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61
360 위계질서(1)
후우우!
마지막 기의 용트림, 휘몰아쳤던 기세를 내부로 갈무리한 우경은 눈을 떴다. 정광이 번뜩이는 눈빛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고수의 품격과 기도를 발산했다.
“내가 벽을 넘다니!”
부부 사이에도 말 못 할 고민이 있듯. 새벽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청승을 떨었더니 느닷없는 깨달음이 왔다.
시초는 이렇다. 내가 도대체 뭘 하는 거지? 정체성에 의문을 품었었다. 문파는 나날이 규모와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반면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문주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했다. 아들이 떠먹여 주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었다.
늙어서 얼마나 생색을 낼지.
내 아들이지만 끔찍했다.
소문파였을 땐 숨죽이고 사는 거야 버릇처럼 쉬웠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다. 대문파와 비교하기엔 부족하긴 하나, 이젠 떳떳하게 청양을 대표하는 문파라 내세울 수 있었다.
아들이 바뀌고, 문파가 바뀌었음에도 스스로만 과거에 있다면 꼰대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는 법이다.
아직은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아들의 폭압에 못 이겨 마지못해 나아간다면 과연 본인에게 떳떳할 수 있을까?
스스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자 미처 깨닫지 못한 영감을 받았다. 그 즉시 우경은 일주일간 폐관에 들어갔고, 지금 이렇게 벽을 넘었다.
내공은 아들이 채워 주어 넉넉했다. 부족해서 여태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면 도둑놈 심보였다. 먹은 영약을 상기하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많이 먹긴 했구나.”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약은커녕, 가문의 무공을 완성하는 데만 급급했었다. 아들이 맛이 더 가고…… 크흠.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무공을 돌아볼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아들이 달라졌을 때만 해도, 작심삼일도 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들의 무공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에 절대고수가 되다니, 상식적이지가 않았다. 단순히 영약을 때려 박는다고 해서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뼈를 깎는 노력을 했을……걸.
장담은 못 해도, 내 아들이었다.
근래에 들어 아들은 가문의 중대사를 넘어 강호의 안위를 거론했었다. 솔직히 청양의 소문파에 불과한 송호문으로선 감당하기 벅찬 일이었다.
“그래, 해 보마.”
못 미더워하는 아들에게 아비로서 보여주어야 할 때다. 다행히 원하던 성취에 한발 다가섰다. 작금의 감각,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초절정에 오를 때와는 더더욱.
화경이 왜 절대의 범주에 들어가는지를 체감했다. 넘고 안 넘고의 간극이 천양지차였다.
“이 녀석은 얼마나 강한 거야?”
신주이십일강도 패고 다니는 걸 보면, 절대경은 확실할 테고.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전인미답의 경지에 다다랐을지도.
가부좌를 풀고 일어선 우경은 폐관수련장의 문을 열었다.
굳게 닫힌 문이 열리며 빛이 포화를 이룬다. 시야를 가리는 햇살을 뒤로하고.
“상공,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아버님, 대성을 경하드려요.”
“할아버지, 최고예요!”
아내, 며느리, 손자, 손녀까지 폐관수련장에서 나온 자신을 기다린 것이다. 벽을 넘은 자신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가족의 정을 느꼈다. 확실히 무진이 녀석이 없으니 평범한 가족처럼 보였다.
‘이게 가족이지.’
그 녀석이 정상이 아닌 거다.
우경은 하루는 쉴 법도 했지만, 아들의 성화를 알기에 대소사를 차분히 처리했다. 피곤하다거나 곤란하진 않았다. 가문의 대소사는 부총관이 알아서 잘 처리하고, 중요한 목록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두었다.
폐관수련을 하는 동안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끝내고 나자, 무진의 수하들이 집무실을 찾았다.
“어쩐 일들인가?”
“문파를 위해 분골쇄신을 마다하지 않을 성실한 일꾼을 한 명 데려왔습니다.”
“호오, 그런 인재가 있다면 얼마든지 환영하네. 자네들처럼.”
“문주님의 은혜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나릉은 기름칠 후에 방몽을 소개했다.
방몽의 무공과 여러 잡다한 능력을 차분히 풀었다. 그간 못된 짓을 하며 살다가 개과천선했다고 포장했다. 도중에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사소한 다툼으로 넘어갔다.
“환영마객이라고?”
“그렇습니다. 허락만 해 주신다면 송호문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과거야 어찌 됐든 지금이 중요하지, 환영하네.”
“이 못난 사람을 이리 환대해 주시다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방몽은 급히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표정 관리는 필수, 환한 미소를 띠며 감읍, 또 감읍해야 했다.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살아왔나?’
대환장할 현실에 방몽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지난 보름을 상기하면 저 악귀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은 위험했다. 다시 돌이켜 봐도 눈물겨운 생존기였다.
‘악마 같은 놈들!’
나릉과 강철은 방몽이 도망치도록 방치한 후, 달아날 때마다 사로잡아 두들겨 팼다. 거기까지는 방몽도 버텨냈다. 둘이서 자신을 잡기 위해서 함정을 판 이상, 자존심은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일 대 일에서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나릉은 둘째 치고, 강철에게도 패한 충격이 컸다.
오대야객의 일인자라는 자부심이 산산이 부서졌다. 더는 당할 수 없어 도망쳤지만, 그것도 불가능했다. 이놈들은 자신의 몸에 독을 심었다. 기절해 있는 동안 꾸준히 해독제를 먹여서 몰랐을 뿐이었다. 단기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그 고통은 상상을 불허했다.
이놈들이 왜 이러나 싶었다.
방몽으로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뭘 노리는 건지 몰랐는데,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이제부터 송호문의 식객이란다. 송호문이 잘나가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오대야객이 식객으로 들어가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마주한 송호문의 문주는.
‘보통이 아니다.’
은연중에 풍기는 기도에 방몽은 놀람을 애써 감추어야 했다. 대문파의 문주다운 분위기였다. 이 정도면 구파의 장로급은 넘어서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런 자가 불과 얼마 전까지 소문파의 문주였다니,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송호문은 신검마협만이 아니었어.’
강호의 신성이 날아오르도록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것이 분명했다. 송호문의 문주를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쩔 수 없다지만, 이런 사람을 윗사람으로 모실 수 있어 그나마 안심했다.
“저흰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공사다망하실 텐데, 바쁘신 시간을 빼앗아 죄송합니다.”
“괜찮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주게.”
나릉은 동생들을 데리고 문주의 집무실을 나와 장로원으로 향했다. 하나하나 소개할 필요가 있었다. 문파의 규모와 세력이 커지면서 위계질서가 매우 중요했다. 아랫사람으로서 인사는 당연한 예법이었다.
장로들을 본 후, 곽 호법을 찾았다. 순서대로라면 소문주와 검후를 찾아야 하나, 현재 집무 수행 중이라 자리를 비웠다.
“허허, 이 사람. 한 수만 물리세.”
“누가 보면 바둑 두는 줄 알겠네.”
“앞선 사람으로서 양보는 미덕이 아니겠나.”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야.”
곽 호법은 장 사부와 바둑……이 아니라 기석치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평범한 기석치기와는 다르다. 내공을 이용하여 방진을 세웠다. 겹겹이 둘러싸인 방어를 뚫고, 기석을 쳐 내야 했다.
당연히 고강한 내력을 가진 곽 호법이 여러모로 유리한 편이었다. 같은 내력을 사용해도 내기의 운용에서 장 사부는 곽 호법에게 밀렸다.
“천주신창 곽 대협을 뵙습니다.”
“범상치 않은 다리를 지녔군. 그래, 뉘신가?”
“방몽이라고 합니다. 일선에선 환영마객으로 통합니다.”
“호오, 동료였군. 잘해 보게.”
방몽은 천주신창을 예전에 멀찍이서 본 적이 있었다. 그때와 지금의 모습은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날이 잔뜩 서 있었던 당시와 비교하면 옆집 할아버지처럼 순해 보였다. 그러나 은연중에 풍기는 느낌은 그때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천주신창도 그렇고, 이 사람은 뭐야?’
장 사부를 본 방몽은 본 적도 없는 무당파의 개파조사가 떠올랐다. 딱 그 모습이었다. 이름이 헷갈려서 사이빈 줄 알았는데, 풍기는 기도가 선풍도골의 선인이었다. 어디서 용한 도장을 데리고 온 듯했다.
‘용담호혈이었어!’
방몽은 송호문의 저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빈객도 아니고 식객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번이 가장 중요해, 잘 보이지 않으면 곤란할 거야.”
“……무슨 말씀입니까, 형님.”
“가보면 알아.”
“저도 눈치가 있습니다. 송호문이 대단한 건 인정합니다. 그래도 식객은.”
마지막 자존심이거늘.
방몽은 상대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지금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뒤를 돌아봤다. 거리를 둔 채 경건하게 예의를 갖추는 나릉과 강철이 있었다.
다시 돌아봤다.
보슬보슬!
털과 살에 묻혀 본체가 보이지 않는 고양이가 고관대작처럼 어렵게 앉아 매섭게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막냅니다. 소 형님!”
“……?”
이런 미친 새끼들이!
***
“저게 공주라고?”
“그렇습니다. 한 떨기 수줍은 꽃처럼 청초하고 어여쁘시지 않습니까!”
“저런 게?”
“그리 삿대질하시면 안 됩니다. 공주님은 남만의 우상입니다!”
우상이 다 뒤졌나?
철호를 보고 잘생겼다고 할 때부터 정신 나간 연놈들인 건 알고 있었지만, 남만인의 시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다. 이러니 사사건건 대륙과 마찰을 빚지. 서로 문화가 맞지 않는 게 아니라, 눈이 안 맞는 거다.
‘너는 어때?’
-얼굴은 괜찮다.
‘몸은?’
-남색은 취미 없다.
추적을 피해 도망친 저걸 구했더니 야수궁의 공주란다. 야수궁이 남만에선 왕궁이나 다름이 없으니, 공주라고 불려도 이상하진 않겠지만.
얼굴과 몸이 따로 노는 여인이 공주라고 한다면?
사실 여인인지 사내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다. 보통의 사내보다 머리 하나는 크고, 골격도 최소 세 배는 두껍다. 그러면 얼굴도 몸과 맞추어서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얼굴은 천생 청순가련이었다.
자연적인 균형을 무시한 어마어마한 괴리감에 무진조차 고개를 저었다. 원래 사람의 외모로 성격을 판단하진 않는 편이지만, 선입견이 들 수밖에.
남만엔 각종 신비한 식물, 독물, 동물이 많다고 하더니, 사람도 신비했다.
쿠웩!
무진은 무의식적으로 이랑의 목을 또 잡고 말았다. 방심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바동거리게 된 이랑이 의문을 담았다.
“……왜요?”
“아니다.”
이 새끼가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니까, 괜히 기분이 더러웠다. 차라리 쌍욕을 듣는 쪽이 상선약수의 지름길이었다.
진짜로 욕하면 뒈질 때까지 처맞겠지만.
“눈 평소처럼 뜨고 다녀. 괜히 또랑또랑하게 뜨다가 목 잡히지 말고.”
“……예!”
문화적 충격으로 괜한 시간을 소비하고 말았다. 여하튼 우중혈투는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다.
싸우더라도 화창하고 맑은 날에 피를 봐야 정신 건강에 이롭다. 가뜩이나 혈전을 치렀는데, 날까지 덥고 습해 봐라. 얼마나 짜증이 나는지. 전장을 겪어 본 자들만이 아는 고충이었다.
“철호야, 굳이 그렇게까지 정성 들여 간호할 필욘 없다.”
“독이 완전히 해독된 게 아니잖아요.”
“독 조금 남아도 안 죽어. 저게 죽겠냐?”
“사람한테 저거라니요. 그건 사부께서 실수하신 겁니다.”
……안 되는데.
철호의 독기가 빠지고 있었다. 적아를 막론하고 물불 안 가리는 철왕의 독기가 그리웠다. 아무래도 남만은 제자에게 이롭지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남만을 정리하고 대륙으로 넘어가야 했다.
흠.
무진은 공주의 규격을 자세히 살폈다. 확실히 뼈대가 일반적이지가 않았다.
‘궁주가 안 바뀐 이율 알겠다.’
-동감이다.
혈통의 힘을 느꼈다. 여자로 태어나서 저 정도면, 사내였으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육체의 근간을 태생부터 얻었으니 외공에 천부적인 건 당연했다.
‘어때, 내 예측이?’
-소 뒷걸음질에 쥐를 잡는구나.
‘그것도 여러 번이면 실력 아니냐.’
-한 것도 없이 운만 좋군.
신이 아니고서야, 변수를 전부 고려하진 않았다. 정 안 되면 야수궁을 몰래 찾아가서 쑥대밭으로 만들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간밤에 쳐들어가 쳐 죽이면 누가 그랬는지 모를 테고.
남은 정리는 남만의 몫으로 남겨 두면 된다. 외인이 남만 내부의 일까지 관여하면 내정간섭이었다.
안타깝게도 야수궁엔 사연이 있었다. 없으면 간단할 수도 있으나, 내부적인 문제가 산적했다.
그 증거가 바로 저것이다.
끄응!
목소리는 또 미성이네.
꿈에 나올까, 아내를 몇 번이나 심상에 그렸다. 잠 안 올 때 아내를 떠올리면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이러니 좀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