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383
382 개간(1)
장방형으로 반듯하게 자른 철과 나무를 정교하게 맞대어 놓은 정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아침이 되면 문을 열어 놓게 되었음에도 닫아 놓았다. 이는 손님을 받지 않겠다는 주인의 의사였다.
쿵쿵쿵!
금색의 명필이 음각된 흑색의 현판 아래, 한 노인이 정문을 발로 두들겼다.
드르르르!
곧 문이 열리며 도를 찬 거구의 무인들이 노인을 에워싸며 으르렁거렸다.
파파팟!
맹호의 기운이 기공에 실려 사나운 기세를 발산했다. 평범한 노인이었다면 바지에 실례를 범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손님이 아닌 적을 대할 때와 같았다.
‘그 녀석 말대로군.’
호탕하고 대범한 가문으로 알고 있었거늘.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노인을 씁쓸하게 했다.
“겁도 없이 본가의 문을 발로 차다니, 진정 죽고 싶은 것이냐?”
“나 취선이다.”
“……?”
“누굴 죽인다고?”
“거짓말하지 마라, 그딴 말에 속을 것 같으냐!”
“강룡십팔장 보여 줄까?”
“……?”
노인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패도무쌍의 기력이 일순 공간을 집어삼켰다. 발출하지 않았음에도 용의 역린을 건드린 듯 무지막지한 기세가 사방을 짓눌렀다.
비틀!
올곧이 서 있기는커녕, 다리가 휘청거렸다.
두드드드드!
코가 시뻘건 술 취한 노인네의 변화에 포위했던 무인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정중하게 짝다리를 짚은 취선이 다시 물었다.
“보여 줘, 말아?”
“정녕 개방의 전대 방주님이십니까?”
“지금은 무림맹의 특사야. 이건 금팬데, 다시 돌아가야 되나?”
“……전대 방주님을 뵙습니다. 너희들! 어서 가내에 알리지 않고 뭐해!”
“……예!”
오대세가의 한 축인 하북팽가라도 개방의 전대 방주를 홀대했다는 소문이 돈다면 질타는 불가피했다. 하물며 무림맹을 상징하는 금패를 들고 왔다. 방금의 고압적인 태도는 무림맹의 특사를 위협한 행위였다.
세가의 경비를 책임지는 경호대의 대주 이덕산은 급히 태도를 바꾸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손님을 받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가 없다.
“건방지긴 해도 처세가 좋구나. 한데, 내가 기다려야 하는 게냐?”
“……아닙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별채로 안내하겠습니다!”
“가주를 보러 왔네만.”
“저기,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장로전에 기별했으니 사람이 올 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든가.”
취선의 방문에 하북팽가는 소란이 일었다. 무림맹에서 사람이 온다고는 했지만, 개방의 전대 방주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다.
장로들은 시간을 끌려고 했으나, 취선은 금패를 보이며 가주를 찾아왔다고 했다. 이 이상의 지체는 개방과 무림맹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취선은 하북팽가의 가주 팽위천을 만났다. 때마침 정운상단에서도 개방도와 함께 세가를 방문했다.
정운상단은 하북팽가에서 추진하다 자금이 부족해서 중단했던 사업을 전폭적으로 밀어주기로 협상을 맺었다.
고가의 귀공품이 화려하게 치장된 방 안의 중심.
노인이 앉아 있었다. 하나, 노인이라고 하기엔 옷 사이로 비치는 탄탄한 육체와 주름 하나 없는 피부가 두드러졌다.
단악도(斷岳刀) 팽도광.
경천신도 팽위천의 숙부이며, 가주를 대신해 가문의 대소사를 관리해 왔었다. 탁자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멋스러운 수염을 살포시 쓰다듬었다.
대협의 풍모가 인상적이다.
흠.
최근 돌아가는 흐름이 팽도광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예상을 연이어 빗나가기에 편치 않았다.
‘자책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기를 바랐거늘. 쯧!’
패룡대주 팽호산을 이용해 가주의 총기(聰氣)를 흐리고, 차후엔 가문을 위한 결단을 내리려고 했거늘. 팽호산이 어이없이 죽어 버리는 바람에 가주에게 기회를 주고 말았다. 당시 장로회를 움직이기엔 명분에서 밀렸었다.
한데, 이번엔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설마 했거늘 개방의 전대 방주와 연이 닿아 있을 줄이야.
드륵!
문이 열리며 팽도광의 아들 팽위윤이 들어왔다.
“어떻더냐?”
“놈의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중립을 지켰던 장로들은 예견된 일이나, 포섭된 장로들도 무림맹이 가주를 지지하자 흔들렸다. 더욱이 정운상단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의사 결정에서 배제되었던 가주의 권위가 높아졌다.
“그간 쌓아 놓은 기틀도 하루아침에 흔들리는구나.”
“이대로 놔두어선 안 됩니다.”
예전처럼 상대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무림맹이 지원하고 있었다. 가주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이 의심받게 된다. 무림맹이 세가의 일에 관여하긴 어려워도, 대외적인 시선을 무시할 순 없다. 후일, 무림맹의 요직에 가문의 인사를 앉히려면 의혹을 남겨선 안 되었다.
‘곤란해.’
맹 내에서 검제의 영향력이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취선이 직접 왔다면 검제와도 연이 닿았다고 봐야 했다.
그렇다고 마냥 방관할 수도 없기에 답답했다. 팽호산이 살아 있었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끝낼 수 있었거늘.
‘하나, 이 가문은 나의 것이다.’
가주의 권위에 짓눌려서 살아야 했던 지난 세월이 떠오른 팽도광의 눈빛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역사는 반복한다더니, 원한다면 다시 해 주는 수밖에.
‘조만간 후회하게 해 주마.’
***
“잘 못 들었습니다.”
“마수림을 개간하겠다고.”
“신수림 말씀이군요.”
“귀를 뚫어 줄까?”
“마수림이 맞습니다!”
고양이가 생선을 보고 지나치지 못하듯, 각종 영약이 넘쳐흐르는 마수림을 무진이 내버려 두겠는가.
자고로 내가 못 먹으면 남도 못 먹게 하라고 했다. 개간이 안 되면 영영 개간 못 하게 해야지.
“개간을 하려면 수가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저번에 봤잖아, 만수영통.”
오대부족의 부족장은 헛바람을 삼켰다. 새삼 그날의 압도적인 무력이 상기되었다. 한꺼번에 덤비고도 고전했던 흑마룡을 일격에 쳐 죽였으니. 마수림을 산지 개간쯤으로 봐도 이상하진 않았다.
“후딱 정리하자고.”
“하오나, 우리만 가지고는 어렵습니다!”
흑마룡을 죽이는 일과 마수림 전체를 개간하는 일은 아예 다른 영역이었다. 마수림에 사는 마물의 수가 적지 않았다. 만수영통만으로 가능한 사안은 아니었다.
씨익!
무진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 항상 의견을 수렴하고 존중했다.
“맞고 할래, 그냥 할래?”
“그냥 하겠습니다!”
“자꾸 묻지 마, 짜증 나니까.”
“준비 다 했습니다!”
무진의 자애로움에 오대부족장은 군말하지 못했다. 마수림을 열 명 남짓의 인원으로 정복하겠다는 미친 짓에도.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고도 또 가까웠다.
뭐야?
야수경합의 경위를 자세히 모르는 군위천으로선 얼떨떨했다. 오늘도 부족들 순회나 하는 줄 알고 따라 나왔었다.
“방금 만수영통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자네에게선 영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곧 보여 드리겠습니다.”
만수영통엔 미치지 못해도, 그 비슷한 영역에 도달했다고 자부하는 군위천으로선 선뜻 납득은 되지 않았다. 영수의 혼과 연결하려면 영기를 지녀야 했다. 따로 배운 것 같지도 않은데, 만수영통이라니.
“마수림을 정복하려면 흑마룡을 제압해야 하네.”
“소식이 느리네요.”
여태까지 무진의 행보를 봤을 때, 금기에 들어가지 말란다고 들어가지 않았을까?
“……죽였군.”
“당연하죠.”
분명 놀라운 일이기는 하나, 군위천은 무진의 만행을 알기에 받아들였다. 말린다고 들을 위인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마수림을 정복한다면 나쁠 건 없겠지.’
야수궁을 세우고 야수경합을 벌이는 연유는 마수림의 마물을 줄이고, 정복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단순히 궁주를 세우기 위한 시험이 아니었던 것이다.
역대 누구도 마수림을 정복하지 못했기에 군위천은 무진이 어떤 방식으로 마수림을 정복할지 궁금했다.
전설의 만수영통이라도 마수림의 마물을 제어하기는 어려웠다. 마물은 오랫동안 마수림을 둘러싼 어둠의 기운에 잠식되었다. 영혼을 잇는 순간 마기가 침투한다. 통제력을 잃는 순간 마인화의 위험성이 컸다.
‘만수영통으로 마기를 제어한다는 건가?’
만수제 군위천조차도 진정한 의미의 만수영통에 도달하지 못했다. 만수영통은 모든 짐승을 다루는 꿈의 경지, 군위천도 경험해 보고 싶었다.
‘신황님의 영통술은 우리와 다르겠지만.’
‘흠, 통제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무슨 수로 대량의 마물들을 조종한 걸까?’
오대부족의 부족장들도 야수궁주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신황께서 어떤 신통한 방법으로 마물을 다스렸는지 확인할 기회였다. 상승의 무공을 보면 깨달음이 있듯, 영통술도 비슷했다.
만수영통이야말로 모든 남만의 부족이라면 염원하는 경지다. 만물의 지배를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다들 잘못 생각하고 있네.’
‘알면 환장할 텐데.’
‘다른 의미로 대단할진 모르지만.’
육칠, 철호, 서문호는 야수궁주와 오대부족장의 노림수를 염려했다. 야수경합을 보진 않았어도, 함께 다닌 짬밥이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가는 게 있어야 주는 게 있다.
사부에게 무언가를 배우려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공짜를 바라다간 머리만 벗겨지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이다.
마수림에 당도했다.
우웅!
오대부족을 따라온 결계사들이 입구를 열었다. 줄을 묶어 길을 헤매지 않도록 방지했다.
마수림 진입 시 마물이 달려들기도 한다. 다행히 대비할 필요는 없었다. 입구로 들어서자 함께 마수림을 횡단했던 친구가 떡하니 자리했다.
두둥!
의도치 않은 실수로 대가리를 잃기는 했으나, 위용만은 고스란히 남았다.
그러게 친구가 부탁하면 물러섰어야지. 고작 알 좀 깼다고 그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미처 몰랐다.
군위천은 죽어 있는 흑마룡을 보자 헛바람을 삼켰다.
“……대가리를 부수었군.”
“제 친구가 분노 조절을 잘 못 하더라고요. 좀 더 이성적이었으면 대가리를 잃는 불운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마물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바라다니,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분노를 조절하기는커녕 날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물며 흑마룡에게 친구라니, 상식적이지 않았다.
그래, 친구라 치자.
‘자네는 친구의 머리도 부수나?’
실수하면 친구든, 혈족이든 상관하지 않고 대가리부터 깨 버릴 녀석이었다. 협박은 아닌데, 협박보다 무섭게 다가왔다.
실상, 이보다 더 무서운 협박이 있을까?
‘알을 깨고 조용히 넘어가는 게 이상한 거지.’
‘마수림의 재앙인 흑마룡이 불쌍할 줄이야!’
‘이토록 간단히 죽어 버리면 그간 고생한 우리는 뭐가 되지?’
오대부족장은 흑마룡이 분노한 연유를 알기에 입을 닫았다. 자식을 죽인 원수 앞에서 친절하기를 바랄 순 없지 않나.
겪을수록 신황이 무섭게 다가왔다.
배신이란 단어를 뇌리에서 아예 지워 버렸다. 신황의 뜻을 거역했다가는 자신뿐만 아니라 부족이 쫄딱 망할 수도 있었다.
‘사부는 역시 전문가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와 더불어 협박의 미학이었다. 대놓고 협박하지 않았음에도 다른 생각 못 하도록 강제했다. 협박은 이렇게 하는 거다, 본을 보였다.
‘나중에 써먹어야겠다.’
서문호와 철호는 사부의 완벽한 협박질에 감탄했다. 잘 보고 배운다면 후일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을 것이다.
‘강 대협, 이건 좀!’
육칠은 물들어 가는 철호와 서문호를 보며 탄식했다. 이대로 성장해서 뭐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무림이 감당하기는 벅찰 듯싶다.
무진은 앞장섰다.
흑마룡의 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로서 어미를 잃은 자식들을 돌봐 주어야 했다. 훌륭하게 성장해서 요긴한 가죽과 뼈를 제공해 주길 바랐다.
착각이었을까?
대가리를 잃은 흑마룡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무엇이 그리 원통하다고?
크르릉!
처음 냄새를 맡고 나타난 마물은 흑각호였다. 흑색의 범처럼 보이지만, 이마에 뿔이 있었다.
최근 흑마룡이 죽어서 마수림은 혼란에 빠졌다. 왕이 사라지자, 마물들이 치열한 영역 다툼을 벌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날이 선 듯 굉장히 사나웠다.
‘만수영통을 시도하려는 건가?’
‘저렇게 화가 나 있으면 어려울 텐데.’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군위천과 오대부족장은 신황의 만수영통을 눈여겨봤다. 저처럼 살기가 극에 이른 마물까지 제어한다면 만수영통을 이루었다고 봐야 했다.
“잘 보세요.”
무진은 뚜벅뚜벅 흑각호에게 다가갔다.
흑각호가 입을 크게 벌리며 포효했다. 사나운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가 뿔을 잡아챘다.
그리고 살포시 귀에다가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
“친구 할래, 죽을래?”
“……?”
서리를 맞은 듯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우리가 들은 게 맞는지 귀를 의심했다. 귓구멍은 정상인데, 이상한 헛소리가 들렸다.
저딴 말이 통할 리가 없잖아.
-쟤들이 아직 널 모른다.
‘뜻만 통하면 만사형통이지.’
만수영통이든, 만사형통이든 무진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불시에 엉뚱한 기습을 당한 흑각호가 저항했다.
무진은 뿔을 내리쳤다.
빠가각!
손날에 뿔이 부서지며 흑각호의 급격히 충혈된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급살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비틀거리더니 맥없이 쓰러졌다.
허허!
무진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뿔 좀 부쉈다고.
“죽은 척하기는.”
“……흑각호는 뿔이 심장과 같습니다.”
오대부족장이 흑각호의 약점이 뿔이라고 설명하자, 무진의 반응이 살짝 늦었다.
“……알아.”
-알긴 뭘 알아!
마왕이 입만 열면 개소리를 지껄인다고 소리치지만 안타깝게도 전달되진 않았다.
“뿔이 상해도 가치가 떨어지거나 효능을 상실하진 않지?”
“뿔이 가장 중요합니다. 가격도 비싸고요.”
“다리는?”
“다리는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그 말이 흑각호들에겐 재앙이 되었다. 무진은 보이는 족족 다리만 노렸다. 다릴 잃은 흑각호의 비명이 마수림을 울렸다. 통과의례처럼 만수영통은 시도하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친구 할래, 죽을래?”
선택지가 무지막지했다.
군위천과 오대부족은 새롭다 못해 기상천외한 만수영통에 할 말을 잃었다. 저런 식으로 만수영통을 시전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뭐 저런?’
‘다 죽일 심산인가?’
‘……그럴지도!’
‘한데,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