안 되잖아. 이해하지?”
정파의 협객으로서 고뇌가 담긴 반성이었다. 한 입으로 두말을 했으니 욕을 먹어도 쌌다.
무진은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 얼마든지 욕해.
“이런 실수를! 젊은 도사님들, 내가 나서도 괜찮지?”
“……?”
“안 괜찮은가? 갈까, 그럼?”
“……아닙니다. 당연히 괜찮습니다!”
그간 고수 앞에서 객기를 부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런 엄청난 고수를 앞에 두고 화산파를 자랑했다니, 도사들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주춤주춤!
겁에 질린 반오가 뒷걸음쳤다. 승산이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까이 오지 마라!”
“그런다고 안 가는 거 아니니까, 살 수 있다는 괜한 기대는 하지 마라.”
반오는 순식간에 색혼십괴를 저세상으로 보내 버린 무진이 인간 같아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강하면서 암습을 했다는 점도 일반적인 정파의 무인과는 궤를 달리했다. 자신에게 말을 건 것도, 방심을 유도한 것이다.
“……날 죽이면 이년은 요녀가 되어 날뛰게 될 것이다!”
“저런.”
음기에 완전히 지배를 당한 홍설이 이지를 잃은 채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끼요요요욧!
평소보다 엄청난 고음을 질러 정신을 사납게 했다. 무진은 고성방가를 좌시하지 않고 사내답게 맞섰다.
퍼어어어엉!
까아아아악!
내지른 무형권에 처맞은 홍설은 허공을 수십 바퀴나 회전한 후에 바닥으로 구르며 십 장을 날아가고 나서야 멈췄다.
다시 일어서려는 홍설의 의지를 시험했다.
바르르르르, 꼴까닥!
아!
적양, 적하, 적일은 입을 쩌억 벌린 채 바라보고 말았다.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랐거늘.
저 멀리서 서리를 맞은 개처럼 다리를 파르르! 떠는 사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