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35
434 분란제조기(1)
누더기가 되어 버린 검은 장포 사이로 흐른 핏물이 검게 변색이 되었고, 오른팔 부위는 뜯겨 나갔는지 헐렁했다. 악전고투를 펼친 흔적이 역력해 보였다.
그는 부복을 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상태를 말해 주고 있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나, 명을 기다렸다.
빠득!
당장에라도 선혈이 뚝뚝 떨어질 강렬한 살의를 풍겼다. 분노한 혈마장 조웅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의 동료였던 현마장이 죽고, 얼마 되지도 않아 철마장의 부고(訃告)를 보고받았다.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어야 할 것이다.”
“목숨을 걸겠습니다.”
“하찮은 목숨 따윈 필요 없다. 어서 꺼져.”
“충!”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선 진고월이 피를 흘리며 사라지고서도, 답답한 침묵이 이어졌다. 예상하지 못한 사태와 비보가 겹쳐져 혈마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검제와 취선에게 놀아났군.”
“이번에도 천운권을 미끼로 썼습니다. 아마 천운권도 자신을 미끼로 쓴 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미친놈이긴 해도, 영악하긴 하군.”
“게다가 다음에도 제거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철마장께서 압도했다고는 하나,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천운권의 경지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석가장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당장 천운권을 제거할 필요는 없었지만, 철마장의 의견에 동조했었다. 그 안일한 결정이 일을 키운 꼴이 되고 말았다.
“검제가 석가장을 흔들 목적으로 천운권을 보낸 건 확실하군.”
“그래서 문제입니다. 이번에 석가장주가 우릴 속였는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속였다고 봐야지 않나?”
“당장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마저도 검제와 취선의 계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로선 석가장을 잃는다면 흑상을 수면 위로 드러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의혹을 키웠다고 봐야겠군.”
“석가장주를 외면한다면 그것 역시 무림맹으로선 아쉬울 게 없는 일이 됩니다.”
“그렇다고 마냥 석가장주를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느냐.”
석가장주를 죽인다고 끝날 문제였다면 어렵지 않은 일이나, 상계는 무림과 달랐다. 주인이 죽었다고 해서 자금을 온전히 끌어올 수가 없는 구조다. 그렇기에 흑상을 석가장과 연계하여 천월로 탈바꿈할 기회를 노린 것이다.
온전하지 않은 석가장을 흡수했다간 도리어 정운상단에 먹힐 수도 있었다. 무섭게 치고 나가고 있는 정운상단으로 인해 흑상마저 자금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검제와 취선이 문제로군.”
“그 둘은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그에 대한 준비는 완벽하겠지?”
“교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지원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혈마장에겐 여전히 답답한 형국이었다. 다섯의 천군이 죽고, 두 명의 마장이 또 죽었다. 각 주에서 활약하던 암주들마저 대부분 제거당했다. 더는 전력 소모를 감당하기가 힘들다. 본단에서도 그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다.
‘어쩌다 이리 꼬인 거지?’
원래는 이 시국에 일어나지 않을 환란이었다. 시기를 계속 앞당길 수밖에 없도록 사건이 터지고 있었다.
이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라면 하늘의 농간이 아닐 수 없었다.
‘무림지계가 통하지 않는다면…… 아니다.’
실패를 떠올렸다는 사실만으로 혈마장의 눈 밑은 깊게 침전이 되었다. 어떻게든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무림을 흔들어 놓고, 실패한 계획들을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차후 새외 공략만 이루어진다면 실패를 만회하고도 남았다.
‘잠깐, 이놈이 혹시?’
천운권이 흑천부로 가게 된 것은 모두 계획된 일정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흑천부에서 처리할 수 있을까?”
“오히려 좋은 기횔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잘된 일일 수도 있다. 미끼라곤 하나, 천운권은 엄연히 무림맹의 감찰관이다. 눈엣가시 같은 놈을 이번에는 역으로 이용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섣불리 행동하진 말라고 해.”
“그리하겠습니다.”
당장 죽이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더는 잃어서는 곤란했다. 이런 때일수록 선후를 잊으면 곤란하다.
***
자잘한 사건들은 원래 소문이 잘 안 난다. 살인 사건 하나 일어났다고 세간의 관심을 받기에는 땅이 너무 넓었다.
그러나 원체 주목도가 높은 사람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자신을 알리지 못해 안달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천운권이야말로 이 시대의 획을 그을 인물로 낙점을 받고 있었다. 대협이나 영웅은 몰라도, 천운권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천운권에 쏠린 이목만큼이나 소문도 빠르게 퍼졌다.
-녹림왕도 한 방 먹었구나.
-녹림구걸이 망신을 당했으니 녹림왕으로선 손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거지. 이번 기회에 뒈졌으면 했는데.
-천운권도 알고 보면 불쌍해, 이용당한 거잖아.
-사고나 치고 다니는 천운권을 검제께서 친히 중용해 줬으면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지.
-사람을 미끼로 썼는데, 그것도 중용이냐!
-마신교를 찾아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어. 그리고 죽지 않았으면 된 거지.
-천운권도 알면서 했다잖아. 그럼 서로 좋은 거지, 뭘 또 따지냐.
-그나저나 천운권도 이젠 무시 못 하겠다. 무림맹, 녹수연맹, 마신교까지 삼파전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이런데도 팔팔하게 살아 있는 걸 보면 대단한 거 아닌가.
-하긴, 인정할 건 인정하자. 어쨌든 화경의 고수라고!
무림맹과 녹수연맹에선 사건을 감추고 싶었겠으나, 천운권은 곧장 자금을 투자하여 널리 전파했다.
물론, 내용은 전적으로 본인 위주였다. 걸러서 들어야 하기에 따로 조사가 이루어졌었다.
-석가장도 대단해.
-석가장이 왜?
-강호의 대의를 위해서 희생을 각오했잖아.
-상행에 직계라도 있냐?
-어쨌든 그렇다고.
천운권에 가려져서 그렇지, 석가장에 대한 소문도 돌았다. 무림맹이 천운권을 내세워 마신교를 끌어냈듯, 이번 상행은 굉장히 위험했다. 석가장의 상인들과 표사들이 전멸할 수도 있는 작전이었다.
일전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무림맹의 뜻을 따랐다는 말도 있었다. 상행에 석가장의 직계가 포함되지 않아 의심스럽기는 하나, 대의를 따랐다는 점은 높이 샀다.
파앙!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고가의 탁자가 크게 흔들렸다. 내리친 손은 여전히 떨림을 감추지 못했다. 모든 일을 계획하에 실행해 왔던 석가장주의 삶이 말라 버린 나무처럼 비틀렸다.
부르르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는 분명했다. 그 망할 종자가 본장으로 오고 나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한편으로 그 화근을 처리하지 못한 흑상에 대한 미덥지 못한 불신도 있었다.
“형님, 접니다.”
“들어와.”
방으로 천금각주가 들어왔다. 이번 일을 장로들과 협의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차후 알려질 수도 있으나, 당장은 의혹을 증폭할 소지가 다분했다.
“어떻게 됐어?”
“당분간은 연락을 자중하랍니다.”
“이제 연락을 하고선, 그딴 식으로 대응을 해!”
“형님답지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하아. 네 말이 옳다.”
분노에 잠식되어 이성을 잃는다면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냉철하게 현실을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그러나 당장 선택을 하기에는 주어진 정보가 빈약하다.
“놈들이 우리 뒤통수를 쳤다고 보느냐?”
“무림맹의 간계일 가능성이 크지만, 전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흑상의 배후가 마신교였군.”
“우리로선 손을 떼기도 모호한 처지입니다. 저들이 어찌 나올지 예측하기가 힘듭니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거래를 터 왔으나,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손을 잡았다. 자신의 대 이전부터 연관이 있는 이상, 가문의 내부에 손을 썼을 수도 있었다.
‘직계조차 온전히 믿을 수 없다니.’
관건은 저들이 강호를 장악할 수 있느냐였다. 만약 그렇다면 손을 놓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침체하였던 무림맹이 태동하고 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무림맹은 건재함을 과시했다.
“정운상단과 손을 잡고 본장을 흔들어 보려는 그자의 수작이 분명합니다. 이번에 죽어 버렸어야 했는데.”
“나도 너만큼이나 죽이고 싶지만, 당분간은 손을 떼는 수밖에 없다.”
분통이 터지는 현실이었다. 황명으로 얻은 면죄부를 한순간에 날려 버리고 말았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천운권임에도, 처분할 방도가 없다. 손발이 묶인 이상 억장이 무너지지만, 정운상단이 상계를 지배하는 꼴을 눈 뜨고 지켜봐야 했다.
“형님, 방도가 없겠습니까?”
“방도는 정운상단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뿐이지 않더냐.”
“정면 대결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해야 한다.”
흑상이든, 무림맹이든 우선은 석가장이 온전해야 했다. 정운상단에 잡아먹히게 된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정운상단의 확장을 막아야 했다.
하나, 더는 시끄러운 사건에 연루되면 곤란하다. 최대한 자중하고, 상인으로서 승부를 봐야 했다.
“형님, 사파 무림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천운권이 흑천부에서 뭔 짓을 할지 모릅니다.”
“이놈이 사람이면…… 빌어먹을!”
사람 같지도 않은 놈을 믿어야 하는 현실에 석가장주와 천금각주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렇다고 놈이 사고 치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힘들었다.
“분점에 연락해서 최대한 놈이 원하는 대로 편의를 봐 주라고 해.”
“예, 형님!”
일방적으로 처맞았는데, 복수는 못 할망정! 조용히 지내 달라고 뇌물을 바쳐야 하다니, 석가장주는 치가 떨렸다.
제발 조용히 지나갔으면 했다.
다다다다!
맹 장로가 화급을 다투며 장주를 찾았다. 이젠 누군가 서두를 때마다 심장이 놀란다.
“무슨 일이신가?”
“녹수연맹에서 통행세를 네 배로 올리겠답니다.”
경지에 이르진 않았어도 건강을 위해서 무공을 익혔던 석가장주는 뒷목을 잡고 쓰러질 뻔했다.
“대문에 소금 뿌려.”
“미신입니다.”
“닥치고 그냥 뿌려!”
“옙!”
석가장주는 평소 믿지 않는 잡신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번 위기를 넘긴다면 반드시 놈에게 철퇴를 가하리라, 다짐 또 다짐했다.
***
후비적, 후비벅!
전용 마차에 누워 있던 무진은 귀가 가려운지 연신 검지를 놀렸다. 항상 청결에 신경을 썼기에 먼지 한 톨 떨어지지 않았다. 공령체에 도달한 육체는 자연적으로 최적화를 이루기에 때가 쌓일 여지를 주지 않는다. 절대경의 고수가 목욕을 하지 않아도 항상 매끈한 피부를 유지하는 이유였다.
피부 미남이 되고 싶다면 절대경에 도달하면 된다.
“누가 욕하나?”
원흉을 특정하진 않았다.
살다 보면 수백만 명한테 욕을 먹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게 바로 인생의 쓴맛이다. 전혀 의도치 않았으나, 오해에서 비롯한 잘못된 비판들.
무진은 겸허히 받아들여 무병장수의 지름길로 활용했다. 남이 욕하든 말든, 초심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갈 것이다. 수백만 명이 욕한다고 포기한다면 사내로서 실격이었다.
한 명을 패면 악당이지만, 수백만 명을 패면 영웅으로 불릴 수밖에 없으니.
‘답은 미래에 있지.’
-석가장주의 억장이 또 무너지겠군.
‘애초에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이제는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정말?’
-썩을!
사람은 과거를 반추하여 미래를 예측하지만, 무진은 미래를 확정하여 과거를 추궁했다. 미래에 뚜렷한 명성이나 악명이 없는 편이 현재로선 나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이름도 모르는 연놈들이라도 눈앞에서 알짱거리면 참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