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00
399 대장전(1)
녹림과 장강.
대다수에겐 산적이나 수적이나 매한가지일 테지만, 녹림과 장강은 물과 불처럼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일터가 달라 대대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어도, 수백 년간 신경전은 이어져 왔었다.
소모전을 지속할수록 녹림과 장강은 하나의 결론으로 도달하게 되었다. 굳이 녹림과 장강을 구분 지어야 하나? 산과 강을 하나로 잇는 단일화된 체계가 된다면.
육로와 수로를 통합한 녹수연맹이 이루어진다면 차원이 다른 규모와 무력을 얻게 된다. 항상 정사마에서 녹림과 장강의 대접은 하찮았다. 힘이 있어도 깊게 박힌 인식은 변하지 않았다.
녹림과 장강을 통합하여 강호의 체계를 바꾼다면 시선이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 그러한 걸 제쳐 두고서도 녹림과 장강은 본질적으로 같았다.
수로와 육로로 나뉠 뿐, 뺏고 빼앗는 노략질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을 한들 녹림과 장강은 근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녹수연맹의 맹주는 녹림과 장강의 주인이라면 품어 볼 야욕이자 욕망이었다. 하나,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릴 뿐 총력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전과 같은 소모전과 신경전으로 점철되었다.
그 지루한 대치도 오늘이 끝이었다.
역대로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녹수연맹의 초대 맹주가 결판이 날 것이다. 그간 녹림과 장강은 적지 않은 출혈경쟁을 해 왔다. 불필요한 소모전을 지속하였기에 총채주의 결단이 중요했다.
‘수륙도가 네놈에게는 불귀도가 될 것이다.’
낭악은 오늘을 위해서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장강수로채의 총채주가 되었지만, 녹림왕으로 인해 뒷전으로 밀려났었다.
이제 장강과 녹림의 우열을 가릴 때가 되었다. 수륙도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천하의 녹림왕도 불귀의 객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놈도 생각이 없지는 않을 테고.’
수륙도에 함정이 있으리란 의심은 당연했다. 녹림왕이 약속을 어길 수도 있기에 음지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검혈대만 데리고 왔다. 수로채의 채주들은 수륙도 밖에 대기하도록 해 녹림왕의 의심을 피했다.
‘검혈대가 전부는 아니지만.’
실상, 수륙도는 단사의 작품이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단사는 수륙도에 수백의 그림자를 심어 놓았다. 녹림왕이 녹림구걸과 채주들을 모두 데리고 온다고 해도 수륙도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모두 데리고 오너라.’
녹림왕과 녹림구걸만 제압하면 녹림을 손아귀에 넣기란 식은 주 먹기였다. 나머지 놈들이 반발한들, 구심점을 잃은 이상 대세를 거스르진 않을 터. 녹림이든, 장강이든 주인을 잃은 놈들에게 의리를 기대하진 않았다.
수륙도에서 십 리 내외에 녹림과 장강의 주력이 있었다. 하나, 강과 육지를 두고 대치한 형태다. 누가 더 빠를지는 불을 보듯 자명했다. 신호를 내리는 즉시 수륙도는 장강의 배로 차단될 테니까.
꾸요요요요!
섬여의 반응에 낭악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도 발을 빼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었다. 녹림왕도 대외적으로 공표했기에 도망치진 않았다. 수뇌부를 대거 이끌고 왔다고 해도,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우열을 가려 주마!’
낭악의 눈빛에 승부욕이 짙게 깔렸다. 결판이 어찌 나든, 녹림왕과는 붙어 보고 싶었다. 항상 녹림왕의 뒷전으로 밀렸기에 오늘이야말로 수라도의 강함을 만천하에 증명할 기회였다. 그리된다면 굳이 차선책은 쓰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순순히 말을 듣는다면 말이지.’
낭악은 녹림왕이 승패를 인정할 거라고는 단정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트집을 잡거나 집단전이 되겠지. 그것이 수로채와 녹림의 습성이었다.
학수고대한 끝에 드디어 놈이 나타났다.
“어이, 낭악!”
오래전에 헤어진 불알친구를 부르듯 필도의 친근한 말투에 낭악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주변에 누가 있나 돌아봤으나,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휙!
낭악은 무의식적으로 기감을 개방했다.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녹림왕과 모르는 놈만 있었다. 녹수연맹의 맹주위를 다툴 결전의 장소에 혼자서 찾아온 것이다. 최소한 녹림구걸은 데리고 왔어야 했다.
상황만 놓고 보면 최상이었다.
겁도 없이 홀로 수륙도를 찾아왔으니 승패는 정해졌다. 하나, 필사적으로 인내했던 그간의 일들이 나열되면서 자존심을 긁었다.
낭악은 장필도가 보냈던 서신들이 상기되었다. 언제나 자신을 무시하며 도발로 일관했었다. 그때는 단순히 성질을 긁고 떠보려는 수작인 줄 알았었다. 이렇게나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을 줄이야.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무슨 짓이라니, 알 수 없는 말을 하는구나.”
“도발이라면 선택을 잘못한 거다.”
“대장전을 벌이자고 한 게 누군데. 혹시, 함정이라도 팠냐?”
장필도의 연이은 도발에 낭악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모멸감에 치가 떨리지만, 반박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대장전을 제안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그런 주제에 혼자서 왔다고 질책한들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다.
‘끝까지 나를 무시했겠다!’
주체하기 힘든 화가 치밀었지만, 낭악은 겉으로 드러내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오히려 분노가 차갑게 식으며 사태를 냉철하게 주시했다. 따지고 보면 굳이 화를 낼 필요도 없다. 도발은 도발일 뿐, 승패에 영향을 주진 않는다.
‘작금의 오만을 후회하게 해 주마.’
이후에 펼쳐질 녹림왕의 처절한 발악을 떠올린 낭악은 평소대로 돌아왔다. 신주이십일강이란 허울에 매몰되어 스스로에 대한 과신이 지나쳤다. 상황 파악 못 하고 제 잘난 맛에 사는 놈이라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요리할 자신이 있었다.
홀로 찾아온 선택을 평생을 두고 후회하게 만들어…… 어?
“사람이 왔는데, 여긴 상도 하나 안 차려 주나.”
“……응?”
여태 모르는 놈으로만 치부해 잊어버렸던 낭악과 검혈대가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녹림왕이야 당사자라서 그렇다 쳐도, 화창한 봄날 마실을 나온 듯한 여유로움이 굉장히 거슬렸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린 줄 알고 나대는 게냐!
미친놈인가?
그 와중에 음식 안 나온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한편으로 어이가 없었다. 녹림왕은 어째서 저런 미친놈을 데리고 온 거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진 않는다. 홀로 수륙도를 찾아올 때부터 정상적인 사고방식하고는 괴리감이 느껴졌다.
‘혹, 조력자를 숨겼나?’
일견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자만에 취했다곤 하나, 녹림왕은 신주이십일강에 속한 강자였다. 그런 놈이 아무 생각도 없이 산다고 보긴 힘들었다. 여태 수로채의 뒤통수를 얄밉게 노렸던 걸 상기하면 더더욱 그렇다.
“밥 안 줄 거야?”
점입가경일까, 연신 밥 타령을 하고 있었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 좋다는, 미신을 신봉하는 미친놈인가? 제아무리 미친놈도 이런 분위기에선 분노 조절을 잘하기 마련이었다.
“형님께서 밥 좀 달라시잖아. 물에서만 놀아서 그러나, 손님 대접이 형편없네.”
“형님이라고?”
“왜, 난 형님도 없는 줄 알았냐.”
“허튼짓은 통하지 않는다.”
“나, 신주이십일강이야.”
“그 앞에 수라도가 있을 것이다!”
탐탁지 않았던 낭악은 준비해 놓은 음식을 내어 주었다. 녹림왕을 이긴 후 축배를 들려고 했거늘. 죽기 전의 마지막 식사로 치부했다. 녹림왕은 쓸모가 있지만, 저놈은 반드시 쳐 죽일 거다.
하는 짓이 마치 천운권 같았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나, 천운권이 녹림왕에게 형님 소리를 들을 리 만무했다. 어쨌든 그 자체로 쳐 죽여야 할 놈임은 분명하다. 감히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천운권을 떠올리게 했다는 사실만으로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혹, 음식에 독을 타 봤자 소용없어. 나는 만독불침지체거든.”
“……?”
뭔 지체?
장애가 있나!
순간적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무인 중에 자신을 포장하고 싶어 안달인 놈들이 있기는 해도, 만독불침지체를 거론하다니. 신주이십일강의 독왕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사안이었다. 진짜면 육체를 난도질해서라도 알아내려고 할걸.
백독불침이 통상적으로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최선이었다. 만독불침지체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절대고수의 경우 내력을 통해 독의 자정작용을 이루긴 하나. 그것을 아예 독이 통하지 않는다고 할 순 없다.
“참고로 나는 절대지경이니까. 필도랑 같은 급으로 봐도 무방해.”
“우리 형님께서 많이 겸손하시지. 원래 나랑은 비교도 안 돼.”
“어이구, 내가 동생 하나는 잘 뒀다니까.”
“저도 형님이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것들이 대체 뭘 하는 거지?
이 자리에서 왜 자화자찬을 하고 지랄이야! 그리고 뭐가 어쩌고저째!
만독불침도 믿기 어려운데, 절대경의 고수란다!
설상가상으로 녹림왕이 거들고 있었다. 낭악으로선 생전 처음 당해 보는 광경이었다. 농인지 진심인지 구별이 되지 않아 울화가 치밀었다. 냉철하게 가라앉았던 심기가 굉장히 복잡해졌다. 더 듣고 있다가는 자신조차 이상해질 것 같아, 이쯤에서 차단했다.
“더 없어?”
“뭐?”
가져다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 처먹어!
양이 적지는 않았다. 사인 기준으로 음식을 내어다 주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동이 났다. 상에는 빈 접시만 요란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이 깨끗하게도 비웠네!
수륙도가 맛집인가?
“손님 불러 놓고, 박하네.”
“……가져다줘라.”
화가 치밀지만, 낭악은 음식을 내어다 주라고 했다. 오늘은 녹림왕을 이기고, 녹수연맹의 초대 맹주가 되는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이딴 일로 대결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았다.
우걱, 우걱!
후르륵!
내어 주는 족족 게걸스럽게 먹고 마시는 무진의 만행에 분위기가 더더욱 흉흉해졌다. 당장에라도 밥 잘 먹는 무진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리고 싶었던 검혈대원이었다.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잘 처먹어!’
정말 죽기 전에 밥 처먹으려고 여기 왔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사방에서 흉흉한 살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체하지 않고 밥을 멀쩡히 넘기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무감각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역시 형님답다!’
믿고 있었다고요.
사람 열 받게 하는 재주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 장필도는 자신도 모르게 엄지를 치켜세울 뻔했다. 본왕도 변죽에선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거늘, 형님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저처럼 막 나가는 쌩 동냥아치는 전무후무했다.
‘나도 전장에서 밥 먹어야겠구나.’
밥 먹는 거로 변죽을 울리다니, 형님의 기발함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꺼어억!
이십인분을 혼자서 꿀꺽하더니, 가지고 온 술을 반주로 삼았다. 배도 부르고, 수륙도 내부는 따뜻했다. 잠이 솔솔 올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결 중에 수면은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는지.
“소화 시키게 섬이나 둘러볼게. 함정 같은 거 있으면 처리도 할 겸.”
“부탁합니다, 형님!”
낭악의 안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대놓고 함정을 살피겠다고 하는데 제지할 명분이 없었다. 지나치게 당당해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차라리 은밀하게 살피려고 했다면 검혈대를 동원할 수 있겠지만,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막아서는 순간 섬에 함정이 있다고 자백하는 꼴이 되었다.
최후의 순간이라면 모를까, 굳이 체면에 손상을 입을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자신의 심리를 노렸다면, 성공한 개새끼였다.
‘저 새끼는 내 반드시 죽인다!’
자꾸 자신이 세워 놓은 계획에서 엇나가자, 낭악은 활활 타오르는 살의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당장 쳐 죽이고 싶은데, 죽여도 별 쓸모가 없을 것 같아 화가 치밀었다. 어차피 장필도만 이기면 끝나는 일이기에 더더욱.
-천하제일은 고독하구나~~!
-천하에 적수가 없어 살발하게 고독하구나~~~~!
-본 좌는 왜 이렇게 강해서 적수가 없을까나~~~!
-천상천하유아독존만독불침절대경이니라~~~!
-달마나 천마는 환생 안 하나?
-본 좌를 만나 봐야 자기들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달을 텐데.
저 새끼가 대체 뭐라고 씨불이는 거야!
말이면 단 줄 아나!
주둥이가 있다고 나불거려도 되는 세상이 아니다.
낭악과 검혈대는 당장 없다는 적수가 되어 놈을 난도질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이렇게나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욕구를 느끼기도 싶지 않을 텐데.
크크크크!
녹림왕의 키득거림에 낭악은 정신을 차렸다. 어쩌면 자신을 흔들기 위해 미친놈을 데리고 온 격장지계일 수도 있었다. 지금은 저런 놈한테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녹림왕의 강함은 진짜였다. 대장전에 전력을 다해도 쉽지 않은 승부이기에 냉정해야 했다.
“같잖은 수작질은 통하지 않는다.”
“보통, 수작질에 목숨을 걸진 않지 않나.”
이놈이나, 저놈이나!
낭악의 신경을 연거푸 긁었다. 하지만 더는 장필도의 의도대로 끌려다니지 않기로 했다.
스르렁!
말은 필요 없었다.
허튼짓으로 인해 시간만 빼앗겼다. 수라마도로 끝장을 내고, 승자로서 녹수연맹의 주인이 되리라.
-나를 방치하다니 후회할 텐데~~~!
-나는 섬에 수작질을 할 수 있는 진법의 대가이기도 한데~~~~!
-소싯적에 제갈공명도 나한테 맞으면서 배우고 그랬어, 이거 왜 이래!
-천기자도 날 만나면 사부님이라고 할걸!
여전히 들려오는 개소리도 낭악의 무도(武道)를 흔들진 못했다. 근래에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어도, 수라도의 성취는 극한에 도달해 있었다.
두둥!
건곤일척의 승부가 시작되려고 하자, 팽팽한 기세가 낭악과 장필도의 중심에서 부딪친다. 화경의 중반에 이르렀다고 알려졌던 수라도의 진체는 능히 절대경에 도달해 있음을 과시했다.
그간 녹림왕과 비교되었던 수라도의 심정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나도 절대경인데, 왜 녹림왕만 신주이십일강에 꼽냐는 수라도의 억울함을.
“우리 낭악, 많이 컸네.”
“내가 네놈보다 나이가 많다. 적당히 해라.”
그랬었나?
딱히 관심이 없었던 장필도는 곧바로 말을 바꿨다.
“무림은 나이순이 아니니까.”
“오늘 연륜의 무서움을 깨닫게 해 주마.”
장필도와 낭악의 육신에서 번지는 무형지기가 첨예하게 대치하며 서로를 가늠했다. 세간에 알려진 평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고수의 대결은 본인이 느낀 감각이 중요했다. 내가 상대를 직시하지 않으면 틈이 생기고, 방심은 화근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낭악은 오늘 수라도가 아닌 수라마왕으로서 녹림왕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결판을 내자.”
“잠깐.”
군림의 일보를 내디디려고 했던 수라도는 발도를 펼치기 전에 막혔다. 급하게 내력을 멈추었던 낭악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와 겁이 나는 것이냐?”
“그보다는 확실하게 해야지. 녹수연맹의 초대 맹주를 결정하는 자린데 순서도 없이 행하면 모양이 빠지잖아. 안 그래?”
“그래서 어쩌자고!”
“어쩌긴, 생사결에 서명하고 수인해야지. 그래야 나중에 딴소리해도 반박할 수 있고. 겁나면 하지 않아도 돼. 본왕은 네가 어찌 나와도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네가 무슨 수를 써도 나한테는 안 돼, 라는 의사가 다분한 장필도였다.
낭악은 울화가 치밀었다. 이놈한테는 무엇 하나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서명과 수인은 해야 했다. 장필도의 말대로 서명과 수인이 있다면 녹수연맹의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좋다, 나중에 딴소리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럴 줄 알고 준비했지.”
장필도는 품에서 준비해 놓은 문서를 꺼내 놓았다. 각자 가지고 있기 위해서 네 장이 필요했다. 주요 내용과 약관을 꼼꼼하게 읽어 보도록 시간을 주었다.
“난 서명하고 수인했으니, 너만 하면 돼. 혹시, 글을 못 읽는 건 아니겠지?”
“닥치지 못하겠느냐!”
“왜 화를 내고 그래. 먹고살기도 바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언제 글을 배우겠어. 나처럼 똑똑한 경우가 드물잖아.”
“시끄럽다고 했다!”
수적이나 산적이나 글을 배운 녀석들이 드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은연중 학식을 자랑하는 장필도가 낭악은 못마땅했다. 한시라도 빨리 승부를 내고, 초대 맹주로서 녹림왕을 발아래 두고 싶었다.
“날 이기면 녹림은 네 거야. 반대로 지면 장강은 내 거다.”
“운이 좋아 신주이십일강에 든 주제에 언제까지 잘난 체를 할 셈이냐! 이제 곧 네놈의 실체를 끄집어내 주마.”
“운이 좋아서 신주이십일강이라니, 그건 좀 많이 나갔다. 세상 사람들이 병신도 아니고, 아무나 뽑아 주겠어? 대다수가 병신이라도, 보는 눈은 있더라고.”
“시끄럽다, 네놈에게 현실을 알려 주마!”
낭악은 대화를 단절했다. 말을 섞을수록 상황이 좋게 흘러가지 않았다. 대화로 승자를 가릴 거였으면, 이렇게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다. 모든 건 승자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