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5
034 관행(3)
신산묘녀(神算妙女) 황보세령.
차후 무림맹에서 지략을 담당하는 여인으로 성장한다. 빼어난 안목으로 사람을 모으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용병술의 대가. 후일 용무길이 무림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여인이었다.
지금은 호기심 많은 철없는 소녀이나, 저 나이 때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에 관한 관심이 후일 용병술의 바탕이 됐을 테니.
‘나 놀리니까 재밌냐?’
-네 무지를 탓해라. 최소한 기본적인 정보는 알고 있어야지. 이러면 회귀를 하나 안 하나 똑같잖아.
‘어허, 똑같다니!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크다. 알잖아.’
-무식이 자랑은 아니다.
‘어차피 무림맹은 그 나물에 그 밥이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혈풍의 모든 시작은 작은 날갯짓에서 비롯된다. 그 작은 방심이 태풍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어.
천경의 말이 틀리진 않지만, 무진은 여전히 무림맹을 신뢰하진 않았다. 그들의 오만과 오판,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한 추잡한 암계는 다시 생각해도 최악이다. 굳이 그런 자들을 안고 갈 필요가 있냐고.
-오만한 건 너다.
‘나만큼 겸손한 사람이 없어요.’
-인세의 지옥이로구나.
최후의 전투에서 군사로서 활약한 용무길이 송호문의 총관이 되기로 예약이 된 이상, 신산묘녀의 활약은 두드러지지 않을 것이다. 용무길과 비견되는 지략가를 발굴하지 않는 이상.
‘이번 기회에 추잡한 놈들의 싹을 뿌리 뽑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역사가 뒤틀리면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는 수가 있어.
역사대로 흘러가야 중요한 사건들을 되짚어서 해법을 찾기 수월했다. 굳이 역사를 뒤집어 새로운 판에서 싸울 필욘 없었다. 역사의 지식이 아직은 무진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으니까.
막 돌아서려는데.
휘이이잉!
안개가 위화감을 전달했다.
무진이 주변의 변화를 알아채고 얼마쯤 지났을 때 선장이 뱃머리로 나왔다. 선장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소호의 호걸들이 오셨습니다. 관례대로만 하시면 불미스러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최대한 협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선장은 평소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긴장은 유지했다. 저 앞에서 가로막고 선 무리는 소호 일대를 장악한 소호채였다. 수적이라고 하여 만만히 봐선 곤란하다. 그 수가 적지 않은 데다가, 남궁세가가 관리하고 있음에도 소호 일대에서 활개 쳤다.
실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소호채가 남궁세가와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강과 육지라는 지리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남궁세가도 소호의 어딘가에 둥지를 튼 소호채를 토벌하려고 시도는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선박을 운용하는 선주나 선장으로서는 소호채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정해진 운행비를 낸다면 무사히 보내 주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수적은 수적. 저들은 언제든 돌변하여 악행을 저지르고도 남을 놈들이다.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선장으로선 최선을 다해야 했다.
“저희 선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대협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선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황보장성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었다. 관례라고 해도 수적에게 돈을 바치는 행위였다. 오대세가의 한 축인 황보세가로서는 껄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선장으로선 불가피했다.
황보세가는 산동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마찰을 빚어도 산동으로 떠나 버리면 그만이지만, 선장은 오늘도, 내일도 소호를 운행해야 한다.
물론 형식적인 요식행위였다.
명문의 세가나 문파도 강 위에서 수적들과 마찰을 빚는 것은 껄끄러웠다. 사활을 건다면 또 모를까, 저들의 입장을 인정하고 받아 주었다.
대신 명문 문파와 세가는 돈을 바치지 않는다. 수적들도 그 부분에 관해서는 묵인했다. 괜히 날을 세웠다간 수적들도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음 쓰지 말고 하던 대로 하시오.”
“감사합니다, 대협.”
황보장성은 선장을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불합리하지만, 모든 일을 정의롭게 처리할 순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현실이야말로 불합리함투성이고 그것이 또 현실이었다.
선장은 선원을 동원해 약정된 금액을 손님들에게 받았다. 수적이 당도할 때 돈을 내어주기 위해서다.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는 선장의 노련한 지휘였다.
‘잘하네.’
무진은 선장의 빠른 대처를 칭찬했다. 처세술이라고 하기엔 구차하나, 경험은 무시할 수 없었다.
황보세가의 태도도 적절했다. 저들이 겉멋이 들어서 활개를 쳤다면 선장과 선객은 곤란한 지경에 처했을 것이다. 간혹, 협객 놀이에 빠져 사리 분별 못 하는 경우도 있었다.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거면 애초에 나서질 말아야지.’
협객 놀이는 명성을 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이 된 지 오래였다. 대의를 위한 순수한 협의는 사라져버린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렇기에 일은 저질러놓고 사후 조치는 해 주지 않았다. 자신들은 피해를 보지 않는다 이거지.
“자, 여기요.”
태진은 순순히 돈을 내주었다.
무진은 그런 아들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되지 않는 푼돈에 연연해할 필욘 없다. 더욱이 모두가 합의된 관행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했다.
-네가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 않나. 회귀하더니 상상외로 뻔뻔해졌어. 나 혼자 돌아오지 않은 걸 점점 후회되게 만드는구나.
‘낄 데 안 낄 데 구분 좀 하자. 마왕아!’
여하튼 내 아들이지만 사태 파악을 매우 잘했다. 그럼, 그래야지. 아들은 아직 절대경에 이르지 못했다. 자중하며 실력을 쌓아 나가야 할 때다.
-그 말은 꼭 절대경에 들면 개판 치라는…….
‘자꾸 초 치고 있어! 알아서 들어.’
딱히 부정하진 않았다.
개판을 치고 싶으면 최소한 절대경에 들어야 한다. 왜냐고? 잘 도망칠 수 있으니까. 절대경의 고수는 잡기 어렵다. 그것도 굉장히! 공적이 되어 천라지망에 빠져도 작정하고 도망치면 약점을 치고 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절대경의 고수가 무서운 것이다. 도망치고 나선 독기 잔뜩 품고 복수하니까.
공적으로 찍힌 자를 반드시 죽이려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도망치면 두고두고 우환이 될 테니, 당연히 필사적일 수밖에.
“수적 따위에게 돈을 바칠 바…… 쿠웩!”
무진은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철호의 멱살을 누가 들을세라 잡아챘다. 자기보다 세 살이나 어린 태진이도 사태 파악하고 돈을 내주는데, 협객인 척 오만을 떨어!
절대경이면 또 몰라.
진상오괴한테도 쩔쩔매다 죽을 뻔한 놈이 잘도 수적들을 상대하겠다. 그리고 수적들은 정공법을 쓰지도 않는다. 배 밑창에 구멍이 나면 그땐 이 넓은 강을 헤엄쳐서 가야 한다. 자신이야 간단한 등평도수가 있다 해도 손님들은 어쩔 겨. 지가 들고 나를 거야, 뭐야.
잠깐, 재수 없으면 내가 해야 하잖아.
이 새끼가!
멱살 잡힌 철호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잘 안 들린다.”
“……왜?”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다들 병신이라서 돈을 내겠어? 생각 좀 하고 살자. 아니면 머리는 놔두고 가든가.”
목이 잡힌 철호의 발버둥은 무의미했다. 무진은 철호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선원에게 주었다.
“……한 냥인데요?”
“제 것도 포함입니다. 하하하.”
수적이 멀리 있지 않았다. 곧 배를 댈 것이다. 선원은 깨달았다. 그렇다고 무진을 탓하진 않았다. 철호가 반발했으면 곤란했을 테니.
“앞으로 눈치 좀 키우고 살아. 어쭈, 대답 안 해!”
“……목을!”
아!
무진은 목을 놔주었다.
오랜만에 바동거렸더니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는 철호였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철호에게 위대한 온정과 가르침을 동시에 내렸다.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배우지 못할 귀한 가르침일 것이다.
“돈 돌려주십시오!”
“한 냥 없다고 죽지 않아.”
“오늘내일하시는 사부는 한 냥을 벌기 위해서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평생 어렵게 모은 전 재산을 제게 주신 겁니다. 저 하나만을 바라보고!”
“……쩝.”
뭘 그렇게까지 주저리주저리 떠드냐.
무진은 돌려줄까 고민하다가 어제부터 먹은 만두를 상기했다. 공짜로 식사를 해결했으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하마터면 공돈이 나갈 뻔했다.
-그걸 아끼냐!
‘아껴야 잘 살지.’
저 뒤에서 황보세령이 재밌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본인 딴에는 흥미로운 상황인가 보다. 순간 광대가 된 기분이라, 돈을 받아야 하나 재차 고민이 되었다.
두둥!
안개를 뚫어내고 수적의 선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박은 총 세 대였고, 일반 선박을 군선으로 개조한 형태였다. 대놓고 군선으로 제조했다가는 관에서 가만있지 않을 걸 염두에 두었다고 해야 하나? 약탈이나 일삼는 무식한 수적 놈들이 제법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걸리면 뒈질 텐데.’
적당히 했다고 봐줄 수는 없잖아.
세 척의 배 중 한 척이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나머지 두 척은 거리를 두어 간격을 유지했다. 관행처럼 행하지만, 제법 틀이 갖추어져 있었다. 수적질을 하면서 얻은 경험을 잘 살리고 있는 것이리라.
‘이거 봐라.’
수적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진 않았지만, 범상치 않은 놈이 섞여 있었다. 그것도 여럿이 몰려 있는 무리 속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 알 바 아니지.’
정의감을 불태우면 인생이 피곤해진다. 적당히 봐도 못 본 척, 중도를 지켜야 오래 산다.
무진은 돌아가는 사태를 아들과 함께 관망했다. 위협적이라고 해봤자 수적에 불과하다. 천하의 전왕이 수적 따위에게 관심을 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투욱!
배로 갈고리가 넘어왔다. 예전부터 그리해 왔는지 선박의 뱃머리에 흔적이 자욱하다.
수적들은 갈고리를 당기며 배를 붙였다.
쿠웅!
거한의 사내가 넘어왔다. 순간적으로 배가 흔들렸다. 얼기설기 정리되지 않은 산발에 덥수룩한 수염, 전형적인 수적의 외형이었다.
‘배짱 좋은데.’
주제를 모르거나.
조심성이 많은 자였다면 수하를 먼저 보내 배를 살피고 난 후에 넘어왔을 것이다. 아니면 애초에 수하만 보냈거나. 매사를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사태를 안일하게 여기는 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딱 봐도 자신감이 지나쳐 보였다. 얼굴에 거만함이 잔뜩 묻어 나왔다. 내가 이 소호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이 심히 하늘을 찔렀다.
무진은 이놈이 왠지 모르게 사고를 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니면 뭐, 다행이지만. 호기로운 놈일수록 판단력이 흐렸다.
도살부(屠殺斧) 막기.
소호채를 이루는 십팔채의 총채주. 수틀리면 가차 없이 죽이는 잔혹한 도살자로 흉명(凶名)이 자자하다.
그러나 단순히 수적으로만 치부해선 곤란했다.
그가 펼치는 광혈부(狂血斧)는 이백 년 전 살성으로 불린 잔악혈부(殘惡血斧) 나후성의 성명절기다. 도끼 하나로 일세를 풍미한 혈성으로 평가받은 놈이다.
막기의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가볍게 여겼다가 물고기 밥이 된 무인이 수두룩했다.
“막기 대협을 뵙습니다.”
“그렇지, 대협이지. 클클클! 나 아니었으면 너희들이 안전하게 물길을 갈 수 있었겠어.”
자부심이 지나쳐서 머리가 돌아버린 놈이거나 상당히 뻔뻔한 놈이었다.
‘내 살다가 저런 뻔뻔한 놈은 처음 보네.’
-너는 말하고서 미안하지도 않냐.
‘내가 어디가 어때서?’
-너에 비하면 저놈은 겸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