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54
453 꺼어억!(2)
무인은 무공이라면 사족을 못 쓰기 마련이다. 천운권에게 혈불의 가치를 일부 알려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천운권이 혈불의 숨겨진 비밀을 알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적당히 절세신공이 숨겨진 장소를 가리킨다고 하려다 허를 찔렸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
“내가 좀 알면 안 되냐?”
“안다면 어서 혈불을 내놓아라. 네놈에겐 쓸모도 없지 않느냐!”
“병신 같은 소릴 잘도 씨불이네. 내게 소용이 있든 없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으면 그에 합당한 가치가 있는 거지.”
무진의 정의로운 미소에 여인은 폭발적인 살기를 발산했다. 범인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서는 격렬한 기세였다. 그녀의 경지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저기요. 지금 대체 무슨 상황이에요? 저 여인은 또 누구고요?”
“쟤, 악살이야.”
“……예? 설마 칠살의?”
“맞아.”
절색신투의 보고를 터는 것까지는 이해하겠지만, 아까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물었는데, 구양옥설에겐 생각지도 못한 존재의 등장이었다.
‘아니, 악살이 여기서 왜 나와?’
악살 관옥상은 칠살의 일인으로 근래에 활동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족히 이십 년이 흐르는 동안 강호에 나오지 않아 다들 죽은 줄 알았다. 그런 걸 떠나서 악살이 여인일 줄은. 하물며 미녀로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이게 말이 돼요?”
“말이 되지, 내가 소문을 흘렸으니까.”
무진은 육칠에게 청명산을 지칭하는 문구를 퍼뜨리라고 했었다. 문장은 간단했고,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단서 따윈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악살만이 청명산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정안까지 찾아왔다면 절색신투의 보고에 대한 증거를 거의 다 수집했다고 봐야 했다.
절색신투의 보고를 찾으려고 애를 쓰지 않는 자에게는 무진이 만든 문구는 말장난에 불과했다.
물론, 정안에 없다면 당장은 손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보물은 일단 찾아 놓고, 개방도를 배치해 놓았을 테지만.
‘……말도 안 돼!’
구양옥설은 기가 차서 말을 잊었다. 오밤중에 미친 짓을 하기에 천운권이라 그런 줄 알았거늘.
……이렇게나 뛰어난 계책을 선보일 줄이야.
암계의 효과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악살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천하의 악살이 천운권의 손바닥 안에서 완벽히 놀아났으니 그 심경을 모를 수가 없었다.
“가당치 않은 소리를!!”
“느닷없이 소문이 퍼지면 의심부터 했어야지. 난 또 머리가 있는 년인 줄 알고 괜히 고민했잖아.”
“네놈 따위가 나를 속였어!”
“화났쪄요! 한데, 이걸 어쩌지. 알다시피 세상은 이렇게 말해, 속은 년이 병신이라고. 크크크크!”
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욕하냐고 하는데, 무림이 그런 상식적인 세상인가.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사기와 변칙이 난무한다. 그 안에서 속지 않기 위해 본인도 노력해야 했다.
물론, 속이는 놈이 나쁜 놈이다. 문제는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냐 이거다. 누가 봐도 이상하면,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편이 이로웠다.
크크크크크!
무진이 웃자, 제자들도 따라서 웃었다. 사제 간의 이심전심공이 극의에 도달했다. 정의를 수호하는 협객으로서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 주었다.
‘이 인간들이!’
구양옥설은 그 사부의 그 제자를 떠올렸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만, 이들은 진한 걸 넘어 아주 징글징글했다.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사람을 빡치게 하는 재주가 탁월했다. 사정을 모르면 악인 여럿이서 가련한 여인을 희롱하며 괴롭히는 줄 알 것이다.
부글부글!
속에서 끓어오르는 염화를 주체하기 힘든 악살이었다. 이렇게나 철저하게 농락당할 줄은 미처 몰랐다.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악살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절색신투의 보고가 널리 퍼졌다면 모를까, 어떻게 알고 선수를 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중에 비밀이 새어 나갔다고 하기에도 무리였다.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 치밀지만 악살은 인내해야 했다. 주도권은 저 망할 놈이 가지고 있었다. 혈불을 얻지 못하면 그간의 노력을 하나도 보상받지 못하는 데다가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었다.
“혈불을 내어 주면 절세의 비급과 만금의 영약을 내어 주마!”
“싫은데.”
“어차피 네놈은 익힐 수도 없는 무공이다!”
“애초에 익힐 생각도 없었어.”
“그런데 왜?”
“재밌잖아. 흐흐흐흐.”
“……?”
천운권의 대꾸에 악살은 물론, 구양옥설도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정상적인 인간으로 치부하진 않았지만,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최소한 인간이라면 저래선 안 되었다.
구양옥설은 천운권과 협상하는 악살이 불쌍했다.
“네놈, 죽여 버리겠어!”
“아후, 놀라라. 손아귀에 힘이 강해지네. 이거 터지면 도로 아미타불 아니던가. 네년의 불완전한 혈기흡마공을 보완하려면 꼭 필요할 텐데.”
“……너 그걸 어떻게?”
“비밀.”
악살이 근 이십 년 동안 활동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권왕에게 패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무공은 완성되지 않지 않은 미완의 대기로, 사용하면 할수록 본원진기의 소모가 심해졌다.
치명적인 단점을 만회하기 위해서 혈기흡마공으로 적지 않은 동남동혈의 피를 흡입했지만, 혈기흡마공이 가지는 고질적인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진 못했다. 특히 혈기흡마공은 본원진기의 소모만이 아닌, 정신에도 영향을 미쳐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내가 이년을 잊고 있었다니, 너무 평온했나.’
-수천의 무인을 죽인 희대의 악녀를 잊을 만큼 평온하긴 했지.
‘무인으로 생사는 그렇다 쳐, 죽이려면 무인답게 죽였어야지.’
-혈불의 광기를 간과한 대가다.
만불악살(萬佛惡殺).
당시에는 그녀가 칠살인 줄도 몰랐었다. 그녀의 무공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데다가 권왕마저 잡아먹혔기 때문이다. 혈불을 얻은 악살은 능히 신주이십일강에 비견되었다. 전투 능력은 물론, 만불마라혈경의 괴랄한 공능은 상대하기가 버거웠었다.
더욱이 악살은 사람을 죽이고 목내이로 만든 후, 좌불상으로 박제를 해 놓았다. 그 수가 족히 만불에 가깝다고 하여 붙여진 악명이었다.
‘본인의 의지가 아니면 끝나는 문제냐고. 게다가 애초에 미친년이잖아.’
-너보단 정상이다.
‘시끄러워, 되지도 않는 소린 그만하고.’
-불완전한 혈기흡마공과 만불마라혈경의 합일은 광기의 시작이었지.
악살은 만불마라혈경으로 불완전한 혈흡공을 고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실제는 다르다. 혈불상에 숨겨진 비의는 단순히 무공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안에 숨겨진 악령까지 스며들어 완전한 혈불이 되었다.
‘무공에 영향을 받으면 단가.’
-동감한다.
미쳐서 제 의지가 아니면 살인은 살인이 아닐 수도 있나? 면죄부를 받으려는 개수작 따윈 무진에게 통하지 않았다. 살인을 했으면 미쳐도 죽음으로 대가를 받아야 했다.
‘소림의 땡중이 한 건 하긴 했지.’
-항마공이 아니면 상대하기가 수월하진 않았을 거다.
‘하긴 내가 항마력이 딸리긴 해.’
-응? 그 항마력이 맞는 거냐?
마지막에서야 소림은 소림다운 행동을 했지만, 무진은 그때를 돌이켜 보면 여전히 마음에 들진 않았다. 어쨌든 소림 최고의 땡중이 희생하여 마물을 처리할 수 있었다.
당시 무진은 다른 작전에 투입되어 마신교를 때려잡고 있었기에 악살과의 대면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많이도 죽이긴 했지.’
-본교에서도 흔치 않은 전공을 올렸으니까.
맺힌 한이었을까, 본능이었을까? 악살은 사람을 철저하게 가지고 놀았다. 특히 사내에겐 지옥에서 올라온 마녀의 화신과도 같았다.
‘뽑을 데가 없어서 하필이면.’
-불자로서 색을 멀리하길 바랐던 모양이야.
‘지금 농담이 나오냐?’
-그래서 기억하고 있었다.
사내로선 입에 담기도 험악한 가학 행위를 즐겼으며, 그녀가 지나간 자리는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든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었다. 마왕이 다른 건 몰라도 악살을 기억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워낙 뛰어난 활약상에 마신교는 악살의 활용 폭을 대거 늘렸었다.
무림에는 재앙이었어도, 마신교에겐 최고의 병기 중의 하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후일 고자로 죽었을 사내들의 복수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별 같지도 않은 이유를 만드는군.
‘신체를 찾으면 하나만 자르자.’
-……건드리면 가만 안 둔다!
‘거봐.’
-인정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럴 땐 한마음 한뜻이어야 했다. 저 악독한 년을 곱게 죽이는 것은 고자가 되어 성불했을 무인들의 후계를 짓밟는 짓이었다.
“개 같은 잡종 놈이 나를 놀려! 혈불을 부수면 절대 성히 죽지 못할 거야. 내가 장담해!”
“어이쿠, 무서워서 오싹하네. 애들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철호와 서문호가 무진의 좌우로 돌아섰다가 악살을 향해 무섭게 쇄도했다.
쐐애액!
무진은 만불악살도 아닌 현재의 악살을 딱히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정도로 강했다면 변죽을 울리기보다 최대한 빠르게 기습하여 숨통을 끊어 놓았을 것이다. 흙구덩이에 폭탄만 집어넣은 것만 봐도 그렇다. 죽이려고 작정했으면 폭탄으로 만족 못 하지.
‘아주 좋지, 훈련 상대로.’
철호와 서문호의 무공을 시험해 보기에 이보다 더 제격인 상대는 흔치 않았다. 단순히 무공의 경지보다 악살의 악의를 높게 평가했다. 흔치 않은 쌍년으로, 사장 어른도 꽤 고생했다는 말을 했었다.
‘열 받게 했으니, 기대에 부응해 주겠지.’
-독이 바짝 올랐을 텐데, 위험할 수도 있어.
‘우리가 키운 녀석들이야.’
-……그렇군.
원한을 가득 담은 쌍년의 저주가 얼마나 대단한지 지켜보자고. 자고로 실전만큼 좋은 훈련도 드물었다. 차후, 마신교와 싸우려면 악살처럼 지독한 연놈들을 상대해 봐야 했다.
전투란 무공만으로 승패가 결정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 비슷한 경지에 이르면 누가 더 지독한지에 따라서 결정이 되곤 했다.
“천운권! 네놈이 사내라면 맞서라!”
“응, 싫어.”
무진은 변죽을 멈추지 않았다. 제자들의 발전을 바라는 사부로서의 숭고한 희생정신이었다.
삶에 진중한 무진으로선 원치 않는 변죽을 울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항상 똑같은 변죽을 울리면 의도를 간파당할 수 있기에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야 했다.
와!
약이란 약은 자기가 다 올리고 제자들을 내세울 줄이야.
구양옥설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또한,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인간하고는 절대 적이 되지 않겠다고.
적이 되는 순간 주둥이로 처맞고 너덜너덜해진 후, 무공으로 또 처맞는다. 억울해서 죽어서도 편히 눈을 못 감을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인간이 있지?’
구양옥설은 아버지가 왜 그렇게 저자세로 나가는지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적이 되면 이 사람보다 피곤한 사람이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런데 더욱 환장할 일은, 무공만으로도 이미 적수가 없다.
‘절대고수가 뺀질거리면 이렇게나 무섭구나!’
고수일수록 품위와 명예를 지켜야 하는 까닭을 되새겼다. 열불 터지는 성격인데, 강하기까지 해 봐라. 얼마나 얄미울까? 저런 인간이 한 명인 걸 다행으로 여겨…… 응?
‘아닌가?’
천운권에게는 제자가 여럿 있었다. 악살과 치열한 혈전을 펼치는 제자들 말고도 몇 명이 더 있었고, 자식도 있다고 했다. 자고로 콩 심은 데 콩이 난다지 않는가.
구양옥설은 다른 작물이 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문호만은 보존해야 했다.