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3
032 관행(1)
석양이 지고 있었다.
노을에 물든 호수가 붉게 타올랐다. 저물어 가는 태양이 어둠으로 물들어 가기 직전이라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후륵!
무진은 술잔을 기울이며 노을을 구경했다. 뱃머리에서 병나발은 무인이라면 해 봄 직한 낭만이었다.
저벅!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물결이 치는 강물 위에서 거구임에도 흔들림이 없다.
굳이 누군지 고민하진 않았다. 자신을 찾아올 자는 정해져 있었다.
착!
그가 포권을 취해 예의를 갖추었다. 명문 세가의 자존심을 내려놓은 의외의 행동이었다.
“황보장성이오.”
“송호문의 강무진입니다. 기억하려고 애쓸 필요 없습니다. 청양의 작은 문파입니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황보세가와는 견줄 바가 못 됩니다.”
강무진은 평소 성향과 다르게 겸양의 미덕을 보였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당사자, 황보장성에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몰랐으면 또 몰라.
‘무형지기로 찍어눌렀으면서.’
함부로 움직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이제 와 겸양을 떨어봤자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한편으로 송호문에 저와 같은 자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소룡대회에 출전한다면 정파에 적을 둔다는 건데.’
명문의 힘은 세월에서 나온다. 오랫동안 쌓아 올린 경험과 무공이 녹아들어 명문이란 간판을 세웠다. 그러한 명문 세가의 힘을 무시할 세력은 많지 않다.
그러나 간혹,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자들이 나타나곤 했다. 어쩌면 괴물이라 불려야 마땅한, 이른바 천재들. 명문이란 간판을 달기 전 세가나 문파의 조사쯤 되는 일대종사들이다. 물론 그런 이들과 저자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긴 했다.
하지만 황보세가를 알면서도 도발을 했다면 무모한 자이거나 괴물이라 불려 마땅한 자일지도 모른다.
한데, 아까까지만 해도 후자였거늘 지금 보니 전자 같기도 했다. 판단하기 어려운 자임은 틀림없다.
“상념이 길군요.”
“체면을 구겼으니 당연하지 않소.”
“편히 말해도 됩니다.”
“실컷 때려 놓고 이제 와서 약을 준다고 병이 낫진 않소이다.”
“아니면 술이나 하시죠.”
무진은 마시고 있던 술병을 황보장성에게 내어주었다. 황보장성은 망설이지 않고 술병을 받아 입에 털어 넣었다. 독한 백주가 목구멍을 뜨겁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원한 강바람에 날아갔다.
“어때요, 술기운이 도니 고통이 가시지요?”
“이거 마시고 잊으라는 거요?”
황보장성은 이자가 보이는 것 이상으로 뻔뻔하다는 걸 깨달았다. 황보세가란 간판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 하물며 강호에 적을 둔 자치고 산동십수의 백전권(百戰拳)을 두고도 이리 태연한 자는 처음 보았다.
“애들 싸움에 어른이 끼면 돌이키기 어렵지요.”
“싸움이란 원래 사소한 일로 부풀려지기 마련이오. 대문파일수록 사소하지 않은 이유로 몰고 갈 뿐이지.”
“보기보다 직설적이군요.”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 하나, 모든 일이 그렇듯 상식에서 벗어나면 배척받을 수밖에 없소.”
황보장성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섰다.
일종의 경고이자 충고였다. 차후에도 위협을 가한다면 오늘처럼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피식!
무진은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고 황보장성의 경고를 비웃진 않았다. 그는 적절한 충고를 했다. 강호에서 독불장군은 공적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 하물며 명문과의 시비는 다수의 공적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너답지 않은데?
‘나다운 게 뭔데?’
-주둥이부터 나불거리는 놈은 가만두지 않았잖아.
‘내가 마왕이냐?’
-나보다 더하지. 여하튼 어째서냐?
‘너 때문이잖아.’
-나? 아하, 그 일 때문이군.
‘쪽팔리게.’
전왕으로 활동할 당시, 딱 한 번 목숨의 위협을 받은 적이 있었다. 마신교가 작정하고 펼친 악랄한 작전에 걸려 죽을 뻔했었다. 그날을 계기로 마신교를 뒤엎을 발판이 생긴 셈이긴 하지만, 전왕으로선 되새기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운 날이었다.
-그날 내가 갔어야 했는데.
‘얍삽한 놈이었네.’
-죽은 놈은 말이 없으니까.
‘그렇긴 하지.’
황보장성으로선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날의 작은 인연이 없었다면 갑판 위에서 흠씬 두들겨 맞은 후에 공손히 무릎 꿇은 채 손 들고 있어야 했을걸.
-하나, 작인 인연 따위로 조용히 넘어가진 않을 거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넌 사고를 몰고 다니는 상이다. 이건 내가 보장하지.
‘너 자꾸 재수 없는 소리 할래!’
사고를 몰고 다니다니, 그저 운이 조금 없었을 뿐이다. 사소한 다툼이야 강호밥 먹고 다니는 이상 늘 있는 일이고.
따지고 보면 무공을 배웠는데 얌전히 썩히는 쪽이 더 이상했다. 배웠으면 써먹어야지. 분란이 없으면 만들고. 그게 무인의 삶이다. 아니라고 해 봤자, 역사가 답을 해 준다.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전쟁이 벌어지진 않는다. 그러면 사람 목숨이 남아나나. 적어도 태평성대가 길게 이어지고, 고인 물과 썩은 물이 넘쳐나야 혈류가 흐르는 법이다. 이는 강호뿐만 아니라 나라의 흥망성쇠와도 일맥상통했다.
‘그래도 지금은 아냐.’
-과연 그럴까?
무진은 잔망스러워진 마왕의 태도 변화에 혀를 찼다. 저게 어떻게 피를 머금고 다니는 마의 화신이야. 요즘 들어 마왕이 아니라 마왕을 사칭하는 마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마왕을 의심하지 마라.
‘지랄도 태평이다.’
무진이 탁주 일곱 병을 갑판에서 까고 있는 동안 조용했던 선내의 선실이 시끄러워졌다. 모두의 예상대로 의식을 회복한 황보진운이 태진과 철호를 찾았다.
“이 치사한 새끼들! 네놈들이 그러고도 사내라고 할 수 있더냐! 일 대 일이었으면 절대 지지 않았어!”
얼굴은 붓고 시퍼렇게 멍이 들었지만, 황보진운의 투기는 식지 않았다. 이 대 일이었다는 불리한 구도가 그나마 자존심을 지켜 주었다. 명문의 자존심이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합리화를 해버렸다.
“형, 이거.”
“그래도 너한테는 안 져.”
“싫으면 말고.”
“누가 싫대.”
철호는 누가 볼세라 태진의 손에서 만두를 가로챘다. 종일 토하다가 이제 겨우 멀미에서 해방이 되었다. 안정을 찾기가 무섭게 허기가 몰려왔다.
우물, 우물!
분기탱천한 황보진운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만, 철호와 태진은 무덤덤했다. 우리 일이 아니라는 듯 지극히 합리적인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너는 질러라, 우린 모르겠다.
일관된 무시에 황보진운의 노기는 갑판을 꿰뚫었다. 발로 바닥을 세차게 두드렸다. 내 말을 들어달라는 이성적이지 못한 경박한 행패였다.
“이 새끼들이, 내 말 안 들려!”
“덤비게?”
싸움은 마다하지 않는다.
태진과 철호가 만두를 베어 문 채로 물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 대 일로 싸워 주겠다며 일어서려고 했다. 일 대 일은 애초에 고려하지도 않았다. 빨리 끝내고 식사나 마저 끝내겠다는,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움찔!
그제야 처지를 깨달은 황보진운이 뒤로 반걸음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혼자 찾아와선 안 되었다.
빠득!
곧 실책을 또 한 번 깨달았다. 선실에서 떠들면 듣고 싶지 않아도 소리가 울려서 다 들린다.
숙부와 적룡단이 배후에 있었다. 가문의 적공을 이어받은 후계의 위험을 외면하지는 않을 테니, 황보진운은 자신감을 재차 끌어 올렸다.
“비겁한 짓이 또 통할 것 같아?”
“언제는 합공해도 된다면서요? 그땐 혼자서도 이길 수 있을 줄 알았을 테고, 이젠 상황이 바뀌었으니 그 상황에 맞추어서 행동하겠다는 건가요? 그게 대협의 길이군요. 제 배움이 짧아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태진은 갑자기 존댓말을 쓰며 상황을 조목조목 따져 물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반박을 원천 차단하는 화법이었다.
빈정거렸다고 해도, 인정한다.
으득!
말문이 막힌 황보진운의 노기는 두 배로 상승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논리로 따지면 욕먹어야 할 대상은 자신이었다. 그 앞에서 사실, 폭력을 심검 수준으로 날려 대면 열이 받을 수밖에.
원래 말이 안 통하면 열 받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 애초에 전제가 잘못되었는데 반박을 하려니 대화가 꼬이지.
“너희들, 이러고도 무사할 성싶어!”
“대체 뭘 잘못했다고 무사하니 마니 하는 거예요. 우리는 당당한 정도의 일원 아닌가요? 하물며 황보세가는 오대세가를 대표하는 명문세가일 텐데, 대련에서 패배했다고 피의 복수를 하려는 거예요? 그런 거예요?”
“……피의 복수가 아니라 정당한 대결이다!”
“아, 제가 또 오해했군요. 그러면 이제부터 정정당당하게 붙어볼까요?”
태진이 눈짓을 하자 철호도 같이 일어서려고 했다. 둔탁해 보이긴 해도 철호도 장단은 맞췄다.
그러자 황보진운은 재차 반보 더 물러섰다.
“비겁하다!”
“산동을 대표하는 대황보세가의 직계를 상대로 무명소졸인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데. 혹시 대황보세가의 직계께서는 겁이 나시나요?”
평소엔 듣기 좋았던 가문의 위세가 오늘따라 황보진운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누가 겁이 난다고!”
“역시 대황보세가의 직계답게 호탕하시군요.”
되긴 뭐가 돼!
황보진운은 이 상황이 맘에 들지 않았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소졸에게 패배한 것도 억울한데, 겁을 먹고 물러섰다. 무엇보다 이렇게까지 시끄럽게 했으면 숙부와 적룡단이 반응했어야 한다.
왜 이렇게 조용해!
저벅, 저벅!
대치 중인 가운데 선실로 무진이 들어왔다. 독한 백주를 일곱 병이나 마시고도 부족했는지 심심한 기색이 완연했다.
“호오, 패배한 지 반나절도 안 되어서 다시 찾아오다니, 용기가 가상하구나. 어디 이 대 일의 정정당당한 대결을 한 번 더 구경해 보실까? 대황보세가의 직계가 도중에 빼지는 않겠지. 암! 그렇고말고.”
대체 뭐가 정정당당하다는 건데!
이 부자 사기단이!
황보진운은 돗자리를 깔다 못해 활짝 펼쳐 대는 저 인간이 무척이나 얄미웠다. 하는 말이 어찌나 똑같은지, 부전자전이었다.
황보진운은 망설였다.
분노와는 별개로 국면이 불리했다. 저쪽은 한 명이 불어나 세 명이 되었고 자신은 혼자였다.
“날도 어둡고 하니 오늘은 이만하겠다. 소룡대회 때 이 빚을 갚아 주겠다. 나와 붙을 때까지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경고 후, 황보진운은 부리나케 자리에서 벗어났다. 같은 공간에 있어 봤자 좋은 꼴 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호응하지 않은 이유를 알아봐야 한다.
‘감이 없지는 않네. 좋은 자세야. 작전상 후퇴는 훌륭한 전략이지.’
무진은 황보진운을 잡지 않았다.
여물었다고 하긴 부족하나 역시 사내였다. 경쟁심은 당연했다. 이런 사소한 일까지 걸고넘어지면 강호는 피가 마르지 않을 것이다. 장부의 복수는 십 년도 부족하다는, 쪼잔한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아량이었다.
-누가 보면 관대한 줄 알겠다.
‘나만큼 관대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서 고기 좀 먹었다고 독안개의 하나 남은 눈을 터뜨린 거냐?
‘고기 좀 이라니. 말 이상하게 하네. 다른 것도 아니고 고기를 훔쳐먹었잖아. 게다가 먹어도 되냐고 물어봤으면 곱게 줬을 거다.’
-지랄을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