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53
452 꺼어억!(1)
쌔애액!
달빛에 반사된 음영이 서둘러 산을 오르고 있었다. 경신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달빛조차 그림자를 쫓기에 바빴다. 흑색의 무복에 얼굴까지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파앙!
속도를 한층 높였다.
‘빌어먹을!!’
복면인으로선 생각지도 못한 다급한 사태였다. 단서를 모으고, 모아 겨우 목적지를 특정할 지역을 좁혔다. 불분명한 정보를 찾아내고, 통합하는 과정만 족히 십오 년이 걸렸다. 오랜 결실의 수확이 이제야 코앞에 다가왔거늘.
-청명한 밤하늘 아래 절색의 미녀가 청화와 흥겹게 춤을 추는구나.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딱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기 어려운 문구였다. 이백이나 두보와 같은 시선(詩仙)의 문장이나 글귀와 견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오랫동안 찾아다니거나, 조사하지 않은 자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을 문구에 지나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널리 퍼지지는 않았지만, 소문의 진원지를 찾기는 어려웠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퍼뜨리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로 인해 신중히 처리하다가 늦고 말았다. 누구도 찾지 않으리란 방심의 대가였다.
정체는 금세 밝혀졌다. 자신을 알리지 못해 안달인 위인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천운권이 관심을 보이더군요. 이해가 안 되시겠지만, 천운권이 언제 이해되는 행동을 했습니까.
보통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야 정상이었다. 천운권도 관심을 보이다가 말 줄 알았다. 그런데 자신이 찾은 정보를 토대로 위치를 확인했을 때 천운권이 청명산을 오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떻게?’
자신도 족히 이십 년을 투자하여 얻은 정보였다. 한 달도 안 되어서 위치를 확정하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산에 오를 때까지도 설마 했다. 정확한 위치를 모를 줄 알았다. 설령 안다고 해도 확인하기 어렵다고 봤거늘.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외면하지 못했다. 개고생하며 겨우 찾아온 자신을 제쳐 두고 이 망할 놈이 선점하도록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다.’
오랜 세월을 투자해도 찾아내기 어려운 절색신투의 보고였다. 이때까지 발견되지 않았고, 소문도 나지 않았었다. 천운권이 대체 무슨 재주로 절색신투의 보고를 찾는단 말인가. 문구대로 비슷한 산을 우연히 찾았을 가능성이 컸다.
화르르!
환한 달빛 아래 청화가 보였다. 청화를 보려면 산의 중심까지 들어서야 하며, 오늘처럼 만월이 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았다.
스륵!
복면인은 빠르게 쇄도하다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혹시나 있을 복잡한 사태는 원치 않았다.
사삭!
기감을 개방하여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암굴을 향해 접근했다. 혹시나 있을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응?
인기척이 느껴졌다. 복면인은 급히 몸을 날려 숲에 숨겼다. 눈빛이 매섭게 일그러졌다. 이곳에, 이 시간에 인기척이 있어선 안 되었다.
바람은 바람일 뿐.
빠득!
암굴에서 걸어 나오는 자들이 있었다. 다들 한가득 봇짐을 메고 나왔다. 하필이면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런 복면인의 분노와는 별개로, 탐탁지 않은 대화가 이어졌다.
“금은보화가 태산처럼 쌓여 있을 줄 알았는데, 털어 봤자 보따리 세 개밖에 안 되는구나.”
“시장 가판대에 떠도는 소문에 불과합니다. 허탕을 치지 않은 게 어딥니까?”
“내 발품은!! 이거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인다.”
“무공비급과 신병이기를 팔면 꽤 짭짤할 겁니다.”
무인이라면 금은보화보다 무공비급과 신병이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거늘, 팔아먹을 생각부터 하자 숲에 숨은 누군가의 입에선 어이없는 한숨이 흘렀다. 복면인의 처지에선 고생고생하며 찾아왔더니 애먼 놈이 모조리 긁어 간 꼴이었다.
그런데도 성에 차지 않아서 못마땅해했다.
‘죽일까?’
숲에서 돌아가는 사태를 지켜보던 복면인은 고민이 되었다. 천운권이 비록 천하망종일지라도, 무공만 놓고 보면 만만치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찾고 있는 물건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되는데, 문제를 일으켜 봐야 처지만 곤란해진다.
‘이놈 뒤에 검제가 있으니까.’
검제와 취선도 문제지만, 줄줄이 엮여 있는 문파와 무인들이 만만치 않았다. 천운권을 천대하긴 해도, 죽이게 되면 뒤를 캘 우려가 있었다. 흔적이 남으면 차후 무공을 익히는 데 시간적인 손실을 가져올 것이다.
‘어서 가라.’
안을 빠르게 살핀 후, 그래도 없다면 천운권이 산을 빠져나가기 전에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상황이 복잡해지지 않는 선에서 해결해야 했다.
어?
복면인의 눈빛이 흔들리며, 살짝 들썩거렸다.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건 괜히 가지고 나온 것 같아.”
“붉게 칠해서 그런지, 께름칙하긴 하네요.”
“조각을 잘 해 놓은 것 같지도 않고.”
“감정은 전문가에게 맡기시죠.”
“감정하는 데도 돈 들잖아.”
“혹시 압니까, 전설의 무공이라도 담겨 있을지.”
“아냐, 내 감이 딱 왔어. 이거 쓰레기야.”
천운권이 소불상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버릴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복면인도 나설지, 말지 갈등했다.
‘버려라.’
버려야 네놈이 산다.
복면인의 눈은 소불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설프게 조각된 소불상이지만, 진실을 안다면 누구도 천운권처럼 함부로 다루진 않을 것이다. 버리는 순간 땅을 치고 후회할 날이 올 테지.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면 안 되지.”
“나무라서 금방 삭아서 거름이 될 겁니다.”
“붉게 칠한 불상에 놀라서 죽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잖아.”
“그런 경우까지 따지면 밖을 왜 나옵니까?”
하늘을 쳐다보다 새똥이 떨어져서 죽을 가능성까지 고려해서 산다면 사람은 피곤해서 살 수 없을 것이다.
‘……뭔 개소리야~~!’
수풀에서 지켜보던 복면인은 점점 깨닫고 있었다. 왜 천운권이 천하망종으로 불리는지를. 저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조차 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으로 시간을 낭비해서 짜증을 유발했다. 당장 뛰쳐나가서 쳐 죽이고 싶을 지경이다.
“네가 어려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불 밖은 원래 위험해.”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봅니다.”
“겪어 보면 깊은 뜻이 있음을 깨닫게 될 거다.”
“……예, 사부님!”
구양옥설은 이 인간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보통은 의문이라도 생길 텐데,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어차피 이상한 사람이었다. 알아 갈수록 앙금이 생기고, 화병만 날 뿐이다.
“네 말대로 가지고 다니기도 그렇고, 땅에 묻는 게 낫겠다.”
“최선의 방법입니다.”
돌아선 무진은 깊게 땅을 파서 소불상을 묻었다. 누가 찾을 수도 있기에 평탄화 작업까지 꼼꼼하게 마쳤다.
“이제 안심이다.”
“죽을 사람을 살렸습니다. 사부님!”
철호의 아양에 구양옥설은 흠칫하며 몸서리를 쳤다. 사람을 단칼에 쳐 죽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백정이 저러니까, 오히려 더욱 소름이 끼친다.
‘제자들을 얼마나 달달 볶기에!’
저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상기하자, 구양옥설은 제자들이 가련해 보였다. 더하면 더했지, 천운권이라면 능히 그리하고도 남을 위인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내려가자.”
“예, 사부님.”
천운권과 일행이 암굴에서 나와 산 아래로 내려가고 얼마 뒤, 숲에 숨어 있던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삭!
뜻하지 않은 일로 사태가 꼬일 수도 있었으나, 천운권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병신 같은 놈. 크크크!”
절색신투가 숨긴 보물 중 가장 중요한 물건을 쓸모가 없다고 하여 버리다니, 천운권의 안목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보여 주었다. 후일 오늘 일을 땅을 치고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날 화나게 한 대가를 네놈과 가문을 멸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복면인은 조심성이 강하고 냉철한 성향이지만, 원한은 절대 잊지 않는 지독한 부류였다. 과정은 혼자서 오해한 모양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대상은 반드시 죽였으니까.
“드디어.”
단서를 모으고, 수집된 정보를 조합하여 혈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것만 있다면 신주이십일강도 자신의 발아래 두게 되리라. 지금처럼 놈들이 두려워서 숨어서 다닐 일도 없게 된다.
“다른 놈은 몰라도 권왕, 네놈만은 반드시 죽인다!”
이십 년 전 산동에서 권왕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날 자신은 처참하게 부서졌다. 적어도 비슷한 수준은 될 줄 알았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비장의 무기까지 꺼낸 후에 비참하게 도망을 쳤어야 했다.
혈불이 묻힌 장소를 조심스럽게 팠다. 흔적을 지웠어도, 이 정도로 자신의 눈을 피하진 못했다.
거의 다 팠을까.
딸깍!
맞물렸던 무언가가 어긋나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감각을 예리하게 세우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었다.
응?
순간적으로 번지는 위화감에 복면인은 즉시 몸을 틀면서 튀어 올랐다.
꽈아아아앙, 화르르르르!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 들리고, 하늘로 흙기둥이 거세게 치솟아 오르다가 사방으로 흩어져 내리며 타올랐다. 일대를 불태우는 가공할 화염에 숲이 순식간에 전소했다. 타는 듯한 열기와 폭발의 여운이 길게 이어졌다.
쿠웅!
폭발에 휩쓸렸던 복면인은 간신히 겁화에서 벗어났지만, 여파는 곳곳에 고스란히 남았다. 특히 얼굴을 덮고 있던 복면은 날아가 버리고 묶어 놓은 긴 장발이 산발이 되어 흩날렸다.
달빛에 반사된 복면인은 놀랍게도 여인이었다. 미친년처럼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흩날리지만, 능히 미녀로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제길, 빌어먹을!”
감각을 믿고 피했기에 망정이지 폭발에 휩쓸렸다면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리 성한 몸이라고 할 순 없었다. 한편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갑자기 폭발이 일어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째서?”
“어째서긴, 폭탄을 숨겨 놨으니까 그렇지. 그러게 왜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땅을 파.”
획! 하고 고개를 돌린 여인은 다시 돌아온 천운권을 보자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모르고 혈불을 들고 가지 않을까, 부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으니 얼마나 우스웠을까.
부글부글!
여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폭발할 지경이었다. 살면서 오늘처럼 분노하기는 처음이었다. 권왕에게 처참하게 패배했을 때보다 더한 살의가 치솟았다. 놈을 산 채로 찢고, 껍질을 벗기지 않고선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천운권, 감히 본녀를 우롱해! 네놈을 천참만륙한…… 헉!”
“이게 필요하지 않은가 봐.”
무진의 손에 소불상이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제자들이 앞에 서고, 뒤로 돌아선 무진은 폭약을 묻어 두고 소불상을 빼돌렸었다. 그것도 모른 채 소불상이 있는 줄 알고 땅을 팠으니 얼마나 웃기겠어.
“부순다고 부술 수 있을…… 네놈, 부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네까짓 게 어쩌려고?”
짝다리를 짚은 채 소불상을 인질로 잡은 정의의 협객(?)은 여유 만만했다. 네가 뭘 해도 나는 상관없다는 식의 무책임은 기본으로 깔려 있었다.
“성히 죽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나!”
“곱게 죽으나, 흉하게 죽으나 죽는 건 다 똑같아.”
“죽지도 못하게 생채로 포를 떠 주마!”
“소불상의 안위가 달려 있는데, 말 곱게 해라.”
여인은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십오 년을 투자해서 겨우 찾아낸 신외지물을 애먼 놈이 낚아챈 것이다. 닭을 쫓다 지붕을 쳐다보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천운권에게 끌려간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었다.
“혈불의 가치를 안다면 네놈은 절대 부수지 못한다!”
“그래 봤자 만불마라혈경이지.”
“……?”
순간 말문이 막히는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