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42
441 떠먹기만 하다(2)
“아프면 아프다고 하시지, 처음부터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게냐?”
구양천극은 피를 토하며 내력의 불균형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려는 불굴의 의지였다. 범인이었다면 버티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절명했을 텐데.
무진은 아아!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또박또박 안정적인 발성으로 협박을 가했다.
“검만 순순히 내어 주면 해독제를 줄게.”
“닥쳐라!”
“이쯤에서 끝내자고. 정사대전이 일어나면 책임질 거야? 당신 딸을 생각해.”
“나와 내 딸을 모욕하고 끝낼 수 있을 것 같더냐!”
“노인네가 고집은.”
무진은 이쯤에서 적당히 끝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해독제를 꺼냈다. 복용한다고 당장 해독이 되진 않으니, 검만 가지고 가면 되었다.
“받아.”
찰나, 날카로운 광영이 스치고 지나갔다.
서걱!
어둠을 베는 검격에 해독단이 반으로 갈라지며 떨어져 나갔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무진과 제자들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두드드드!
어둠 속에서 검은 장포를 뒤집어쓴 자들이 무리를 지어 사방을 포위해 나갔다. 정체불명의 무리를 이끄는 자가 월광 속에서 검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치아 관리를 잘했는지, 달빛에 새하얀 치광(齒光)이 번쩍였다.
“네가 어떻게?”
“천하의 신마께서 어인 추태십니까.”
비틀거리며 바닥에 재차 무릎을 꿇은 구양천극은 사내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부르르르!
그는 흑천부의 대공자 구양진이다. 흑협(黑俠)이란 별호처럼 사도의 무인답지 않다고 알려졌다. 한편으로 사도와 어울리지 않아 대공자의 자리를 위협받고 있었다.
어쨌든 사부의 안위를 걱정하여 달려온 모양새였다.
빠득!
제자의 등장에 구양천극은 그 어느 때보다 비통에 젖어 있었다. 흑천부의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했기에 이 자리에 있어선 안 되었다. 하물며 눈앞에서 해독단을 갈라낸 자가 자신의 제자였다. 의도가 없다고 하기에는 남몰래 조용히 히죽이는 이 망할 놈이 거슬렸다.
크크크!
안 들리게 웃고 지랄이다.
이게 웃기더냐?
그렇다고 따질 수도 없기에 구양천극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당장은 제자의 등장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을 했거늘, 여전히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째서더냐?”
“진정 모른다는 듯한 표정이군. 그런 짓을 하고도 말이야. 가증스럽기 짝이 없구나!”
“진실을 숨기지 않았다. 진아, 너는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어.”
“닥쳐! 그런다고 원한이 사라지진 않아!”
구양진은 과거 구양세가의 비극적인 날, 정도에 섰던 구양천극의 동생 구양천산의 아들이었다.
구양천극이 자신의 손으로 동생과 내외를 죽이던 날 구양진은 고작 세 살에 불과했다. 기억을 하고 있을 리 만무하다.
묻어 두었다면 몰랐을 수도 있으나, 구양천극은 굳이 과거를 숨기지 않았다. 자신은 언제나 떳떳해야 했기에 그날의 비극을 사실대로 전했다.
기실 이 모든 사태는 동생이 자초한 일이었다. 패배를 받아들이고, 세력을 이끌고 떠났으면 되었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밤중에 기습하여 목숨을 잃은 것이다.
-네가 내 상대가 되리라고 여겼더냐.
-당신은 끝까지 자기만 잘났다고 생각하는군.
-부질없으니 그만 항복하거라.
-그냥 죽여, 쥐새끼처럼 살진 않아!
차마 죽일 순 없었으나, 따르는 이들을 위해 선택을 해야 했다. 동생이 살아 있으면 구양세가는 쪼개질 수밖에 없었다. 흑천부를 위해서 결단을 내렸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 나도 죽였어야지.”
“용서하기는 늦었느니라.”
“어설픈 감정 따윈 버렸어야 했어. 그랬다면 오늘 같은 날이 오진 않았을 테니까.”
“정녕 되돌릴 마음이 없는 게냐.”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여기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구양진의 주변으로 선 자들이 보였다. 눈에 익은 수하들이 꽤 있었다. 이렇게나 많은 자가 구양진을 따르고 있었다니, 구양천극으로선 충격적인 현실이었다.
심각한 대치 속에서 무진이 나섰다.
“저기.”
“뭐지?”
“사연이 궁금하긴 한데, 나하고는 상관없는 패륜이잖아. 이쯤에서 나는 제자들과 빠져 줄게.”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하는구나.”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무고한 사람이라고.”
“미친놈이 맞군. 하나, 네놈으로 인해 무림은 피가 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해독단을 주려고 했는데.”
“글쎄. 누가 받았던가?”
무진의 무미건조한 해명에 구양진은 득의한 미소를 지었다. 빠져나가지 못할 함정이었다. 흑천부의 주인을 중독시킨 이상, 흑룡성은 간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설령 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무림대회 이후로 세상은 지옥이 되겠지.
“하여튼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아야 해. 네놈 같은 놈들 때문에 세상에 믿음이 안 가.”
“하하하하, 웃기는 재주 하나는 타고난 놈이구나. 네놈이 그런 말을 할 처지나 되더냐.”
구양진은 대화로 시간만 끌지 않았다. 만약을 대비하여 일대를 완벽히 차단하는 진형을 갖추었다. 독에 중독이 되었다고 해도, 암흑신마는 괴물이었다. 여기서 끝장을 내지 않으면 차후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이다.
“당신의 딸은 내가 잘 보살펴 주지. 절대 죽지 못할 거야. 더럽혀지고, 또 더럽혀진 채로 돼지처럼 살아가겠지.”
“설아는 네놈에겐 동생이다.”
“동생이라서 살려 준다잖아. 당신이 나를 우리 안에서 살려 둔 것처럼.”
“……이렇게까지 썩었더냐.”
구양천극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구양진만큼은 살렸으며, 대공자의 지위를 주었다. 사도에 어울리지 않는, 동생과는 다른 진정한 협사인 줄 알았다. 사람을 이렇게나 잘못 판단했단 말인가.
인생을 헛살았다.
크크크!
조용히 웃는 천운권이 또다시 거슬렸다.
웃지 마라!
사태 파악은커녕,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얄밉기는 하나,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현실이다. 설마 했거늘, 자신의 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으랴. 굳건하다고 여겼던 세월이 한순간의 물거품처럼 허무해졌다.
“금일 신마께서는 천하망종의 더러운 암계에 속아 폐인이 될 것이다.”
“그럴 일은 없다.”
무릎을 꿇었던 구양천극이 보란 듯이 일어섰다. 파랗게 질려 있었던 안색도 평소대로 돌아오면서 절대자의 기도를 드러냈다.
스윽!
움찔!
돌변한 기도에 구양진은 자신도 모르게 일보 물러섰다. 실태를 깨달은 구양진의 안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암흑신마가 대단하긴 해도 이빨 빠진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방금까지도 흔들렸던 암흑신마의 얼굴이 무심하게 변한 것도 거슬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 봐야 소용없어. 차라리 빌어. 네놈의 딸만큼은 살려 달라고 말이야!”
“할 수 있으면 해 보거라.”
“하라고 하면 내가 못 할 것 같아!”
“말이 길구나.”
암흑신마의 여유에 분노가 솟구친 구양진의 검에서 백광이 터져 나오며 어둠을 갈랐다.
까아아앙!
어둠을 제압하는 명왕의 검식, 백일검(白日劍)의 광명살(光明殺)이 폭발하며 빛의 포화가 어둠을 창처럼 찔러 댔다.
솨아아!
빛의 허물이 사라진 후 현실이 드러났다.
구양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독에 중독되었을 텐데?”
“그깟 독에 당할 성싶더냐.”
“허튼소린 죽어서나 해!”
“아직도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는구나.”
천운권의 독이 아니더라도, 암흑신마는 흑마고라는 고독에 당한 상태였다. 구양진이 은밀히 흑령후(黑靈吼)를 펼쳤기에 흑마고가 발동하면서 암흑신마가 피를 토한 것이다. 독왕의 독과 흑마고에 당했으면서 아닌 척해 봐야 소용없었다.
우웅!
구양진은 구양세가의 독문심법인 광일기공(光日氣功)을 개방했다. 십성에 도달한 광일기공이 검에 전달이 되자, 검명을 토해 내며 백색의 검강이 형성되었다.
“언제까지 잘난 체할 수 있을 것 같아!”
일광신(日光身)을 시전한 구양진은 빛이 어둠을 뚫어 내듯 순식간에 잔상을 일으키며 구양천극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초절정을 넘어 화경에 올라선 구양진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암흑신마의 암흑과 대비되는. 그가 얼마나 이날을 학수고대해 왔는지를 보여 주었다.
스윽!
구양천극은 사방을 어지럽히는 빛의 포화 속에서도 무심히 검을 뻗었다.
까아아앙, 헉!
일광신에 의한 빛의 환영이 단번에 깨지며 실체를 드러낸다. 구양진의 입에서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대단한 초식도 아닌, 단순 찌르기에 일광신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믿고 싶지 않은 결과물이었다.
빛의 물결은 중첩된 강기였다. 이를 찌르기만으로 뚫어 낼 수는 없다.
“어떻게 내력을?”
“언제까지 심처에 독버섯이 자라도록 내버려 둘 순 없지 않느냐. 하등 쓸모없는 놈이긴 해도, 기회를 마련해 주더구나.”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오지 않기를 바랐거늘.”
그 한마디로 구양진과 함께했던 자들까지 안색을 굳혔다. 돌아가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웃기지 마! 중독된 독을 몰아내려고 시간을 끌려는 수작임을 내 모를 줄 알아!”
“맘대로 생각하거라.”
구양진의 눈빛에 살의가 번들거렸다. 광일기공만으론 통하지 않자, 흑마고를 재차 발동했다. 동시에 마정을 각성하여 내력을 증폭시켰다.
화아아아!
빛의 포화가 특이하게도 불길한 기운을 내포했다. 정순하지 않은 포악한 광영이 어둠을 집어삼켰다. 명왕의 의지를 이어받았다면 파사현정의 기운을 지녀야 하거늘, 오히려 악의가 넘쳐흘렀다. 구양진의 격정적인 감정이 검식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뭣들 하고 있어, 어서 공격하지 않고!”
“결국, 자기 힘도 아니었구나.”
“멋대로 지껄이지 마! 땅바닥에 개처럼 처박히는 건 네놈일 테니까!”
“이것밖에 안 되는 녀석에게 미련을 두었다니 한심하구나.”
구양천극은 구양진을 대공자로 세웠지만, 소부주의 자격은 주지 않았다. 능력만 된다면 자신의 다음 대는 구양세가의 직계가 아니어도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구양진의 말이 틀리지도 않았다. 동생을 죽인 가책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테니.
흑현원의 원로 셋.
흑적원의 장로 넷.
흑심전의 전주 외 다섯.
장명각의 각주 외 열.
이원삼전오각으로 구성된 흑천부의 핵심 수뇌부가 구양진을 따랐다. 또한, 그들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자들까지 합하면 무려 백 명이나 되었다. 하나하나가 뿜어내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예전에 알고 있었던 그들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마치 각성을 통해 벽을 넘은 듯했다.
“죽엇!”
구양진의 명령이 떨어지자, 암흑신마를 향해 살의를 발산하며 달려들었다. 다만, 배후에서 무리를 이끄는 자는 이 사태가 마음에 걸렸다.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애초의 계획대로 흑천부를 완전히 장악한 후에 손을 썼어도 됐었다. 그러던 중 천운권의 도발로 절호의 기회가 왔다. 암흑신마를 쓰러뜨리고, 정파에 그 죄를 뒤집어씌울 적기였다.
지나치게 좋았던 기회라, 마음에 걸렸다.
‘일단 제압하고 본다!’
암흑신마가 복용한 흑마고는 예전 사천당문에 사용했던 마고의 단점을 개량하여 완성한 고독이자 극독이었다. 천하의 암흑신마라도 흑마고를 제어하여 독을 몰아내진 못한다. 설령 내공으로 억제한다고 해도, 오래 버틸 순 없을 터.
찌릿!
막 손을 쓰려는 순간 오싹한 느낌을 감지했다. 사내는 그제야 놓치고 있는 자들을 떠올렸다. 지친 상태라 열 명이면 될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