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76
375 복수는 달달한 법(1)
“이런 파문이라니?”
궁 전체를 뒤흔들다 못해 뿌리째 뽑아 버리는 파괴력에 전율했다. 수마(睡魔)에 들었던 육체가 파문에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의문은 뒤로했다. 그는 급히 침상에서 일어나 장식으로 숨겨 놓은 기관을 작동시켰다.
드르르!
잠겼던 기관이 작동한다. 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벽면이 열렸다. 사람이 겨우 들어갈 입구로 사내는 몸을 날렸다. 지체하지 않았다. 궁 안을 휘몰아치는 파장은 소름이 돋을 만큼 강력했다. 파문이 번지는 순간 위화감이 심신을 짓눌렀다.
‘도대체가?’
망설임 없는 행동과는 별개로 작금의 현실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직감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이성이 아닌, 본능에 의한 생존 감각이 위험을 감지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
머릿속이 복잡했다. 잠에서 깨기 전까지만 해도 남만의 일통은 기정사실이었다. 누가 감히 본궁을? 야수궁을 제외하고 본궁과 자웅을 겨룰 만한 세력은 남만에 존재하지 않았다.
‘포위됐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위화감의 정체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궁 전체를 포위하여 진입하고 있었다. 속전속결로 파문이 번지고, 세력이 덮쳐 왔다. 정확한 수를 파악하긴 어려우나, 이만한 세(勢)가 포위해 오는 동안 전혀 감지를 못했다니.
‘어떻게?’
당황스럽긴 하나 행동엔 망설임이 없다. 선택의 기로에서 주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사선(死線)을 경험하면 할수록 생존 감각이 예리해진다. 그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위험하다.’
침입자를 알아내기보다는 생존이 먼저였다. 살아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최대한 나아갔다. 궁에서 멀어질수록 생존 확률이 높아진다고 본능이 경고했다.
두드드드드!
통로를 지날 때마다 기관의 축이 되는 부분을 부쉈다. 오독궁이 자리한 후 비밀 통로를 짓기 위해 들어간 비용과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비좁고, 난해한 미로와 같은 통로다. 찾으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냄새로 추적하기도 어렵게 통로에는 특이한 향을 뿌려 놓았다. 오독궁이 생긴 이후로 벌어지지 않은 일이나, 언제나 이때를 대비했다.
‘누가 됐든 가만두지 않겠다.’
신중한 성격과는 별개로 분노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갖은 고생을 상기하면. 비 맞은 쥐새끼처럼 도망가야 하는 처지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위험에서 벗어나는 즉시 본궁을 노린 자들을 한 줌의 독수로 녹여 내리라 다짐했다.
통로의 끝에 다다랐다. 궁에서 꽤 먼 거리에 있었다. 독궁에 위기가 닥쳤을 때를 대비한 그만의 공간으로, 사부조차도 그 위치를 정확히는 모른다.
독공을 연마하고, 독을 연구하기 위한 자기만의 공간은 독인이라면 갖추어야 할 필수 요건이다. 사부도 이를 알기에 용인한 일이었다.
“이만한 세라면 야수궁 외엔 없을 텐데.”
마신교의 지원을 받은 이상, 야수궁은 현재 사부의 손아귀에 떨어져야 마땅했다. 야수궁주가 독을 극복한다고 해도 천군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가, 천군은 인외의 절대고수였다. 사부조차도 천군에게 무릎을 꿇으며 굴종을 택했다. 그것만이 본궁을 보전하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설령 천군을 물리쳤어도, 너무 빨라.”
시간상 궁을 정비하기도 빠듯했다. 이만한 세를 규합하여 침입하려면 야수경합을 끝낸 즉시 본궁으로 향했어야 한다. 그도 아니면 절대적인 명령 체계를 확보했거나. 어느 것 하나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제삼 세력일까?”
남만을 노릴 만한 다른 세력은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만한 힘을 가진 세력도 없고, 본궁을 점령한다고 해도 남만의 통합은 불가능했다. 묘족의 특성상 외인 세력이 짓누르는 걸 얌전히 받아들이진 않는다.
“본궁을 노린 대가는 반드시 치러 주지.”
사부가 천군의 수발을 드는 동안 사내는 궁의 대소사를 관리했다. 독의 총화가 남아 있는 이상, 언제든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찌잉!
새하얀 백지에 먹물이 떨어지듯, 급작스럽게 번지는 위화감에 반응했다.
이번엔 한발 늦었다.
꽈아아아아앙!
공동을 거세게 울리는 파공성이 들리고 이내 경력이, 막아서던 장벽을 관통했다. 경력은 장벽을 부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쏘아져 나가 공동을 강타했다.
쿨럭!
경력에 휩쓸렸던 사내는 핏물을 쏟아내며 일어섰다. 용암에 빠진 듯 육신이 녹아내리는 줄 알았다. 경험을 초월한, 어이가 없는 현실이었다. 경력에 직접 부딪힌 것도 아닌, 스쳤음에도 기혈이 요동쳤다.
저벅, 저벅!
공동에 차오르는 연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소리가 들렸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 소리가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먼지가 가라앉으며 공동을 비추는 횃불에 모습을 드러냈다.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입구가 좁더라고.”
“죽엇!”
사내는 지체하지 않고 전력을 다한 독장을 펼쳤다. 정체를 물어보기 전에 죽여야 한다는 다급함을 느꼈다.
꽈아아아앙!
검은 기운이 휘몰아치고, 매캐한 연기가 공동을 채운다.
***
오독궁엔 아닌 밤중의 날벼락, 막을 수 없는 대홍수였다. 쏟아지는 장대비 속 갑작스러운 폭발이었다. 하늘을 뒤덮은 빛의 포화가 사라진 후 드러난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현실적인 광경하고는 거리가 먼 비현실의 극치.
시선을 압도하는 경이로운 파괴력에 몸서리가 쳐졌다. 정신을 수습하고 사태를 파악하려는데, 광풍은 시작에 불과했다.
쐐애애액!
어둠 속에서 이질적인 그림자가 꿈틀거린다. 일순간에 사라져 버린 정문을 향해 해일처럼 밀려왔다.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운 무리로, 막아서기엔 역부족이었다.
두두두두!
빛의 광폭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는 흔적도 없었다. 경이를 넘어선 파괴에 사기는 창졸간에 무너졌다.
기세를 잃은 오독궁이 정문을 내주기가 무섭게 학살의 밤이 되었다. 침입자의 분노는 살의로 융합하여 일대를 장악했다. 살육전이 되자, 잔혹한 죽음이 몰아쳤다.
“……야수궁이 어떻게?”
“이건 말도 안 돼…… 크악!”
“막앗! 막으란 말이닷!”
오독궁의 지휘 체계는 엉망이었다. 빛의 포화가 스쳐 지나간 공간이 공교로웠다. 급습에 허둥지둥하는 독인을 정비하고, 체계적인 명령을 내릴 통제부가 망가졌다. 그나마 막아선 자들도 독궁을 장악해 들어오는 무리에 압도되었다.
“이놈들, 감히 예가 어디…… 헉!”
“오랜만이군, 독염귀수.”
“당신이 어떻게?”
“독은 잘 받았다.”
오독궁의 팔장로 독염귀수(毒焰鬼手) 홍화극은 재빨리 뒤로 빠지려고 했다. 상대는 야수궁의 궁주였다. 독에 중독되지 않은 만수제는 남만제일인으로, 오독궁주가 이 자리에 있어도 정면 승부는 어려웠다.
살아생전 마지막일 수 있는 백척간두였다.
“……빌어먹을!”
독탄을 사용했던 홍화극은 가슴을 뚫어낸 군위천의 수강에 절명했다. 도망치지 않고 덤볐더라도 좀 더 시간을 끌 수 있었겠지만, 애초에 저항은 무의미했다.
‘하, 그 짧은 시간에.’
군위천은 홍화극의 죽음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러기엔 눈앞에 펼쳐진 광경과 지난 일들이 현실적이지 않았다.
급습이긴 하나, 오독궁이 이처럼 간단히 무너질 줄이야.
절로 경탄이 흘러나왔다.
오랜 세월 야수궁을 괴롭혔던 오독궁이기에 믿어지지 않았다. 그간 알고 있었던 오독궁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수월했다.
‘오독궁의 수뇌부를 날려 버렸구나!’
군위천은 오독궁의 허접한 대응을 돌아볼수록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단순히 정문과 궁만을 부수지 않았다. 강환으로 일차 충격을 준 후, 권경을 발출해 수뇌부를 요격했다. 오독궁이 통제력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연유였다.
‘기도 안 차는군.’
섬뜩한 결과물이었다.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자다가 뒈지고 싶은 전사는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비정한 죽음의 사신이었다. 강약을 불문하고 적은 돌아보지 않는다. 전투를 승리로 장식할 가장 쉬운 방법을 사용할 따름이다.
‘이게 되는구나.’
비 오는 날 야밤에 굳이 소란을 일으킬 필요가 있나 싶었거늘. 그러한 극적인 광경이 작금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물렸다. 경배하지 않을 수 없는 가공할 파문에 야수궁과 오독궁이 휩쓸린 것이다.
“남만의 신황이시여!”
“진정한 남만제일인이시다!”
“이 전쟁을 끝내자!”
군위천은 한껏 상기되어 전의를 불태우는 야수궁도에 한숨이 흘렀다. 백족, 황족, 적족, 흑족, 청족의 오대부족이 오늘처럼 단합된 적이 있었나?
역대 야수궁주조차 오대부족을 규합하여 남만을 통합하지 못했다. 그 어려운 일을 단번에 해결한 무진의 신위에 입맛이 썼다.
‘하물며 오독궁까지.’
야수궁주로서 위엄을 내세우기에는 무진의 결과물이 무지막지했다. 남만의 누구도 해내지 못할 업적이기에 전설로 회자한 남만신황을 부르짖는 것이다.
‘그럼 나는?’
군위천은 여전히 야수궁주였다. 그러나 예전과 같은 대우를 기대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이제 신황의 명은 절대적이었다. 야수궁주도 신황을 따라야 했다. 여기서 반기라도 들었다가는 남만의 공적이 되는 수가 있었다.
끄응!
절로 앓는 소리가 나온다.
평생의 숙원인 남만의 통합이 눈앞에 있는데도, 군위천은 맥이 빠졌다.
“아빠, 힘내세요.”
군위천은 딸의 응원에 힘이 더 빠졌다. 하는 짓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난다.
맘과 달리 당장은 나무랄 수도 없다. 소소와 철호의 합이 절묘하다. 둘이서 독궁의 무력대를 박살 내는 광경은 실로 놀라웠다.
허어!
독혼단에게 애를 먹었던 야수궁이었기에 더더욱 그렇다. 사방에 뿌려진 독에도 흔들리기는커녕 돌진하여 박살 냈다. 물러서지 않는 강단과 극강패도를 이룬 권경은 대단했다. 확실히 이전보다 강해졌다는 걸 철호도 느꼈다.
“남 공자님, 사랑의 힘이에요.”
“그렇게까지는.”
“남 공자님! 사랑의 힘이에요!”
“……그렇다고 치겠습니다.”
“남 공자님!! 사랑의 힘이에요!!”
“……그렇군요.”
철호는 긴가민가했지만, 군소소는 단호했다. 사랑에 빠진 여인은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반드시 사랑의 힘이어야만 했다. 철호조차 소소의 강단에 납득하고 말았다.
끄응!
군위천은 딸의 추태에 시야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보고 있으려니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내 딸이지만, 정말 상종 못 할 새로운 모습이었다.
이게 다 저 잘생긴 놈 때문이다.
내 딸은 원래 저렇지 않다고, 얼마나 조신하고 현명한데.
딸 가진 군위천의 소망일 뿐이었다.
퍼퍽, 파앗!
궤적을 예측하기 어려운 각법, 허공에서 변화를 이루자 서너 명의 얼굴이 피떡으로 변했다. 턱뼈가 으스러지고, 광대뼈가 함몰되었다. 현란한 발차기, 지상과 허공을 가리지 않으며 독인을 쓰러뜨렸다.
“……합공해!”
“놈을 죽여!”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육칠이었다. 서너 명의 독인이 달라붙었다.
하나, 독을 뿌리기도 전에 검광이 번뜩였다.
스왁, 서걱!
정통 검로를 유지하던 검식이 변화를 이룰 때마다 생의 불꽃이 사라진다. 검로에 선 독인은 채 의식하지도 못하고 숨통이 베였다. 정면이 아닌 사각과 등을 노렸다. 최선의 검로는 생사를 가르는 비정함을 담았다.
‘이놈들도 보통이 아니구나.’
불편한 속내와는 별개로 군위천은 저들의 실력을 인정했다. 무진의 권속은 하나하나가 비범한 자질을 갖추었다. 당장도 뛰어나지만, 앞으로의 잠재력이 무궁무진했다. 단순히 무진만 강한 게 아니라, 주변까지 강하다는 걸 보여 준 것이다.
‘군말 없이 따라야겠구나.’
군위천은 자존심을 버렸다. 무력으로도, 인복으로도, 명망으로도 적수가 되지 않았다. 어설프게 이빨을 드러냈다간 저번처럼 바동거릴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성깔이 정말 더럽다.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신황께서 오독궁의 멸문을 바라신다!”
대세는 굳어졌다. 군위천도 오대부족과 같이 흐름에 동조했다. 자신만 반대로 가면 아무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이미 무진의 손아귀에 들어간 지 오래였다. 하물며 오독궁의 처참한 잔해를 보고 있으면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저걸 무슨 수로!’
오대부족과 전사들은 오독궁을 부수고, 독인들을 추살했다. 동시에 오독궁의 신물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신물을 신황에게 바쳐라!”
신을 따르듯 광기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