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65
364 위장계(3)
야수경합이 얼마 남지 않았다. 궁주가 병이 들고 나서 오대부족이 야수경합의 일정을 서두른 결과다.
하나, 순조롭게 진행이 되던 가운데, 변수의 등장은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더군다나 변수를 확인하기엔 시간이 촉박해진 상황이다.
“뭔지 알겠나?”
“독입니다. 그것도 당장은 활력을 띠도록 선천진기를 끌어 올리는 활생독입니다.”
“궁주가 의식을 간간이 회복한 것도 그런 연유였군.”
“잔꾀를 부린 모양인데, 놈의 목적을 안 이상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궁주의 회복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심혈을 기울인 독이고, 완전히 퍼졌을 때 사술을 통해 제압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해독제를 구해 왔다. 가능성은 희박하나, 성분을 확인해야 했다. 오래전에 심어 놓은 세작을 통해 해독제를 얻어 왔다.
만약 진짜로 해독제였다면 손을 써야 했다. 다행히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선의를 보였다고 하기엔 이상하긴 했다.
“경합에서 놈의 편에 선 놈들이 있나?”
“분주하게 선을 대곤 있지만, 현재로선 없습니다.”
겉으로는 패도를 추구하지만, 군무극은 잇속을 챙겼다. 궁 안의 장로, 호법, 단주, 대주에게 선을 대고, 포섭을 시도했다.
손을 들어 주는 놈들이 몇몇 있기는 하나, 쭉정이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대부족이었다. 그들 중 하나라도 손을 잡아야 하지만, 군무극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경합에서 보여 줄 필요가 있겠지.”
“천군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중원에서의 연이은 실패를 만회해야 한다. 현천군과 역천군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확실한 힘의 우위를 보여 남만의 지배자로서 거듭나야 했다.
‘격의 차이를 보여주지.’
***
무진은 그간 찾지 않았던 궁주를 찾았다. 같은 혈통으로 소문이 난 이상, 병문안을 여태 하지 않은 건 문제가 있어 보였다. 다분히 주변을 의식하고 행하는 모습이었다.
대랑궁.
남만의 성향이 잔뜩 묻어 있는 필체가 떡하니 자리했다. 순수하게 강함을 숭상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이 그렇듯, 순수함만으론 살아남지 못했다. 제 뜻을 굽히지 않고 온전히 관철하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무진이 들어서자 공주가 마중을 나왔다. 극진한 예를 보여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구명지은으로 맺어진 신뢰를 강조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공주로서.
“산군을 뵙습니다.”
“그새 혈색이 좋아졌구나. 하면 궁주께선 어떠시더냐?”
“전보다는 좋아졌어요.”
“다행이군. 한데, 넌 뭐지?”
무진은 홍야를 향해 마땅치 않은 시선을 보냈다. 한낱 시녀 주제에 자신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너 따위가 감히 대면할 수 없다는 권위주의적인 위압감을 발산했다.
공주가 나서며 홍야를 옹호해 주었다.
“산군, 홍야는 제가 의지하고 총애하는 시녀예요. 그러니 심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너는 본궁의 소궁주다. 천한 시녀 따위에 의지하다니, 공주로서 본분을 잊지 말거라.”
“산군의 말씀 새겨듣겠어요.”
“됐으니 넌 그만 나가 보거라.”
무진은 홍야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내 눈에 밟히지 말라는 경고를 했다. 만일 경고를 어기고, 주제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응분의 대가를 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홍야는 제가 잘 단속할게요. 그만 노여움을 푸세요.”
“네 얼굴을 봐서 이번만은 참는 거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홍야는 산군의 말씀대로 하도록 해.”
“예, 소궁주.”
위협에 안색이 창백해진 홍야는 조심스럽게 돌아섰다. 한데, 그녀는 겁을 먹기는커녕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를 떼 놓으려고? 수가 뻔히 보이네.’
궁주를 처리하는 데 방해가 된다 여긴 것이다. 홍야는 내심 헛웃음이 나왔다. 본인 딴에는 대단한 사람인 줄 알겠지만, 명백한 착각에 불과했다.
‘곧,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걸 알게 해주지. 호호호.’
이로써 일말의 의심조차 할 필요가 없어졌다. 겉으로는 혈통을 위하는 척하지만, 본인의 욕심을 위해 조카를 이용하는 위선자에 불과했다.
홍야가 사라지는 걸 확인한 무진은 무심했던 표정을 풀고, 평소대로 돌아왔다. 오히려 소소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머니처럼 여겼던 사람이 배신했으니, 충격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표정 관리 잘해야 할 거야.”
“알아요.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홍야는 용서할 수 없어요. 반드시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어요!”
“분노하는 건 좋지만, 냉철하게 행동해야 해. 적아를 구분하기 어려울 땐 더더욱.”
“명심할게요.”
만약을 대비해서 철호, 서문호, 육칠을 소소의 주변에 대기시켰다. 어떤 식으로든 궁주의 안위는 중요했다. 나중에 간판으로 쓰게 될 테니 더더욱.
“내가 미남을 몰라봤어.”
“미남이라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사부님.”
“아니긴, 시녀들 사이에서 난리도 아니던데.”
“그냥 하는 소립니다.”
“됐고, 정신 똑바로 차려. 붕 뜬 상태로는 아무것도 못 해.”
“항상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무진은 제자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에 한눈을 팔아 본분을 잊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동안 제자를 너무 띄엄띄엄 봤다는 걸 인정했다. 이 녀석도 나이가 들더니 제 얼굴값을 하고 있었다.
무진은 궁주가 누워 있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깊은 수면에 취한 사람처럼 고요했다.
“깬 거 아니까, 그만 눈 뜨시죠.”
“잠도 편히 못 자게 하는군.”
“더 자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크흠, 깼으니 그만하게.”
만수제(萬獸帝) 군위천은 상체를 일으켜 세운 후 침대에 기댔다. 참으로 오랜만에 자기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일 년이 다 되어 가도록 그는 의식은 있었지만, 몸을 통제하지 못했었다.
“평소 인덕이 없는 편이더군요. 그러니까 저처럼 사람답게 사셨어야지요.”
“그게 방금 일어난 사람에게 할 소린가!”
“원래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은 법입니다.”
“그냥 쓰기만 한 것 같은데.”
옆에서 듣고 있던 소소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청순가련에 눈이 커서 그런지 놀란 표정을 잘 드러냈다.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만수의 제왕이신 아버지 앞에서 저딴 말을 대놓고 할 만큼 간 큰 인간은 본 적이 없었다.
허!
육칠, 철호, 서문호도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지금 누구보고 인성 타령 하는 건지. 본인부터 삶을 착하게 살아야 했다. 저 말을 다른 사람은 해도, 무진은 해선 안 되었다.
‘정말 급이 다르군요.’
‘나도 제법 뻔뻔해졌는데! 졌다, 졌어!’
‘너무 위험한 거 아니냐고요!’
육칠, 철호, 서문호는 인정해야 했다. 무진의 뻔뻔함이 금강불괴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저리 말하다니, 궤설이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아무나 저러한 경지에 오르지는 못하리라.
“내부에 동조자가 많아 골라내기도 바쁩니다. 그냥 새로 차리는 편이 낫겠습니다.”
“자기 집 아니라고 막말을 서슴없이 하는군.”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그렇다고 제 탓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내 탓일세. 그러니 중환자의 아픈 부위는 그만 쑤시게.”
막 일어났더니 혓바닥에 비수를 단 녀석이 심장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중독된 자신을 구해 준 녀석만 아니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오대부족도 세력이 있는데 궁주라는 분이 왜 이렇게 사는 겁니까. 따로 세력도 만들고, 힘도 키우고, 돈도 빼돌리고 그래야죠.”
“……?”
너무 당당하게 말해서 군위천은 지금 환청이 들리나 싶었다. 원래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해도, 대놓고 하지 않는 게 대화의 암묵적인 예의였다. 대륙의 세태가 요즘은 노골적으로 바뀌었나, 그런 의문마저 들었다.
“내가 잘못했단 뜻인가?”
“혼자 가면 남은 사람은 죽으란 건데, 잘못이 아니라는 겁니까?”
“……그렇군.”
“남만의 주인이라면 응당 남은 사람을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조치는 해 놨어야 합니다. 무책임도 죄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맞네.”
군위천은 생소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었다. 언제 자신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난타를 당했던 적이 있었던가? 남만에선 누구도 함부로 입방아를 찧지 못했었다.
그런데 반박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나 원색적이고 직설적이기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자존심마저 굽히지는 않았다. 중독만 되지 않았더라면 오대부족이 기어오르지도 못했다.
“내 몸이 정상이었다면 오대부족 따윈 아무것도 아니네!”
“오대부족에게 애를 먹었으면 오지도 않았습니다. 아직도 사태의 본질을 모르는군요. 하긴 누워만 있으니 세상 돌아가는 걸 알 턱이 있나.”
“내가 대체 뭘 모른다는 건가?”
“작금의 혼란은 오대부족이 만든 게 아닙니다.”
무진은 암중 세력에 대해 꺼내 놓았다. 물론, 그들의 정체까지 확실하게 언급하진 않았다. 모르는 사람에게 일일이 설명해 봤자 알겠나. 대충 야수궁이 굉장히 위험한 상태라는 것만 알리면 되었다.
“사마외도가 궁 안에 있었다고?”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야수궁은 마신교의 도구로 전락할 겁니다.”
“본궁은 그 정도로 약하지 않아!”
“야수궁이 북해나 사막보다 강하다고 보진 않습니다. 그들이 멍청해서 당했다고 여긴다면 더는 볼 필요가 없겠지요.”
신랄한 비판에 군위천은 분노했지만, 곧 바람이 빠진 듯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암류가 자신을 해할 때까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 말은 자신의 딸도 언제든 위험할 수 있었다는 뜻인데. 딸조차 지키지 못한 아비가 남만을 책임지겠다고 호언장담을 한들,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았다.
“자네의 말에 따르지.”
“이제야 좀 정신을 차렸군요. 실망할 뻔했습니다.”
“나중에 한 번 붙을 수 있을까?”
“얼마든지요.”
육칠, 철호, 서문호는 안타까웠다. 이제 막 회복한 궁주는 정말로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있었다. 돌아가는 세태를 안다면 저딴 말은 함부로 하지 않을 텐데.
잠깐 참으면 되었다. 자존심을 부리면 무진은 가만두지 않는다.
“경합은 예정대로 진행이 될 겁니다.”
“자신은 있나?”
“잡것들하고 오래 놀 생각 없습니다.”
“……그렇군.”
은근히 무시하는 줄 알았더니, 대놓고 무시하고 있었다. 순간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은연중 오대부족의 활약을 기대하게 했다.
“마수림에 대해서 얼마나 아나?”
“아는 만큼 압니다.”
“아직 모르는군.”
“상기해야 할 내용이 있나 보군요.”
마수림에 대해 군위천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마수림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오대부족을 힘으로 꺾었으니 말이다.
“마수림에서도 가지 말아야 할 금역이 몇 군데 있네.”
“듣기로는 아예 들어가지 말라던데요.”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한 곳은 절대 들어가지 말아야 하네.”
“뭔가 있나 보군요.”
“전설로 전해지고 있지. 아마 오대부족 놈들도 거긴 안 갈 걸세.”
군위천은 금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마수림에서 각별히 유의해야 할 점을 알려 주었다. 자신이 직접 이 사태를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당장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어설프게 처리하면 나중에 또다시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하다.
“알아들었나?”
“적당히 들었습니다.”
아주 구미가 당기는 내용이었다. 그중에서도 호기심을 자극해 주었다.
-입맛 다시지 마라.
‘나 그렇게 함부로 나서는 사람 아니다.’
궁주와의 대화는 이쯤에서 마무리했다. 마수림에 관한 내용을 제외하면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이었다.
군위천은 무진이 아닌 대상에 날 선 태도를 보였다.
“그보다 자네.”
“저요?”
느닷없이 궁주에게 지목을 당한 철호는 어리둥절했다. 노려보는 눈빛에서 적의가 물씬 풍겼다.
“사내는 얼굴이 다가 아니다.”
“예?”
“소소에겐 통했을지 몰라도, 나에겐 어림도 없어!”
“무슨!”
군위천은 철호를 바라보는 딸의 눈빛만 봐도 소외감을 느꼈다. 간병을 하느라 고생했던 딸이 이젠 아비를 바라보지 않았다. 비통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이게 다 저 허우대만 멀쩡한 놈이 나타나고부터다.
“아니에요, 남 공자. 아버지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정신이 없으세요.”
“……뭐?”
소소의 반박에 군위천은 뒷목을 잡고 다시 누웠다. 별안간 철호는 부녀 사이를 깨 버린 불한당이 되어버렸다.
‘후후후.’
-심보 좀 곱게 써라.
건수를 찾은 무진의 표정에선 악의가 물씬 풍겼다. 육칠과 서문호는 자신들의 팔자가 별로 좋을 것 같지 않아 불안했다.
‘꼬락서니 봐라.’
‘미친 세상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