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37
436 분란제조기(3)
괜히 아는 척을 하는 바람에 코가 꿰인 갈호상이었다. 삶의 목표인 호상(好喪)을 누리기가 이렇게나 힘들었다. 함께 흑천부를 수호했다고 자처했던 동료들은 눈깔을 피했다. 같이 훈련하고, 밥 먹고, 똥 쌌던 우정은 의미가 없었다.
과연 우리는 사파였다.
“먹고살기 힘들지?”
“삶이 다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속세를 등진 도인처럼 말하는구나. 나중에 무당파에 소개해 줄까? 재능은 없지만 내 처제들이 제법 영향력이 있어.”
“헙, 전 흑천부의 무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낍니다.”
“누가 잡아먹어, 편하게 얘기해.”
“저는 아주 편합니다.”
갈호상은 편하게 말하라는 무진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지만, 늘 그렇듯 진짜로 편하게 말하면 인생이 피곤해진다. 자고로 내뱉은 말은 주워 담지 못한다고, 말단 무사라면 반드시 입을 조심해야 했다.
“철저하네. 우리 집 문지기로 쓰고 싶은데. 달에 스무 냥 어때?”
“……아닙니다!”
박봉에 시달렸던 갈호상은 홀라당 넘어갈 뻔하다, 식겁하며 급히 부정했다. 과연 세간의 악명이 거저 붙지 않았다. 말로 사람의 혼을 빼 놓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이런 간사한 혓바닥을 가진 자는 조심해야 했다.
‘어머니, 오늘 못 들어갈지도 모르겠어요.’
갈호상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자신을 키운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해 왔었다.
‘의리도 있고, 맡은 소임도 잘하고, 괜찮은데.’
-장난 그만해라.
무진도 농담으로 한 제안이었다. 굳이 적지 않은 돈을 써 가면서까지 빼 올 가치는 없었다. 그저 흑천부의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아볼 겸 찔러본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누워 있으면 먹잇감들이 찾아올 줄 알았다. 악명이 자자한 천운권이 궁금하지도 않나. 유명인을 보고 싶은 인간의 호승심을 자제했다. 호전성이 강한 사파의 무인들이 알아서 자제했을 리는 만무하고.
‘이거 참 곤란하네.’
-뭐가?
‘선수를 쳤잖아. 알려진 바와 다른 모양이야.’
-세월 앞에 장사 없지.
‘아, 귀찮은데.’
-대화하기 귀찮다고 사람 죽이는 거 아니다.
흑천부주는 신주이십일강의 사마에 속하는 암흑신마다. 원체 호전적인 성향으로 알려져 무림맹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꼽고 있었다. 당연히 문턱을 넘을 때부터 신경전을 벌일 줄 알았는데, 문지기의 태도가 무진의 예상과 달랐다.
‘사파 새끼들이 간 보고 지랄이야.’
-네가 그 지랄을 떨었는데 시비 걸고 싶겠냐.
‘똥개도 제집에서는 삼할은 먹고 들어간다잖아.’
-넌 그냥 똥이야.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고!
‘그럼 더더욱 먹고 싶지 않겠냐.’
-우웩, 더럽게!
똥개가 똥을 피하진 않잖아.
무진은 더러움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발휘했다. 여튼 흑천부를 떠보기가 어렵게 됐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깽판을 치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 악명의 약빨이 떨어졌나? 아니면 너무 강해서?
‘역사가 비틀리는 바람에 예측이 어렵네.’
-그럼 언제까지 날로 먹으려고. 이쯤 했으면 너도 생각을 좀 해라.
‘어떻게 됐더라.’
-고민하기는.
이놈의 마왕이 이랬다저랬다 지랄이다!
신주이십일강 중 마지막까지 남은 자는 고작 아홉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전부 뒈졌다. 그로 인해 마신교와의 전투에서 초중반까지 속절없이 밀렸었다.
문제는 무림맹의 맹주가 교체되었던 때와 흑룡성이 마신교에 복속되는 과정이 미묘하다는 점이다. 마신교가 정사를 막론하고, 새외까지 지배했던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역사가 되었다. 미래를 알고 대비하기엔 이젠 어려웠다.
‘신주이십일강의 색출은 암주들이 나섰으니까, 여기도 있으려나?’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흑룡성이 아예 마신교의 앞잡이로 전락했다면 모를까, 무턱대고 원한을 맺기에는 꺼림칙했다.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이어진 골치 아픈 상념은 탁 트인 장소로 들어서면서 깨졌다.
“이곳이 흑천부가 자랑하는 흑원정입니다.”
“과연 집에는 정원이 있어야 해.”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샘을 이용해서 만든 정원으로, 호수처럼 굉장히 넓고 화려했다. 다리로 이어 놓은 네 개의 누각과 조각상이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동서남북으로 세워진 정자에는 사방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북쪽의 현무각에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 있었다. 주변으로 잉어 떼가 시끄럽게 분탕질을 쳤다. 먹이를 던져 줄 때마다 파닥거렸다.
스윽!
인기척을 느낀 여인이 무진과 일행을 보았다.
갈호상은 여인의 신분을 알려 주었다. 혹시나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천운권도 위험하지만, 여인도 함부로 대해선 안 되는 인물이었다.
“흑봉 구양옥설 아가씨이십니다.”
“아, 그래.”
시큰둥한 무진의 반응에 갈호상은 속으로 놀랐다. 소공녀는 부주님이 가장 아끼시는 여식이며, 금지옥엽이었다. 사파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명의 여인에 꼽혔다. 자신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소공녀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탕아라며!’
천운권의 방탕한 소문을 들어서 문제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거늘 기우에 불과했다. 갈호상은 세간의 소문과 천운권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수라면 내려다보는 기색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또 그렇진 않았다.
‘이거 혹시?’
-입맛 다시지 마라.
촉이 왔지만, 무진은 일단 내색하지 않았다. 즉흥적이라서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한데, 마침.
멍!
무진이나 철호와 달리 서문호는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유독 봉이 들어간 별호에 약한 사내였다. 당문의 독봉과 함께 쌍봉으로 불릴 만한 여인이었다.
“독봉한테 차이더니, 분풀이하냐?”
“그런 거 아닙니다.”
서문호는 아차 싶었으나, 돌이킬 수 없음에 절망했다. 저 표정을 보니 백 년간 놀림감이었다. 서둘러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편이 이로웠다. 앞으로 두고두고 놀릴 걸 상기하니 장래가 암담했다.
“사부님, 볼 거 없으니 어서 다른 곳으로 가시지요.”
“볼 거 없다니, 실례가 많구나.”
서문호는 기감이 사부에게 먹혔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등 뒤를 돌아볼 자신이 없었다. 서늘한 기운이 등을 쑤시자, 한숨을 쉬며 포기했다.
하아아!
정자에 있던 흑봉이 앞에 있었다. 사부의 수작질에 빌미를 제공했으니, 내 발등 내가 찍은 격이다.
“그러게요, 굉장히 실례되는 말씀이네요. 제가 그렇게 볼품없는 여잔가요?”
“아닙니다. 볼 거 아주 많습니다.”
“어머! 초면에 너무 노골적이세요. 원래 그런 분이셨나요?”
“……그런 뜻이 아니라!”
흑봉은 서문호가 봐 왔던 정파의 여인들과는 기질이 아예 달랐다. 사파의 여인답게 직설적이고, 호전적이었다. 그 앞에서 멍청하게도 말을 더듬고 말았다.
자신감 있게 사부처럼 받아치…… 이건 아니군.
저런.
무진은 제자의 부족함을 두고 보지 않았다.
설상가상과 첩첩산중은 기본이었다.
“우리 호가 예전엔 독봉을 아련하게 연모했거든. 그래서 봉이 들어가면 사족을 못 써. 철호한테 빼앗기긴 했지만.”
“불쌍한 분이시네…… 음. 엄청난 분한테 빼앗겼네요.”
철호가 돌아서자 흑봉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을 치고 말았다. 놀리는 맛이 있어서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 했는데, 사파 최강의 흉면(凶面) 도악도살(屠惡刀殺) 굉웅을 능가했다.
저런 사람을 독봉이 왜?
얼굴 안 보나?
사내의 얼굴 뜯어먹고 살진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적응은 할 수 있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놀라고 싶진 않잖아.
흑봉은 본 적도 없는 독봉의 독특한 취향에 감탄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는.
‘사파 년치곤 정상인데.’
-어딜 봐서.
‘어쨌든 냄새가 나.’
-개코냐.
정말로, 진짜로! 원치 않지만, 분란의 냄새가 진했다. 자고로 미녀는 사건에 휘말리기 좋은 요건을 갖추었다. 벌이 꽃을 찾듯, 사내는 미녀를 따르기 마련이다. 때론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하물며 금지옥엽이란다, 이건 또 못 참지.
‘아내가 나를 찾아왔던 날이 떠오르네.’
-미쳤구나.
‘원래 미치지 않고선 사랑을 못 해. 나이 들수록 이거저거 따지고.’
-아니, 네 마누라가!
‘유진이 욕하지 마라. 다 엎는다.’
-네 아내만 한 사람이 없다.
짜증은 나도, 마왕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당시 무진은 청양에서 알아주는 개망나니였다. 인생을 무의미하게 허비하던 자신의 어디가 좋아서 찾아왔을까? 생각해 보니 사랑이란 그런 것 같다. 아무런 조건도 없는.
참 순수했지.
술 마시고 깽판 치기는 했어도.
“철호야, 환골탈태를 잊지 말거라. 여자는 내 아내와 미주 빼고 다 똑같아.”
“예, 사부님.”
철호의 서늘한 눈빛에 흑봉은 마른침을 삼켰다. 살기를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오싹한 한기가 전해졌다. 사람 잡아먹을 눈빛이 어떤 느낌인지 실감했다.
“미안해요. 본의 아니게 실례했어요.”
“괜찮아. 아주 잘했어.”
제자를 깠는데, 웬 칭찬?
흑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처럼 판단이 서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부와 제자의 조합도 요상하고. 근래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장본인답다고 해야 하나.
“천권 대협을 뵈어요.”
“천운권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러면요?”
“처맞겠지.”
환하게 웃는 무진의 미소에 안절부절못하던 갈호상은 대경실색했다. 신마께서 계신 안마당에서 금지옥엽을 패겠다는 말을 하고서 웃음이 나오나.
흑봉도 살짝 당황했지만, 곧바로 신색을 회복했다. 그녀로선 겪어 보지 못했던 신선한 반응이었다. 자신을 앞에 두고 주먹을 까딱거릴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니 놀랍다.
이렇게 나온 이상, 흑봉도 지고 싶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승부욕은 사파제일이라 자부했다.
“그럴 용기는 있고요?”
“보여 줄까?”
웃고 있는 무진의 눈빛에 서늘함이 피어오르자, 흑봉은 이 사람이 왜 천운권으로 불리는지 깨달았다.
‘미친놈인가?’
해 보라고 하면 진짜로 할 것 같아서 순간 망설였다. 자존심을 부리기에는 상대가 좋지 않았다. 악명 그대로라면 그리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신선하면서도 오싹한 사람이다.
“강심장이시네요.”
“난 남녀노소 안 가리거든. 맞을 짓 하면 처맞아야지.”
“원래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나요?”
“때에 따라서.”
“정파 같지 않은데요.”
“사람을 대하는 데 정사마가 중요한가. 내 맘에 들면 그만이지.”
자유로우면서도 무서운 발언으로. 자기 맘대로 살겠다는 의미였다. 흑봉에겐 감히 상상도 못 할 파격이었다.
정사 간에 중립을 지켰던 아버지의 세대라면 모를까. 직접 겪지는 않았어도 당시의 살육전은 아직까지도 회자하였다. 그런 피의 무게를 짊어질 각오가 아니고서는 감히 함부로 해선 안 될 발언이었다.
“위험한 말씀을 하시네요.”
“정파라서 선이고, 사파라서 악은 아니잖아.”
“그렇다고 강 대협께서 선은 아니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내 맘에 안 들면 정파든, 사파든 무슨 의미가 있겠어.”
심오하지만 가벼우며, 모호하지만 진리를 관통했다. 흑봉에겐 살면서 처음 느껴 보는 당혹스러운 감정이었다. 어떤 판단도 통하지 않았다. 떠보려고 했지만, 솔직한지 거짓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어려운 사람이야.’
다른 의도가 있나? 그런 생각도 들었는데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기보다는 즉흥적인 느낌이 강해 혼란스러웠다.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몸으로 때우는 게 최고지.”
“저를 패고 싶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원한다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싶진 않아요.”
흑봉은 승산이 없는 무모한 도전을 즐기진 않았다. 천운권의 태도를 봐선 대결을 수락하는 즉시 망설이지 않고 주먹을 날릴 위인이었다. 설령 하지 않는다고 해도, 화경에 오른 고수와 싸울 수는 없다.
어딜!
무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한발 물러서는 흑봉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깨달음을 줄 수도 있잖아.”
“유혹하지 마세요.”
“쩝, 아쉽네.”
“정말 무서운 것이 없는 사람이군요.”
천운권의 악명과 무력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다. 흑천부에서도 천운권을 확실하게 꺾는다고 자신할 무인은 아버지뿐이다. 한편으로 화경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사람을 헷갈리게 해서 도탄에 빠지게 하는 유형이었다.
“그럼 내 제자와 한번 겨뤄 봐. 이 녀석도 검을 쓰거든. 만약 이기면 원하는 걸 주지.”
“제가 뭘 원할지 모르시잖아요.”
“미안하지만, 넌 못 이겨.”
“줄 생각도 없었군요.”
“당연하지.”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군요.”
흑봉으로선 처음 받아 보는 홀대였다. 그것도 내 집에서. 천운권이 왜 그토록 세간을 들썩이게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화경의 고수가 아니더라도, 천운권은 최소한 초절정의 극에는 이르렀다고 봐야 했다. 무공으론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제자라면 상황이 다르다.
흑봉이 사파삼화로서 미모를 담당하긴 해도, 검술이 약하다고 보면 오산이었다. 그녀는 당당히 사파를 대표하는 젊은 후기지수였다.
실질적으로 그녀를 이길 만한 후기지수는 많지 않았다. 암흑신마가 금이야, 옥이야 키우며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본인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후회하실 거예요.”
“지금이라도 살살 봐 달라고 해. 그럼 흉터는 안 생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