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22
421 거절(2)
과거 시험이 끝이 났고, 등락이 정해졌다.
세 번의 시험을 거쳐 황도에서 치르는 마지막 시험에 이르면 어느 정도는 실력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통상적으론 대석학의 가르침을 받거나, 고관대작의 자제들이 과거에 유력할 수밖에 없다.
이번 과거의 장원은 의외였다.
지난 과거와 달리 빠르게 치러졌다는 점도 있겠지만, 대석학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특히 약관의 나이에 모든 시험을 통과하여 장원급제 했으니 적지 않은 파문을 불러왔다.
전임 대학사가 차린 학관의 학생이나 고관대작의 자제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나이가 너무 어렸다.
과거에 급제하려면 최소한 이립은 되어야 했다. 갓 약관에 이른 청년이 모두를 제치고 장원급제를 하다니 상식적인 선에선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한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장원급제 한 염산호의 시험지를 공개했기 때문이다. 시험지를 본 사람들은 의심을 지우는 걸 넘어 경악했다. 나이와 연륜을 뛰어넘는 깊이와 혜안이 전해졌다. 과거 누구의 서체도 따르지 않은 독창적인 기법과 감히 헤아리기 어려운 지식이 담겨 있었다.
그뿐이랴, 단순히 지식을 쌓기만 하지 않고 현실과 대응하여 가장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학자들에게 대오각성의 깨달음을 주었다.
전대미문의 천재를 부정할 수 있는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명필과 혜안을 지닌 천재를 매도한다면 그 어떤 유생이 과거에 도전하겠는가. 일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는 자들도 있었지만, 대세를 감히 거스르진 못했다.
한편으로 예상을 뒤엎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통상적으로 과거 시험지는 비공개로 한다. 황실의 일로 치부하여 급제자의 시험지를 공개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매번 뒷말이 많이 나온 것도 사실이었다.
황실의 분명한 입장 발표에 불만과 불신을 가졌던 유생들에게 시험지의 공개는 황궁에 대한 신뢰를 쌓는 전환점이 되었다. 고관대작의 자제나, 대학사의 제자가 아니더라도 노력만 하면 급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사건이 되었다.
“아버지가 밀어준다고 했으니 정일품까지 탄탄대로겠지.”
“이제 정오품 학사라고.”
“한 방에 정일품까지 가는 방법도 제시했잖아.”
“말이 쉽지.”
염산호는 장원급제를 한 후 황제의 앞에서 관직과 상을 받았다. 그 일련의 과정이 간단하지는 않았다. 황제의 앞에 서려면 복잡한 관례와 절차가 있었다. 정작 황제의 인가를 받는 건 금방 끝났지만, 과정만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그것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간소화했다고 하니 말 다 했지.
“정말 싫다.”
“전 대륙의 유생들에게 돌 맞을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싫은 건 싫은 거지.”
“이래서 천재들은 일찍 죽는 모양이다.”
“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거든!”
“알아. 농담이야.”
염산호는 어서 빨리 임무를 마치고 송호문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황궁의 답답한 분위기는 숨을 막히게 했다. 그런 곳에서 적응해야 하는 현실이 탐탁지는 않았다.
“그래도 돈 먹인 값은 한다.”
“일만 냥이나 받아 처먹고 다른 짓 하면 곤란하지. 관리란 것들이 왜 이렇게 돈을 밝히는지 원.”
“너는 돈 싫냐?”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니야!”
청탁이긴 하나, 청탁이 아니기도 했다. 그저 공정하게만 봐 달라는 부탁이었다. 염산호는 그 어떤 부정도 없이 실력만으로 장원이 된 것이다.
이번에는 태진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곤 하나, 받아들이지 못하면 무용지물이었다. 짧은 시간에 방대한 지식을 쌓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산호가 대단했다. 무공으로 따지면 단숨에 화경의 벽을 무너뜨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됐으니까, 한잔해.”
“오냐. 이런 날 아니면 언제 마시냐.”
“마시고 죽자!”
“안 죽는다니까.”
염산호에게 생은 의미가 아예 달랐다. 체질적으로 오랜 기간 병약한 삶을 살아 봤기에 작금의 건강한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농담으로라도 죽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저택도 받고, 좋겠다.”
“원하면 줄게.”
“진짜?”
“아니.”
내 집을 가진 염산호와 송호문의 세대원에 불과한 태진의 차이였다. 장원급제로 황도에서 집을 살 자금을 받았다. 이 돈을 가지고 저택을 사긴 힘들어도, 정운상단의 도움으로 괜찮은 집을 구했다.
“정운상단이 절강, 강소, 산동, 하북까지 진출했다더라. 황도에서도 영향력이 커졌고.”
“이번 일로 석가장은 움츠러들 테니 눈 뜨고 코 베이는 심정일걸.”
“황명이면 만사형통일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봐.”
“석가장주는 황명이 양날의 검이라는 걸 알기에 견제를 하는 선에서 타협한 걸 거야.”
오랜 세월 상계를 좌지우지했던 대상인답게 판단이 정확했다. 그런 자는 어지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이번에도 속셈을 따지면 대놓고 발뺌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여하튼 공과 사를 떠나 무림맹은 황실의 체면을 세워 줘야 했다. 석가장을 마신교의 끄나풀로 몰아 무너뜨린다면 황실이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형평성과는 별개로 황명은 그 어떤 정의보다 우선시되어야 할 힘이 있다. 그 힘을 적절한 선에서 양보한 석가장주의 선택을 높이 샀다.
“사부님에게도 쉽지 않은 상대야.”
“네가 아직 아버지를 모르는구나. 머리 쓰는 놈치고 아버지를 이길 놈은 없어.”
짱돌 꿀리는 순간, 짱돌로 찍히는 거지.
“설마 힘으로?”
“몰래 들어가서 뚝배기부터 깨겠지.”
태진이 아는 한 아버지는 절대 머리 쓰는 놈들의 방식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
염산호는 아들이란 놈이 아버지를 저딴 식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터질 뻔했다. 하나, 그간의 행보를 보면 이상하진 않았다.
“그랬으면 진작 손을 썼겠지.”
“아니면 말고.”
“과연, 사부님의 아들이 맞구나.”
“난 주워 온 놈이야.”
서러움이 밀려왔는지 태진은 눈시울을 붉혔다. 반드시 강해져서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기로 다짐했다. 령 매와 둘이서 알콩달콩 살 것이다. 집에 찾아가나 봐라. 손주 손녀가 보고 싶다고 졸라도 안 보여 줄 테다.
“취했냐?”
“전혀.”
한 잔 두 잔 비워 내는 술병이 많아질수록 밤의 정취가 깊어져 갔다. 자정이 넘었다는 황궁의 타종 소리가 길게 울렸다. 멀리까지 들리도록 각 지점에서 시간에 맞춰 종을 울리는 사람이 있었다.
뎅뎅뎅!
술에 취하지는 않았다. 술 몇 병에 취하기에는 체질도, 내력도 너무 강해졌다. 그간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진솔하게 털어놓는 시간이 되었다.
“쌓인 게 많구나.”
“그냥 한 소리야. 그보다, 온 거 같다.”
자리에서 일어난 태진은 조용히 방에서 나와 소피를 보러 가는 척하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까악!
급습에 당황한 여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진은 자연스럽게 제압하여 방으로 끌고 왔다. 여인들의 복면은 벗겨졌고, 얼굴이 드러났다.
“단 소저께서 여긴 어쩐 일입니까?”
“……!”
염산호의 물음에 단소정과 능하는 답하지 못했다.
한동안 그녀들은 불신 가득한 눈으로 태진을 보았다. 일전에 객잔에서 무위를 보여 주긴 했어도, 손 한번 못 써 보고 제압당할 줄은 몰랐다.
‘이 사람 강해!’
능하는 호위무사로서 아가씨를 지키지 못한 현실에 좌절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
탁탁!
태진은 점혈을 풀었다.
단소정과 능하는 자유로웠지만, 수치심도 느꼈다. 제압을 당하고 목을 잡힌 채로 끌려왔기 때문이다. 좌우 양손으로 늘어진 목을 잡았다.
‘핏줄은 어디 가지 않는구나.’
‘……잡을 데가 없잖아.’
염산호의 전음에 태진의 반박이 늦었다. 실상 잡기에는 목이 가장 편했다. 아버지가 어째서 목을 잡는지 이해가 되었다. 잡는 맛이 있었다. 중독되면 아버지처럼 되기에 금단증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절제했다.
또르르!
염산호는 잔에 술을 채워서 단소정과 능하에게 주었다. 놀란 가슴을 다스리고 진정하라는 의미로.
“한 잔 드시죠. 긴장이 풀릴 겁니다.”
“긴장 풀 생각 없어요.”
“이런, 빈틈이 없으시군요.”
“비꼬는 거면 곤란해질 거예요.”
밤중에 몰래 들어오려다가 대번에 발각되어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 앞에서 빈틈이 없다는 말이 칭찬으로 들릴 리 만무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은신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했기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서둘렀어.’
단소정은 염산호의 호언장담을 반쯤은 농으로 들었었다. 한데, 일말의 반론도 없이 보란 듯이 장원급제를 했다. 처음에는 청탁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본 시험지는 경이로웠으며,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이제껏 상상했던 일들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객잔에서 나누었던 식견도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명필이었어.’
획의 균일함과 전체적인 구도는 인간적인 영역을 넘어섰다. 명필가를 많이 봐 왔음에도 염산호의 필체는 새로웠다. 그래서 다급해졌다. 너무 대단해서 시간이 늦으면 노리는 자들이 많으리라 봤다. 그 전에 선을 대려고 했는데, 초장부터 엇나가고 말았다. 순진한 줄 알았더니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다.
짠!
카아!
산호와 태진은 싫다는 사람에게 술을 권하진 않았다. 하던 일을 마무리하듯, 술잔을 기울였다.
이각 동안 멀뚱히 앉아 있게 된 단소정과 능하는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을 앞에 두고 자기들끼리만 얘기를 하는 경우가 어디 있냐고!
‘젠장!!’
성격이 나올 뻔했던 단소정은 애써 심기를 다스렸다. 능하가 급히 나서지 않았다면 곤란했을 것이다. 저들의 행태가 맘에 안 들긴 하지만 밤중에 몰래 들어오려던 원죄를 고려하면 따져 묻기는 적반하장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언제까지 자기들끼리만 마실 거냐고!
단소정은 이처럼 무시를 당했던 적이 있었나 되돌아봐야 했다. 능하의 분노한 얼굴만 봐도 답은 나왔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도, 본래의 얼굴과 완전히 다르진 않았다.
“이봐요,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너무한 건 단 소저가 아닐까요.”
“제가 잘못했다는 건 인정해요. 그래도 사람을 앞에 두고 대놓고 무시해선 안 되죠.”
“정체를 숨기는 분한테 속내를 터놓으란 말씀이군요.”
“그걸 어떻게?”
“친구가 점혈하면서 역용한 걸 알아냈습니다. 굉장히 뛰어난 역용술이라더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전에는 신나게 떠들어댔으니 솔직히 창피합니다.”
술잔을 나누면서 전음을 보낸 것이다. 그쯤 되자 화를 내려던 단소정은 말문이 막혔다. 이연타로 직격을 당해서인지 정신이 얼얼하다.
“미안해요.”
“안 됩니다. 아가씨!”
실수를 인정한 단소정이 역용을 풀려고 하자, 능하가 만류했다. 아직은 이들을 완전히 믿기에는 꺼림칙했다. 한편으로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한 악감정도 있고.
“강예예요.”
“……설마?”
술 잘 마시던 염산호와 태진이 급히 예를 갖추었다. 너무 놀라서 살짝 술을 토하기까지 했다.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예는 됐어요.”
“그러지요.”
“정말 뻔뻔하네요. 혹시 알고 있었어요?”
“전혀 몰랐습니다.”
강예는 통찰이 담긴 예리한 눈길로 염산호를 응시했다. 발뺌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를 담았다.
“아는 것 같은데?”
“사람이 너무 놀라면 담담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단소정은 염산호의 놀람을 오래 구경하고 싶었지만, 알고 그러는 건지 판단이 서진 않았다. 하나, 사전에 이들에 대한 조사를 했다.
알고 봤더니 만만치 않은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신분으론 자신과 비교가 되지 않지만, 갖춘 힘은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현재로선 연관성이 없는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만약 이 일이 실패하면 돌이키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저와 일 하나 해요.”
“싫습니다.”
***
석가장은 악운과 마주하고 말았다. 무림맹의 감찰단과 미친놈이 친분을 과시하며 같이 온 것이다.
무림맹의 감찰단은 황명이 있어서 적당한 선에서 살피는 정도에 불과했다. 근데 이 미친놈은 사사건건 방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황명을 어기고 강압적인 수단을 썼다고 하기도 불분명하다.
“그때는 너무 놀라서 심장이 덜컥 가라앉는 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어쩌란 것이오?”
“정신적 피해 보상이 필요해.”
“그런 말 같지 않은 요구를 들어줄 성싶은가?”
“싫다면 하는 수 없지.”
석가장주는 천운권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상식적으로 정신적인 피해 보상으로 십만 냥이 과도하단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렇게 끝날 줄 알았는데, 사태가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렀다. 정운상단을 견제하지 못하는 데다가 천운권이 따라다니자 일 자체가 잘 안 되었다. 가는 곳마다 관심이 집중되어서 곤란했다.
그뿐이랴.
녹수연맹에서 천운권을 관심 대상으로 지목했다. 자연스럽게 천운권과 같이하게 된 석가장은 녹수연맹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그렇다고 천운권을 내보낼 수도 없는 형편이다.
어쨌든 천운권은 무림맹의 감찰단에 속해 있었다. 씻지 못할 잘못을 하지 않는 이상 내치긴 힘들었다.
돌연 녹수연맹에서 천운권을 내보내지 않았다고 통행세를 세 배로 올려 버렸다.
“네놈은 할 일이 그렇게 없느냐?”
“없어. 놀기도 바빠.”
이……개!!
침착하기로 정평이 난 만금산 석주태는 생애 처음으로 이성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이래서 동생도 잘 둬야 해. 이 감찰이 끝나는 날이 오려면 말이야.”
“……(부글, 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