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36
335 악마의 유혹
파앙!
거칠게 내려친 탁상이 힘겹게 버텨 냈다. 되레 주먹의 떨림은 가시지 않았다.
가문의 수뇌부가 모인 자리.
임시긴 해도 가주의 중책을 맡은 악효천은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그러나 탁상에 놓인 서신을 읽어 내려갈수록 분노를 제어하기 힘들었다.
부들부들!
억눌린 감정은 가주실에 모인 장로들도 매한가지였다. 송호문에서 보내온 서신은 명백한 엄포였다.
-그간의 죄를 인정하고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본문의 손속이 매섭다고 욕하지 마라.
예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치욕스러운 서신이었다.
일벌백계해야 하나, 누구도 단죄를 거론하지 못했다. 송호문을 건드리기에는 산동악가의 사정이 최악이었다.
가주와 정예를 잃었고, 내부적으로 가주 위를 두고 경쟁하는 중이다. 그 와중에 자리다툼까지 벌였으니 작금의 혼란은 당연했다.
그나마 송호문이 압박을 해 오자, 생존의 위기를 느꼈던 것인지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강호의 역사에서 사라졌던 수많은 가문처럼 될 수는 없다는 절박함이었다.
“감히 송호문 따위가 본가를 능욕하다니!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래야지. 이대로 두고 본다면 만천하가 본가를 우습게 여길 것이야!”
“송호문만 처리하면 남은 잔당들이야 금방 정리가 될 겁니다!”
“예전이라면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것들이 주제를 모르고 짖는구나!”
수뇌부의 설왕설래에 진 총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돌아가는 꼴이 가관이었다. 아직도 사태 파악은커녕, 현실 직시도 못 하고 있었다. 서신만 봐도 답은 명확하다. 보복은커녕, 가문의 내일도 보장하기 힘들었다.
답답한 현실이나 진 총관은 자신의 역할을 외면하진 않았다. 직면한 과제를 외면한다고 현실이 달라지지도 않으니. 우선은 가문의 사정을 일깨워야 했다.
“송호문의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예의를 가르쳐 주어야 할 때이지요. 자, 어떻게 보복을 하시겠습니까?”
“그거야, 무림맹의 협조를 받아서.”
“건방진 송호문은 남궁세가와 황보세가를 등에 업고 있습니다. 게다가 개방과도 친하더군요. 과연 예의와는 별개로 힘 빠진 우릴 맹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겠습니까?”
“우리만으로도 송호문을 처리할 수 있네!”
“신검마협은 초절정에 이른 고수입니다. 게다가 서신을 보니 전대 검후와 천주신창까지 합세했더군요. 그런데도 우리만으로 처리할 수 있다니, 제가 모르는 힘이 가문에 있는 겁니까?”
“……그건!”
진 총관의 말이 이어질수록 분노로 가득했던 가주실은 차갑게 식었다. 현실적인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감정에 기대어 복수하겠다니,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송호문은 이제 예전의 약소 문파가 아니다. 천주신창만 해도 본가로선 감당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런 주제에 전대의 검후와 현시점의 검후까지 있었다.
세월이 흘러 전대 검후를 잊힌 사람으로 치부하는 모양인데, 그녀는 신주이십일강이었다.
대체 뭘 믿고 아직도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인지. 가주께서 살아 계셨다면 모를까.
지금이 기로임을 인정해야 했다.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복수를 운운할 때가 아니다. 제갈세가의 동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리석은 결정이 되었지만, 감정을 토해 내기보다는 수모를 감내했다.
따지고 보면 선택을 할 필요도 없다.
배경으로 짓눌러 버리기에는 인맥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송호문이 바보도 아니고, 작심하고 나온 연유가 있었다.
그간 당한 걸 갚겠다는 보복성도 있겠지만,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문파의 명성을 올리려는 의도가 먼저였다. 송호문에 머리를 쓰는 자가 있었다. 단순히 무력만 믿고 설치진 않았다.
“그러는 총관은 방도가 있는 것이오?”
“다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송호문에 사과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어찌하시려고요?”
무림은 약육강식의 세상이었다. 강자였을 때는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으나, 약자로 전락한 이상 무릎을 꿇어야 했다.
“자네는 자존심도 없나?”
“하면 옥쇄를 각오하시렵니까? 원하신다면 최선을 다해 전략을 짜 보겠습니다.”
진 총관을 몰아붙였던 장로들은 차분한 대응에 입을 다물었다. 옥쇄는 멸문을 뜻했다. 그제야 현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 모른다고 할 수도 없다. 이 안에 장로들이 옹호하는 직계가 각각 연립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공을 세우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사과로 연명할지, 자존심을 세우고 멸문을 각오할지, 판단하시면 됩니다. 저는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여태 말 많았던 자들이 거짓말처럼 입을 꾹 닫았다. 자존심이 중요하긴 해도,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은 것이다.
“아시다시피 결정에 따라서 방향이 달라집니다. 참고로, 제갈세가는 이미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총관의 말대로 사과를 하는 즉시 본가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 거요.”
“맞습니다. 또한, 송호문은 계속해서 압박해 올 테지요. 모욕을 견디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도 사과를 하라고!”
“살려면 어쩌겠습니까.”
생사의 갈림길이 되자 침묵이 흘렀다. 한데, 자고로 침묵은 긍정이라고 했었다. 자존심을 운운하지만, 정작 이 자리의 누구도 목숨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럴 거면서 자존심은.’
진 총관은 살아남기로 했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젠 정파나 명문에 얽매일 때가 아니다. 진정으로 수단 방법을 가려선 안 되었다.
‘이빨 빠진 노인네들과 애송이쯤이야.’
가주가 살아 있었기에 참아 왔을 뿐이다.
***
-송호문도 대단하긴 하네. 제갈세가와 산동악가의 사과를 기어이 받아 냈잖아.
-예전의 산동악가와 제갈세가가 아니라고. 이빨 빠진 종이호랑이에 불과해.
-그 이빨 빠진 호랑이한테 왜 아무도 짖지 않았냐?
-썩어도 준치라고, 제갈세가와 산동악가가 만만하진 않잖아. 그랬으면 진작 달려들었겠지.
-이번 기회를 틈타서 승냥이처럼 날뛰는 놈들도 있다고! 이러다가 사파에 빌미를 주는 건 아닐지 걱정이야.
-구더기 무서워서 장도 못 담글까. 그딴 걸 생각했으면 구린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산동악가와 제갈세가는 끝났다고 봐야지.
-송호문이 그 자리를 대신하겠지. 신검마협에 천주신창이면 웬만한 대문파는 찜 쪄 먹는 수준 아닌감.
-천운권의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제기랄!
-정말 운이 트인 놈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사방에서 떡을 주네.
-있어 봐, 천운권이 또 한 건 터뜨릴 거야. 그놈이 가만히 있을 위인은 아니잖아.
-하긴, 항주에 있다고 했지. 거기 조심해야 할걸.
기득권에 대항하여 정의를 수호한 송호문의 배짱에 환호했지만, 득의해할 천운권을 상기하자 맘 편히 옹호하지도 못했다.
안 되는 놈은 뭘 해도 안 되듯, 될 놈은 뭘 해도 되는, 이 부조리한 세상의 적나라한 현실을 천운권이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신지보를 포기하지 않는 천운권의 행보와 항주에서의 망나니짓이 더더욱 부각되어 장수(長壽)를 부추겼다. 이쯤 되면 불로장생도 노려 봄 직해 우화등선을 목표로 하는 도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크하하하!
자면서 웃고 있었다. 웃을 일이 없을 텐데도 웃는 것 같아서 굉장히 실없어 보인다.
“강 대협, 천 가주께서 웃으시는데요.”
“꿈에서는 이기나 보지.”
꿈과 현실은 반대여야 하는 천 가주의 미련이 반영되었으리라. 확신은 하지 않았다. 처맞고서도 웃을 수 있다면, 대자대비한 부처에 비견되었다. 잘하면 한 대 더 맞고, 두 대도 요청할 듯싶다.
“사람이 왔는데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는 거야! 나처럼 인내심 강한 보살도 이쯤 되면 참기 힘들지.”
“……깨우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천세진이 공손하게 일어나서, 꿈속에서 행복한 결말에 빠진 아버지를 흔들었다.
“아버지, 일어나세요!”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자식이 곤혹스럽다고 대변했다. 현실을 부정하고 무책임하게 꿈속에서나 활약할 때가 아니었다.
활약할 거면 현실에서나 하라고욧!
“아버지!”
“……흐억!”
천운권의 머리를 짓밟으며 통쾌한 승리를 자축했던 천 가주는 공간이 흔들리는 느낌에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흐릿했던 시야가 트이면서 아들이 보였고.
“천운권, 네 이놈…… 꾸웩!”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기에 무진은 천 가주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쳤다.
이제는 정신이 들어야…… 기절했다.
벌러덩!
침대라서 괜찮았다.
무진은 손수 깨워 주었다. 손님이 왔는데, 주인 새끼가 계속 처자고 있으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바로잡아 줄 필요가 있기에 재차 손을 썼다.
찌리리리릭!
크아아아악!
기함을 토하며, 건재함을 알리는 천 가주였다.
방의 천장이 그리 낮지는 않은데, 충격이 꽤 큰 모양이다. 통증을 유발하는 점혈법에 천 가주는 한겨울에 풍을 맞은 사람처럼 떨었다.
“가주께서 정신을 차린 듯하니 들어오라고 해.”
“예, 강 대협!”
아버지를 강제로 깨웠음에도 천세진은 공맹의 도리를 익힌 학자처럼 얌전했다. 명성객잔에서 보인 무례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 어려운 개과천선을 했다면 갱생의 여지는 있는 모양이다.
가주의 침실은 여러 명이 들어와도 넉넉했다.
침상에서 일어난 천 가주는 고통을 호소하다, 현실을 파악하고 연신 헛기침을 했다.
커험!
꿈은 꿈일 뿐, 내막을 파악한 천 가주는 쥐구멍이 그리웠다. 지켜보는 동생들과 아들이 부담스러웠다.
한데, 시선 처리가 어색하다.
왜 다들 손으로 한쪽 눈을 가리고…… 어? 모두 시퍼렇게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하고 있었다. 어찌 된 연유인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답은 나왔다. 침상 앞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건들거리는 모습만 봐도.
“못 믿겠다기에, 믿게 해 줬지.”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다시 붙자는 거야?”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얼마든지 재대결을 해 주겠다는 천운권의 아량에도, 천 가주는 선뜻 그러겠다고 하지 못했다. 말까지 더듬으며, 논리조차 어긋났다. 사술로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충격적이었다. 다시 붙는다고 해도 승산이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원에 모였던 세가의 무인들은 정예다. 그들이 다 같이 처맞고, 눈두덩이를 날달걀로 비비고 있었다. 분위기만 봐도 승산은 없었다.
그나마 같이 처맞아서 동질감은 생겼다.
“삼만 냥 알지?”
“……다다다당장은 무리다.”
“소문나고 싶어?”
“아아아안 돼, 제발!”
천운권에게 패했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하는 날엔 천씨세가는 항주에 발을 붙이고 살기 어렵다. 이토록 무서운 협박은 처음이었다. 돈은 달라는 대로 줘야 했다. 무조건 소문만은 차단해야 한다.
“육만 냥 어때?”
“……뭐?”
“배로 내면, 졌지만 잘 싸웠다고 해 줄게.”
“그 정도로는.”
“무승부는 십만 냥이야.”
“세 배 이상이라니, 터무니없지 않나!”
“아니면 나한테 졌다고 소문나는 거지.”
배로 널뛰는 액수에 천 가주와 가솔들은 눈 뜨고 코 베이는 현실과 마주했다. 평상시라면 고민하는 천 가주를 만류했을 것이다. 한두 푼도 아니고 십만 냥이었다. 평생 돈을 갚다가 가문이 거덜 나는 수가 있었다.
절대 안 되는데.
천 가주와 마찬가지로 동생들도 망설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선뜻 강경하게 부정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운권에게 패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천씨세가는 엄청난 타격을 입는다. 호시탐탐 자리를 넘보는 다른 문파에 집중 견제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천 가주는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애초에 천운권과는 엮이지 말았어야 했다. 왜 이런 처지가 되었을까? 밀려오는 억울함에, 속에 있는 말을 꺼내고 말았다.
“네놈이 우릴 속였어! 아니, 천하를 속였다고 봐야지! 경지를 밝혔다면 대결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 미안하네. 내 아들과 제자가 강하긴 했지. 그 심정 알아. 그러니까 동네방네 떠들어도 괜찮아. 천운권이 절대고수였고, 그 아들과 제자는 초절정이어서 당연히 질 수밖에 없었다고, 그렇게 소문내.”
얼마든지 사실을 알려도 된다고 하지만, 천 가주와 가솔들은 답답했다. 천운권의 아들과 제자가 초절정고수였다고 밝힌들 누가 믿겠냐는 거다. 패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변명으로 치부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서서히 현실을 깨닫게 되는 천씨세가였다.
천운권의 악명이 주는 파급력은 엄청났다. 될수록 시비가 붙지 않는 편이 낫다고 알렸다. 그런데도 붙었다면 최소한 이겨야 했었다.
‘와, 이런 걸로도 협박이 가능하구나!’
‘기가 찬다. 설마 일부러?’
‘보는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드네!’
육칠, 나릉, 강철은 무진의 신종 협박에 혀를 내둘렀다. 본인의 악명을 이런 식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떤 면에서는 최강, 최악의 명성이었다.
“대단치는 않았어도 다들 한 방에 졌으니까, 명성 좀 오르겠는걸.”
흐어어어억!
부르르르르!
천 가주와 가솔들이 눈을 까뒤집으며 대경실색했다. 무인은 명성을 먹고 산다.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순간 먹잇감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차후, 천운권의 명성이 정정된다면 좋겠지만, 그때까지 천씨세가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나중에 사실이 알려져도, 지금 망하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십오만 냥이면 졌다고 해 줄 수도 있어.”
“정말이시오, 강 대협? 그리되면 강 대협의 명성…… 아!”
천 가주는 자신의 말투가 달라졌다는 사실마저 잊었다. 천운권이 패배를 인정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그러나 서서히 현실적인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아, 그래도 십오만 냥은……!”
“싫으면 말고.”
“분할로 됩니까?”
“모시겠습니다, 호구…… 고객님.”
무진과 천 가주의 극적인 타협에 가솔들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게 잘된 건지, 안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패배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부채의 덫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십오만 냥이라니!’
‘언제 그런 거액을 갚아!’
‘이건 안 돼!’
그렇다고 주지 않을 수도 없다. 깨알같이 숨통을 열어 주어서 다 버리고 떠나지도 못했다.
“혼자만 당할 필욘 없는데.”
무진의 혼잣말이었다.
인파가 몰리는 시장판이라면 들리지 않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침묵 중인 방 안이다. 듣고 싶지 않겠지만, 귀가 달린 이상 들렸다.
내용을 상기할수록 악마의 유혹이었다.
‘우리만 처맞을 필욘 없지 않나?’
‘우리만 뜯길 필요도 없고!’
‘우리만 수모를 안고 살 순 없지!’
정말 치졸한 짓이 분명하다. 정파에 속한 가문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비열한 행위였다. 사람이란 궁지에 몰리면 체면도 불사한다지만, 숨 쉴 틈이 생기면 꼼수를 정당화하곤 했다.
하물며 자식 교육부터 시작해서 가문 전체가 권위 의식에 찌들어 있는 세가였다. 그런 자들이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택하진 않는다.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강 대협께선 아시지 않습니까.”
“전혀 모르지만, 한 번 들어나 봅시다.”
본인이 제시했음에도,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협의는 일절 없는 무진의 일방적인 협상력에 강철, 나릉, 육칠, 태진, 철호는 혀를 내둘렀다.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무책임의 표본이었다.
나는 선량하지만, 너희들의 고민은 들어주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도량이기도 했다.
천대상은 순전히 무진의 입맛에 맞추어서 나열하고 있었다. 눈빛이 부정적이면 긍정적인 반응이 나올 때까지 노력했다.
그제야 만족한 듯, 무진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천 가주의 혜안이 놀랍군.”
“……고맙습니다!”
누워서 절 받기도 이쯤 되면 식상하지 않을까.
무진은 아들에게 계약 내용을 문서로 꼼꼼하게 적으라고 했다. 누차 말하지만, 구두 약속은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말을 바꾸면 입을 찢어 버리기도 귀찮은 일이고. 한 번에 할 일을 두 번 하지 않도록 매사에 신중해야 했다.
특히 계약에 관해서는.
-이 모든 내용은 대(大)천씨세가의 천대상 가주께서 직접 제안한 방식이다.
-번복할 시 가문이 뜻하지 않은 화마에 휩싸이는 사소한 일이 생길 수 있다. 깊게 고민할 필요는 없는 일이고, 계약만 잘 지켜지면 된다.
서명, 수인, 인장.
발 도장까지 완벽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은 꼼꼼한 계약에 천 가주와 식솔들은 숨이 막혔다. 이젠 빼도 박도 못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빠져나갈 방법 따윈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상대는 알려지지 않았을 뿐, 절대고수에 범접했다.
그것도 성질 더러운.
‘……내가 어쩌자고?’
다들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무언가에 쓰이지 않고서야, 말도 안 되는 계약서에 발 도장까지 찍을 줄이야. 한 부씩 나누어 갖고 나서야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땅 좀 사 둬야겠지?’
-나쁘지 않군, 땅은 배신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