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71
370 일취월장(1)
번쩍!
서걱!
잘린 머리가 떨어져 나가며 바닥을 구른다. 본인의 죽음조차 알지 못한 채 허망한 최후를 맞았다.
데구르르르!
수급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떨어져 내리는 장면은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달려들던 자들마저 얼어붙고 말았다. 상대가 손을 썼다면 모를까, 다들 스스로 목을 내어 주고 있었다.
“……어떻게?”
“망자가 알 필요가 있을까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유리알처럼 청아했다. 방금 야수궁도 서른 명을 순식간에 죽였다는 걸 상기하면 이율배반적이었다.
“……마녀!”
야수궁의 오대 장로인 야수혈조 비도광의 목에 혈선이 길게 늘어졌다.
“……언제?”
그제야 죽음을 확인한 비도광은 경악했고, 이내 그의 수급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데구르르, 콰드드득!
멋대로 구르는 수급을 부수어 버린 여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작금의 사태는 원하는 방향과 동떨어져 있었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선 안 되었다.
“어찌 된 일인가요?”
“서둘러 사태를 파악하겠습니다!”
“실망이 크네요.”
“……송구합니다!”
적암과 뇌암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여인은 그들로서는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지고의 성역이었다. 천상의 선녀 같은 모습이지만, 그녀가 얼마나 잔혹한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성히 죽고 싶다면 그녀의 눈 밖에 나지 말아야 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냐고?’
‘야수경합이 한창이어야 할 텐데.’
적암과 뇌암으로선 기가 막힌 현실이었다. 내부의 연락책이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벌어진 사태였다. 하나, 용천군이 나선 이상, 암천군과 같이 있을 터. 야수경합 자체는 문제가 되진 않는다.
‘이렇게 될 동안 몰랐었다니!’
‘누가 이런 짓을?’
야수궁을 찾을 때만 해도 이렇진 않았다. 독마의 갈산독에 야수궁주가 중독되었고, 오대부족의 야욕을 부추겼다. 야수경합이 남아 있긴 하지만, 용천군이 오대부족장에게 패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야수궁의 수뇌부와 궁도들도 야수경합에 의해서 결과가 달라지기에 이처럼 일사불란한 행동력은 예상 밖이었다.
“야수궁주가 건재한 모양이네요.”
“……아!”
길들지 않은 야수궁도들을 일사불란하게 부릴 수 있는 자는 야수궁주뿐이다. 그가 온전하다면 야수경합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모든 사태의 흐름을 이해하려면 야수궁주가 일어나야 했다. 그래야 전후의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실로 대단하신 분이다!’
‘그 짧은 순간 핵심을 간파하셨어!’
감탄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능히 그럴 만한 능력과 지략을 갖추었다. 감히 삿된 마음이라도 품었다간 지옥이 멀지 않았다.
“야수궁주를 처리하겠습니다!”
“찾아갈 필요는 없네요.”
그녀의 말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궁도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수가 적지 않았다.
전력의 차이가 극명해 보이지만, 그녀는 피하기는커녕 수줍게 웃었다.
호호호호.
적암과 뇌암은 뇌리를 울리는 전율에 소름이 돋았다. 즉시 데리고 온 수하들과 함께 전투를 벌일 준비를 마쳤다.
두둥!
야수궁주 군위천.
그는 바닥을 적신 유혈 사태의 중심에 선 여인을 보며 맹수와 같은 기세를 발산했다. 수십이 넘는 궁도가 죽었고, 장로마저 살해당하고 말았다. 본궁을 흔들기 위해 스며들었던 적도들이 분명했다.
“본궁을 유린한 걸 후회하게 해주지.”
“재밌는 말씀을 하시네요.”
세요설부, 아미청대, 오발선빈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는 섬뜩한 한기가 머물렀다.
“요녀로다.”
“일정에 없던 일이에요. 안타깝지만 죽어 줘야겠어요.”
철호, 육칠, 서문호는 야수궁주의 배후에 서서 여인을 보았다. 천상의 선녀가 따로 없는 용모였다. 남만의 여인상과 맞물리지 않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모두 마음 단단히 먹어요.
-왜?
-자칫 죽을 수도 있어요.
-……그 정도야!
-솔직히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겠어요.
-죽기 싫은데!
철호는 직감했다. 저 여인의 무서움은 겉으로 보이는 외양이 전부가 아님을. 이제까지 만났던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위화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내일 뜨는 해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미치겠네.’
사부께선 정 안 되면 도망치라고 했다. 괜히 되지도 않게 목숨 걸면 가만두지 않을지도.
***
바르르르!
쩌저저적!
투심마안에 영혼까지 탈탈 털린 독마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하더니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졌다.
푸스스스!
갈라진 육체는 바람에 부서지며 흩날렸다. 전력을 쏟아부어 겨우 제압했던 독마의 최후에 오대부족은 숨을 죽였다.
우우웅!
때마침 마수림의 입구가 열렸다.
목적을 완수한 무진은 미련을 두지 않고 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 뒤를 오대부족이 말없이 따랐다.
둥둥둥둥!
마수림의 입구 주변으로 오대부족의 수천 부족민들이 모여 야수경합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진이 선두로 나오자 부족민들은 의아한 기색이었다. 오대부족의 부족장 중에서도 나오리라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무진은 나아간 방향 그대로 걸어갔다. 부족민들의 의혹을 해결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다다다다!
뒤늦게 마수림에서 나온 부족장과 전사들이 무진의 뒤를 서둘러 따랐다. 사방에 포진한 부족민들은 돌아가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수림에 들어간 전사들의 상태가 온전치 않았다. 과정이 순탄치 않음을 실감했다.
“산군을 따르겠습니다!”
“산군을 따르겠나이다!”
무진의 앞으로 달려 나간 부족장과 전사들이 서둘러 무릎을 꿇으며 완전한 굴복을 전했다. 부족민들은 그제야 사태의 전말을 파악하고 일제히 무릎을 굽혔다.
“산군을 따르겠습니다!”
“산군을 따르겠습니다!”
오대부족의 족장이 항거는커녕 스스로 무릎을 꿇어 굴종했다. 그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산군이야말로 야수경합의 주인임을 증명했다. 안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졌든 현재의 결과가 과정을 드러낼 뿐이다.
‘백 명쯤 죽여야 할 줄 알았는데.’
-결과에 승복하는 게 당연한 거다.
드러난 정황을 믿지 못하고 날뛰는 놈들이 있을 거란 무진의 예측과는 달랐다. 남만의 성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는 했다. 마신교는 남만의 특성을 알고 야수경합을 계획한 것이다. 그러나 야수경합에서 이겼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궁주께서 깨어나셨다.”
“……아!”
오대부족의 족장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병환에 들었다는 궁주, 사실은 독에 중독이 되었었다. 여태 그들은 군무극이 야수경합을 위해 궁주와 소궁주를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궁주의 혈통이었으며 남만의 진정한 전사였다. 잇속에 눈이 멀어 정작 중요한 신념을 잊고 있었던 자신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이런 자와 경쟁을 하려 했다니!’
‘욕심에 눈에 멀어 진정한 전사를 몰라봤구나!’
‘그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럽구나, 이 죄를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수치심이 밀려왔다. 욕망에 함몰되어 진실을 외면하고, 야수궁의 긍지를 잃어버렸으니 자신들은 남만의 죄인이었다.
죄를 씻고 다시 일어서려면 철저히 믿고 따라야 했다. 설령 죽음을 원한다고 해도 기쁜 마음으로 바쳐야 한다.
“궁주께서 위험하다.”
“저희도 따르겠습니다!”
“너희들이 할 일은 복수야.”
“아! 부족을 정비하겠습니다.”
무진은 오대부족장의 결의를 확인한 후, 야수궁으로 향했다. 쏘아져 나간 신형은 한순간에 점이 되어 사라진다.
‘시간 끌어서 좋을 게 없지.’
-맞는 말이다.
야수궁을 정리하는 대로 전쟁이었다.
***
해치웠나?
스왁!
죽었나?
스왁!
잘려 나간 대가리가 허망한 눈빛을 한 채 바닥을 구른다. 그녀의 검이 나아갈 때마다 죽음이 기다렸다. 그야말로 죽음을 관장하는 사신이었다.
후우우!
군위천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강철처럼 단련된 손톱이 일부 잘려 나갔다. 육신에 새겨진 검흔도 가볍지 않았다. 이런 상처를 입었다면 상대는 응당 저승 문턱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어떤가? 여인은 여전히 죽음을 관장하고 있었다.
“굉장하군.”
군위천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계집의 이상한 환술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맹수의 심안인 야수안(野獸眼)으로도 본질이 흐릿했다. 진실을 파고들어야 하나, 손끝에 닿지도 않는다. 이토록 상식을 뛰어넘는 보신과 환술은 처음이었다.
“인정하마, 넌 강하다.”
“호오, 제법 안목이 있네요.”
“그러나 죽는 건 너다.”
“주제 파악은 못 하는군요.”
결사의 각오를 다진 군위천은 천존야수마공(天尊野獸摩功)을 극성으로 개방했다. 만상을 군림하는 천존기와 수림의 늑대와 같은 야수기의 상반되는 기운이 융화하여 육신을 변화시켰다.
“대랑!”
천존기를 감지한 대랑이 군위천의 배후로 날아왔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를 빠름이었다. 하물며 일반적인 늑대와는 규격이 완전히 다르다. 남만의 대랑 중에서도 배는 더 큰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크르르릉!
대랑은 군위천이 궁주가 되기 이전부터 야수궁의 수호신으로 자리한 영물이었다. 선대의 선대로부터 이어졌기에 천년대랑으로 불린다.
파앗!
신체의 모든 능력치가 극대화되었다. 한계를 넘어선 육체의 극한, 변화된 육체는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능력을 선보였다.
쐐애액!
숭덩, 숭덩!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선기를 장악한 대랑의 앞발이 여인을 다섯 조각으로 가른다. 마치 조강(爪剛)을 발출하듯 예기가 뻗어나가 벽면을 갈라 버렸다.
사르르르!
조각조각으로 갈라진 여인이 연기처럼 흩어진다.
여인은 대랑의 거리에서 벗어나 있었다. 잔상을 일으키는 극한에 이른 보신경이다. 순간적인 속도는 능히 천하제일이라 할 만했다. 자리한 곳곳마다 잔상과 허상을 심어 혼란을 가중시켰다.
꽈아아앙!
군위천의 대응도 환상을 베어 낼 만큼 빨랐다. 다음으로 이어질 위치를 알고 있는 듯 강격을 발출했다. 단순 주먹질처럼 보여도 강기를 분멸할 위력이었다.
야수연환마권(野獸連環魔拳) 극의 포식(飽食).
굶주린 맹수처럼 군위천은 멈추지 않았다. 야수연환마권의 전 초식을 일권일수(一拳一手)에 담는다. 염탐, 추적, 박리, 발골, 분쇄가 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여인의 호흡을 읽어 내며, 본능적인 감각을 극한으로 개방했다.
솨아악, 파아아앙!
영성이 연결된 대랑과의 호흡이 맞물리듯 이어지며 공간을 분쇄한다. 그야말로 물샐틈없이 이어진 촘촘한 연계였다. 촌음 간에 셀 수도 없이 많은 공방이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공간이 산산이 부서지며 위력을 과시했다.
움찔.
공세를 이어 나가는 군위천은 소름 돋는 현실과 마주하고 있었다. 대랑과의 합격으로 반경 십 장 안을 가두었다. 그런데도 여인의 옷자락을 잘라내기조차 쉽지가 않았다. 수십 차례의 공방에서 전혀 이득을 챙기지 못했다.
‘대랑조차 환술로 속였어?’
대랑은 격을 초월한 영수였다. 본질의 파악은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넘어서거늘.
그런 대랑이 허깨비를 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