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68
367 친구와 함께(1)
운무로 중첩된 흐릿한 공간 속, 바람에 흔들리듯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형태를 갖추며 운신을 비쳤다.
씨익!
만족스러운 구도에 무진의 입꼬리는 환한 호선을 그렸다. 생각보다 재밌는 장면을 완성해서 그런가, 나름 뿌듯했다.
“같잖기는, 많이 놀랐으면서.”
“북수림의 마물인가?”
“호오, 제법인데.”
“이딴 수작으로 궁주가 될 수 있을 것 같은가.”
“너희도 부렸으면서, 나는 부리면 안 되냐?”
“제법 변죽을 울리는군. 그것으로 네 운명은 결정되었다.”
마물을 이용한 전술, 용천군에겐 분명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마물만으로 작금의 상황을 타개하려고 했다면 명백한 패착이었다. 감히 그따위 어쭙잖은 짓으로 구도를 흔들려고 했다니,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해주어야 했다.
“저런, 잘 막네. 병신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잔재주는 더는 통하지 않는다.”
용천군에겐 여유가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은 물론, 준비한 수를 전부 풀지도 않았다. 이뿐인가, 비록 도구에 불과하나 오대부족도 마물을 막아내고 있었다. 방진과 영통술을 펼쳐 마물의 접근을 원천 차단했다.
오대부족의 뜻밖의 활약에도 무진은 시큰둥했다. 애초에 저들이 활약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잡것들이 뛰어나 봤자 잡것들이지.
“너만 죽이면 끝나는 일인데, 대단한 수가 필요하나.”
“네놈은 천군께서 상대할 가치도 없다.”
용천군의 주변을 지키는 자들이 두건을 벗으며 정체를 드러냈다. 체격 자체는 남만인들답지 않게 크진 않았다. 평균적인 체격인데, 음침한 기운이 감돌았다. 주변을 녹여 내는 진득한 독기가 풍겼다.
“오독궁주냐?”
“제법 안목은 있구나.”
오독궁의 궁주 독마 갈세혁. 궁주의 좌우로 오독궁의 장로인 독혈쌍마 좌효와 좌경이 자리했다.
“저건 독강신가?”
“흠,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군.”
초점이 잡히지 않은 검은 동공, 실혼인에 가까운 두 마리. 오독궁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독강시다. 일반 강시와 달리 독강시는 그 자체로 대량 살상 병기로, 한 기만으로도 대문파를 모조리 다 녹여 낼 수 있었다.
일기대결에서의 독강시도 강력하지만, 대인 전쟁에서의 독강시는 최강의 병기였다. 한 기로 수백, 수천을 죽일 수 있으니 굉장히 효율적이다.
한데, 한 기도 아니고 두 기나 있었다. 오독궁의 전력이 투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 저 한 기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인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손쉽게 만들 수 있었으면, 개나 소나 다 만들었지.
독강시와 함께하니 자신감도 대단했다. 독마가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후후, 이제 어쩔 셈이더냐?”
“오호, 다 이긴 것처럼 말하네. 한데, 이걸 어쩌지. 써먹지를 못하게 됐는데.”
“허튼수작이 통할 성싶은가.”
“잠깐만, 친구가 올 때가 됐거든.”
거리를 조절하기는 했는데, 도중에 길이 꼬였을 수도 있다. 그 시간까지 계산했을 때, 지금이었다.
“개수작을 들어 주기도 지겹구나.”
“온다니까.”
“더는 살려 둘…… 음.”
운무를 관통하여 일대를 울리는 파문이 번졌다. 재차 마물이 몰려온다고 볼 수도 있으나, 기질이 완연히 다르다.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소름이 끼치는 영혼의 떨림이 전달되었다.
부르르르!
이를 느낀 오대부족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간파했다. 마치 열어서는 안 되는 금기를 개방한 것 같았다.
“……이건 대체?”
“……영통술이 안 먹힙니다!”
“……마물이 광기에 먹혔어!”
“……무언가 옵니다!”
모두를 불안하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존재였다.
용천군은 이놈이 대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뭔가 오기 전에 결판을 내야 했다. 더는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는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바뀌는 건 없다. 놈을 죽여.”
“예, 천군.”
용천군의 명을 받은 독마는 기꺼웠다. 놈만 죽이면 이 모든 사태를 잠재울 수 있었다. 애송이가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데, 곧 처참한 현실을 맞이하게 될 터. 놈을 죽이고, 천군의 호의를 받는다면 남는 장사였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잔인하게 죽여야 했다.
“네놈은 이미 죽어 있다. 내가 죽이기로 한 이상.”
“유년기 때나 들어 봄 직한 말투긴 한데, 그보다 조심해야 할 거야. 내 친구가 널 용서할 것 같지 않거든.”
“한 줌의 독수가 되어서도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
“네 상대는 내가 아니라니까. 귀머거리야? 말귀를 못 알아듣네.”
독마는 무시하고 달려들려다 멈칫했다.
두둥!
무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을 뒤덮은 검은 그림자가 선명해졌다.
쿠우우웅!
하늘에서 내려선 거대한 생명체가 돌아보자 사위를 무겁게 짓눌렀다. 마물조차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크어어어어엉!
십오 장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에 흡사 용처럼 생겼지만, 전신의 비늘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천계의 문을 열지 못하고 지상으로 떨어져 버린 타락한 용처럼.
“……흑마룡!”
“……이 미친놈이 기어이!”
“……자고 있을 시긴데!”
“어떻게 일어난 거야?”
마수림은 동서남북으로 경계를 나누는데, 북수림의 끝에 자리한 북마산은 들어가선 안 되는 금지였다. 그 안에 남만을 초토화시켰던 최악의 생명체가 잠자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내 친구, 존재감 빵빵한데.”
“……네놈, 미친 게냐!”
자신만만했던 독마의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말투까지 떨리고 있었다.
“알고 있구나.”
“흑마룡을 깨우다니, 네놈도 성하지 못할 거다!”
“친구라니까.”
“흑마룡은 통제가 불가능한 마물이다. 영통술 따위가 통할 성싶으냐!”
독마도 오독궁의 궁주이기에 흑마룡을 알고 있었다.
설마 했거늘 저 저주받은 마물을 깨웠을 줄이야. 정말 상상을 불허하는 미친놈이 아니던가. 한 번 깨우면 원하는 만큼 살육을 하지 않는 한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통제가 불가능한 마물이었다.
크어어엉, 푸아아앙!
흑마룡이 포효하며 사방으로 검은 화염을 뿜어 댔다. 흑화가 닿는 곳마다 화염이 번지며 불태웠다. 놀랍게도 화기와 독기의 상성을 무시하는 흑마룡이었다.
“이럼 다…… 아니!”
광기에 휩싸인 흑마룡이 발광했는데 그 목표물이 뚜렷했다.
“어이, 친구.”
무진의 부름에 흑마룡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흑마룡이 노리는 건 독마와 오대부족이었다. 의도치 않게 소외당한 무진은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그럴 수 있지.”
“……어째서?”
독마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흑마룡은 영통술이 통하지 않는 마물이었다. 아까부터 확인했지만, 이놈은 영통술을 전혀 익히지 않았다. 왜 자신들만 공격하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현실이었다.
“어째서긴, 아까 받으라고 던진 친구의 알을 네가 깼잖아. 그러게 왜 아무거나 막 깨고 그래.”
“……뭐? 그게 설마?”
“그래도 다섯 개 중에 두 개니까, 괜찮을 거야.”
“……이런 미친놈이!”
“자식을 잃은 어미의 마음이야. 알면 좀 받아 줘라.”
……크윽!
독마와 장로들, 독강시까지 대답할 여력이 없을 지경이다. 자식을 잃은 흑마룡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그들로선 억장이 무너지고 속이 뒤집히는 억울한 상황이었다. 저 미친놈이 흑마룡의 알을 가지고 왔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폭탄인 줄 알고 받아치는 순간 사방으로 퍼진 알의 파편을 뒤집어썼으니 흑마룡의 공격대상은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다. 이제 와 오해였다고 밝힌들 흑마룡이 들어나 주겠는가.
“어때?”
무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용천군의 응대를 기다렸다.
나 잘했지?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을 담았다.
허~!
용천군의 예상을 또다시 벗어나 버렸다. 예측한 대로 모조리 다 빗나가 버리자 분노가 아닌 황당함이 자리했다. 곧, 자신의 실태를 깨달으며 분노로 돌변했지만.
“처음부터 마물을 깨울 의도였나?”
“창의적이지 않냐.”
예로부터 금기는 깨라고 있는 거고, 금지는 들어가라고 있는 장소였다. 언제 사람들이 말만 듣고 돌아섰나. 호기심에 죽고 사는 인생이었다. 들어가서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구였다.
‘저렇게까지 광분할 줄은 몰랐지만.’
-네 자식이라고 생각해 봐라.
‘알이 다섯 개나 있는데, 두 개 정도는 괜찮잖아.’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냐.
‘자식을 빼앗기고도 잠만 처자고 있으니까 그렇지.’
-경각심을 심어 주기 위해서라는 개소린 하지 말자.
무진은 흑마룡이 잠들어 있는 산으로 몰래 들어가서 알을 훔치고, 그때까지도 단잠을 자는 흑마룡에게 권풍을 선사했다.
꿀잠을 자다가 산봉우리가 무너지면서 잠에서 깬 흑마룡이었다. 압사를 뚫고, 그제야 알을 확인한 흑마룡이 미쳐 날뛰었었다.
빠드드득!
용천군은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화가 난 적이 있는지 되돌아봤다. 몇 번을 되짚어 봐도 없었다.
계획이 틀어져도 그렇지, 이렇게나 엉망진창이 될 수 있는 건가?
그 앞에서 실실 쪼개며 히죽이고 있는 놈을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다.
“이제 혼자네.”
“죽음조차 사치라는 걸 깨닫게 해 주…… 이놈이!”
여태 말로만 변죽을 놓았던 무진이 갑자기 쇄도해 들어오자, 용천군은 급히 내력을 끌어올려야 했다. 대결의 기본적인 예의 따위는 밥 말아 먹은 지 오래였다.
꽈아아아앙!
지축을 뒤흔들다 못해 뽑아 버리는 경력의 파동이 사위를 들쑤셨다. 무진과 용천군의 중심에서 날카로운 원을 그린 파문이 층층으로 흙 거죽을 벗겨 내다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후아아앙!
파문의 중심에 선 무진과 용천군이 서로를 마주했다.
희비가 엇갈린다.
씨익!
무진의 여유에 용천군의 얼굴이 흉신처럼 일그러졌다. 다 이긴 듯한 자신감은 둘째 치고 굉장히 거슬리는 흐름이었다.
승부는 끝나지 않았고, 이제 시작에 불과하거늘.
“건방진, 숨통을 끊어…… 크윽!”
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거리를 잡은 이상,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다. 전왕투법의 영역에 발을 들였으니, 건방을 떤 상대는 자신이 아니라 용천군이었다.
대비하고 있었어야지.
‘전에도 이러더니.’
들어올 땐 몰랐지만, 기운을 드러내자 무진은 놈의 정체를 파악했다. 상위 서열이 나올 줄 알았는데, 마신교는 여전히 간을 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기는 했다. 중원도 아닌, 변방에 속하는 남만이니 전력을 최대한 아꼈다고 볼 수 있다.
육신이 마주하는 공간.
육체를 극한으로 이용한 박투를 펼치기에 적합했다.
용천군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거리에선 무적이었다. 천군 내에서도 박투에 관해서는 자신을 능가할 자는 많지 않았다. 감히 이 안으로 자신을 유도했다고 자신만만해하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크윽!
그래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