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33
332 업보(2)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뭐가 어쩌고 저째!
용서고 나발이고, 천권을 알고 있어서 짜증이 급격하게 치밀어 오른 천세진이었다. 놈의 말대로 유명하기는 했다. 너무 유명해서 모르고 싶어질 지경이다.
“감히 천운권 따위가 본 공자를 놀려!”
“얼레, 날 알면서도 그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뒷일을 감당할 수 있겠어?”
허영심, 자만심, 겉치레가 휘몰아쳤다. 누가 더 거만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지를 시험하는 듯한 모양새다. 고수의 품격하고는 거리가 먼 추잡한 내력의 치열한 심리전이었다.
‘가만, 이놈을 잘만 이용하면?’
항주에서 천씨세가를 무시할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한 수 접어주고 들어간다고 봐야 했다. 그런 자신 앞에서도 대차게 나오는 놈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정상적이지 않지만, 천운권이라면 이해가 되었다. 천하제일의 망나니! 악명이기는 해도, 명성은 명성이었다.
“본 공자를 기만한 행위는 묵과할 수 없다. 또한, 항간에 네놈이 벌인 기괴한 짓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봤다고 들었다. 그들을 대표해서 네놈에게 죄를 묻겠다.”
“같잖은 놈이, 이상한 겉멋이나 들어서 개소리를 잘도 주저리주저리 나불거려. 야, 까놓고 말해. 너 같은 놈이 대의 따위에 관심이 있을 리 없잖아. 너나 나나 그런 거 따지는 사람 아니지 않냐. 이놈은 양심도 없네.”
누가 누구보고 양심이 없대!
뒤늦게 사태를 알고 달려온 명성객잔의 주인 왕소팔에겐 둘 다 진상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마(魔)가 낀 날이 분명했다.
한 놈도 아니고 두 놈씩이나.
‘천씨세가의 망나니도 그렇고, 왜 하필 천운권이냐고!’
왕소팔로서는 진퇴양난이었다.
제발 별채에서만 싸우지 않았으면 했다. 이층으로 짓느라고 제법 많은 가산을 쏟아부었다. 건물과 물건이 부서지면 손해 막심이었다. 최소한 십 년을 내다보고 지은 건물이니만큼 안절부절못했다.
“이 새끼가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됐나 본데. 네가 어디서 좀 논 모양이지만, 그딴 명성 따윈 천검인 나한테는 안 통해!”
“별호가 멋지구나. 좋아. 누가 하늘의 뜻을 받았는지 결정을 지어 보자. 밖으로 나와. 여기서 이러지 말고.”
“좋다, 이놈아! 본때를 보여 주마!”
무진이 나가자고 하자, 천세진도 호응했다. 이번 기회에 명성을 날려 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하나, 대공자를 호위하는 호영종은 즉시 천세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안 됩니다.
-내가 질 것 같아?
-놈은 절정고수로 소문이 났습니다.
-뭐? 정말?
-소문이긴 하지만, 신빙성은 있습니다.
천세진은 멈칫했다. 천운권이 진짜로 절정고수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가문의 장로들은 와야 했다. 그제야 천운권의 악명이 떠올랐다. 천하제일의 망나니로 불리는 놈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다. 나가서 싸웠다가 망신이라도 당하면, 역으로 온갖 비난의 화살이 날아올 수 있었다.
‘이런 씨발!’
천운권의 명성을 짓밟을 생각에 뒤에 따라오는 악명을 무시했다. 그와 연관돼서 좋은 꼴을 보지 못한 사례들을.
‘어쩌지?’
당차게 나온 이상, 물리기에는 천세진도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소문은 소문일 뿐, 눈으로 본 것도 아니다. 꼭 주변에 누군가 있었기에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천세진의 내적 갈등이 길어졌다.
“쫄리는구나. 하긴, 초절정고수인 내게는 안 되겠지.”
“허튼소리를. 네놈이 겁이 나지 않는다면 본 세가로 찾아와라!”
“지금 싸우는 거 아니었어?”
“네놈은 본 공자의 상대로 격이 맞지 않는다.”
“저런!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진짜로 쫄았나 보구나.”
“내일 본 세가로 오거라. 오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흐억!”
품위를 유지하며 모양새 좋게 자리를 떠나려는 천세진의 가소로운 짓을 무진은 두고 보지 않았다.
어디서 감히 우쭐댄 채로 빠져나가려고, 어림도 없지.
알려진 명성대로 행동할 필요가 있기에 내버려 둘 수 없는 일이었다.
악명은 소중하니까.
퍼퍼퍽!
태진과 철호가 빛살처럼 튀어 나가 천세진의 호위 호영종과 단자겸을 두들겨 팼다. 대공자의 호위로서 일류 수준의 무인이었지만, 태진과 철호를 상대하기에는 벅찼다.
꺼르륵!
카악!
육칠, 나릉, 강철은 하찮은 허세를 부린 천세진을 머리부터 다리까지 자근자근 밟은 후 대령했다.
파르르!
정신없이 처맞은 천세진의 얼굴은 시퍼렇게 멍이 들고 부어올라 원래 모습과는 이질적으로 변했다.
“이런 짓을 하고 항주에서 무사히…… 푸악!”
“다시 말해 봐.”
“본 세가에서 네놈을 가만…… 크악!”
“다시 말해 봐.”
동냥아치를 동냥아치로 제압하는, 이독제독의 표본이었다. 누가 더 동냥아치인지 우위는 분명했다. 천하망종의 상종 못 할 동냥아치 앞에서 가문을 내세워 봤자 더 처맞기나 하지. 이래서 동냥아치가 절대고수면 답이 없었다.
“무신지보로 목숨을 잃을 뻔한 무고한 인명을 살려 낸 천하제일의 대협객이 바로 이 몸이시다. 너 따위가 감히 비빌 급이 애초에 아니라고. 알겠어?”
“잘못했습니다……. 그만 때려 주세요!”
천세진의 의기는 거기까지였다. 바로 자신의 처지를 알고 바짝 엎드렸다.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세전환의 교본이었다.
“짜식, 고거 맞았다고 징징거리기는. 아무래도 정신교육이 필요하겠어. 너에게 나의 대협객행을 알려 주도록 하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니 귀를 씻고 잘 들어.”
“……으아아아악!”
손가락으로 귓구멍의 고막을 살짝 뚫어 주었다. 피가 잘 통하도록. 체했을 때 귓불을 뚫기도 하니, 고막 정도는 뚫어도 괜찮겠지?
“시끄러워.”
“……으으으으!”
무진의 대서사는 주관적이며 작위적이었다. 내용만 들어서는 천하제일협객이 분명했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소문과 대조하면 전혀 다른 내용이 되었다.
‘……지독한 인간이다!’
왕소팔은 오십 평생 객잔을 운영하면서도 저런 쪼잔함과 지독함은 처음 보았다. 차라리 깔끔하게 목을 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주 그냥 구라가 생활이 됐구나!’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 했다. 육칠, 나릉, 강철이 사지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천세진은 항거 불능인 처맞은 상태 그대로 협객행을 들어야 했다.
‘……나는 누구?’
천세진에겐 면벽이나 불공보다 더한 고욕이었다. 삶의 고찰을 통해 인생을 되돌아……보기는 개뿔!
마냥 고통스러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들 질린 기색이 완연했다. 반 시진 동안 자기 자랑만으로 도배하는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같은 내용인데도 살이 붙고, 또 붙으니 전혀 다른 내용이 되는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미친놈!
‘기본이지.’
듣고 있던 마왕마저 연결을 차단하고 지저의 심상으로 가라앉았다. 미친놈도 급이 있음을 실감했다.
“끝나 간다.”
“……정말입니까?”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할게.”
“아까도…… 크악!”
학관의 훈장처럼 마지막을 처음처럼 시작하는 신비로운 재주를 선보였다. 끝난 줄 알고 방심했던 천세진의 내상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사람을 말로도 죽일 수 있는, 촌철살인의 현장이었다.
“똑바로 살아.”
“……예, 알겠습니다!”
“가 봐.”
“……가도 되는 겁니까?”
“가.”
“가……감사합니다. 천권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는 삶의 지침으로 삼아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그래야지.”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완벽한 정신교육이었다. 무진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천세진은 비틀거리면서도 최선을 다해 일어섰다.
“저래서야 나처럼 대협객이 될 수 있겠나.”
항주에서 돈을 많이 쓰긴 했다.
썼으면 벌어야지.
가려는 사람 발목을 붙잡은 대가는 원래 비싼 법이다.
***
천씨세가가 발칵 뒤집혔다.
평소와 다름없이 밖으로 싸돌아다니던 대공자가 엉망진창이 되어 돌아왔다. 자초지종을 물어봐도 횡설수설하며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천씨세가의 가주 천대상은 분노했다.
사고를 쳐도 벌을 주기는커녕 오냐오냐 키웠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천씨세가를 이끌어 갈 대공자였다. 벌을 줘도 자신이 줘야 했다. 자신조차 손을 대지 않았던 아들을 만신창이로 만든 이상, 본 세가를 업신여기는 행위였다.
소문을 내지 않으려고 해도 본 이들이 있었다. 객잔에서 처맞고 가문으로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다. 누가 봐도 이상해 보였을 테니, 내막을 알아보려는 날파리가 꼬일 것이다.
항주오대무문에 속한다는 말은, 반대로 천씨세가에 비견되는 곳이 네 곳이나 있다는 의미가 되었다. 그들이 이런 좋은 먹잇감을 얌전히 내버려 둘까.
“누가 그랬지?”
“천운권입니다.”
항주에서 천씨세가를 건드릴 간 큰 위인은 흔치 않다. 자기 주제를 모르는 외지인일 것이다. 또한, 명성이 있는 자를 건드릴 만큼, 아들이 바보는 아니다. 최소한 누울 자리를 보고서 누울 줄은 알았다.
여태 말썽을 부렸음에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연유였다. 그런 아들을 정신이 나가도록 두들겼다면, 알려지지 않은 고수여야 했다.
그런데 하필 천운권이라고!
허, 어이가 없네.
근래에 절강, 산동, 강소, 안휘를 시끄럽게 한 주범이었다. 하는 짓마다 원한과 악명을 쌓아 갔다. 천하의 망종이 항주까지 와서 설치고 다닌 것이다. 자고로 망종은 계도를 해도 망종이라고, 항주라고 얌전할 리는 없겠지만.
“그놈 어디 있어?”
“명성객잔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놈이 날 우습게 여기고 있구나!”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이런 수치를 당하고도 가만히 있으라는 겐가, 홍 총관!”
천씨세가의 총관 홍사철은 아들의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천 가주의 불같은 성향을 알면서도 만류했다. 이치상으론 천운권의 안하무인을 단죄해야 마땅하나, 악명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처럼 편하게 무마하기는 쉽지 않았다.
“보통 놈은 아닙니다.”
“그래 봤자, 천하를 시끄럽게 하는 망종에 불과하잖나!”
“놈은 최소한 절정에 이르렀다고 알려졌습니다. 과장된 소문이라고 보기에는, 그간의 행보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그거야 운이 좋았던 거겠지.”
“운만으로 이 험준한 강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호사가들은 전한다.
강호에 운은 없다고. 운만 믿고 살아남을 만큼 강호는 만만하지 않았다. 눈먼 칼에 고수도 죽어 나가는 판이었다. 살벌한 강호에서 악명이라고 하지만, 명성을 쌓아 갔다. 그 자체로 놈은 평범하진 않았다. 최소한 어느 정도의 무력은 가지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래서 내 아들을 병신 만든 놈을 이대로 두고 보자고!”
“천운권이 의도했다고 보긴 힘들지만, 자칫 송호문이 항주에 지부를 세울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은 약자에게 자비롭지 않습니다. 빈틈을 내어 주는 순간 숨통이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최대한 조용히 해결해야 합니다.”
홍 총관의 논리적인 어조에 불같은 성향의 천 가주도 설득을 당하고 말았다. 특히 약육강식의 강자지존을 내세운 것이 즉효였다.
“흠, 놈을 초대하라는 건가?”
“그편이 나을 겁니다.”
“순순히 따를까?”
“그 부분은 협의를 해 봐야 할 사안입니다. 아시다시피 혹여라도 패한다면 뒷감당을 하기 힘듭니다.”
“그딴 놈에게 패할 만큼 본가는 약하지 않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조금이라도 흠이 생긴다면 차후 상상도 하기 힘든 후폭풍이 올 겁니다.”
천운권과 악연을 맺은 자들의 최후는 하나같이 비참했다. 망신은 그나마 천운이고, 목숨을 잃은 자들도 수두룩하다. 이러다 천운권에게 지기라도 하는 날엔 감당하기 어려운 끔찍한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천운권에게 패배한 세가.
꼬리표처럼 사방에서 들려올 조롱과 멸시가 눈앞에서 펼쳐졌다. 천대상은 물론, 장로들도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사사건건 마찰을 빚는 태화도문에서 안다고 상상해 봐라. 태화도문의 문주, 설태상의 빈정거리는 넓적한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제야 사태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단순히 아들이 처맞고 들어와서 복수한다는 개념을 벗어났다. 비겨도, 져서도 안 되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명제가 생겼다.
천운권의 파급력을 되새기도록 해 주었다. 천하의 망종이 가진 업보였다. 그를 이기지 못하면 그 업보를 고스란히 계승하게 된다. 첩첩이 쌓아 올린 천운권의 위명을 새삼 실감하게 했다.
“기회를 주어선 안 되겠군. 그렇다면 암살을 의뢰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건 위험합니다. 놈이 개방과 연관이 깊습니다. 사고사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우릴 의심할 겁니다.”
천운권과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송호문과 연을 맺었을 것이다. 더욱이 송호문의 신검마협은 초절정고수로 소문이 났다. 그가 직접 나서면 천씨세가로서도 부담이 되었다. 친선 비무 선에서 조용히 마무리하는 편이 이로웠다.
“허, 기도 안 차는군. 이딴 식의 명성도 명성인 건가?”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벌레 같은 놈이 온 사방을 시궁창으로 몰아넣는군.”
“건드린 이상, 이제는 방치해서도 안 됩니다.”
“어째서?”
“그는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소문을 퍼뜨릴 테니까요.”
“……빌어먹을 놈이로다!”
천운권은 입이 쌌다.
자신의 과업을 떠벌리지 못해서 안달인 놈이 천씨세가와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못했다. 입단속을 하지 않으면 자기 멋대로 과장할 것이다.
“홍 총관, 자네가 가게.”
“알겠습니다.”
홍 총관으로선 원치 않은 떨떠름한 일이었다. 그러나 주인의 명을 거부할 권한은 없었다.
‘소문의 반만 돼라.’
그의 간절한 소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