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38
337 물귀신(2)
내민 손바닥 위에 누런 금자가 안착하고 나서야, 대화를 시도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오백 냥이 허공으로 날아간 설태상은 허망함을 뒤로해야 했다. 천운권이 밖으로 나가 본문을 이겼다고 하는 즉시, 태화도문은 항주에서 발을 붙이지 못한다.
‘사실을 말해도 믿지 않겠지.’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했다. 내가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사람들이 개소리로 치부하면 개소리가 되는 거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명제, 따지고 보면 좋게 포장한 위선에 지나지 않았다.
“졌다는 말만 빼 주십시오.”
“이겼다고 해 줄 수도 있어. 졌지만, 잘 싸웠다고도 할 수 있고.”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선택지가 갑자기 몇 개로 늘어났다. 갑자기 이런다면 내막을 살펴야 했다. 애초에 금자로 환산했을 때를 고려하면 답안지는 나와 있었다.
의도를 파악한 설태상이었다.
“……단가가 다르군요!”
“대도시라서 그런지 눈치가 빨라. 사람이 모일수록 돈 벌기가 쉬운 일이 아니잖아.”
사람이 모여야 돈을 벌기 쉽다고 하는데, 남의 돈 먹기가 쉬웠으면 모두가 성공했겠지. 세상 쉬워 보여도, 실제로 해 보면 쉬운 일은 없다. 항상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기 마련이다. 아니면 직접 해 봐라. 쉬운 길이 있는데 하지도 않고, 배만 아파해선 언제나 빈곤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얼마나?”
“십오만 냥.”
“……?”
“분할도 돼.”
“썩을…… 아닙니다!”
“싫으면 말고.”
무진으로선 아쉬울 게 없는 일이었다. 태화도문과의 대결을 사실대로 설명하면 알아서 자멸하게 되어 있었다. 가지지 못할 거면 흔적을 남기면 안 되지.
“……하겠습니다!”
“결단이 빨라서 좋네.”
“뒤를 돌아본다고 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태화도문이 전적으로 책임을 질 필요는 없어.”
“그게 무슨?”
“천 가주는 알던데.”
그제야 흑막 속에 가린 진실을 본 설태상이었다.
겨우 인내했던 분노가 폭발할 것 같았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천씨세가가 있었던 것이다.
‘이 망할 놈이, 혼자만 당한 것이 억울해서 날 끌어들였구나!’
설태상과 천대상은 비슷한 이름 못지않게 앙숙이었다. 이 순간 천대상이 히죽거리고 있을 거란 걸 알기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 계약하자고.”
“이럴 수는 없습니다!”
“간다.”
“계약하겠습니다!”
신성한 계약을 감정에 호소하고 지랄이야.
개인적인 감정은 둘이서 풀라고. 비슷한 잡것들이 누가 더 강하다고 한들, 무진에겐 도토리 키 재기였다.
“정파로서 대의를 지키자고.”
“……!”
***
대의라?
방에 다섯 사내가 모였다. 서로를 마주한 시선에 불편함과 적의가 한가득이었다. 하나같이 맘에 들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어쩌다가 이런 처지가 되었을까? 어이가 없으면서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계약서에 발목이 잡혔다.
작당……은 개뿔!
서로가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밀려드는 배신감에 휩싸여, 신뢰를 구축할 여력 따윈 없었다. 믿을 사람이 따로 있지. 적의 적은 아군이긴 하나, 배신하면 답이 안 나온다. 이후의 충격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언제까지 어색하게 서서 있을 거야. 이거야, 원! 불편해서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잖아.”
“앉겠습니다. 자네들도 어서 앉게.”
뜻하지 않게 항주의 오대무문의 주인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태화도문의 설태상, 천씨세가의 천대상, 지강문의 유진원, 천중방의 방세관, 백검장의 구천홍이 자리했다.
계약은 대동소이하여 굳이 따져 묻지 않아도 되었다.
‘혼자 죽지 않으려고 이따위 짓을!’
‘우리가 대체 뭘 어쨌다고!’
‘두고 봐라, 이 수모를 절대 잊지 않겠다!’
설태상과 천대상이 앙숙임을 모르는 이는 없다. 둘의 싸움에 엮여 피해를 본 유진원, 방세관, 구천홍은 이를 갈았다.
빠드득!
어처구니없게도 족쇄를 차고 말았다. 죽으려면 혼자 죽었어야 했다. 자신들까지 끌어들여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족적을 남겼다.
무진의 품에 있는 계약서.
서명, 수인, 인장, 족인까지.
발을 보였으니 이젠 볼 장 다 본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아니라고 발뺌을 해 봤자, 계약서가 시중에 나돌면 한패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명성에 욕심낸 놈들이 누굴 욕해!’
‘누가 강제로 떠밀었냐고? 지들이 하고선!’
천대상과 설태상도 할 말은 있었다. 끌어들였다고 욕하는데, 따지고 보면 묵인했을 뿐이다. 대외적인 명성이 올라가면서 안절부절못하고 나섰으면서. 순전히 본인들의 선택이었다. 본의 아니게 물귀신이 되었지만, 욕심이 부른 화였다. 그러니 전혀 미안하지도 않았다.
끄덕, 끄덕!
모처럼 뜻이 같은 천대상과 설태상은 자기합리화를 극대화하며,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내 발등에 떨어진 불도 못 끄는 판국에 무슨.’
‘나부터 살아야지. 저 괴물한테서!’
송호문의 눈에 띄는 약진이 거저 얻어진 행운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항주의 오대무문을 한순간에 제압하고, 꼼꼼하게 족쇄를 채운 것만 봐도. 이놈들의 성정을 알기에 얌전한 고양이처럼 수그리는 모습이 낯설었다.
천운권의 무력은 명백히 과소평가되었다. 최소한이 초절정의 극, 어쩌면 화경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신주이십일강은 아니더라도, 그에 근접했다고 봐야 한다.
괴물들의 영역에 발을 들였으니, 여태 뻘짓을 하고도 살아남았겠지. 악명이 수두룩한데도 죽지 않은 것만 봐도 천운권은 강자였다.
강자는 살아 있기에 강자다. 죽어 버린 강자는, 대접을 받지 못했다. 강호의 기본적인 법칙을 외면해 봤자, 현실 부정에 지나지 않았다.
“얼굴들 붉힐 것 없어.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하잖아.”
“무슨 말씀이신지?”
“우물 안의 개구리, 이게 당신들의 민낯이야.”
“말씀이 과하십니다!”
“과하다고? 나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면서.”
무진의 신랄한 비판에 항주의 주인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우물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자각했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마련이다.
“당장은 손해지만, 내가 잘나갈수록 명성은 높아질 테고. 돈이야 자연스럽게 따라오지 않겠어.”
“하고자 하는 말씀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본문과 정운상단의 관계는 조사해 봐서 알 거야.”
“정운상단과 계약하라는 거군요.”
“협력하면 이자를 면제해 줄 수도 있고. 한데, 그건 중요하지 않아. 항주 내에서 가문을 유지하고 싶다면 말이야.”
오대무문의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정운상단은 상계에서도 명망이 올라가고 있었다. 조건만 맞는다면 협상의 여지는 충분하다. 그러나 거래 때문이라면 이 자리에서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다른 의도가 있군요.”
“석가장이 절강성 내에서의 영향력을 이전보다 넓히려고 하거든.”
“만천상회가 대상단이긴 해도, 항주에서만큼은 우릴 강제하진 못합니다.”
“강소성의 팔대문파 중 다섯이 협력하고 있어. 이뿐인 줄 알아! 석가장은 절강성의 터줏대감인 구룡산장과 연계를 할 계획이야. 콩고물을 나눌 게 아니면, 버티기가 쉽지 않을걸.”
구룡산장을 언급하자, 항주의 수장들은 얼굴이 굳었다. 강소성의 오대문파도 만만치 않은데, 구룡산장이 야욕을 부린다면 항주를 내어 줄 수도 있었다. 최근 들어 구룡산장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긴 했다. 주변의 문파를 흡수하고, 고수를 영입하여 절강제일문을 노리고 있었다.
“연합하란 말이군요.”
“살려면.”
정보의 부재가 여실했다.
석가장이 움직이는 동안 자신들은 까맣게 몰랐다. 물밑 작업이 이루어졌다면 손을 내미는 시늉이라도 했을 터. 자신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는 뜻이 되었다. 천운권이 언급한 대로,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
“구룡산장이 개입했다면 우리만으론 벅찹니다.”
“맨입으로 도와 달라고 하면 안 되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신뢰에 선물만큼 좋은 것도 없지. 근자에 눈여겨 둔 땅이 있거든. 적당한 가격에 사고 싶은데.”
“어디를 말씀하시는 건지?”
“서호의 남쪽이야.”
곰곰이 생각을 해 보던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호 주변이 발달하긴 했지만, 남쪽은 상대적으로 덜했다. 인구도 부족한 편이었고. 적당한 가격에 팔려고 해도, 팔리지 않았다.
불모지로 보긴 어려워도, 내주지 않으려고 애를 쓸 필요까진 없다. 내준 후에 송호문과 정운상단의 원조를 받는 편이 이득이었다.
이해관계는 이쯤 하고.
“이왕 협조하는 김에 다시 덤벼 봐.”
“덤비라니…… 또 대련입니까?”
“전부 한 방이라, 볼 새가 없었어. 어떤 무공인지 알아야 알려 주지.”
“……그런!”
얼굴이 붉어질 만큼 수치스러웠다. 사실이지만, 이토록 적나라하게 까발리다니.
너희들이 너무 약해서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무진은 아쉽지 않은 얼굴이었다.
“감당할 수 있으면 그만하고.”
“……아닙니다!”
그들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항주오대무문의 간판이 잠시 필요할 뿐이다. 항주 무문과 협조해서 정운상단이 자리를 잡고. 적당한 방패막이가 될 수 있다면 족했다. 역량이 부족해서 망해 버린다면 하는 수 없고.
그렇다고 대충 하진 않는다. 의욕이 끓어오르도록, 무진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소문나고 싶지 않으면 잘해야 할 거야.”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천운권이 가진 계약서가 외부로 새어 나가면 항주는 물론, 중원 어디에서도 발을 못 붙인다.
-땅장사라도 하게?
‘네가 그랬잖아. 땅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흠. 교의 활동 지점을 노리는 거군.
‘어때, 내 생각이?’
-네가 사면 바꾸지 않을까?
‘……?’
그건 생각 못 했는데.
회심의 계획이 마왕의 한마디로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하자, 무진의 고민이 깊어졌다. 마신교가 활약했던 지점을 알고 있기에 먼저 선점해 볼 심산이었다.
이럼 나가린데.
선회하여 방법을 재구상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으나, 무진은 일단 밀고 나가기로 했다. 남아도는 돈을 모아 두기만 해선 안 되었다. 투자의 개념으로 미래에 발전할 지역을 선점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땅 투기를!
‘투자야.’
-장사치가 다 되셨군.
‘너도 아는 것 있으면 다 내놔.’
-노골적으로 노리면 의심을 살 수 있어.
‘그러니까, 역린을 건드려야지.’
-……못 먹게 하려고?
도시의 발전은 황제의 명이 크게 작용했다. 정신이 나간 황제가 광기를 드러내는 가운데,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땐 자신의 치적을 세우려고 황제가 발악한다고 여겼는데, 그 일대가 전부 마신교가 역점을 둔 지점이었다.
대로를 넓히고, 수로 길을 뚫고.
마신교가 중원 전역을 지배하는 교두보가 되었던 곳들이 토목공사로 엄청난 이득을 보았었다.
‘눈치가 있다면 당장 살 필요는 없잖아.’
-교의 전략을 역으로 이용할 심산이구나.
‘이러면 좀 괜찮냐?’
-……괜찮다.
마왕의 마지못한 타협에 무진은 회심의 미소를 다시 지었다. 그러면서 대막과 북해의 교역로를 틀어서 선점한 장소를 발전시키기로 했다.
‘대륙 곳곳에 별장도 지어야지.’
-잿밥에만 관심이 있으면 망할 거다.
아내와 딸을 위한 휴양지도 사 놓기로 했다. 마신교를 처리한 후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송호문을 중심으로 무림이 개편되었을 때 이득을 챙긴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지금부터 사 놓는 거다.
‘황제를 쳐 죽인 후에 천도라도 할까?’
-미친놈!
‘미친놈은 황제고.’
-넌 잘나가다가도 항상 도가 지나쳐.
관과 무림의 아름다운 화합을 위해서라도, 염산호의 활약이 중요했다. 확실히 황궁에도 내 사람을 심어 놓아야, 계획을 실행하기 용이하다. 염산호라면 공주의 환심을 사기에 적합한 얼굴이었다.
파파파팟, 타타타탓!
타아앙!
무진의 상념은 계속되었다. 오대무문의 수장들이 열심히 각자의 무공을 펼치고 있지만, 상념을 깨기엔 부족했다.
우린 뭘 하는 거지?
전력을 끄집어내고 있지만, 오대무문의 수장들은 허탈했다. 천운권은 집중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면서 대체 뭘 알려 주겠다고 하는 건지.
우릴 언제까지 농락할 심산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자괴감이 첩첩이 쌓이고,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들이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현실에 한숨이 흐른다.
‘마왕아.’
-알아서 좀 하면 안 되냐.
‘아니면 말고.’
-도구로 쓸 거면 양심의 가책도 좀 받아라.
‘마왕 주제에 헛소리를.’
-이놈들도 팔자가 기구하군.
‘그러니까 적선이라도 하라는 거잖아.’
-징그러운 놈.
이렇게 말해도, 마왕은 보기보다 친절했다. 진짜 마왕이 맞나 싶을 때가 있어서 당혹스럽다.
스윽!
방어 위주로 툭툭! 치던 무진의 손속이 바뀌었다. 그럴 때마다 수장들은 헛바람을 삼켜야 했다. 분명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빈틈이 저절로 생겨났다. 아니, 이걸 생겼다고 해야 하나? 원래부터 알고 있는 투로…… 헉!
단천분광검식, 분뢰검혼.
태화십팔도법, 태화진천.
기겁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무공이 확실했다. 그런데 같냐고 물어본다면?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데,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천대상과 설태상의 심정을 유진원, 방세관, 구천홍도 느꼈다. 각자의 무공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기원이 다른 무공이 마치 하나의 무공처럼 연환이 되고, 분리되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적절하다.
작은 힘으로 큰 힘을 이기는 사량발천근의 묘리하고는 다르다. 그저 적재적소, 어떤 식으로 운용을 해야 적합한지를 보여 주었다.
이럴 수가!
같은 배에서 나온 자식도 이렇지는 않을 텐데.
그들은 알아 가고 있었다. 여태 익히고 있는 무공을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을.
왜 이렇게 했을까?
여기선 물러서면 안 되었다.
저렇게 했어야지.
효율성의 극대화가 무엇인지를 체감하고 있었다. 그간 확신했던 독문무공이 낯설어졌고, 익숙해지기를 반복했다.
무공을 처음부터 다시 익히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뒤죽박죽이 되어 혼란을 가져왔다. 자신이 써 왔던 초식이 잘못되었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습관이란 건 이래서 무섭다. 한 번 익숙해진 습관은 아예 배우지 않은 백지장보다 못했다.
그러나 서서히 세월을 이겨 내고 있었다. 배어 있던 습관이 저절로 최적화된 초식으로 변해 갔다.
‘……이런 게 가능해?’
‘인간이 아니다!’
‘괴물이란 표현도 부족하구나!’
‘이런 자를 어떻게 이겨!’
‘어떻게든 함께해야 한다!’
반 시진이 더 흘렀을 때 설태상, 천대상, 유진원, 방세관, 구천홍은 반강제적으로 성장하고 말았다. 이전의 자신들과는 달랐다. 무공이 갑자기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작금의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우리가 틀렸다.
“강제는 아니야, 선택은 당신들 몫이니까.”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이런 짓을 하고선 강제가 아니라니, 여기서 떨어져 나가는 즉시 먼지처럼 사라질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