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4
033 관행(2)
이런저런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무진은 당시 개방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이것들이 하지도 않은 일을 부풀리고, 흔적을 흘리는 바람에 무진은 꽤 고생해야 했다.
가만히 있는데 마신교가 죽자사자 달려들잖아. 이러면 짜증이 나, 안 나? 남은 목숨 걸고 싸우는데, 정작 그렇게 만든 놈들은 뒤에서 정보를 계속 흘렸다.
그리고 그 중심에 독안개가 있었다.
그런 주제에 태연히 나타나서 고기를 처먹고 있으니 배알이 뒤틀리는 건 인지상정이잖아.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대의를 위해서란다. 그래서 더 짜증이 치밀었다.
누굴 호구로 보고 있어.
눈 한 개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겼어야 한다.
무진은 고기만두를 게걸스럽게 처먹고 있는 철호를 보며 물었다.
“멀미는 괜찮냐?”
“멀미 따위에 지지…… 않습니다.”
철호는 습관적으로 나오려는 반말을 움켜쥐고 선회해야 했다. 반말하는 즉시 먹었던 고기만두를 도로 토해낼 수도 있었다. 먹을 때는 거지도 안 건드리지만, 저 인간은 능히 거지의 밥그릇을 차 버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우리 아들, 제법이야.”
“누구 아들인데요.”
“그렇지. 저런 새끼들한테 지면 안 되지. 네 뒤에 내가 있다는 걸 명심해.”
“아무렴요.”
무진은 태진과 황보진운의 대화를 선내에 들어오기 전부터 듣고 있었다. 아들의 현명함에 감개가 무량했다. 우리 아들이 제법 잘 자라 주었다.
‘역시 내 아들이야.’
-내 제자를 물들이지 마라!
‘내가 어때서?’
-딱 봐도 공적 될 상이지!
‘공적은 너지.’
-무림에서 널 죽이고 싶어 하는 놈들이 얼마인지 세어볼까?
‘걔들이 이상한 거야.’
모두가 이상하다고 손가락질할 때 혼자만 멀쩡하다고 하면, 어느 쪽이 옳다고 할까?
그러나 반드시 다수가 옳지는 않다. 그래서 공적이 되는 것이다.
황보진운은 숙부를 보았다.
왜 나서지 않았느냐고 따지지는 않았지만, 눈빛에는 원망이 담겨 있었다. 황보세가의 직계가 무명소졸의 비겁한 합공에 당했다. 숙부가 좀 더 일찍 개입했다면 단번에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었다. 일 대 일만 되었어도 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아.
조카와 단원들.
이어서 딸까지.
황보장성으로서는 해명이 필요했다. 맘 같아서는 토 달지 말고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못할 불합리한 강압은 오래가지 않는 법.
‘여러모로 골치 아프군.’
사실대로 말하자니 예상보다 고수일지 몰라 꼬리를 말았다는 뜻이 될 테고, 전후를 살펴 조카의 잘못으로 몰면 기가 죽어 소룡대회에서 제 실력을 펼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조카의 선전은 반드시 필요했다.
“네 말대로 일 대 일이었다면 당하지 않았겠지. 하나, 네 입으로 분명 합공을 허락하지 않았느냐.”
“그건 그렇지만, 놈들이 실력을 숨겼다고요!”
옳지, 계획대로 나오는구나.
황보장성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럴 때는 도리어 배를 째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이놈, 무림이 만만하더냐! 강호의 어떤 무인이 실력을 드러내며 허술하게 행동을 해! 네가 진정 그리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시인하는 것이냐?”
“……!”
황보진운은 물론 적룡단도 반박하지 못했다. 부정하면 스스로가 무인임을 부정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막말로 무공 내력을 까발리고 싸우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공론화하면 지탄 받을 대상은 황보세가였다. 아마 두고두고 회자되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될 것이다.
“제 식견이 짧았습니다.”
“물론 억울할 것이다. 이 숙부가 네 말을 들어주길 바랐겠지. 하나, 상대는 나와 비교해 부족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아도 그 말이 지닌 의미를 모르진 않으리라 본다.”
“……예?”
모두는 황보장성의 토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누구인가? 황보세가가 자랑하는 권공의 고수이며, 산동십수의 백전권이었다. 초절정의 초입이라고 해도 그를 대적할 자는 많지 않았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 문파의 무인이 절정의 극을 넘어선다면 가벼이 여길 사안이 아니었다. 그와 대치해 세가가 밀린다고 할 순 없어도 굳이 적을 만들 필욘 없었다.
“본가는 약하지 않습니다.”
“네 말대로 무릎을 꿇릴 수는 있었겠지. 그러고 나면 어떤 소문이 나겠느냐? 우리가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힘으로 짓눌렀다고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할 테지. 아닐 것 같으냐?”
“하오나 누가 감히 본가를 입에 담겠습니까.”
“그뿐이 아니다. 소룡대회는 오대세가의 입지를 다지는 자리다. 지저분한 소문이 번지면 네게 이로울 게 없다. 하물며 네 목표는 남궁세가에 있지 않더냐. 너는 장차 큰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작은 일에 연연해하지 말거라.”
숙부의 말씀이 지당했다. 초절정의 고수와 싸운다면 반드시 소문이 날 것이다. 힘으로 무릎을 꿇리면 입바른 자들이 물고 늘어지기 딱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할 테고. 그 두 놈이 짜증 나기는 해도 소룡대회에서 갚아 주면 된다.
스윽!
황보장성은 고개를 돌렸다. 이쯤 했으면 체면을 떨어뜨리지 않고 잘 설득했다.
응?
다들 자리로 돌아갔는데 세령이만 은근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아버지 같지 않다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주둥이가 매끄럽게 순환이 되었냐는 듯 노골적인 표정이다.
“왜 그러느냐?”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내 딸이지만 눈치가 귀신같다. 목적이 분명하나, 아비의 위신을 고려해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걸 봐선 뭘 원하는지 훤히 보였다.
‘돈깨나 깨지겠군.’
하여튼 그 인간과는 엮이지 않는 편이 이로울 듯싶었다. 싸구려 백주 한 모금으로 얼마나 손해를 본 건지 원.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마냥 손해만 봤다.
‘그냥 해 볼 걸 그랬나?’
***
강물 위로 안개가 끼었다. 물기가 공기 중으로 번지며 일대를 뒤덮었지만, 다행히 시야를 완전히 가리진 않았다.
소호는 대륙의 오대호수에 속하는 일망무제, 무변무제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중심으로 갈수록 안개가 짙어지긴 했어도 배를 모는 선장은 노련했다. 평생을 물길에서 산 사람이라 보지 않아도 수로를 놓치지 않았다.
해가 구름에 가려 안개는 좀처럼 걷히지 않았다. 소호의 풍경을 구경하며 술병을 음미하려던 무진의 계획은 어긋났다. 안개의 진득한 습기가 달라붙어 풍류를 즐기기엔 썩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들어가야겠다.’
습해서 자리에 앉아 있기도 불쾌하다. 우중충한 날씨엔 선내에 들어가 낮잠이나 자는 게 이로웠다. 선장의 말을 들으니 내일은 날씨가 화창할 거라고 했다.
“황보세령이에요.”
“그런데?”
다짜고짜 이름을 밝혀봤자 무진의 관심을 끌진 못했다. 여물지도 않은 어린애하고 할 말도 없고. 설령 자칭 대륙제일미가 ‘나 배에서 내려요.’라고 해도 따라 내리지 않는다.
“확실히 특이한 분이시네요.”
“그럴 리가. 나만큼 정상적인 사람이 어디 있다고. 살면서 이상하단 말은 처음 들어.”
내 안의 또 다른 마왕이 지랄하지 말라고 언성을 높이지만 단칼에 무시했다. 되돌아오기 전이라면 또 모를까, 돌아와서는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혹, 의도치 않게 부끄러운 일이 발생한다면 가급적 지워버리는 편이 현명했다. 그래야 나중에 발목을 잡히지 않는다.
“할 말이 없으면 이만 간다.”
“아버지는 당신이 상당한 실력자라고 했어요.”
“틀린 말은 아냐.”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무진은 많이 타협해서 겸손해지기로 했다. 실제로 네 아버지는 내 일초식, 아니 손가락 하나로도 뭉개버릴 수 있다고 사실대로 밝히면, 자식으로서 화가 나기 마련이다. 부녀의 자존심을 지켜 주었다.
“비밀 아니었어요?”
“내가 암중 세력의 쥐새끼도 아니고, 숨길 게 뭐가 있어. 알고 싶으면 얼마든지 물어봐.”
“그러니까 더 수상한데요.”
“황보세가의 정보력이면 오늘 하루만 지나도 알 수 있는 얘기일 텐데, 숨긴다고 될 일은 아니지 않나.”
“그건 그래요.”
황보세령은 오라버니와의 대결과 아버지의 모호한 태도에 호기심이 생겼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치 않았다.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치면 금방 잊힐 흔한 외형이었다.
그런데 대화를 할수록 독특하다.
세령은 어디에서나 주목받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어른이든, 아이든 관심을 받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이자는 여태 알고 지낸 사람들과 사고방식이 다르다.
“혹시 내 아들에게 관심 있는 게냐?”
“예?”
“음. 서로 호감이 있다면 또 모를까, 일방적인 호감은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다.”
쌍방이 아닌 짝사랑만큼 불행한 일도 없다. 상호 간의 교감이 있어야 행복한 삶이다.
말 붙였다가 짝사랑녀가 되어 버린 황보세령이 발끈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설마 나? 안 돼.”
“……절대 아니거든요!”
생각지도 못한 폭격에 황보세령도 조금은 당황했다. 대놓고 자기 얼굴에 금칠하는 인간은 처음 봤다. 그리고 불쾌했다. 자신과 아들을 비교하고 고개를 젓는 느낌이랄까?
내가 맘에 안 찬다고?
그럴 리가.
“부녀가 상념이 기네. 농담인데.”
“그런 농담은 실례예요.”
“호기심만 채우려고 찔러보는 거면 누가 더 실례일까나?”
“역시나 쉽지 않은 분이네요.”
황보세령은 안목이 뛰어났다.
외향, 말투, 행동을 보면 직감적으로 상대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아저씨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그런 문파의 무인인 줄 알았다.
‘대화할수록 어려워.’
속내를 간파하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숨기려고 하느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실없는 농담은 해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무공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여유가 있었다. 아버지가 대등하다고 했지만, 그걸 제 입으로 말하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뻔뻔해.’
황보세가와 송호문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 본인과 문파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 과신하는 걸까? 정체를 숨기기 위한 연막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내심 아무 생각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안 되겠어.’
이 아저씨는 음흉한 데다가 만만치가 않았다. 속을 파보려고 접근했는데, 괜히 이상한 말만 들었다. 세가에서든, 외부에서든 들어보지 못한 막말이었다.
“내 아들을 파보게?”
“그럼 안 되나요?”
“의도가 불순하긴 해도,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뭐.”
“정말 알다가도 모를 분이네요.”
내심을 들킨 황보세령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허를 찔러 빈틈이 생기길 노렸건만, 씨알도 안 먹혔다. 이쯤 되면 관심을 끊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 들자 오기가 생겼다. 숨기는 게 없어도 반드시 까발리겠다는.
-신산묘녀답군.
‘응?’
-대체 아는 게 뭐냐?
‘……모른 척한 거다.’
아차! 이럴 때는 침묵이 낫거늘.
괜히 첨언했네.
-사실은 나찰일봉이다.
‘알거든, 나찰일봉.’
후우, 다행이군.
-신산묘녀 맞다.
이 개마왕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